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1화
제12장. 이대홍안(二大紅顔)
낙양(洛陽)의 거리는 말로 듣던 것보다 더욱 번화했다. 이 오래된 고도(古都)는 주(周)나라 때 처음 세워진 후로, 동주(東周), 후한(後漢), 북위(北魏), 서진(西晉), 후당(後唐)의 수도였으며, 대운하를 따라 강남에서 수송되는 물자들의 집산지로 크게 번성했다. 그 때문인지 곳곳에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즐비했고, 거리는 넓고 깨끗했으며, 행인들의 의복은 화려하고 부유해 보였다. 그들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오후에 사람이 가장 붐빌 때인지라, 거리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상원건과 낙일방은 예전에 낙양에 온 적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처음인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의 풍물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문득 열심히 지나가는 행인들과 낙양의 성곽을 바라보고 있던 응계성이 낙일방의 어깨를 툭 쳤다.
“네가 낙양에 대해 그렇게 잘 안다니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낙일방은 그가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걱정부터 일어났다. 하나 여기서 잘못 대꾸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호되게 경을 칠게 뻔한지라 감히 싫다는 말도 못하고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많이 알진 못하지만… 물어보세요.”
응계성은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낙일방의 마음은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낙양을 구륙성(九六城)이라고 불렀는데, 대체 그 이유가 뭐냐?”
낙일방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낙양이 구륙성으로도 불리운다는 것은 낙일방도 알고 있었다. 하나 낙일방이 낙양을 본 것은 하남성을 떠돌 때 두 번 정도 뿐이었다. 그러니 낙양의 명승고적들도 대충 눈으로 한 번 훑어본 정도에 불과한 그가 대체 그 내력을 어찌 알고 있겠는가?
“저… 그건…”
낙일방은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쩔쩔 매었다. 여기서 모른다고 말하면 응계성의 입에서 당장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었다는 불호령이 터져 나올게 분명했고, 그렇다고 낙양의 토박이인 석지명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대충 둘러댈 수도 없어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상소홍이 입을 가리고 킥킥 거렸다. 다행히도 그때 마침 상원건이 나서서 낙일방을 구해주었다.
“그건 말일세. 낙양성이 처음 지어졌을 때 그 규모가 남북으로 구화리(九華里: 일화리는 0.5km), 동서로 육(六)화리였기 때문일세. 그래서 사람들이 구륙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세.”
낙일방은 구세주라도 만난 사람처럼 상원건을 쳐다보며 연신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응계성은 낙일방을 혼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게 아쉬운 듯 눈을 찡그렸으나, 상원건에게 마저 트집을 잡을 수는 없는지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석지명이 웃으면서 한 마디를 거들었다.
“사실 지금의 낙양은 그보다는 훨씬 넓습니다. 그 뒤로 계속 확장되어 지금은 아마 동서로 이십 화리, 남북으로는 십오 화리 쯤 될 겁니다.”
이어 그는 손으로 동쪽 방향을 가리켰다.
“원래 처음에 세워진 낙양성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입니다. 병란(兵亂)으로 황폐해지자 수(隋)나라 때 이곳에 다시 성을 지은 거지요.”
이어 석지명은 낙양의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비켜라!”
갑자기 요란한 호통소리와 함께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넓은 거리가 반으로 쫘악 갈라졌다.
“뭐… 뭐야?”
사람들이 나직한 욕설을 퍼부으며 길 양옆으로 허겁지겁 물러섰다. 그 사이를 뚫고 한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가 나타났다. 그 사두마차는 눈부신 네 마리의 백마(白馬)가 이끄는 것으로, 호화스럽기 그지 없었다. 마차는 온통 은색(銀色)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는데, 자세히 보니 단순히 은색을 칠한 게 아니라 진짜 순은(純銀)으로 세공을 한 것이었다. 마차의 네 귀퉁이 상단에는 하늘로 솟구치는 용(龍)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고, 용의 몸통이 길게 내려간 하단에는 승천하는 용을 떠받드는 듯한 구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구름 문양이 어찌나 생생한지 마차 전체가 마치 구름 속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마차의 양쪽 문에 달려 있는 주렴(珠簾)은 순백색의 진주(眞珠)로 만든 것이어서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마부석에는 눈부신 백의를 입은 냉막한 표정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백의 중년인은 연신 비키라는 호통을 치면서도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인파 속을 헤치며 마차를 몰아갔다.
“제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서 마차를 몰다니.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응계성은 마차를 피하느라 뒤로 밀려나는 사람들에 몸이 떠밀리자 고리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진산월을 비롯한 정해와 상원건 등도 모두 길 옆으로 바짝 붙어 마차를 피해야만 했다.
두두두…
은색 마차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그들의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누구지?”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먼지를 사방으로 날리며 멀어져 가는 은색 마차를 우두커니 보고 있던 석지명이 그 말을 들었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저건 운문세가의 운룡신차(雲龍神車)요.”
낙일방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석지명을 바라보았다.
“운문세가라고요?”
“그렇소.”
석지명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정해가 불쑥 물었다.
“저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석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룡신차는 운문세가에서도 오직 두 종류 뿐이라서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 전의 운룡신차는 사두마차이니 아마 소운룡(小雲龍)일 겁니다. 그러니 운문세가의 소가주인 운자추(雲子樞)가 타고 있을 겁니다.”
“저것이 소운룡이라면…”
“운문세가의 가주가 타는 것은 대운룡(大雲龍)이라고 하는데, 소문으로 듣기로는 여덟 필의 한혈마(汗血馬)가 이끄는 거대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팔두마차(八頭馬車)라… 굉장하군요.”
정해는 눈을 크게 치켜 떴다. 한혈마는 천하에서도 보기 드문 명마(名馬) 중의 명마로, 멀리 장성이북(長城以北)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한혈마 여덟 마리가 이끄는 마차라는 것은 상상만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해가 다시 물었다.
“운자추는 어떤 인물입니까?”
“듣자하니 운문세가 사상 최고의 기재(奇才)라고 하더군요. 사실 운문세가의 소가주는 모두 세 명인데, 다른 두 사람은 너무 평범해서 운문세가의 명성을 많이 떨어뜨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운자추는 날 때부터 무학(武學)의 천재로, 지금은 당대의 후기지수(後起之秀)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석지명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진산월 등은 아직 강호를 주유한 적이 거의 없어 미처 알지 못했으나, 운자추의 명성은 적어도 하남(河南)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정해는 일전에 만났던 운자개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운자추가 절세의 기재라는 말을 듣자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를 운자개에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석지명은 빙긋 웃었다.
“그 말썽 많고 사고뭉치인 운자개 말입니까? 운자개 따위를 어떻게 감히 운자추와 비교하겠습니까? 설사 백 명의 운자개가 온다 해도 운자추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같은 형제인데 그렇게 자질이 차이가 나지요?”
“두 사람은 사실 배다른 형제입니다. 어머니가 틀리지요.”
이어 석지명은 목소리를 낮추어 소근거렸다.
“운자추는 정실 부인의 자식인데 비해 다른 두 형제는 첩에게서 나온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나이는 운자추가 더 어리지만 운문세가의 대공자(大公子)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정해는 새삼스러운 듯 석지명을 바라보았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운문세가의 일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알고 계시군요.”
다른 집안의 혈통(血統)에 대한 내막은 웬만한 사람은 결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남성에 있는 대소문파(大小門派)의 일을 알아두는 것은 장사의 기본이지요. 본가에서는 누구나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석지명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다.
이어 그는 정해를 보며 약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운자개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운문세가에서 가장 유명한 운자추도 모르는 정해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운자개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하자 궁금함이 치밀었던 것이다.
정해는 일전에 운자개를 만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석지명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것 참… 공교롭게 됐군.”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정해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석지명은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별 일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조금만 더 가면 본가가 나옵니다.”
이어 정해가 꼬치꼬치 물어볼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 한 발 앞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정해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석지명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도 그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도 의혹이 일었으나 석지명이 저만큼 걸어가자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석지명의 말대로 낙양의 번화한 거리를 빠져나와 일각 쯤 걸어가자 눈앞이 갑자기 탁 트이며 멀리 거대한 장원(莊院)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장원은 높고 웅장한 담장으로 둘러 쳐져 있어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으나,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지붕들의 끝없이 이어진 모습으로 보아 그 장원이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가서 아뢰겠습니다.”
석지명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두 명의 장한 중 한 명이 재빨리 장원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장원은 멀리서 본 것보다 한층 더 거대해 보였다.
담장의 높이는 무려 이 장에 달했고, 길이는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입구에서 오장 떨어진 곳에는 양 쪽으로 일 장이 넘는 거대한 석사자상(石獅子像)이 우뚝 서 있었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맞았을텐데도 석사자상의 형태는 거의 손상이 없어, 부릅뜬 눈과 솟아 올라 있는 갈기,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과 으르렁거리는 듯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금시라도 거대한 사자가 포효를 하며 달려들 것만 같았다.
석사자상을 지나니 은은한 자색을 띈 웅장한 문이 압도하는 듯한 기세로 우뚝 서 있었다.
문은 천연(天然)의 진귀한 자단목(紫檀木)을 통째로 잘라 썼는데, 오랜 세월 사람의 손때가 묻어서인지 반질반질 윤이 흐르고 있었다.
문 위에는 높이가 다섯 자나 되고 너비가 이 장은 족히 되는 거대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석가고장(石家故莊).>
현판에 써있는 용사비등한 글씨는 소박한 듯 하면서도 은은한 기상과 고고한 기품을 함께 지니고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 현판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원건은 한참동안이나 그 현판을 올려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잘쓴 글씨로군.”
글씨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안목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정해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넘치면서도 거칠지 않고, 소박한 듯 하면서도 격조가 있으니 가히 천하의 명필(名筆)입니다. 이왕(二王)의 작품이 아닌가요?”
이왕이란 진대(晋代)의 최고 명필이었던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 부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석지명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슷하지만 이왕의 것은 아닙니다. 저것은 왕희지의 숙부인 왕이(王이)의 글씨입니다.”
그 말에 정해는 약간 멋적은 웃음을 날렸다.
“그렇군요. 어쩐지 왕우군(王右軍)이 좀처럼 쓰지 않는 예서(隸書)로 써 있다 했더니…”
왕우군이란 왕희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왕희지가 한때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낸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왕우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왕이는 왕희지의 숙부로, 진나라 황실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시문(詩文)의 일인자였다.
왕희지는 어렸을 때 왕이에게서 글씨와 그림을 배웠기 때문에 두 사람의 서체는 유사한 점이 많이 있었다.
왕희지는 해서(楷書)와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두루 능했지만 예서는 좀처럼 쓰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마도 왕희지가 숙부인 왕이를 존경해서 왕이의 장기인 예서를 쓰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하곤 했었다.
왕희지의 아들인 왕헌지가 예서에 능한 것을 보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석지명은 현판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저것은 저희 가문의 이십오대조(二十五代祖)이신 석숭(石崇) 태조부께서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왕이 선생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 가문의 가보(家寶)중 하나지요.”
석숭은 진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거부로, 오늘날 석가장의 토대를 이룬 사람이었다.
전국(戰國)시대 때부터 내려온 석씨 가문은 한(漢)나라 초기에 만석군(萬石君)으로 알려진 석분(石奮) 때부터 가세가 번창하였으나, 본격적으로 그 부와 명성을 천하에 떨친 것은 석분의 십오대 후손인 석숭 때 부터였다.
그 후로 석씨가문은 단 한 번도 그 절대적인 부(富)의 왕국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누구도 넘보기 힘든 부를 쌓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석가장의 정문 가까이 까지 왔을 때 정문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쪽문이 열리며 두 명의 인물이 불쑥 나왔다.
그들은 처음에 달려갔던 석지명의 하인과 다른 한 명의 중년인이었다.
그 중년인은 깨끗한 백삼을 입고 이목구비가 단정한 사십 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검은 수염을 가슴부근까지 길게 늘어 뜨렸는데, 얼굴 표정이나 태도에서 차분하면서도 냉엄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백삼 중년인은 석지명을 보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칠공자(七公子)님.”
“하집사(夏執事) 덕분에 별 일은 없었소.”
백삼 중년인의 시선은 석지명의 뒤에 서 있는 진산월 등에게로 향했다.
“이 분들은…?”
“인사하시오. 종남에서 오신 분들이시오. 저분이 종남파의 이십대 장문인이신 진 장문인이시오.”
석지명이 자신을 가리키자 진산월은 가볍게 포권을 했다.
“진산월입니다.”
백삼 중년인은 조금도 놀라거나 의외라는 표정을 짓지 않고 처음과 다름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하종요(夏宗耀)입니다. 본가에 잘 오셨습니다.”
석지명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집사는 본가의 여섯 명 집사 중 오집사(五執事)의 직위를 맡고 있습니다.”
집사란 한 집안의 살림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 아무리 큰 집이라도 대개 한 두명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석가장에는 집사가 여섯 명이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살림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능히 상상이 가는 일이었다. 사람들을 대하는 하종요의 태도는 침착하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어서 석가장의 집사라는 신분에 걸맞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강호상(江湖上)에 이름높은 고수인 상원건을 소개받았을 때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중인들은 하종요의 안내를 받으며 석가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본 석가장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달랐다. 밖에서는 높게 둘러쳐져 있는 끝없는 담장과 높은 거각(巨閣)들의 화려한 지붕들만이 보여서인지 웅장하고 화려해서 어딘지 모르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선 석가장은 웅장하기 보다는 아담했고,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하면서도 은은한 풍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각양각색의 화원(花園)들이었다. 그야말로 화원천지(花園天地)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구석구석에 크고 작은 꽃밭들이 산재해 있었다. 수백, 수천 종류의 꽃들이 형형색색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서 사방에 화향(花香)이 감돌았다. 그 꽃밭 너머로 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이삼 층의 루각(樓閣)들이 처처히 늘어서 있어 그야말로 한 폭의 선경(仙境)을 보는 것 같았다. 낙일방은 눈을 크게 뜨고 한참 동안이나 정신없이 화원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구나…”
정해가 웃으면서 석지명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화원입니다. 이 드넓은 화원을 가꾸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석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증조부님때부터 화원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백 년쯤 되었지요.”
정해는 깜짝 놀랐다.
“이 화원이 백 년이나 되었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구십팔 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증조모님께서 일일이 꽃을 심고 물을 주어서 직접 키웠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이렇게 크지 않았는데 그 분이 삼십 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 꽃을 심어서 종내에는 본가 전체가 온통 꽃밭으로 뒤덮히게 되었습니다.”
“아! 삼십 년이나 꽃을 심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로군요.”
“사연이 있었지요. 당시 증조부님께서는 엄청난 바람둥이 이셨는지라 증조모님은 하루도 속을 끓이지 않는 날이 없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증조부님과 심하게 다투시고는 그 다음날부터 꽃을 심기 시작하셨다고 하더군요.”
“꽃을 심으시면서 마음을 달래신거로군요.”
“그러셨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 뒤로 증조모님은 화원을 키우는데만 전력하시고 증조부님과는 돌아가실 때까지 말 한 마디 안하셨다고 합니다.”
정해의 입가에 고소가 떠올랐다.
“정말 굉장한 분이셨군요.”
석지명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장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도 그 분을 무척 좋아한답니다.”
그 말에 정해는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반짝 빛냈다.
“혹시 그 분이 아직까지 살아 계십니까?”
“하하… 물론이지요. 증조부님은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분은 지금도 정정하십니다.”
정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증조모님의 연세가…”
“올해로 백이십칠 세가 되셨습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길다고 하지만 백삼십 살 가까이 사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기 때문이었다. 정해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 분은 지금도 꽃밭을 직접 가꾸십니까?”
“십 여년전 까지도 직접 손을 보셨는데, 아버님께서 극구 말리셔서 지금은 손을 놓으셨습니다.”
“아…!”
정해는 거듭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십 여년 전이라고 해도 그녀는 백십 살이 넘도록 화원을 직접 관리했다는 말이 된다. 이 넓은 화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힘이 들텐데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을 하는 도중에 그들은 커다란 화원을 두 개나 가로 질러 오른쪽 담장 근처에 있는 작은 월동문(月洞門) 쪽으로 향했다. 월동문 안으로 들어서자 작고 아담한 꽃밭과 함께 푸른 지붕의 이층 누각이 나타났다. 누각 위에는 <청운각(靑雲閣)> 이라고 쓰인 현판이 달려 있었다. 석지명이 그 누각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여기가 저의 거처입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당분간은 여기서 묵으셔야 겠습니다.”
정해가 예의바르게 말을 받았다.
“누추하다니 당치 않습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를 왜 객소(客所)에 데려가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 묵게 하는 것일까?’
원래 명문세가들은 대부분이 손님이 묵을 장소가 따로 있는 법이다. 특히 석가장 같이 거대한 곳이라면 하루에도 찾아오는 손님이 적지 않을것이다. 설마하니 화북제일의 거부인 석가장에서 손님 맞을 장소가 없어서 석지명이 그들을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왔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석지명은 왜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정해는 의혹이 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석지명에게 그것을 직접 물어볼 수가 없어 그냥 마음속으로 접어두고 말았다. 청운각의 안은 밖에서 보던 것 만큼이나 깨끗하고 정갈했다. 천하에 이름높은 십이지공자의 거처임을 생각한다면 너무 소박해서 단촐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으나, 그안의 집기와 가구들은 하나같이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품위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석지명을 따라 일층의 대청으로 들어갔다. 대청은 너비가 사오장 쯤 되었는데, 미리 준비를 했는지 그들의 인원수에 맞는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낙일방은 의자수가 자기들 수와 딱 맞는 것을 보고 신기한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다.
“우리들이 올 줄을 어떻게 알고 의자를 딱 맞게 준비했지?”
하종요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별 거 아니라는 듯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의 하인이 제게 공자님이 손님을 모시고 오신다고 알려줘서 여러분들을 맞으러 나오기 전에 미리 인원수 만큼의 의자를 준비해 두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 말에 낙일방은 멋적게 웃었다.
“그랬군요.”
석지명이 웃으며 하종요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집사는 일처리 하나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지요.”
이어 그는 하종요와 무언가를 나직하게 소근거린 다음 중인들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여러분들은 잠시 쉬고 계십시오. 저는 아버님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석지명과 하종요가 대청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중인들은 의자에 편하게 앉으며 휴식을 취했다. 문득 상원건이 진산월을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혹시 그 화원을 보고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소?”
진산월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낙일방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상한 점이라뇨? 전 정말 좋다는 느낌 밖에는 안들었는데요.”
응계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이 놈아. 상대협이 언제 네게 물어 보았느냐?”
낙일방은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머리통을 어루만진 채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진산월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낙일방은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는 응계성에게 다시 얻어맞을 것이 두려워 그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다행히 상원건이 때늦지 않게 물어 보았다.
“그게 무엇이오?”
“화원에 천하의 모든 종류 꽃들이 다 있었지만, 막상 꼭 있어야할 한 종류만이 없더군요.”
그 말에 낙일방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게 무슨 꽃이오?”
진산월은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모란(牡丹)입니다.”
낙일방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모란이 왜 꼭 화원에 있어야할 꽃이죠?”
정해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툭 쳤다.
“너는 낙양을 손바닥처럼 환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까불더니 그것도 모르느냐?”
낙일방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형까지 왜 그래요? 내가 언제 낙양을 잘 알고 있다고 했어요? 그냥 친구만 하나 있다고 했지.”
“하하… 친구 같은 건 없어도 낙양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너 혹시 낙양에서 가장 흔한 꽃이 무엇인지 아느냐?”
낙일방은 입이 퉁퉁 부은 채 퉁명스런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정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몰라? 짐작이라도 해봐라, 이 밥통아.”
“알았어요. 그게 모란이라고 해두죠.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죠?”
낙일방이 계속 정해에게 시비조로 나오자 진산월이 대신 입을 열었다.
“‘낙양모란갑천하(洛陽牡丹甲天下)’ 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낙양에는 모란이 흔하지. 그런데 다른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란이 막상 온갖 꽃으로 뒤덮힌 석가장의 화원에는 단 하나도 없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진산월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자 낙일방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헤헤… 그렇군요. 저도 이제 알았어요.”
응계성이 심통스럽게 물었다.
“알긴 무엇을 알아? 왜 이곳에 모란이 없는지를 알았단 말이냐?”
낙일방의 얼굴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에이, 응사형도… 제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응계성은 눈을 부라렸다.
“그럼 입다물고 조용히 있어.”
낙일방은 기가 팍 죽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상원건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진장문인도 그걸 알아 차렸구료. 나는 모란이 없는 그 화원을 보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소.”
“그게 누굽니까?”
상원건은 문득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백 년전에 낙양성에는 천하에 보기 드문 미녀(美女)가 태어났소. 그녀의 용모가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경성홍안(傾城紅顔)이라고 불렀다고 하오.”
정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 이름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성홍안 백모란(白牡丹)은 당시에 강북제일미녀(江北第一美女)로 손꼽히고 있었지요.”
“자네도 알고 있군. 바로 그 백모란일세.”
“그런데 그녀가 이 화원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말을 들어보게. 당시 백모란은 수많은 사람의 구애를 물리치고 한 사람과 열애에 빠지고 말았지. 그가 바로 당시의 천하제일거부(天下第一巨富)였던 석동(石動)일세. 바로 석가장의 전전대(前前代) 가주지.”
정해는 두 눈을 총명스럽게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그가 바로 석지명, 석공자의 증조부란 말입니까?”
“그렇지. 석동은 백모란에게 빠져 아내와 가업(家業)을 등한시 하여 한때 천하인(天下人)들의 비웃음을 받기도 했지. 오죽했으면 그가 백모란과 결합한지 십 년도 되지 않아 석가장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하남성에서도 제일거부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겠나.”
중인들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흥미어린 눈으로 상원건을 주시하고 있었다. 상원건은 말을 이었다.
“그대로 갔으면 석가장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마 망하고 말았을 걸세. 그때 석가장에서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가문을 다시 부흥시켰다네.”
정해가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굽니까?”
“그가 아니라 그녀일세.”
“예? 여자라고요?”
“그렇지. 그녀는 바로 석동에게 버림받았던 그의 부인이었네. 그녀는 유명무실해진 석동을 밀어내고 석가장의 실권을 장악한 후 단 삼 년만에 석가장을 과거의 위치로 돌려 놓았지.”
“아! 정말 대단한 여걸(女傑)이로군요.”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철혈홍안(鐵血紅顔)이라고 불렀다네. 경성홍안과 반대되는 의미로 말이지. 그래서 당시 무림에서는 ‘철혈은 가시가 있으나 능히 사람을 살리고, 경성은 아름다우나 결코 오래 있지 못한다’ 는 노랫구절이 유행하기도 했었다네.”
묵묵히 상원건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곳 화원에 모란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상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홍안은 자신을 버린 석동은 물론이고, 그를 유혹한 백모란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소. 그래서 그녀는 모란을 보면 백모란이 떠오른다는 이유에서 평생토록 자신의 눈앞에서 단 한송이의 모란꽃도 피지 못하게 함은 물론이고 모란이 들어간 그림이나 문양도 모두 부수거나 파괴해 버렸다고 하오. 나도 오래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철혈홍안이 아직도 살아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
“사람의 집념은 왕왕 그에게 끈질긴 생명력을 주지요. 그녀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그 두 사람에게 복수하고 말겠다는 마음이 그녀를 늙지 않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정해가 문득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석동과 백모란은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원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철혈홍안이 석가장을 장악한 후 그들의 행적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네. 하지만 그들이 결코 그전과 같은 행복한 생활을 누리지 못했으리라는 것만은 삼척동자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한동안 중인들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한참 후에 낙일방이 평소의 그답지 않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화원에 그런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확실히 세상 일이란 겉보기와는 많이 틀리군요.”
응계성이 그를 쏘아보며 냉소를 날렸다.
“그걸 이제 알았느냐? 그러니 네 놈도 함부로 아무 여자에게나 눈독 들이지 말란 말이다.”
낙일방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이구… 응사형!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이러다가는 소림사에 닿기도 전에 응사형 등쌀에 쓰러지고 말겠어요.”
응계성이 커다란 눈을 부릅뜨며 무어라고 쏘아붙이려 할 때 대청 문이 열리며 석지명의 모습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