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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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3화


제50장. 도장풍운(賭場風雲)

섬서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그것이 대파산맥(大巴山脈)이다. 대파산맥은 특이하게도 북쪽 면이 가파르고 남쪽면이 평탄해서, 섬서에서 사천으로 오는 사람들은 약간 돌아가더라도 한수(漢水)를 따라 우회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사천에서 섬서로 가는 사람들은 미창산(米倉山) 동쪽의 낮은 봉우리를 직접 넘는 길을 택한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통과하는 지역이 만원현이다. 미창산 서쪽은 유명한 촉잔(蜀棧)이 있는 천하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이고, 대파산의 동쪽은 너무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대파산맥의 커다란 두 봉우리인 미창산과 대파산(大巴山) 사이에 교묘하게 위치한 만원현이 교통의 요지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진산월과 이정문 일행이 한수를 따라 대파산맥을 통과하여 만원현의 근처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일행이라고 해보았자 진산월과 이정문 외에 육난음 뿐이었지만, 수시로 이정문에게 보고를 하는 사람들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수가 그들을 뒤따르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정문은 진산월 앞에서도 특별히 가리거나 숨기지 않고 거리낌없이 수하들을 만나서 오히려 진산월이 멋적어서 자리를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덕분에 진산월은 이정문의 수하들이 천하 각지에 상당수가 깔려 있으며, 그들 중에서도 특히 이십팔숙(二十八宿)이라 불리우는 스물 여덟 명의 인물들이 핵심적인 일을 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안강의 주루에서 보았던 비렁뱅이 노인과 장삿꾼도 모두 이십팔숙에 속해 있는 고수들이었다. 비렁뱅이 노인은 당랑취객(螳螂醉客) 유호상(劉豪祥)이라 하고, 장삿꾼의 이름은 응조객(鷹爪客) 한양(韓揚)이었다. 두 사람 모두 강호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주루에서 잠깐 보았던 그들의 실력은 능히 강호의 일류고수에 속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주루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타났던 마의 사나이는 파운수(破雲手) 추동생(秋東生)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나이는 유호상과 한양보다 어려도 이십팔숙 중에서의 서열은 오히려 그들보다 높은 것 같았다. 추동생은 하루에 한 번 이정문을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오래 밀담을 나누고 돌아갔다. 세 번째로 이정문을 찾아왔을 때, 추동생은 뜻밖의 말을 했다.

“이제는 그자의 뒤를 추적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정문은 즉시 물었다.

“왜 그런가?”

“조금 전에 그 자가 살해되었습니다.”

이정문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조용히 그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추동생은 침착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만원현에서 멀지 않은 관도(官道)를 지날 때 그 자가 갑자기 길 위에서 쓰러졌습니다. 당시 십칠호와 십팔호가 그를 뒤쫓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자가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자 일각(一刻)을 더 기다린 다음 그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들이 다가가 보니 그자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정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독살(毒殺)이군.”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오전에 길을 떠나기 전에 중독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연독(遲延毒)의 일종인 것 같은데, 그자가 길을 걸으면서 몸에 땀이 나자 독기(毒氣)가 발작한 듯 보입니다.”

“하독(下毒)한 자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나?”

“어제 저녁에 그 자가 묶었던 숙소와 오늘 아침에 식사를 했던 주루를 모두 뒤졌습니다. 그 결과 주루에서 음식을 나르던 점소이 중 하나가 갑자기 실종된 것을 알아냈습니다. 확인해 본 바로는 그 점소이가 그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점소이의 소행인 듯 싶습니다.”

“점소이의 행방은?”

추동생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정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차가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상관욱은 아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일거야.”

육난음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주루를 거점(據點)으로 주로 사용하고, 주방장이나 점소이를 하수인(下手人)으로 즐겨 쓰는 걸로 보아 틀림없을 거야. 사소한 것 같지만 그런 일도 은근히 취향을 따라가는 법이라구.”

육난음은 배시시 웃었다.

“당신은 어때요?”

이정문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평범하지. 난 계산하는 걸 좋아하거든.”

육난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 부하중에는 장사치나 상인으로 변장한 사람들이 많은거로 군요.”

“그건 그런 직업들이 아무 곳이나 돌아다녀도 남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이야. 내 취향하고는 상관없어.”

육난음은 짖궃은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계속 웃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건 당신이 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틀림없이 나중에 굉장한 수전노(守錢奴)가 될거에요.”

이정문은 그 말에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추동생을 돌아보았다.

“점소이는 상관욱에게 갔겠지. 그러니 힘들여 찾을 필요 없다. 그보다 지금쯤은 상관욱도 우리가 자신의 뒤를 바짝 쫒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테니 나름대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인원은 즉시 돌려 보내고 꼭 필요한 자들만 남겨두되, 그들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경계태세를 늦추지 말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추동생이 이정문의 지시를 받고 자리에서 나가자, 이정문은 다시 허공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진산월은 한쪽에 멀거니 앉아서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을 상관욱에게 데려다 줄 유일한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정문은 별로 놀라거나 당황해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는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던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필시 나름대로 또 다른 복안(腹案)을 세워 놓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 복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정문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처럼 은밀하게 숨어 있는 상관욱을 찾아낼 것인가? 그때 이정문이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이정문은 진산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안다는 듯 빙그레 미소지었다.

“사람을 찾아내는데는 모두 세 가지 방법이 있소. 그 중 하나는 내가 사람을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이 나를 대신해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오.”

진산월은 호기심이 동하여 물었다.

“나머지 하나의 방법은 무엇이오?”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나를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오.”

“당신은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오?”

이정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상관욱이 만원현에 있기만 하면 나는 그가 제발로 나를 찾아오게끔 만들 수 있소.”

진산월은 머리가 둔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상관욱이 스스로 이정문의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정문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상관욱은 더욱 행동에 신중을 기할테고, 꼭꼭 숨어 있을 텐데 무슨 수로 그를 제발로 찾아오게 만든 단 말인가? 그때 육난음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은 비록 심술궂고 가끔 엉뚱한 일을 잘 벌이지만 한 가지는 믿을 수 있어요. 어떠한 경우에라도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그녀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듣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조금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만원현의 무림맹 집결지가 어디인지 알려줄 수 있겠소?”

“성 밖의 헌원루(軒轅樓)라는 주루인데, 오늘 새벽에 모두 다음 집결지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곳에 가도 소용없을거요.”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 일행은 아마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오.”

“종남파의 고수들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났소.”

진산월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새벽에 출발한 무리들 중에 마침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었소.”

이정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진산월은 사정이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림맹의 고수들 중에 이정문의 측근이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으나, 이정문의 감시망에 종남파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진산월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진산월로서는 당연히 입맛이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들은 모두 무사하오?”

“그렇다고 들었소. 일행은 모두 네 명인데, 두 명은 중년인이고 두 사람은 젊은 청년과 홍안(紅顔)의 소년이라고 하더군. 그들이 맞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의 중년인들은 상원건과 동중산일테고, 젊은 청년과 홍안의 소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응계성과 낙일방임이 분명했다. 처음 종남산을 떠나올 때 다섯 명이었던 것이 세 사람은 하나둘씩 흩어져버려 결국은 응계성과 막내인 낙일방만 남게 되었고, 대신에 종남파와는 전혀 관계도 없던 두 사람이 엉뚱하게도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과 한 달 동안의 짧은 기간에 너무도 많은 일들이 벌어진 셈이었다. 진산월은 그들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정문의 말을 믿고 일단은 안심을 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그들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고, 다시 종남파의 깃발 아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원현의 서쪽 끝에는 하나의 고색 창연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건물은 높이가 삼층이었는데, 건물 외곽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아서 단촐해 보였다. 게다가 현판도 달려 있지 않았고, 몇 군데 달려 있는 창문마저 굳게 닫혀 있어서 을씨년스러워 보이기조차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는 건물이었다. 주루(酒樓)나 객잔(客棧)도 아니었고, 사당(祠堂)이나 도관(道觀)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그 건물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대부분은 남자들이었으며, 하나같이 다소 들뜨거나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들의 표정만 보아도 이 건물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곳은 도박장(賭博場)이었다. 그것도 만원현 일대에서 가장 크고 장사가 잘되는 곳이었다. 건물에 특별한 이름은 없었지만, 이 일대 사람들은 이곳을 호호루(好好樓)라고 불렀다. 도박꾼들은 마음대로 도박을 할 수 있어서 좋고, 도박장을 운영하는 사람들 또한 돈을 벌어 좋아하며, 일대의 상인들은 다시 도박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으니 역시 좋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좋다는 의미로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저녁 무렵. 석양(夕陽)의 긴 그림자가 호호루의 처마 밑을 조금씩 검게 물들이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는 호호루의 일층 입구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남일녀(二男一女)였는데, 여자가 제법 예쁘다는 것 외에는 별달리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어서 중인들의 시선을 거의 끌지 못했다. 호호루의 일층 안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후끈한 땀냄새, 그리고 욕설과 고함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했다. 일층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누구나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십 여개가 넘는 도박대 주위에는 도박꾼들이 벌떼처럼 모여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도박을 구경하려는 자들이고, 실제로 도박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 열기만큼은 더할 나위없이 뜨거웠다.

이남일녀는 도박장 중앙을 가로질러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으로 향했다. 계단 입구에는 두 명의 건장한 장한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표정이나 자세로 보아 한 가닥의 무공을 익힌 자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장한들이 이남일녀의 앞을 막아서려 하자, 여인이 빙긋 웃으며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두 장한은 재빨리 길을 비켜섰다. 여인의 쳐든 손가락에 두 개의 금전이 쥐어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여인은 아깝지도 않은 지 금전을 그들에게 던졌다. 금전을 받아든 두 장한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며 허리가 절로 숙여졌다. 사실 호호루의 이층은 최소한 은화 백냥 이상의 거금을 가진 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입구를 지키는 호위꾼들에게 금전 한 냥씩을 준 통큰 사람은 좀처럼 보기 힘든 형편이었다. 금전 한 냥이라면 두 장한이 한달 내내 입구를 지키며 받은 품삯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었다. 두 장한 중 턱밑에 염소수염을 기른 자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여인에게 절을 했다.

“마님께서는 이층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삼층으로 가시겠습니까?”

여인은 두 남자 중 신경질적으로 생긴 청년의 팔짱을 꼬옥 끼며 다시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이층과 삼층이 어떻게 다른가요?”

염소수염은 그녀가 호기심을 보이자 입술에 침을 바르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이층은 여러 가지 도박을 할 수 있으며 최고품질의 차(茶)가 공짜로 제공됩니다. 하지만 삼층은 오직 한 가지 도박 밖에는 하지 않죠. 대신 술과 음식을 마음껏 드실 수 있습니다.”

“어떤 도박만 하죠?”

“주사위입니다.”

여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곳이 마음에 드는군요.”

염소수염도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마님 정도 되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삼층에서 즐기셔야지요. 사실 주사위만큼 재미있는 도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다른 건 어린 아이 장난에 불과하죠.”

염소수염이 열심히 삼층을 권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삼층은 호호루에서도 아주 특별한 곳으로, 적어도 황금 오십 냥 이상이 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만한 재력(財力)을 가진 손님을 끌수만 있으면 따로 수당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염소수염은 그녀가 마음이 변할 새라 황급히 그들을 삼층으로 안내했다. 삼층은 입구부터 다른 곳과 확실히 차이가 났다. 바닥에는 질좋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사방의 벽에도 제법 뛰어난 수준의 고서(古書)와 명화(名畵)들이 걸려 있어 색다른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기둥을 모두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들었는지 은은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어, 지저분한 냄새로 가득했던 아래층과는 전혀 다른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삼층에는 대 여섯 개의 작은 방이 양쪽으로 나 있었고, 중앙에 따로 커다란 방이 위치하고 있었다. 염소수염이 그들을 중앙의 방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실제로 도박을 벌이는 도박장이고, 양쪽의 작은 방들은 손님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중앙의 방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원탁 주위에 몇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주사위 노름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화복(華服)을 입어 언뜻 보기에도 부유한 티가 잘잘 흐르는 중년인과 곰방대를 문 칠십대의 노인, 그리고 눈부신 백의를 입고 키가 큰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 각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물주는 체구가 뚱뚱한 오십 대 초반의 인물이었는데, 능숙한 솜씨로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가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오자 가볍게 눈 인사를 했다. 염소수염은 여인을 향해 물었다.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어느 것이라도 해 올리겠습니다.”

“간단히 요기할 것 하고 술이나 한 병 갖다줘요.”

“술은 뭘로…”

“난 여아홍(女兒紅)만 먹어요.”

“즉시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염소수염은 다소 과장스럽게 인사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사라졌다. 여인은 하늘거리는 걸음으로 원탁의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당신도 어서 앉아요. 여기는 분위기가 제법 그럴 듯 하군요.”

비쩍 마른 남자와 건장한 체구의 황의인은 그녀의 양 옆에 나란히 앉았다. 여인이 비쩍 마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붉은 입술을 나불거렸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왜 아까부터 입이 퉁퉁 부어서 한 마디도 안하고 있는 거에요?”

비쩍 마른 남자는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연신 눈쌀을 찡그리고 있었다.

“여기는 너무 조용해. 도박할 분위기도 안나잖아. 도박장이면 도박장 다워야지.”

여인은 투정부리는 어린 아이를 달래는 누나처럼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일층은 너무 소란스럽고 시끄러워서 당신 취향에는 맞지 않잖아요. 이곳에 계신 분들을 보니 모두 점잖고 수준이 있어 보이니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에요.”

화복 중년인이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얼굴에 친근한 웃음을 머금으며 한 마디 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모르지만, 모처럼 만났으니 재미있게 어울려 봅시다.”

비쩍 마른 남자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고, 대신 여인이 배시시 웃으며 화복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이곳은 처음이라서 분위기가 조금 낯설군요. 여기의 규칙은 어떻게 되지요?”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소. 단지 내기 걸 수 있는 금액이 기본적으로 은화 백냥 이상이고, 서로 동점이 되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두 배의 금액을 내고 그 판에 끼어 들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색다를 뿐이오.”

“오. 그거 재미있겠군요. 그런데 그 판에도 동점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죠?”

화복 중년인은 빙그레 웃으며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 경우에도 물론 떨어진 사람들이 다시 판에 합류할 수 있소. 물론 두 배의 금액을 내어야 하지만 말이오.”

듣고 보니 이곳의 규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기본적인 규칙은 물주와 손님이 서로 세 개의 주사위를 던져 주사위의 합이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지만, 동점자가 나왔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그 판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른 곳과 달랐다.

도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마작(麻雀)이나 골패(骨牌), 쌍육(雙六)등 흔히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패구(牌九), 유호(遊湖), 타마(打馬), 동기(同棋) 등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수십 종이 있다.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주사위 노름이었다. 원래 주사위 노름은 세상의 모든 도박 중에서 가장 빨리 승부가 나는 종류였다. 게다가 누구도 승패를 알아보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이런 도박일수록 도박꾼들을 더욱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흠이라면 동점일 경우가 상당히 많아서 그럴 때마다 다시 경기를 벌이는 바람에 자칫 지루해지기 쉽다는 것인데, 이런 규칙이라면 지루하지도 않고 판돈도 얼마든지 커질 수 있어서 도박꾼의 입장에서는 더 할 나위없이 흥미로울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지금 내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백의 청년이었다. 백의 청년은 아름다운 여인이 주시하고 있자 호기가 동한 듯 오백 냥이라는 거금을 선뜻 도박대 위에 올려 놓았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일반인들은 십 년 동안 일하지 않고 놀고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돈이었다. 물주가 커다란 손으로 세 개의 주사위를 잡더니 신중한 동작으로 주사위를 굴렸다.

떼구르르! 여섯 점이 하나, 다섯 점과 넉 점이 각기 하나씩이었다. 도합 십오점으로, 상당히 높은 점수라고 할 수 있었다. 백의 청년은 주사위를 잡고 여인을 힐끗 보더니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가 나온 점수는 여섯 점이 하나도 없고 다섯 점이 하나, 넉 점이 두 개여서 도합 십삼점이 되었다. 순식간에 오백 냥의 은자를 잃었지만 백의 청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신 ‘좋아(好), 좋아(好)’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돈을 잃고도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실성한 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주는 능숙한 손길로 대 위에 올려져 있는 오백 냥짜리 전표를 거두어 들인 후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판 하시겠습니까?”

여인은 비쩍 마른 남자를 슬쩍 바라보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얼마를 거시겠습니까?”

“처음이니까 백 냥부터 시작하는게 좋겠군요.”

여인이 백 냥짜리 은표를 내놓자 물주가 주사위를 던졌다. 물주의 점수는 십이점이었다.

“해볼만 하군요.”

여인이 빙긋 웃으며 뱅어같이 고운 손으로 주사위를 잡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심지어는 졸리운 듯 탁자 위에 턱을 고인 채 곰방대만 열심히 빨고 있던 노인마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배시시 웃더니 수중의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다가 슬쩍 대 위로 굴렸다.

또로록! 그녀가 던진 주사위는 여섯 점이 두 개에 하나만이 넉 점으로, 모두 합해서 십육점이었다.

“축하합니다.”

물주가 웃으면서 그녀에게 백 냥짜리 전표를 건네 주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표를 챙기고는 화복 중년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당신의 실력을 보고 싶군요.”

화복 중년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분부를 기꺼이 받들겠소.”

여인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호호…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오. 내가 큰 실수를 했군요. 미안하오, 소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한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신세이니 신경쓰지 마세요. 호칭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화복 중년인은 그녀 옆의 비쩍 마른 남자를 돌아보더니 어색한 듯 너털웃음을 웃었고, 비쩍 마른 남자는 여전히 심통 사나운 얼굴로 냉소를 날렸다. 백의 청년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고, 곰방대 노인은 흥미를 잃은 듯 다시 허공을 응시한 채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었다. 화복 중년인도 그녀처럼 백 냥 만을 걸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와 물주가 똑같이 십오점을 던져 동점이 되고 말았다. 화복 중년인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멋적게 웃었다.

“허허… 이것참! 나는 아무래도 소저의 실력에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소.”

“이제 겨우 시작이니 아직은 모르는 일이죠. 그보다 나도 이번 판에 들어갈 수 있나요?”

“그렇소. 하지만 이백냥을 내어야 하오.”

“이기면 삼백 냥, 지면 이백 냥이라…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군요.”

그녀가 백 냥짜리 전표 두 장을 올려놓자, 백의 청년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삼백 냥이 아니라 오백 냥이오. 나도 끼어들겠소.”

여인은 그를 슬쩍 돌아보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었다.

“점점 재미있어 지는군요. 더 끼어들 분은 없나요?”

곰방대 노인이 진한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날린 후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노부도 하겠네. 다들 어울리는데 나 혼자 놀고 있으면 너무 심심할테니 말이야..”

졸지에 백 냥짜리 판돈이 칠백 냥이 되었다. 이런 식의 규칙은 엄밀히 따지면 물주에게 손해였다. 그냥 일대일로 칠백 냥을 놓고 겨루는 것이라면 승률이 반반이 되겠지만, 지금은 이길 확률이 오분지 일로 줄어든 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만큼 판돈이 커지기 때문에 물주의 솜씨만 좋다면 훨씬 수월하게 큰 돈을 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물주보다는 손님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호호루의 삼층은 그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 도박꾼들에게 선망의 장소가 된 것이다. 여인은 자신들과 함께 온 황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끼어들지 그래요.”

황의 청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소.”

그녀의 시선이 비쩍 마른 남자에게 향했다.

“그럼 당신이라도 들어와요. 재미있을 거 같잖아요.”

비쩍 마른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구경만 할거야.”

“할 수 없군요. 우리끼리 하죠. 그런데 누가 먼저 던지죠?”

화복 중년인이 주사위를 움켜 잡았다.

“보통 때는 물주가 먼저 던지나, 동점에 다른 손님들이 더 들어올 경우에는 물주가 가장 나중에 던지게 되어 있소.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돈을 건 순서대로이니 이번 판은 내가 제일 먼저요.”

화복 중년인은 잠시 주사위 세 개를 손안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신중한 동작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다섯 점 두 개, 네 점 한 개. 열 네 점이었다. 평상시라면 이 점수는 그래도 제법 승률이 높은 점수였으나, 화복 중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이구. 힘들겠군.”

“한 점밖에 안내려 갔잖아요. 아직 포기하기는 이른 것 같군요.”

여인은 요염하게 웃으며 뱅어같이 고운 손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그녀가 던진 것은 공교롭게도 세 개 모두 네 점이었다.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보세요. 이렇다니까요.”

하나 그 다음에 백의 청년이 열 다섯 점을 던져 화복 중년인을 앞서 나갔다. 백의 청년은 어떠냐는 듯 여인을 슬쩍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거렸으나, 여인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백의 청년의 표정이 조금 굳어질 때, 갑자기 주위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곰방대를 든 노인이 여섯 점 두 개에 다섯 점 하나를 던진 것이다. 열 일곱 점이라면 거의 필승(必勝)에 가까운 점수였다. 물주가 주사위를 주섬주섬 모으면서 곰방대 노인을 향해 친근한 웃음을 보냈다.

“역시 담태야(譚太爺)의 솜씨는 여전하시군요. 이번에는 제가 지겠는데요.”

곰방대 노인은 별로 기뻐하는 빛도 없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도박은 늘 마지막까지 결과를 모르는 게야. 자네에게도 아직 충분한 기회가 있지 않나?”

“충분하긴요. 그렇다고 제게 대표자(大票子)라도 나오겠습니까?”

물주가 웃으면서 아무렇게나 주사위를 던졌다. 대표자는 주사위 세 개가 모두 육 점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전(實戰)에서는 거의 나오기가 힘든 숫자였다. 달리 육표(六票)라고도 부르는데, 알려진 바로는 십 만번을 던져야 겨우 한 번 나오는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물주가 던진 주사위가 하마터면 대표자가 나올 뻔 했다. 두 개의 주사위가 여섯 점을 가리켰고, 마지막 주사위가 정지하기 전까지 여섯 점을 보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숫자가 바뀌어 다섯 점을 나타낸 것이다.

“아깝다…!”

사람들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표자는 도박장에서 평생을 산 사람도 구경하기 힘든 것이어서, 모두들 승패보다는 대표자가 나오는 것을 더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물주도 아쉬웠던지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이내 멋적게 웃었다.

“또 동점이 되었군요.”

여인이 물었다.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죠?”

“담태야와 제가 동점이니 그 외에 다른 분들이 들어오시려면 이백 냥의 두 배인 사백 냥을 추가로 내셔야 합니다.”

여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비쩍 마른 남자를 돌아보았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비쩍 마른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고 싶은대로 해. 도박이란 원래 그런거 아냐?”

“좋아요. 그럼 한 판 더 붙겠어요.”

그녀는 선뜻 사백 냥을 꺼내 탁자위에 올려 놓았다. 화복 중년인도 품 속에서 전표 한다발을 꺼내 들었고, 백의 청년은 두 말할 나위없이 사백 냥을 던졌다. 졸지에 도박대 위에는 이천 냥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의 돈다발이 수북하게 쌓이게 되었다. 다섯 사람이 하게 되니 액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게 되는 반면에, 그만큼 동점자가 나올 확률도 높아졌다. 그래서인지 다음 판에도 역시 동점자가 나왔다. 여인과 곰방대 노인이 똑같이 열다섯 점을 던진 것이다. 이번에는 화복 중년인과 백의 청년이 각각 팔백 냥씩의 거금을 내고 다시 판에 뛰어 들었다. 판돈의 액수가 사천 냥에 육박하자 중인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사천 냥이라면 아무리 대단한 거부라 할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더구나 주사위 노름으로 이와같은 거액이 걸린 경우는 호호루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오늘은 물주 외에 네 명이나 끼어 들었고, 동점 상황이 거푸 벌어지면서 이와같은 엄청난 액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화복 중년인과 백의 청년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무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곰방대 노인도 처음보다는 자세가 한결 신중해졌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비쩍 마른 남자는 냉정한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이정문이었다. 이정문이 이곳에 온 것은 물론 단순히 도박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상관욱을 찾아내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그것외의 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런데 상관욱을 찾기 위해서 왜 도박장에 온 것일까? 오늘 아침에 진산월은 호호루로 가자는 이정문의 말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정말 상관욱이 도박장에 있다고 생각하오?”

이정문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요?”

이정문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진장문인은 이번에 무림맹의 이동경로를 누가 계획했는지 알고 있소?”

진산월은 무심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오.”

그러다 이내 그 질문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빛내며 이정문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계획했단 말이오?”

“그렇소.”

이정문이 무림맹의 이동경로를 사전에 계획했다는 것은 확실히 뜻밖이었다. 하나 그것이 상관욱의 행방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진산월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각 그 해답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당신이 무림맹의 중간 집결지로 이곳을 택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구료.”

“확실히 진장문인과는 말하기가 편하군. 물론 이유가 있소. 만원현은 상관욱이 무림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오.”

이어 그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상관욱은 무림맹이 결성된 후 줄곧 관서지단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소. 그도 내가 관서지단과 함께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오.”

“그래서 일부러 이곳을 중간집결지로 선택한 거요?”

“그렇소. 상관욱은 아직 내가 이곳이 자신의 거점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소. 그러니 틀림없이 그는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요.”

기다리다니… 대체 무엇 때문에? 진산월이 채 묻기도 전에 이정문은 입가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내 목표가 그 인것처럼, 그 또한 나를 노리고 있소. 이곳은 마침 그의 거점인데다, 무림맹의 고수들은 이미 이곳을 모두 떠났고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소. 진장문인 같으면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겠소?”

그제 서야 진산월은 이정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이제 보니 이정문은 자기 자신을 미끼로 하여 상관욱을 낚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관욱이 호락호락 넘어오겠소?”

이정문은 피식 웃었다.

“쫓기는 것은 쫓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이오. 내가 상관욱이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요.”

진산월은 이정문의 생각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천하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 중의 하나라면 그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다. 누구라 할지라도 그런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슴없이 잡으려 할 것이다. 이정문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상관욱도 마음 한 구석으로 혹시나 이것이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조금은 있을 거요. 하지만 그래도 그는 기꺼이 나를 노리고 올 것이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것이 나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오.”

이제 진산월은 이정문의 생각에 완전히 수긍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호호루는 상관욱과 무슨 관계가 있소?”

이정문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호호루의 실질적인 주인이 바로 상관욱이오. 내가 그곳에 나타나면 그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상관욱은 입 속으로 들어온 먹이를 그냥 내보내는 바보가 아니니까 말이오.”

지금 이정문은 느긋한 자세로 앉아 도박에 열중한 중인들을 은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상관욱은 이 중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관욱 본인이 있든 없든, 이중에 그의 수하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은 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장내에 이정문 일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섯 명이 있었다. 화복 중년인과 백의 청년, 곰방대 노인 등 세 사람의 손님과 주사위를 돌리는 물주, 그리고 지금 막 주방에서 음식과 술이 든 술상을 가지고 들어오는 염소수염이다. 이들 중 누가 적(敵)인가? 이정문은 이런 식의 탐구를 무척 좋아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치열하기 그지 없는 머리와 머리의 싸움. 단 한 순간만 실수해도 목숨이 달아나고 만다. 패배는 곧 죽음이며, 오직 승리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승부가 다른 어떤 도박보다도 더욱 짜릿하고 흥미있는 도박이었다. 그가 도박장에 와서도 도박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돈이 아무리 산처럼 쌓여 있다 해도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었다. 지금 서로간의 목숨을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도박을 벌이고 있는데, 주사위 노름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하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지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도박대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번에 주사위를 던질 사람은 곰방대 노인이었다. 곰방대 노인은 도박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도박꾼임에 틀림없었다. 주사위를 잡는 동작도 그렇고, 손짓과 자세에서도 도박으로 평생을 굴러 먹은 고수의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사천 냥이 걸린 판에서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렇지도 않게 주사위들을 굴렸다. 그런데도 다시 열 일곱 점이 나왔다. 주위 사람들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에는 물주가 정말 운(運)좋게 동점을 던져낼 수 있었지만, 사실 열 일곱 점이란 점수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높은 점수였다. 그러한 운이 두 번씩이나 거듭될 리는 없으니 사천 냥 이란 거금은 곰방대 노인의 수중에 절반 이상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곰방대 노인은 수중의 곰방대를 탁탁 털고는 다시 새로운 담배 쌈지를 곰방대에 쑤셔 넣고는 기분 좋은 듯 빨기 시작했다. 묻지 않아도 지금의 담배 맛이 그 어느 때보다 좋으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의 청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주사위를 잡았다. 아마 그는 무를 수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내놓았던 돈을 회수하여 판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나 그런게 허용될 리는 없는지라 그는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그의 점수는 아쉽게도 십육점이었다.

“제기랄.”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의 판에 이 점수가 나왔다면 그가 이겼을 것이나, 지금은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백의 청년은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나, 다행히 더 이상의 거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로 주사위를 잡은 사람은 화복 중년인이었다. 화복 중년인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래도 주사위를 던지는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신중하기 그지 없었다. 화복 중년인의 얼굴에 실망스런 빛이 떠올랐다. 바닥을 몇 바퀴 구르던 주사위들이 모두 멈추고 드러난 숫자는 겨우 십삼점에 불과했던 것이다. 화복 중년인은 멋적게 웃으며 주사위를 거두어 들여서는 여인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오늘 내 일진(日辰)은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군. 소저의 솜씨를 기대하겠소.”

여인은 요염하게 웃으며 주사위를 건네받았다. 한데 막 그녀가 그의 손에서 주사위를 받으려는 순간, 갑자기 화복 중년인이 양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꼬옥 움켜 잡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인지라 여인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양 손을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여인은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단단한 무쇠 철갑에 갇힌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짓…”

그녀 옆에 있던 황의 청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려 할 때, 마침 술상을 가지고 오던 염소수염이 그를 향해 술상을 내던졌다. 술상 위에는 음식 대신에 횟가루가 가득 쌓여 있었다. 장내가 온통 횟가루에 뒤덮이며, 황의 청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횟가루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황의 청년이 눈에 들어간 횟가루를 떨어내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백의 청년이 갑자기 벼락같은 기세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펑!

“크윽!”

황의 청년은 횟가루에 범벅이 된 채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정문 또한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막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그의 뒤에 있던 물주가 그의 몸을 바싹 끌어안았다.

뿌드득!

괴이한 음향과 함께 그는 두 팔과 두 다리로 삽시간에 이정문의 몸을 칭칭 감아 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곰방대 노인이 수중의 곰방대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무언가 눈앞에 그림자가 희끗거림을 느낌과 동시에 이정문의 가슴팍 팔개대혈(八個大穴)은 이미 곰방대 노인에게 완전히 제압당해 버렸다. 처음 화복 중년인이 여인의 손목을 잡을 때부터 이정문이 곰방대 노인의 손에 제압당할 때까지는 실로 숨 한 번 들이마실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너무도 눈깜빡할 사이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버린 것이다. 여인은 여전히 화복 중년인에게 양 손목이 잡힌 채 눈 앞에서 벌어진 뜻밖의 일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화복 중년인은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하하… 소저의 손은 정말 곱구려. 누가 이 손을 보고 어떤 물건이던지 일단 던지기만 하면 반드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공포의 손이라고 하겠소?”

여인은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화복 중년인을 노려 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화복 중년인의 얼굴에는 여전히 예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 이름은 상관욱이라 하오.”

여인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당신이 상관욱이로군요…”

“그렇소. 육소저.”

여인, 육난음은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자 오히려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상관욱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굴이 당신의 진짜 얼굴인가요?”

“그렇소. 너무 변변치 않게 생겨 실망했소?”

“그 반대에요. 나는 당신이 남들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추악한 용모를 지녔거나,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일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상관욱은 궁금한 듯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육난음은 다부지게 말했다.

“제법 허우대는 멀쩡하군요.”

상관욱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그렇게 보아주니 고맙소.”

육난음은 갑자기 쌀쌀맞은 표정을 지으며 아직도 그에게 붙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까지 이렇게 내 손을 잡고만 있을거죠?”

“소저의 양 손을 풀어주려면 소저의 혈도를 제압해야 하는데, 내가 소저의 몸에 마음대로 손을 대어도 괜찮겠소?”

“물론 안되죠.”

“나도 소저의 손을 놓아주고 싶지만, 아직은 안되오. 한 가지 일만 완료되면 기꺼이 소저의 손을 놓아주겠소.”

“그게 어떤 일이죠?”

상관욱은 그녀의 물음에는 답변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다른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혈도가 짚인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이정문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황의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상관욱의 얼굴에 다시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싸늘한 미소였다.

“당신은 이곳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하다고 생각하여 정탐하러 온 것이겠지.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이곳에 온 것은 그야말로 제발로 지옥문(地獄門)을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소.”

이정문은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있다가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나는 당신이 설마 이토록 치밀한 준비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소.”

“하하… 놀랄 일도 아니오. 나는 만원현이 무림맹의 중간집결지라는 걸 안 순간부터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이곳에 나타날 것을 대비하고 있었소. 조금 전에 당신이 호호루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미 보고를 받고 미리 준비했던 계획을 실행한 것이오.”

이정문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이곳에 당신의 부하들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삼층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당신측 사람들일 줄은 몰랐소.”

“매사에 불여튼튼하자는게 나의 신조요. 일단 당신을 대비하기로 한 이상 주위의 모든 인물들을 내 사람으로 배치하는 것이 사소한 착오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소?”

이정문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말이 맞소. 나는 조심만 하고 있으면 당신이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나의 실수였소.”

그 말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냉정하고 희노애락을 잘 표현하지 않는 상관욱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가장 큰 숙적(宿敵)의 입에서 나온 패배선언을 듣자 기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허공을 올려보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터뜨리려 했다.
바로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혈도가 짚여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이정문이 돌연 그의 가슴팍으로 맹렬한 일격을 가격했던 것이다.
상관욱은 대경실색하여 피하려 했으나, 지금까지 그에게 손을 잡혀 있던 육난음이 반대로 그의 손을 꼬옥 잡고 있기 때문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쾅!

굉량한 폭음과 함께 상관욱은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헉!”

이정문의 손은 그의 가슴팍을 그대로 뚫고 들어가 등뒤까지 삐져나와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서도 다시 두 마디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크윽!”
“악!”

상관욱이 뒤를 돌아볼 수만 있었으면 곰방대 노인이 내뻗은 곰방대에 물주가 목덜미를 관통 당하는 광경과, 횟가루에 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던 황의 청년이 돌연 벌떡 일어나며 휘두른 검에 백의 청년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상관욱은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온 이정문의 팔을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이정문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그의 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상관욱은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지? 내 계획은 빈틈이 없었는데….”

이정문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계획은 철저했소. 단지 내 계획이 당신보다 조금 더 철저했을 뿐이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신은 내가 만원현에 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나를 준비했다고 했소. 하지만 나는 만원현에
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당신을 준비하고 있었소.”

상관욱의 신형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너… 너는 이곳이 내 본거지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냐?”

“그렇소.”

이어 이정문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을 의심하고 있었소. 그래서 이곳에 대해 상세하게 조사를 했지.
덕분에 호호루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훤하게 파악하게 되었소.”

“……!”

“당신은 이곳에 가끔 들리기 때문에 당신의 진짜 심복은 의외로 많지 않더군. 그래서 나는
그중에 포섭할 수 있는 자를 최대한 끌여 들이고, 내 사람을 심어 놓았소. 당신은 내가
단순히 의심을 품고 이곳에 들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내가 이곳에 들린 것은 이곳에서
당신을 제거할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었소.”

이정문은 곰방대 노인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노인은 이 년전부터 호호루의 오랜 단골로 행세했고, 당신은 그에 눈독들여 그를 포섭했지.
하지만 사실 그의 진정한 신분은 이십팔숙 중의 추혼봉(追魂棒) 포조산(包照山)이오.”

상관욱이 곰방대 노인을 쳐다보자 곰방대 노인은 가볍게 그에게 목례를 했다.
상관욱은 벌겋게 핏발 오른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이번에는 염소수염을 바라보았다.
황의 청년은 분명 횟가루를 뒤집어 썼는데,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벌떡 일어나 검을
휘둘러 백의 청년을 살해했다.
그가 뒤집어 쓴 것이 진짜 횟가루였다면 그럴 리가 없었다.
결론은 한 가지, 그가 뒤집어 쓴 것이 진짜 횯가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횯가루를 가지고 온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염소수염이다.
그러므로 염소수염은 상관욱의 부하가 아니다.
장내에서 오직 그만이 무사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 연유로 상관욱이 그를 노려본 것이다.
염소수염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이공자의 밀명(密命)을 받들어 육 개월 전부터 호호루의 점원으로
일하게 된 점명객(點命客) 간평(簡平)이라 하오.”

상관욱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도 이십팔숙중의 하나냐?”

“그렇소.”

이제 상관욱은 모든 진실을 알았다.
그토록 빈틈없는 것 같았던 자신의 계획이 사실은 헛점투성이였으며,
수하로 알았던 인물들이 사실은 적의 첩자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두뇌가 이정문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외지인이고, 이곳은 중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을 고용하는데 헛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게 문제였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으나, 이정문과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데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하하하… 과연… 과연…”

상관욱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숨이 끊어졌다. 이정문은 그의 가슴에 박힌 손을 뽑은 후, 피로 얼룩진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때 황의 청년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결국 당신의 승리로군.”

이정문은 승리를 거두고도 별로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하오. 앞으로 서장무림과의 격전은 이보다 몇 배나 더 흉험할 것이오.”

황의 청년은 물론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상관욱이 쓰러진 이상 서장무림은 눈과 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요.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서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된 셈인데,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오?”

이정문은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상관욱은 네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단목초가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소. 그의 죽음이 알려진다면 단목초는 필시 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될 거요.”

진산월은 눈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다음 목표는 단목초란 말이오?”

이정문의 얼굴에 처음으로 한 줄기의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좀처럼 볼 수 없다는 다부지고 굳은 결의에 찬 웃음이었다.

“그렇소. 애초부터 내 목표는 상관욱이 아니라 단목초였소. 그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이번 서장무림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승기(勝機)를 잡을 수 있을 거요.”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기로는 단목초는 서장에서 배출된 최고의 기인(奇人)으로, 그 지혜가 측량할 수도 없을 만큼 뛰어나고 무공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야율척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인물이라고 했소. 당신은 그를 상대할 자신이 있소?”

이정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솔직히 그다지 자신은 없소.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진 장문인의 도움을 받고 싶소.”

이정문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남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단목초를 상대하는 일이 어렵고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도와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나 같은 실력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구려.”

“그저 도와줄 의사만 있으면 되오. 나머지는 내게 맡기시오.”

진산월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그럼 내가 무얼 도와주면 되겠소?”

이정문은 진산월의 물음에는 대꾸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있다면 내가 그자를 상대할 때는 세 가지 방법이 있소.”

“어떤 것이오?”

“첫째는 내가 먼저 상대를 찾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상대가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오.”

“세 번째는?”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오.”

“그건 일전에 당신이 말한 사람을 찾는 일과 흡사한 방법이구려.”

“엄밀히 따지면 두 가지 일은 서로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소. 누가 먼저 상대를 찾아내느냐에 일의 성패(成敗)가 달려 있기 때문이오.”

“그럼 당신은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려는 거요?”

“내가 먼저 단목초를 찾아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오. 또한 단목초가 나를 찾아오기를 무작정 기다라는 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그제서야 진산월은 이정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단목초를 상대하도록 하겠다는 말이오?”

“그렇소.”

“혹시 그 다른 사람이란 무능한 데다 무공도 별볼일 없고, 오른손은 부상으로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애송이 장문인이 아니오?”

이정문의 입가에 다시 예의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으나,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바로 그렇소.”

진산월은 이정문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당신의 속셈을 알겠소. 당신은 나를 미끼로 쓰려는 거로군.”

이정문은 다시 피식 웃었다.

“미끼란 표현은 너무 심하오. 진 장문인은 그저 나를 대신해서 잠깐 그의 이목을 흐려 놓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게 바로 미끼가 되라는 말과 똑 같은 거요.”

이정문은 이번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진산월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하나 자세히 보면 이정문의 입술이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서 지금까지 이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육난음은 이정문과 진산월이 전음술(傳音術)을 이용해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밀히 따지면 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정문이었고,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일각(一刻)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이정문은 불쑥 물었다.

“어떻소?”

진산월은 문득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정말 위험천만한 도박과 같은 것이구려.”

“단목초를 상대하려는 데 그 정도의 위험은 마땅히 각오해야 하지 않겠소?”

진산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단지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할 사람이 나라는 것이 문제겠지.”

이정문은 칼날같이 예리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그럼 거절하는 거요?”

진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당신의 얼굴을 보니 이미 내가 승낙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인데, 굳이 물어볼 필요 있겠소?”

“그럼 승낙한단 말이오?”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정문의 비쩍 마른 얼굴에 다시 엷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번의 미소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다.

“진 장문인도 고맙다는 말 같은 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니 인사치레는 생략하도록 하겠소.”

그 말에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당신은 역시 손해보지 않는 성미로군. 부디 이번에도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이정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혼자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나 나나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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