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9화
제109장. 귀로지몽(歸路之夢)
“무슨 일인가?”
“흐흐… 내가 못 올 곳에라도 왔나? 표정이 너무 삭막하군.”
노해광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가 쌍수(雙手)를 들고 환영해 주리라고 기대했나?”
백동일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건 내가 더 알지. 아무튼 앉자구. 오늘은 싸우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니까.”
백동일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노해광의 옆을 지나쳐 의자로 가서 앉았다.
노해광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왠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백동일은 정말 살기가 짙은 사람이어서 옆에만 있어도 늘 사람을 긴장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의 백동일에게서는 그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노해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백동일의 앞에 가서 앉았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나?”
“술 한잔 하고 싶어서.”
뜻밖의 대답에 노해광은 백동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백동일은 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진짜야. 오늘은 조용히 술만 마시고 가겠네.”
노해광은 한참 동안이나 그의 두 눈을 응시하더니 점소이를 불러 몇 가지 요리와 술을 시켰다.
잠시 두 사람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술과 요리가 나오자 노해광은 말없이 그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여 몇 병의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취기(醉氣)가 오르자 노해광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백동일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아주 거물의 냄새가 물씬 나는군. 몸 전체에서 위압감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니 말이야.”
노해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 허세지. 자네야말로 절정검객의 면모를 풍기고 있지 않나?”
“흐흐… 그렇게 보이나?”
“그래. 내가 자네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걸세.”
“흐하하하!”
백동일은 허리를 붙잡고 웃었다.
주루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다 노해광이 사나운 눈으로 둘러보자 모두들 허겁지겁 시선을 돌렸다.
노해광은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백동일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백동일은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고 있었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헉헉거렸다.
“허헉… 자네 너무 웃기는군. 나를 부러워한다고? 흐흐흐… 이렇게 웃기는 말은 지난 몇 년 간 들어 본 적이 없어.”
노해광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내 말의 무엇이 그렇게 자네를 우습게 했나?”
백동일은 몇 차례 깊은 숨을 몰아쉬고서야 터져 나오는 웃음보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절정검객의 냄새를 풍긴다느니 나를 부러워한다느니 따위의 말이 얼마나 나를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줄 아나?”
“자네가 절정검객이 아니란 말인가?”
백동일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과는 달리 차갑고 냉랭한 미소였다.
“이봐, 절정검객이 뭔 줄 알아?”
노해광은 일시지간 그의 말뜻을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백동일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에 따라 주위의 공기는 급격히 싸늘해져 갔다.
“절정검객이란 말야. 사람을 죽이는 거야. 얼마나 효율적이고 잔인하게 죽이느냐에 따라 명성이 결정되지. 남들이 나를 절정검객이라고 했다면 그건 내가 그만큼 사람을 잘 죽인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
“내가 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죽였을 것 같나? 열? 스물? 아니야. 십년 전에 이미 백 단위가 넘었어. 그 뒤로는 아예 세지도 않고 있지. 아마 모르긴 해도 이삼백은 족히 될 걸.”
백동일은 빙글거리며 자신의 양손을 들어 노해광의 눈앞에 내보였다.
“보라구, 이게 바로 살인자의 손일세. 자네가 말하는 절정검객의 손이란 말이야. 피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지 않나?”
노해광은 말없이 백동일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런데 우스운 건 말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도 가슴 한구석에는 늘 두려운 생각이 든단 말이야. 언젠가는 나보다 더 강한 놈을 만나서 내가 죽인 놈처럼 처참한 몰골로 쓰러지겠지. 그런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단 말이야.”
“…!”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점점 더 높은 명성을 쌓을수록 마음속의 두려움도 그만큼 커져 간단 말이야. 그래서 더욱더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되지.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그 길밖에는 없어.”
백동일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두려움이란 놈은 없어지지 않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지. 나는 이미 무림(武林)이라는 괴물에 먹혀 버린 신세라는 것을.”
백동일은 손가락으로 노해광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부럽다고 하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나? 지금도 두려움에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나를 부러워하는 자가 있다니… 더구나 그가 다름아닌 자네라니 정말 포복절도할 일이 아닌가?”
하나 말과는 달리 백동일은 조금 전처럼 심하게 웃지는 않았다.
다만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을 뿐이다.
노해광은 그 미소가 왠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나 이내 자신의 생각을 부정(否定)했다.
절정검 백동일이 쓸쓸해 보인다니…
장성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노해광은 묵묵히 백동일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나?”
백동일의 어깨가 한차례 들썩거렸다.
“뭐라고?”
“왜 오늘 내게 그런 말을 하느냔 말일세.”
이번에는 백동일이 침묵을 지켰다.
노해광은 그런 백동일의 어깨가 오늘따라 왜소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네를 이십 년이 넘게 보아 왔네. 내가 본 자네는 늘 한결 같았어.
강철같이 강인하면서도 한없이 냉혹한 인간이었지. 나는 늘 자네의 그런 모습을 부러웠다네.
우유부단한고 결단력이 부족한 나에게 자네는 선망(羨望)의 대상이었지.”
“…”
“무공을 수련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입문은 내가 훨씬 빨랐는데 자네는 불과 몇 년 만에 나를 능가했지. 나는 자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자네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그때 내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아나?”
노해광은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종남파를 떠난 후 나는 이제 자네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속으로 좋아했었지. 하나 그것이 아니었어. 자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늘 자네의 그림자를 느끼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네. 결국 나중에 임 사형(林師兄)과 안 좋은 일이 생겨 나 자신도 종남파를 떠나게 되었지만, 한시도 자네를 잊어 본 적이 없어.”
노해광의 시선은 천천히 허공을 향했다.
“장성에서 자네를 만났을 때 자네는 우연히 만난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사실은 내가 자네를 찾아간 걸세. 자네의 행방을 알기 위해 장성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진 끝에 자네가 있는 곳을 알게 된 거야. 그때 나는 자네를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심정이었어. 자네가 얼마나 바뀌었을까? 나보다 얼마나 앞서 나갔을까?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살아 있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
“…!”
“과연 자네는 바뀌었더군.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전혀 다른 사람 같았어.
예전의 그토록 강직스러웠던 자네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피와 복수밖에 모르는 냉혈인(冷血人)이 나타난 거야. 솔직히 그때 나는 자네가 두려웠다네.”
백동일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더 이상의 무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나 자신의 영달(榮達)을 꿈꾸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네. 남들에게 돈만 밝히는 여우 같은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어차피 내가 앞으로 살아 나갈 길은 하나밖에는 없었으니까.”
노해광은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마신 후 다시 한 잔을 따랐다.
“이곳에 정착하고 난 후 자네가 이쪽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자네가 마음을 잡고 종남파로 들어간 줄 알았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반대더군. 그때 내 기분은 참으로 묘했어.”
“…”
“나도 자네처럼 종남파를 등진 몸일세. 뿐만 아니라 나이 어린 장문인을 공갈협박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알짜배기 주루를 몽땅 뺏어 왔지. 그런데 자네는 아예 종남파를 없애려는 조직에 들어가서 그들의 선봉(先鋒)이 되었더군. 과연 종남파 사람들에게는 자네가 더 나쁜 놈일까, 내가 더 나쁜 놈일까?”
노해광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사업이 안정되다 보니 내가 배에 살이 찌는 모양이야. 예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일들이 하나둘씩 마음에 걸리더군. 그 첫째가 종남파에 대한 것이고, 둘째가 자네에 대한 것일세.”
백동일은 갑자기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쾅!
탁자가 완전히 박살나며 그 위에 접시와 술병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 소리에 놀란 중인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노해광은 조금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백동일의 얼굴을 주시했다.
백동일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에서는 연신 흉악한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조금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백동일의 살기 등등한 눈이 노해광을 향했다.
“내가 말했지? 내 앞에서 종남파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그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아!”
노해광은 고개를 저었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건 자네도 알고 있잖아. 난 가끔 생각한다네. 지하에 있는 사부님이나 관 사숙(關師叔)이 우리들을 보면 무어라고 하실지…”
백동일의 입에서 벽력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입 닥쳐!”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그나마 남아 있던 주루의 나머지 인물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래층으로 우르르 내려가 버렸다.
곧 이어 아래층에서 몇 명의 인물들이 불쑥 올라왔다.
그들 중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장한이 백동일을 보더니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매달았다.
“이게 누구야? 며칠 전에 와서 한바탕 검을 휘두르고 사라졌던 신비의 인물이 아니신가? 아니, 지옥의 사신이라고 했던가?”
다른 장한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맞아! 그 작자야!”
“그렇지 않아도 한번 만나면 본때를 보여 주려고 했는데 제 발로 찾아왔군.”
칼자국 장한은 어슬렁거리며 백동일에게로 다가왔다.
“노 형과 아는 사이라서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아예 대놓고 행패를 부리는군. 노 형, 오늘은 나를 막지 마시오. 노 형 체면은 일전에 봐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워 줬으니까.”
노해광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칼자국 장한은 오늘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백동일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봐, 내 말이 안 들려? 남의 장사를 방해했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백동일은 가만히 있는데, 그 앞에 앉아 있는 노해광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죽이지는 말게. 그래도 오랫동안 사귀어 오던 자들이니까.”
그 말에 칼자국 장한과 다른 세 명의 장한들이 어이가 없는지 입을 딱 벌렸다.
“노 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나 칼자국 장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백동일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그의 손목이 그대로 부러져 나간 것이다.
칼자국 장한이 손목을 움켜잡고 고통스런 비명을 토하는 사이 앉아 있던 백동일의 몸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파팍!
그의 동작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해광마저 그저 백동일이 두 팔과 두 다리를 거의 동시에 놀렸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손목이 부러졌던 칼자국 장한은 옆구리를 가격당하고 허리를 움켜쥔 채 벌레처럼 바닥에 쓰러졌고, 세 명의 장한 중 두 명은 턱을 정통으로 맞고 기절해 버렸으며 나머지 한 명은 양쪽 다리가 부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억…!”
“크아악!”
“으으…”
순식간에 주루 안이 온통 비명과 신음 소리에 뒤덮여 버렸다.
노해광은 그들의 상세(傷勢)를 살펴보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백동일의 손속은 너무 가혹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대살 장욱은 오른 손목과 갈비뼈가 부러져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고, 이살 전평과 삼살 도송은 아래턱이 으스러진 채 반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막내인 사살 팽일기는 두 다리뼈가 모두 부서져서 설사 낫는다고 해도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강남 일대에서 상당한 흉명을 날리고 있떤 천남사살이 순식간에 몰락해 버린 것이다.
노해광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점소이들을 불러 이들을 가까운 의원으로 데리고 가도록 했다.
백동일은 언제 손을 썼느냐 싶게 처음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두 눈에 번득였던 살벌한 빛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칼날 같은 기운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노해광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자네는 너무 잔인해. 사정을 봐달라고 했는데 모두 병신을 만들어 버렸군 그래.”
백동일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냉막했다.
“그래도 자네의 부탁 때문에 한 놈도 죽이지 않았네.”
“후우…”
“저런 쓰레기들을 친구라고 데리고 다니다니 자네도 어지간히 인복(人福) 이 없군.”
“그렇지도 않아. 비록 무식하고 성질 더러운 자들이지만 적어도 내 뒤통수를 친 적은 한 번도 없었네. 나름대로 믿을 만한 자들이었지. 그래서 손버릇이 못된 것을 알면서도 데리고 다녔던 걸세.”
백동일은 차갑게 웃었다.
“이제 그런 시절도 끝이로군.”
노해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이곳에 있던 자들이야. 주루나 한두 개 줘서 먹고 살도록 하면 큰 불만이 없을걸세.”
“흐흐… 장사꾼이 다됐군.”
“자네도 말했다시피 나도 이제는 이 일대에서 제법 거물이라네. 무공이 자네보다 뒤처질지 몰라도 돈으로 따지면 비교할 수도 없지.”
“좋겠군. 그래서 이런 생활에 만족하고 있나?”
노해광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만족하느냐구? 내가 만족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백동일은 노해광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군.”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그보다 자네는 어떤가? 초가보에서의 생활은 지낼만 해?”
“그래. 그들은 아주 잘 대접해 주고 있지.”
“그래서 만족하나?”
백동일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떤 대답을 듣기를 원하지?”
“솔직한 대답이면 되네.”
“그러면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앞으로 몇 번이고 똑같이 선택할 기회가 온다면 난 언제든지 주저하지 않고 같은 선택을 할 걸세. 결코 종남파로 돌아가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노해광은 백동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심인가?”
“진심이야.”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와서 술을 마시는 건가?”
“뭐라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선택을 했으면서 무엇이 고민스러워서 술을 마시느냔 말일세.”
백동일의 어깨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떨렸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무공을 지니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왜 만족한 표정을 짓지 못하나? 무엇이 자네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나?”
“…”
“자네 사실은 돌아가고 싶은 거지?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종남으로 돌아가고 싶지? 늘 그걸 꿈꾸고 있지 않나?”
백동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부르르 떨렸고, 이마에는 진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해광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런 백동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백동일은 무언가에 짓눌린 사람처럼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소원이 뭔지 아나?”
노해광은 고개를 저었다.
백동일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남파 고수의 손에 죽는 거야. 종남파 무공을 지닌 자의 손에 쓰러지는 거란 말이야.”
노해광은 흠칫하여 백동일을 쳐다보았다.
백동일의 눈에는 기이한 광기(狂氣) 같은 것이 어른거려 있었다.
“날 죽일 만한 실력을 가진 종남파의 고수가 과연 있을까? 있다면 정말 기쁠 거야. 하지만 없다면…”
백동일의 전신에서 맹렬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종남파는 내 손으로 멸(滅)하고야 말겠어.”
노해광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백동일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동일의 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꿈이었다.
백동일은 과연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노해광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예정(豫定)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