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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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4화


제116장. 거래조건(去來條件)

이씨세가를 벗어난 진산월은 삼 리쯤 더 간 다음에야 몸을 멈추었다. 그곳은 종남산의 산자락 부근이었으며, 주위가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여 있어서 몸을 숨기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두 사람을 내려놓자 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대단하군.”

중년인은 굳어진 관절을 풀면서도 연신 감탄성을 발했다.

“형장처럼 놀라운 검객은 일찍이 본 적이 없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소?”

진산월의 무공에 놀라서인지 그의 음성에는 은은한 경외가 담겨져 있었다. 확실히 강호인들에게 있어 무공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소. 그보다 이제 혼자 갈 수 있겠소?”

중년인은 몸을 움찔하더니 턱밑에 난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혈도만 풀어 준다면 어디든 못 가겠소?”

진산월은 그의 맥문을 잡고 그가 어느 혈도가 막혔는지를 파악했다. 원래 혈도를 푸는 것은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웠다. 사람마다 사용하는 공력이 다른데다 각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점혈수법(點穴手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점혈한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추성과는 달리 중년인은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흔한 방법으로 제압당했기에 쉽사리 해혈(解穴)할 수 있었다. 혈도가 풀리자 중년인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다시 싱겁게 웃었다.

“이제야 겨우 살 것 같군. 역시 나는 한곳에 가만 있는 체질이 아니란 말씀이야. 헤헤…”

다소 경망스런 웃음을 날리던 중년인은 진산월과 추성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거요? 내가 무슨 몹쓸 짓이라도 했소?”

혈도만 풀어 주면 금방이라도 떠날 듯 하던 중년인이 막상 몸이 자유로워지자 떠날 생각을 않고 오히려 넉살을 부리자 추성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안 갈 거요?”

중년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다지 급한 일도 없고,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서둘러 떠날 필요가 있겠나?”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추성이 어이가 없는지 눈을 치켜 뜨고 그를 쏘아보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요?”

“젊은 친구가 말 한번 고약하게 하는군. 우리가 왜 아무 상관이 없나?”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중년인은 히죽 웃었다.

“그야 자네는 나와 좁은 감옥에서 나란히 갇혀 있던 사이이고, 저 사람은 나를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게 어디 보통 사이인가?”

추성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그게 왜 억지란 말인가? 나도 어엿한 무림인일세. 생명의 구원을 받았으면 당연히 갚는 게 도리 아닌가? 그런데 은인의 정체도 모르고 이대로 떠난다면 내가 어찌 당당한 무림인으로 행세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이야 맞는지라 추성은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속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계속 울그락불그락 했다. 그때 지금까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산월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추성은 흠칫하더니 이내 진산월의 뒤를 따랐고, 중년인 또한 빙글거리며 진산월을 따라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그가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진산월의 조용하면서도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도 이제 제 갈 길로 가도록 하시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중년인은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 중압감을 느꼈다. 하나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털어버리고 넉살 좋은 웃음을 흘렸다.

“헤헤… 형장,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어엿한 무림인으로서 은인에 대한 보답을…”

“언제부터 상로객(賞露客)이 남들에게 이렇듯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는지 모르겠군.”

중년인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반면에 추성은 의외의 얼굴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상로객? 당신이 밤이슬만 먹고 다닌다는 바로 그 상로객 지일환이오?”

상로객. 이슬을 감상한다는 그럴듯한 이름과는 달리 지일환은 서안 일대에서 상당히 유명한 밤도둑이었다. 밤에 남의 집을 침입하려면 이슬을 맞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나름대로는 합당한 외호라고 할 수도 있으나, 지일환은 밤손님 중에서도 솜씨 좋고 약삭 빠르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지일환은 설마 진산월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몰랐는지라 허를 찔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조금 전의 경망스런 모습과는 달리 눈을 반짝이며 진산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 그는 이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의 얼굴에는 전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일환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내색도 않고 있다니… 형장도 보기보다는 심술궂은 면이 있구려.”

추성은 속으로 욕설을 터뜨렸다.

‘누가 할 소리를. 도둑놈 주제에 신분을 숨기고 당당한 무림인 어쩌고 하다니…’

지일환은 비록 도둑들 중에서는 그리 평판이 나쁘지 않았으나 그래도 떳떳한 무림인이라고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면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일환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표정도 없이 진산월의 얼굴을 계속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돌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안면 몰수하고 말하리다. 이왕 도와 준 김에 조금만 더 도와 주시오.”

“무얼 도와 달라는 거요?”

“이대로 도망가 봤자 이씨세가에서 나를 가만 놔둘 리가 없소. 그러니 당분간만 같이 행동합시다.”

말이 같이 행동하자는 것이지 그 속뜻은 자기를 숨겨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추성은 그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요구에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이었으나, 지일환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 이씨세가의 눈 밖에 벗어난 이상 그가 자기의 한 몸을 간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몸을 잘 숨긴다 해도 만에 하나 그들에게 종적을 발각당하면 되면 그의 빈약한 무공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럴 바에야 놀라운 무공을 지닌 진산월과 함께 있다면 설사 이씨세가에서 추격해 오더라도 무사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진산월이 아무런 대꾸도 없자 지일환은 속으로 애가 탔으나 그렇다고 그를 윽박지를 수도 없어서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산월은 의외로 그의 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지일환은 반색을 하며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고맙소. 내가 예측한 대로 형장은 정말 대인(大人)의 풍모를 가지고 있구려.”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지일환은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하시오. 황궁(皇宮)에 가서 황후(皇后)의 속옷을 훔쳐오라고 해도 기꺼이 하겠소.”

“황궁까지 갈 필요는 없고, 여기서 이십 리쯤 되는 곳에 가서 한 가지 일을 해주면 되는 거요.”

지일환의 얼굴에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다 이씨세가의 추적을 받기라도 하면…”

“그곳은 이씨세가의 반대 방향이므로 당신이 유별을 떨지 않는다면 그들 눈에 뜨일 리가 없소. 간단한 일이니 빨리 해치우고 내게 오면 되지 않겠소?”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직접 하는 게 좋지 않겠소?”

“당신에겐 간단한 일이지만 내게도 그렇다고 볼 수는 없소. 하겠소? 안 하겠소?”

지일환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시오.”

추성도 호기심이 동하는지 귀를 기울였으나, 이상하게도 진산월의 음성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추성은 진산월이 전음(傳音)을 사용하고 있음을 깨닫고 조금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는지 지일환은 굳은 표정으로 진산월에게 다짐을 받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씨세가로부터 나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마시오.”

처음에는 단순히 동행만 하자고 하더니 어느새 말이 바뀌어 지금은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진산월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서야 지일환은 히죽 웃더니 추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젊은 친구, 자네도 잘 있게. 다음에는 감옥이 아닌 좀 더 나은 곳에서 만나길 기대하겠네.”

이어 그의 몸은 재빨리 근처의 짙은 수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업을 말해 주듯 그는 무척 빠르고 영묘한 신법을 사용해 순식간에 수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추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구려. 구해 주어 정말 고맙소.”

진산월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거래에 의한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소.”

“송 노형의 부탁이었소?”

“그렇소.”

추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금 전보다 한결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송 노형이 도움을 청할 곳이라면 거의 없는데… 혹시 귀하는 종…”

바로 그때 진산월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은 후 좌측의 수림을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나오지 않을 셈이오?”

추성은 흠칫 놀라 진산월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허…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친구로군. 나름대로 기척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좌측 수림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비쩍 마른 늙은이와 체구가 건장한 중년의 거지. 그들은 바로 풍수 인시망과 광권 종호였다. 인시망은 진산월의 삼 장 앞까지 다가와서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노부의 짐작대로 자네는 이씨세가에 용건이 있었군. 이걸 보면 내 머리도 그렇게 녹슨 것 같지는 않단 말이야.”

진산월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음성 속에는 무언지 모를 냉랭함이 담겨 있었다.

“당신 머리가 쓸 만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이씨세가에서부터 내 뒤를 계속 쫓아왔단 말이오? 그건 별로 현명한 생각 같지는 않군.”

인시망은 그의 시선을 받자 마음 한구석에서 차가운 냉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마음 속의 흔들림을 감추기 위해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늙을수록 참을성이 부족해지는 법일세. 게다가 노부는 어려서부터 궁금한 게 있으면 잘 참지 못하는 성미였네.”

“지나친 호기심은 종종 화(禍)를 부르는 법이오.”

냉정한 음성과 함께 진산월은 손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인시망을 향해 다가갔다. 그와 함께 인시망은 자신의 앞으로 싸늘한 기운이 다가옴을 느끼고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우리에게 손을 쓸 생각인가?”

진산월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인시망은 물론이고 종호와 추성도 그의 대답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그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용영검의 손잡이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시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비록 수십 년간 개방의 비밀조직인 오의단의 수뇌로 강호를 종횡(縱橫)해 왔으나 눈앞에 있는 괴인처럼 상대하기 힘든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괴인의 검술은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종호와 합세한다 해도 그는 괴인의 검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이씨세가에서 자랑하는 천무공자 이서명이 십여 초 동안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결국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는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는가? 무엇보다도 지금의 그에게는 괴인을 적대시할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아직 적아(敵我)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이런 절대고수를 적으로 삼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손을 내저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잠깐,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네.”

진산월은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인시망은 그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은 기분에 황급히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찾는 사람이 있지 않나? 그 일을 도와 주겠네.”

인시망의 말이 조금만 늦었어도 진산월은 출수했을 것이다. 인시망은 진산월의 오른쪽 소매가 아주 조금 펄럭이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섬칫해졌다. 다행히 진산월은 검의 손잡이를 놓은 채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소?”

인시망은 더 이상 망설일 것 없다고 생각하고 즉시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전혀 짐작도 못했지. 하나 이씨세가에서 이서명을 상대할 때 알아차렸네. 그때 자네가 사용한 것은 혹시 유운검법이 아니었나?”

“그렇소.”

“역시 그렇군. 예전에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태평검객이 펼치는 걸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었네. 그 당시와는 여러모로 달라서 몰라볼 뻔 했으나,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들더군. 강호무림이 아무리 넓어도 그처럼 변화무쌍하고 신기막측한 검법은 결코 흔하지 않지.”

인시망의 시선은 화살처럼 진산월의 얼굴에 꽂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자네는 몇 년 전에 사라졌다가 얼마 전에 다시 나타났다던 종남파의 장문…”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냉정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하대(下待)를 하는 것이오?”

인시망은 즉시 말투를 바꾸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이 늙은이가 실례를 했구려. 진 장문인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라겠소.”

인시망이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하자 뒤에서 보고 있던 종호가 입을 딱 벌렸다. 인시망은 강호에서의 배분도 높았고, 그 신분 또한 개방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시망이 아직 서른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광경을 직접 보게 되니 놀랍고 당황하여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나 어찌 보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인시망이 비록 강호의 고수라 해도 진산월은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장문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진산월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 종남파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문정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사문의 어른이거나 진산월과 같은 일파(一派)의 종주(宗主)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진산월에게 함부로 하대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시망이 설마 자신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일 줄은 몰랐는지 진산월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냉엄한 빛이 많이 사라졌다.

“인 대협의 인사는 감당하기 어렵구려. 그보다 내게 찾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종남파의 제자들 중 일부가 실종되었다는 것은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업소. 그러니 이제 본산을 되찾은 진 장문인께서 그들을 찾으리라는 건 삼척동자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인시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단순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심기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인시망의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개방에서 강호의 일에 손해를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소. 내가 무엇을 도와 주면 되겠소?”

“진 장문인께서 그렇게까지 말해 주니 이야기하기가 편하구려. 확실히 거래는 주고 받는 것이 맛이 있어야 흥이 나지 않겠소?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하오. 진 장문인의 이름을 잠시만 빌려주시오.”

“내 이름을 빌려서 어디에 쓰겠소?”

“오해는 하지 마시오. 그것으로 진 장문인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니. 우리가 이곳까지 온 것은 본방의 고수인 옥취개 송결을 죽인 흉수를 찾기 위해서라는 건 진 장문인도 알고 있지 않소?”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시망은 한결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송결의 흉수가 쌍쌍인랑이라는 건 진 장문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소. 하지만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송결을 해쳤는지, 그들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지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소. 그래서…”

그제서야 진산월은 인시망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를 미끼로 쓰겠다는 말이오?”

인시망의 원숭이를 닮은 얼굴에 약간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끼라니 당치 않소. 다만 우리는 진 장문인의 이름을 빌어 소문 하나만 내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소.”

“어떤 소문 말이오?”

인시망의 두 눈이 유달리 번쩍거렸다.

“진 장문인께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 쌍쌍인랑을 죽인 사람이 진 장문인이라는 소문을 내면…”

뒷말은 하지 않아도 뻔했다. 쌍쌍인랑의 배후인물은 그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산월을 재거하려 할 것이고, 그를 몰래 지켜보기만 해도 인시망은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절묘한 방법이긴 했으나, 진산월로서는 자칫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 인시망의 제안은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매력이 있었다. 개방이 강호인들에게 무림제일방파(武林第一幇派)로 인식되게 된 것은 그들이 보유한 엄청난 인원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막강한 정보력 때문이었다. 개방에서 도와 준다면 실종된 사제들을 찾는 데 막대한 도움이 될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에게 닥칠 약간의 번잡함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쌍쌍인랑의 배후가 드러나면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개방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그저 인시망의 말대로 소문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빌려 주고, 그들의 배후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을 굴려 보고는 인시망의 제안을 승낙했다. 인시망은 진산월이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특별히 기뻐하거나 반기지 않고 그저 입가에 엷은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그럼 이삼 일 내로 우리 측에서 소문을 내겠소. 혹시라도 그들이 암습을 할지 모르니 진 장문인은 조심을 하기 바라겠소.”

“내가 찾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인시망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벽력과 옥랑군(玉郞君)이 아니오?”

소벽력이란 응계성의 별호였고, 옥랑군은 낙일방을 지칭하는 외호였다. 성질이 불 같은 응계성과 준수하기 이를 데 없는 낙일방에게는 너무도 어울리는 별호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추성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응계성의 행방은 탐문(探問)하지 않아도 되오.”

뜻밖의 말에 인시망과 진산월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특히 진산월의 두 눈은 유성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계성의 행방을 알고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진 대협.”

진산월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인지 추성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천기가 응계성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추성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다분히 있었다. 진산월은 이내 인시망에게 시선을 돌렸다.

“낙일방의 행방만 조사해 주시오.”

인시망으로서도 거부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을 찾는 것보다는 한 사람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시망과 진산월은 정식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 비록 서로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는 했으나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거래라고 할 수 있었다. 인시망과 종호는 곧 진산월을 떠나갔다. 그들은 낙일방의 행방을 찾는 대로 종남파에 알려 주기로 했고, 진산월도 쌍쌍인랑의 배후세력이 찾아오게 되면 즉시 인시망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서 인시망은 어쩔 수 없이 이번에 새로 옮기게 된 자신들의 비밀거처를 알려 주어야만 했다.

진산월이 추성을 데려간 곳은 종남파가 아니라 종남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오래된 관제묘(關帝廟)였다. 그곳에는 송천기가 초조한 모습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산월과 추성을 발견한 송천기는 황급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무사했었군.”

“형님, 걱정 많으셨지요.”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모처럼의 해후(邂逅)를 기뻐했다. 송천기는 추성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나?”

“무공이 폐쇄되어 아직 마음대로 몸을 쓸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송천기는 즉시 사나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아직 혈도를 풀어 주지 않았단 말이오?”

추성이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장문인께선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제압당한 수법이 특이해서 해혈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일단은 이씨세가를 벗어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무리 그래도…”

송천기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혈도는 여기 오기 전에 풀었소. 다만 막혔던 진기가 유통되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한두 시진은 더 있어야 할 거요.”

그제서야 송천기의 표정이 풀렸다.

“그랬구려. 혼자 흥분하여 미안하오.”

“그런 건 상관 없소. 그보다 이제는 그쪽에서 약속을 지킬 차례요.”

송천기는 나직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추성을 힐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소협은 지금 대응표국에 갇혀 있소.”

뜻밖의 말에 진산월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대응표국? 그들이 왜 계성을 붙잡고 있단 말이오?”

그런데 놀란 것은 진산월만이 아니었다. 추성도 당황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송천기를 쳐다보았다.

“혀… 형님, 설마 천리(千里)의 행방을 놓고 진 장문인과 흥정을 한 건 아니겠죠?”

송천기는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정이 워낙 다급해서 어쩔 수 없었네. 자세한 설명을 해봐야 진 장문인이 생면부지의 내 말을 쉽게 믿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을 흥정거리로 삼다니…”

“내게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응계성이라는 인물보다는 자네가 더욱 소중하네. 자네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못할 게 뭐 있나?”

추성은 자신을 위하는 송천기의 진심을 알고 있는지라 그를 더 추긍할 수도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고 말았다. 진산월은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추성을 향해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계성을 잘 알고 있소?”

천리는 응계성의 본명(本名)이었다.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은 그의 본명을 알 리가 없었다. 추성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장문인. 천리와 저는 동향(同鄕) 친구입니다. 가장 친한 죽마고우였지요.”

원래 추성과 응계성은 하북성 방산이 고향으로, 어려서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응계성은 성격이 급하고 기운이 난폭해서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으나, 추성 만큼은 예외였다. 추성 또한 말이 별로 없고 약간은 소심한 성격이라 대인관계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원래 처음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그라지 좋지 않았으나 몇 번의 싸움을 거친 후 의기가 투합하여 서로를 둘로 없는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응계성이 나름대로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종남파로 들어온 이후 추성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비는 듯한 쓸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추성도 커다란 각오를 하고 고향을 등지고 말았다.

추성은 강호를 떠돌다가 응계성이 종남파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를 찾아 서안으로 오게 되었다. 하나 그때는 이미 종남파가 초가보의 공격으로 쑥밭이 되어 문하 제자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응계성은 모습을 감춰 버린 후였다. 추성은 응계성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한편 일자리를 얻기 위해 대응표국의 표사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송천기를 만나 두터운 교분을 쌓게 되었다. 추성은 대응표국의 표사 일을 하면서도 계속 응계성의 행방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나 응계성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무지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성은 의형(義兄)으로 삼고 있던 송천기를 통해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네가 찾는 친구가 응씨 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난데없이 자신의 방에 불쑥 들어온 송천기가 긴장한 표정으로 묻자 추성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실은 이번에 표국에 이상한 청부(請負)가 들어와서 말일세.”

“이상한 청부라뇨?”

“며칠 전에 본 표국의 낙양지부(洛陽支部)에서 이쪽으로 물건 하나가 운반 되어 왔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을 좀 들어 보게. 그 물건이란 게 단단히 밀봉이 되어 있는 커다란 나무상자인데, 그 안에서 이상한 피 냄새가 난다는 거야. 게다가 상자를 심하게 흔들면 미약한 신음 소리도 들렸다고 하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뜯어보니 그 속에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불명인 남자가 들어 있다지 뭔가?”

“그럼 표물(驃物)이 사람이었단 말입니까?”

“그렇지. 그런데 표두들 중 일부가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

“그가 누굽니까?”

“나도 조금 전에 우연히 본청(本廳)을 지나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것이라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으나, 응씨 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하더군.”

추성은 펄쩍 뛰었다.

“그렇다면 천리가 틀림없습니다. 응씨는 결코 흔한 성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 아닌가? 종남산에서 실종되었다던 사람이 어떻게 낙양에서 이곳으로 보내는 표물 속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그 안의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천리가 확실하다면 구해내야 합니다.”

“자네 마음은 잘 알겠네. 하지만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표국 내에서도 수뇌급 인물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네. 한 가지 확실한 건 조만간 표국에서 그를 원래의 목적지로 보낼 거라는 것이지.”

“표물의 최종 목적지가 어딥니까?”

“초가보일세.”

추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곳에 가면 천리는 죽습니다. 초가보에서 혈안이 되어 그를 찾고 있다는 건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표국에서 그를 어떤 식으로 초가보를 보내는지를 알아야 무슨 대책을 세울 게 아닌가?”

“형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발 도와 주십시오.”

결국 추성의 간절한 애원에 넘어간 송천기는 그날부터 표국에서 초가보 쪽으로 향하는 표행에는 무조건 끼여들었다. 그리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표물들만을 노려 추성과 함께 그 표물들을 빼돌렸던 것이다. 하나 이런 일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었다. 세 번째 같은 일을 반복하자 당장 표국에서 송천기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고, 결국 견디지 못한 송천기는 스스로 표국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추성은 자신 때문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표국을 떠나게 된 송천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친구인 응계성의 행방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여 계속 표국 내에서 응계성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대응표국의 후원 깊숙한 곳에 응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계성은 여전히 부상이 심각한 모습이었으나, 다행히 위급한 상황은 넘겼는지 작은 골방에 갇혀 있었다. 추성은 당장에라도 뛰어들어 그를 구하고 싶었으나, 골방 부근의 경계가 너무 삼엄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하나 며칠을 계속 골방 부근을 배회하는 그에게 표국에서 수상한 눈초리를 보냈고, 추성 또한 송천기의 뒤를 이어 표국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송천기와 함께 응계성을 구할 궁리를 하던 추성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대응표국에서 응계성을 빼올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조력자(助力者)를 구하기로 했다. 서안 일대에서 대응표국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더구나 구하려는 사람이 종남파의 고수인 이상 초가보와 어떠한 친분 관계가 있어도 안 되었다. 그들은 신중한 판단 끝에 이씨세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씨세가는 서안에서 제일가는 명문세가일 뿐만 아니라 아직 초가보와도 철저한 중립을 지키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태평검객 임장홍과 상당한 교분을 쌓았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송천기는 집에 남고 추성 혼자 이씨세가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씨세가의 제일총관(第一總官)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자마자 그는 그들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추성이 돌아오지 않자 송천기는 사태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때마침 종남파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진산월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진산월에게 처음부터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던 것도 자신이 추성과 같은 꼴을 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추성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들이 왜 제게 그런 대접을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주기 싫으면 거절하면 그만인 것을 오히려 그들은 제게 배후에 누가 있느냐며 다그치더군요.”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 난 진산월은 머리를 숙인 채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응계성이 낙양으로 간 것은 아마도 정해를 만나서 도움을 청하려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런 응계성이 심한 중상을 입고 초가보로 향하는 표물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은 생각할 점이 적지 않았다. 대체 응계성은 낙양에서 무슨 일을 당한 것일까. 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혀 표물 속에 넣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런 일을 한 목적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의혹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추성과 송천기는 그의 생각을 방해할 수 없어 가만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두 분이 본파를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점에 감사드리겠소.”

그들은 설마 일파의 장문인인 진산월이 자신들을 향해 머리를 숙일 줄은 몰랐는지라 황급히 마주 포권을 했다.

“노고라니 당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친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진산월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추성과 송천기를 향해 말을 이었다.

“두 분에게 한 가지 부탁 드릴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두 분은 지금 곧 본파로 가서 본파의 제자들에게 지금까지의 내막을 설명한 후 내가 올 때까지 경거망동을 삼가고 나를 기다리라고 전해 주시오.”

추성과 송천기도 자신들이 지금 종남파 외에는 달리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순순히 진산월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진 장문인께서는…”

진산월은 천천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추성과 송천기는 말로 표현 못할 중압감을 느끼고 숨을 죽여야만 했다. 이윽고 흘러 나온 그의 음성은 조용하고 나직했다. 하나 두 사람은 그 속에 담긴 결연한 의지와 단단한 각오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물론 내가 구할 거요. 대응표국이 나를 막는다면, 두 번 다시 강호에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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