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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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5화


제52장. 쌍괴출현(雙怪出現)

상원건은 동중산과 응계성의 도움으로 허공을 날아오를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가 송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교운번신(巧雲飜身)의 신법으로 번개처럼 몸을 뒤집었다. 그의 몸은 한 마리의 제비처럼 멋진 곡선을 그리며 당초 날아가던 방향에서 삼 장여 밖의 우측으로 떨어져 내렸다.

“엇?”

그가 떨어진 곳에서 멀지 않은 송림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누군가의 짤막한 경호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이미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상원건의 귀에는 너무도 똑똑히 들려왔다. 상원건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왼쪽 발등을 오른쪽 발로 찍으며 소리가 들려온 그늘 속으로 뛰어들었다. 실로 그림 같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송림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제일 먼저 상원건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우거진 소나무 잎사귀 사이로 다가오는 무언가 희끗한 섬광이었다.

쉬이익!

그 섬광의 뒤에 몇 번 들은 듯한 괴이한 소음이 따라온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상원건은 황급히 상체를 옆으로 비틀었다.

파앗!

싸늘한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며 잘려진 머리카락 한줌이 허공에 나풀거렸다. 상원건은 보지 않아도 그 섬광이 어둠 속의 상대가 쏘아보낸 무영각임을 알 수 있었다. 상원건은 하마터면 목덜미가 베어질 뻔했다는 아찔함도 잊고 더욱 빠르게 앞으로 치달려갔다. 단숨에 상대를 찾아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런 짙은 그늘 속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튀어나오는 무형각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흡정묵질의 무리 속에 갇혀 있는 낙일방 등 세 사람을 생각하면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원건의 머리 속에는 금시라도 흡정묵질에 정혈(精血)을 모두 빨린 세 사람이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광경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상원건의 몸은 섬전과도 같은 기세로 송림의 그늘 속을 헤집고 있었다. 이 일대의 송림은 워낙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데다, 유난히 응달이 짙어서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나뭇잎이 썩는 냄새와 기이한 비린내 같은 것이 주위의 공기에 뒤섞여 있어서 조금만 코로 숨을 들이마셔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상원건은 다시 이 장여를 전진했다.

사사삭!

그가 송림을 지날 때마다 그의 옷에 스친 나뭇가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바탕 휘어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그루의 소나무 옆을 지날 때 무언가를 발견했다. 소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는 인영을 발견한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섬광을 본 것이 먼저인지는 상원건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숨어 있는 인영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위기를 알아차리고 전력을 다해 몸을 회전시켰다. 그것은 오랜 강호 경험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쉬아악!

섬광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에야 예의 그 괴이한 음향이 귀에 들려왔다. 상원건의 옆구리는 어느사이엔가 날카롭게 찢겨져 주먹이 들락거릴 정도로 옷이 잘려져 나갔으나 상원건은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상대의 살인적인 무형각 공세를 피했다는 느낌을 받고 회전하던 기세를 그대로 살려 맹렬하게 상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는 이미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천성산수(天星散手) 중의 절초인 두전성이(斗轉星移)와 운성섬요(雲星閃耀)의 초식을 거푸 전개해 냈다.

파파파팍!

예리한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부러진 송침들이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합!”

그늘 속에 숨어 있던 인영은 신음인지 고함인지 모를 괴성을 지르며 훌쩍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상원건의 기세가 워낙 맹렬해서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몸을 피한 것이다. 하나 상원건의 공세가 그의 움직임보다 더 빨랐다. 상원건의 손은 어느새 삼 장여 거리를 압축해서 그 인영의 앞가슴을 후려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막 상원건의 손이 그 인영의 가슴에 작렬하려는 순간, 인영이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인영이 입에서 무언가 시커먼 것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상원건은 깜짝 놀라서 그의 가슴을 후려치려던 손으로 그 물체를 가격했다.

팍!

그의 손에 격중당한 물체가 그대로 터져 버리더니 끈적끈적한 액체가 그의 상반신을 뒤덮어 버렸다. 코를 찌르는 듯한 역한 비린내가 풍겨 나오는 가운데 상원건은 머리가 어찔함을 느꼈다.

‘아차, 독(毒)이구나…’

상원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틀며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왕 중독된 것이라면 자신이 독에 쓰러지기 전에 상대를 먼저 쓰러뜨리겠다는 비장한 결심이 담긴 한 수(手)였다. 상원건의 공격은 비룡객이라는 별호답게 지극히 빠르면서도 웅대한 힘이 담겨 있었다. 어둠 속의 인영은 설마 이런 상태에서도 상원건이 공격해 올 줄은 몰랐는지라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을 격중당하고 말았다.

팡!

마치 가죽북을 두드리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그 인영의 몸은 사오 장 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나 상원건의 표정 또한 그리 밝지 않았다. 상대의 가슴을 가격하는 순간 마치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약삭빠르게도 상대는 호신갑(護身甲) 같은 것을 입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일격이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했음을 직감한 상원건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다시 그 인영에게 몸을 날리며 쌍장(雙掌)을 거푸 휘둘렀다. 다행히 진기의 흐름이 막히거나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중독된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조금 전에 인영이 입으로 뺕어낸 것은 다름아닌 흡정묵질이었다. 다급한 순간이 되자 인영이 입 속에 비장(秘藏)하고 있던 흡정묵질 한 마리를 상원건을 향해 뱉어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린내는 비록 심하게 났으나 상원건의 몸에 별다른 해악은 끼치지 않았다. 인영은 채 중심을 잡기도 전에 질풍 같은 장력이 줄지어 날아오자 크게 당황한 듯 손발을 두서없이 마구 내저었다. 언뜻 보기에는 부질없는 몸부림 같았으나 상원건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쉬악!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싸늘한 섬광이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언제 발출했는지도 모르는 사이, 상대가 다시 무형각을 쏘아보낸 것이다. 상원건의 눈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이치상으로 보면 무형각부터 피하는 것이 당연하나, 간신히 상대를 장세(掌勢) 속에 몰아넣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상대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보아 이번에 상대를 놓치게 되면 다시 따라잡기가 어려울지 몰랐다. 더구나 지금은 이렇게 상대와 숨바꼭질하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은가? 상원건은 결단을 내리고 몸을 피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장력을 내갈기며 고개만을 옆으로 비틀었다. 이제까지의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상대의 무형각이 주로 목덜미를 공격해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팟!

무언가 차갑고 서늘한 것이 그의 목 부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목이 반치쯤 잘려져 핏물이 뿜어 나왔다. 하나 그 대신에 상원건의 장력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상대의 몸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콰앙!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상대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악!”

상대는 입으로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호신갑을 입고 있었어도 상원건의 공세가 워낙 강력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이다. 상원건은 목덜미의 상처가 어떤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재차 상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상대가 다시 피하거나 반격할 여지도 없이 단숨에 결판을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의 몸은 노도와도 같은 기세로 허공을 육박해서 아직도 바닥에 바둥거리고 있는 인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성난 용(龍)이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인영의 눈에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상원건의 공격을 피할 여력이 없었다. 상원건의 수도(手刀)가 맹렬한 기세로 인영의 두개골을 내리쳐 갔다. 인영이 가슴을 보호하는 호신갑을 입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몸통이 아닌 머리를 직접 노린 것이다. 인영의 머리통이 상원건의 칼날같이 예리한 수도에 박살이 나려는 찰나, 갑자기 상원건의 머리 뒤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 그림자의 다가오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상원건이 그 기척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 그림자는 그의 등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상원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몸을 비틀어 그림자에 닿는 영역을 줄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그의 수도는 인영의 머리통이 아닌 어깻죽지를 향하게 되었다.

우두둑!

“크윽!”

어깨뼈가 부러지는 음향과 함께 상원건의 수도에 어깻죽지를 강타당한 인영은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벌렁 나자빠졌다. 그와 동시에 상원건도 허리 부근의 살점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무언가 길쭉한 것이 자신의 허리 쪽 옷자락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고 멀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그 그림자가 다름아닌 하나의 길고 검은 채찍임을 알 수 있었다. 옆구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걸레쪽처럼 변한 옷자락 사이로 퉁퉁 부은 피부가 드러나 보였다. 비록 살이 갈라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갈비뼈 몇 개는 금이 간 것 같았다.

휘이익!

다시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예의 채찍이 괴이한 각도로 날아들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짙은 그늘 속에서 꿈틀거리며 날아드는 채찍의 공세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채찍의 끝에는 유난히 검은 광택이 나는 쇠구슬 같은 것이 붙어 있었는데, 어찌나 영활하게 움직이는지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의 독사(毒蛇)를 보는 것 같았다. 원래 이런 숲 속에서는 채찍같이 긴 병기는 사용하기 힘들었으나, 이자는 마치 넓은 공터에 있는 듯 자유자재로 공격해 오고 있었다. 상원건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이며 천성산수 중의 비성암도(飛星暗渡)와 적성월운(摘星越雲)의 초식을 거푸 펼쳐냈다. 두 초식 모두 지금처럼 멀리 있는 상대를 공격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적합한 무공들이었다. 하나 채찍 주인이 손을 흔들자 채찍의 끝 부분이 빳빳이 고개를 쳐들며 그의 공세 속을 미끄러지듯 뚫고 들어왔다. 상원건은 다시 재빨리 몇 개의 초식을 더 펼쳤으나, 그때마다 채찍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그의 공격을 피해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게 대체 무슨 무공이지? 강호에 이토록 영활하고 괴이한 편법(鞭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상원건은 자신이 계속 절초들을 펼치는데도 상대에게 접근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의 채찍에 위협을 당하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쉬아악!

지금도 그가 천성산수 중에서도 위력이 강한 난성수천(亂星繡天)을 펼쳤는데도 채찍은 그의 손과 손이 교차되는 빈틈을 교묘하게 뚫고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상원건은 옆으로 세 걸음 빠르게 이동하며 다시 공세를 펼치려 했다.
그때,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던 채찍의 끝이 허공에서 스윽 일어나더니 그의 목을 향해 빠르게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채찍 끝의 둥그런 부분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예리한 이빨이 번뜩였다.

“앗?”

천하의 상원건도 이때만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놀란 외침을 토하고 말았다.
입을 벌린 채 그를 물어오는 것은 분명 뱀의 머리였다.
이제보니 채찍인 줄 알았던 것은 실제로 살아 있는 한 마리의 검은 뱀이었던 것이다.
상원건은 설마 살아 있는 뱀을 채찍으로 사용하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던 터라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져서 하마터면 목덜미를 뱀에게 그대로 물려 버릴 뻔했다.
마지막 순간에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력을 다해 뒤로 몸을 눕혔다.
검은 뱀의 벌려진 입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덜미 한치 앞에서 닫혀졌다.
상원건은 철판교(鐵板橋)의 신법으로 누웠던 몸을 빙글 한바퀴 돌아 일으켜 세우며 이 장 밖으로 빠르게 후퇴했다.
하나 그의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뛰고 있었다.
강호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상원건이었지만 지금처럼 놀라고 황당했던 적은 아직 없었다.
살아 있는 뱀을 병기로 쓴다는 것은 실로 듣도 보도 못한 기문(奇聞)이 아닐 수없었다.

‘어쩐지 채찍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정교하다 했더니…’

그가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예의 검은 뱀이 꿈틀거리며 날아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겉으로는 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뭉툭한 머리를 제외하고는 묵부터 꼬리로 갈수록 굵어지는 데다 전신이 칠흑같이 검은 광택을 띠고 있어서 조금 전처럼 입을 벌리지만 않는다면 누구도 진짜 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멀쩡히 살아 있는 뱀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상원건은 맨손으로 싸우려는 생각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저 뱀은 맹독(猛毒)을 지닌 독사임이 분명한데, 자칫하여 물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게 뻔하지 않겠는가?
하나 그렇다고 무작정 피할 수만도 없다는 데 상원건의 고민이 있었다.
그가 숲 속으로 뛰어들어온 후로 제법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은 동중산과 낙일방 등이 이미 흡정묵질의 무리들에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상원건은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침착하자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으나, 절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상원건은 굳은 결심을 하고 황급히 품속에서 하나의 작은 부채를 꺼내 들었다.
그 부채는 여타의 것에 비하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언뜻 보기에는 마치 여인들의 장신구 같았다.
재질은 곤옥(崑玉)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부챗살의 수는 모두 스물네 개였다.
부채를 뽑아 든 상원건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뱀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뱀은 다시 커다란 입을 쩍 벌린 채 그의 머리를 물어오고 있었다.

촤르르!

상원건이 부채를 펼치자 옥구슬이 쟁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음향이 울리며 새하얀 섬광이 주위를 밝혔다.
그 섬광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그 순간, 그의 목을 물어오던 뱀의 몸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토막나며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헉!”

채찍의 주인은 다급한 헛바람 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 물러나더니 이내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네놈이 내 묵린사(墨鱗蛇)를 못쓰게 만들다니… 육시를 내버리겠다!”

묵린사란 말에 이번에는 상원건이 흠칫 놀랐다.
묵린사는 독성이 지독한 뱀 중의 하나로, 일단 물리기만 하면 달리 해독할 방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 독물(毒物)이었던 것이다.
상원건도 말로만 들었지 묵린사를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상원건은 상대의 얼굴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묵린사편의 주인은 비쩍 마르고 머리를 까치 집처럼 헝클어뜨린 괴인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뱀의 가죽을 벗겨 만든 것이었는데, 하체만 간신히 가리고 있을 뿐이어서 옷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이었다.
허리춤에는 커다란 포대자루 같은 것을 매달고 있었는데, 그 포대자루조차도 뱀의 껍질을 연결해서 만든 것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괴인의 눈빛은 녹색을 띠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녹안(綠眼) 괴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는 상원건에 의해 어깨뼈가 부서진 인영이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자의 복장 또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상의는 알록달록한 오색(五色)의 채의(彩衣)였고, 하의는 어울리지 않게도 착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바지였다.
허리춤에 특이한 모양의 허리띠를 하고 있었는데, 그 허리띠에 십여 개의 유리로 만든 소라 모양 암기들이 꽂혀 있었다.
형태로 보아 그것이 바로 무형각임이 분명했다.
인영의 얼굴 또한 기이해서, 어떻게 보면 여인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남자 같기도 했다.
피부가 제법 희고 입술이 도톰한 것은 여인 같았으나, 전체적인 인상이나 몸매는 완전히 남자였다.
눈썹은 아예 없었고, 두 눈은 옆으로 쭉 찢어져 있었으며, 매부리코에 광대뼈가 유난히 두드러져서 강퍅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인영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상원건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상원건은 진작에 난자분시당했을 정도로 악독한 눈빛이었다.
상원건이 재빨리 두 사람을 살펴보고 있는 동안, 묵린사의 주인이 포대자루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네놈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선사해 주겠다.”

그의 말투에는 운남지방 특유의 사투리가 심하게 섞여 있어서 상원건은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물론 그래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그의 안색과 말투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원건은 묵린사의 주인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보고는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초록색 방망이였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것은 방망이가 아니라 길이가 두 자쯤 되는 뱀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짤막하고 뭉툭한 뱀이 있다는 것을 상원건은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 녹색 뱀은 머리 부분에 세모꼴의 두 눈이 달려 있고, 연신 꿈틀거리며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닫. 게다가 피부는 마치 비늘이라도 달린 것처럼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어 금시라도 뱃속의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보아하니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포대자루에는 이와 같은 뱀들이 잔뜩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이자는 정말 뱀에 환장을 한 사람 같군. 모든 병기를 뱀으로만 이용하다니… 한 명은 뱀, 한 명은 거머리라니 정말 세상에 이런 작자들도 있나? 가만…’

상원건은 문득 예전에 언뜻 이런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는 빠르게 생각을 굴리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들은 혹시 사충쌍괴(蛇蟲雙怪)가 아니오?”

상원건의 말에 묵린사의 주인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제야 안 모양이구나. 내가 바로 사객(蛇客) 도일기(都一忌) 어르신네이시고, 저쪽이 내 의제인 충랑(蟲郞) 비소독(費蕭獨)이다.”

상원건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고 내심 침음했다. 사실 사충쌍괴는 귀주성(貴州省)과 운남성(雲南省) 일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괴인들이었다. 이들은 운남의 오지에서 태어난 덕에 어려서부터 각종 독물들을 벗삼아 자라났다. 나중에 그들은 이인(異人)에게서 독특한 무공과 독물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는데, 그 수법이 하나같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괴이음독한 것이어서 누구나가 두려워 마지않았다. 상원건은 감숙과 하북 등 주로 강북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강남에서도 훨씬 아래쪽인 귀주, 운남의 무림인들에 대한 정보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는 사충쌍괴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소문을 간신히 기억해 냈을 뿐, 그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지 못했다. 다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독물을 다루는 솜씨에 비해서 무공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운남의 무림인들은 서장무림과는 별로 친분관계가 없었다. 이번에 무림맹을 만들 때도 운남에서 활동하는 적지 않은 고수들이 무림맹의 일원으로 참가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사충쌍괴가 무림맹의 고수들을 공격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상원건이 그들에게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도일기가 괴소를 터뜨리며 덤벼들었다.

“흐흐흐… 오늘 우리를 만난 네 불운(不運)을 탓하거라, 무림맹의 떨거지!”

자신이 무림맹의 고수임을 알면서도 공격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목적은 애초부터 무림맹 고수들을 제거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상원건은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피하지 않고 도일기에게 맞서 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부채는 신뢰선(迅賴扇)이라는 것으로, 상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家寶)였다. 그래서 상원건도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자칫하여 부채가 상하거나 분실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조상을 뵈올 면목이 없기 때문이었다. 도일기는 조금 전에 자신이 아끼던 묵린사가 상원건의 부채에 맞아 토막토막 잘려졌음을 직접 보았을 텐데도 전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녹색 뱀을 휘둘러 왔다. 상원건은 신뢰선으로 구름 같은 선영(扇影)을 일으켜 도일기가 휘두르는 녹색 뱀에 맞서 갔다.

파파팍!

순식간에 녹색 뱀은 선영에 휩싸여 대여섯 번의 충돌을 일으켰다. 상원건은 상대가 경솔하게 자신의 신뢰선에 뱀을 정면으로 마주치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녹색 뱀이 묵린사와 마찬가지로 수십 조각의 고깃덩이로 변해 버릴 것을 믿어 의 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그의 신뢰선에 수십 번이나 가격을 당한 녹색 뱀이 잘려지기는커녕 오히려 시퍼런 독아(毒牙)를 드러내며 그의 코앞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엇?”

상원건은 다급한 경호성을 터뜨리며 옆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허나 녹색 뱀은 마치 물 속을 유영(遊泳)하듯 허공을 미끄러지며 계속 그에게로 다가왔다. 상원건은 설마 녹색 뱀이 자신의 신뢰선에 맞고도 멀쩡할 줄은 몰랐는지라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신뢰선을 휘둘렀다. 그가 사용하는 선법(扇法)은 상가(尙家)의 비전(秘傳)인 선풍십팔선(旋風十八扇)이라는 것으로, 빠르고 질풍 같은 위력이 있어서 가히 절학(絶學)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파파파팍!

다시 선영이 일어나며 세찬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상원건은 자신의 신뢰선이 녹색 뱀의 머리와 목 부분을 무려 열두 번이나 가격했음을 알았다. 그 정도라면 잘려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잘게 다져졌을 것이다. 그러나 녹색 뱀은 잠시 허공에서 몸을 멈칫했을 뿐, 이내 다시 그의 선영을 뚫고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상원건은 녹색 뱀을 가격할 때의 촉감이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마치 두꺼운 솜뭉치를 친 듯한 느낌어었던 것이다. 하나 더 이상 생각을 굴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차앗!”

상원건은 한 소리 낭랑한 외침을 토하며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두 번 회전한 뒤 창응박토(蒼鷹搏兎)의 신법으로 도일기를 향해 날아갔다. 녹색 뱀을 조종하는 도일기를 직접 노리고 들어간 것이다.

“흐흐…”

도일기는 상원건의 의중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녹색 뱀이 몸을 비틀며 상원건의 발을 노리고 다가왔다.

짙은 그늘 속에서도 녹색 뱀의 벌어진 입에 박혀 있는 네 개의 독아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상원건은 떨어져 내리는 기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녹색 뱀을 향해 왼손으로 장력을 내갈김과 동시에 오른손에 들린 신뢰선으로 도일기의 상반신을 휩쓸어 갔다. 실로 질풍 같은 일장일선(一掌一扇)의 공격이었다. 상원건이 날린 장력은 녹색 뱀을 격상하지는 못했으나, 장력에 밀려 녹색 뱀은 순간적으로 상원건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도일기는 설마 상원건이 이런 수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는지라 안색이 홱 변하며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려 피하려 했다. 하나 상원건의 신뢰선은 잠시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파아아!

도일기의 왼쪽 가슴이 선영에 스치며 핏물이 튀어올랐다. 어린아이의 주먹만한 살점이 뜯겨져 나간 것이었다. 도일기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바닥을 한바퀴 구르며 일어나더니 황급히 지혈(止血)을 하고는 왼손을 포대자루에 집어넣었다가 재빨리 다시 꺼냈다. 그의 왼손에는 붉은색 뱀 한 마디가 쥐어져 있었다. 도일기는 상원건을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무림맹의 주구(走拘)놈아! 내 혈록신사(血綠神蛇)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도일기는 양손에 든 녹색 뱀과 붉은색 뱀을 마구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번에 꺼내 든 붉은색 뱀은 녹색 뱀과는 반대로 가늘고 길었다. 얼마나 가늘었는지 어린아이의 새끼손가락 굵기보다도 가늘어서 언뜻 보기에는 마치 비단띠를 연상케 했다. 하나 그 길이는 무려 일 장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꼬리부터 머리까지의 두께가 일정했는데, 한쪽 끝에 혓바닥이 날름거리지 않았다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분간하지도 못할 뻔했다. 굵고 짧은 두 마리의 뱀이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자 상원건도 일시지간은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병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라면 더 낫겠는데, 지금처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뱀들을 상대로 싸우려니 훨씬 더 피곤하고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붉은색 뱀은 워낙 가늘어서 장력을 날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하나 그렇다고 머뭇거리고 있을 수도 없어서 다시 용기를 내어 두 마리의 뱀 속으로 뛰어들었다.

파파팍!

한동안 사람과 뱀의 기묘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마리의 뱀을 조종하는 것은 도일기였으나, 그는 그저 두 마리의 뱀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만 할 뿐이었고, 실제로 상원건을 위협하는 것은 뱀들의 기묘한 동작이었다. 예상대로 붉은색 뱀은 장력이나 선영의 사이를 교묘하게 뚫고 들어왔고, 녹색 뱀은 맞아도 맞아도 끄떡도 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들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붉은색 뱀이 더욱 위협적이었다. 워낙 길고 가늘어서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다가올지 전혀 예상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상원건이 벼락같이 날린 연환삼장(連環三掌)의 공세 속을 유유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붉은 뱀의 모습이 갑자기 상원건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붉은색 끈처럼 길다란 몸통만 보이고 정작 중요한 머리 부분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상원건은 붉은 뱀의 머리를 찾으려고 한눈을 팔다가 하마터면 녹색 뱀에게 옆구리를 물릴 뻔했다.

“이크!”

그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옆으로 피하다가 이내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이 피하는 방향에 어느사이엔가 붉은색 뱀이 입을 딱 벌리고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빠른 속도로 그쪽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등뒤에서 예리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쉬아악!

어깨뼈가 박살난 채 한쪽에 주저앉아 있던 비소독이 때마침 상원건의 허점을 노려 전력을 다해 무형각을 쏘아낸 것이었다. 앞에는 물리기만 해도 즉사를 면치 못할 게 뻔한 붉은색 뱀, 뒤에는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공포의 무형각! 그들 사이에 놓인 상원건의 신세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난데없이 세찬 경기가 불어오더니 붉은 뱀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파아…

지독한 악취와 함께 피비린내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상원건은 꼼짝없이 붉은 뱀의 피와 찢겨진 살점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와 함께 상원건의 뒤통수 근처에서 요란한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불똥이 튀었다.

까깡!

박살난 파편이 우수수 허공으로 흩날렸다. 상원건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무형각이 무언가에 부딪혀 박살이 나고 말았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경악에 가득 찬 비소독의 얼굴이 보이고, 그 너머로 무언가 희끗한 것이 허공을 훌훌 날아 송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작은 비발(飛鉢)이었다. 도일기는 상원건이 꼼짝없이 당했다고 생각하고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다가 이 광경을 보자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해 주위를 둘러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송림 부근에서 나직하면서도 힘이 담겨 있는 불호(佛號)가 들려왔다.

“아미타불, 한낱 미물 따위로 사람을 위협하려 하다니 실로 고약한 심성이로다!”

도일기는 자신이 목숨처럼 아끼던 뱀이 죽자 분노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는지 계속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어디서 빌어먹다 온 중놈이 남의 일에 함부로 끼여든단 말이냐?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어서 나와라!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심성만큼이나 입이 고약한 중생이로군.”

칼로 자르는 듯한 단호한 음성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인영의 신법은 무척 깨끗해서 상당히 높은 허공에서 떨어지는데도 전혀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선 인영은 회색빛 승포를 차려 입은 젊은 승려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었는데, 전반적으로 붉은 빛을 띠고 있어서 언뜻 보기에는 술이라도 취한 사람 같았다. 승려의 오른손에는 조금 전에 날아왔던 작은 비발이 쥐어져 있었다. 도일기는 나타난 사람이 의외로 젊은 승려임을 알고는 다소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이내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이 풍뎅이 새끼 같은 땡중놈아! 네놈이 내 홍아(紅兒)를 죽였느냐?”

젊은 승려는 상대가 계속 욕을 퍼붓자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도일기를 쏘아보았다.

“아미타불, 시주가 흉악한 독물을 사용하여 이미 적지 않은 무림 고수들을 살해한 것을 알고 있거늘 어찌 회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독물들 죽은 것에만 신경을 쓴단 말이오?”

도일기는 젊은 승려가 자신들의 행적을 이미 꿰뚫고 있음을 알자 내심 움찔했으나 겉으로는 더욱 심한 욕설을 내뱉었다.

“뭐라고? 이 아비 어미도 없는 후레자식아! 네놈이 뭔데 감히 내게 회개하니 마니 떠드는 것이냐?”

젊은 승려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말로 해서는 안 될 시주로군.”

그때였다.

“계명, 무얼 노닥거리고 있는 게냐? 속히 그자를 제압하고 배후가 누구인지 캐도록 해라.”

어디선가 철탑을 연상케 하는 듯한 거칠고 투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온 것 같았는데도 모든 사람의 귀에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원래 음성이란 멀리까지 보내기는 쉬워도 그것을 흐트러지지 않고 분명하게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강하고 정심(精深)한 공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 음성을 듣자 젊은 승려는 즉시 허공을 향해 합장을 했다.

“예, 사숙.”

이어 몸을 돌린 그는 도일기를 정면으로 보고 마주섰다.

“시주, 내 손이 매정하다고 탓하지 말고 시주의 흉악한 심성을 탓하도록 하시오.”

“뭐라고? 이 망할 땡중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일기가 버럭 노성을 질렀으나 젊은 승려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도일기는 비록 겉으로는 분기탱천하여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속으로는 이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승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마자 재빨리 수중의 녹색 뱀을 휘두름과 동시에 다른 한 손을 포대자루 속으로 집어넣었다. 포대자루 속에는 그가 기르고 있는 각양각색의 독사들이 수십 마리나 담겨 있었다. 일단 그 포대 속의 뱀들을 풀기만 하면 도일기는 상대가 제아무리 무서운 고수라 해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개중에는 독성이 너무 강해서 도일기조차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종류의 뱀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포대자루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던 도일기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포대에 넣은 손을 미처 빼기도 전에 젊은 승려의 손이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젊은 승려와 그와의 거리는 삼 장이 넘었다. 물론 결코 먼 거리라고는 할 수는 없었으나, 허리춤의 포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뺄 정도의 순간에 다가올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젊은 승려는 어느사이엔가 그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으니 어찌 놀랍고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그러한 신법(身法)은 강호무림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젊은 승려의 손이 갑자기 쭈욱 늘어나더니 포대에서 미처 빼내지 못한 도일기의 손목을 덥석 붙잡는 것이 아닌가? 엄밀히 말하면 손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지막 순간에 그의 손길이 너무도 빠르게 움직여서 마치 늘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하나 이러한 한 수(手)는 보는 이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원건이 입을 딱 벌릴 정도였으니, 당사자인 도일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어…’ 하는 순간에 포대자루에서 손을 빼지도 못하고 젊은 승려에게 손목을 잡히자 어이가 없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순식간에 도일기의 손목을 잡은 승려는 재빨리 그의 가슴팍 혈도를 몇 군데를 제압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녹색 뱀이 늦게 허공을 꿈틀거리며 다가왔으나, 그때는 이미 젊은 승려의 몸은 멀찌감치 떨어져 버린 뒤였다. 실로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눈 깜빡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혈도가 제압당한 도일기의 몸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고,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녹색 뱀만이 헛되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도일기는 안색이 해쓱하게 변한 채 젊은 승려를 바라보았다.

“혀… 혈도를 풀어 줘라. 그러지 않으면…”

젊은 승려는 그의 말에 대꾸하기는커녕 슬쩍 고개를 돌려 엉뚱한 곳을 바라보았다. 상원건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비소독이 어느사이엔가 숲 속으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태가 불리함을 느낀 비소독이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이다. 상원건은 그를 제거해야 흡정묵질을 물리칠 수있다는 생각에 절로 다급한 심정이 되어 그를 쫓아가려 했다. 하나 그가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일진광풍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비소독의 앞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오?”

비소독은 어깨뼈가 부러진 통증을 참으며 미친 듯이 숲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대경실색했다. 하나 그가 채 피하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 인영은 번개같이 그의 혈도를 제압해 버렸다.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비소독이 본 것은 키가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이나 더 크고 앙상하게 마른 승인(僧人)의 뒷모습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나 비소독을 제압한 승인은 그를 옆구리에 끼고는 성큼성큼 장내로 다가왔다. 그는 젊은 승려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섯째, 저자가 너보고 무어라고 자꾸 간청하는 것 같은데…”

다섯째라 불린 젊은 승려는 그 말에 도일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도일기는 땀을 뻘뻘 흘린 채 애타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제발 풀어 줘…”

그의 목은 잔뜩 쉬어 있었고, 전신으로 비 오듯 땀을 쏟고 있어서 마치 물 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젊은 승려는 그의 얼굴색이 거으 잿빛에 가깝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 시주는 정말 이상하군. 마치 지옥 속으로 한발을 들여놓기라도 한 듯한 모습인데, 대체 무얼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군. 아무려면 빈승이 불문(佛門)의 제자인데 함부로 시주를 죽이기야 하겠소?”

젊은 승려는 도일기의 표정이 너무 안되어 보였는지 제법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달래려 했으나, 도일기는 몸까지 덜덜 떨며 더듬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이… 이놈을…”

그의 시선은 젊은 승려가 아니라 자신의 오른손에 가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녹색 뱀은 주인이 혈도가 짚여 꼼짝도 못하고 있자 몇 차례 계속 몸부림을 치더니 갑자기 그의 손 위에서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돌연 입을 크게 벌린 채 자신의 꼬리를 잡고 있는 주인의 손을 덥석 물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젊은 승려가 황급히 제지하려 했을 때는 이미 도일기의 손은 녹색 뱀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으아악!”

도일기의 입에서 도저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일기는 학질 걸린 사람처럼 전신에 마구 경련을 일으켰으나, 혈도가 제압당해 있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젊은 승려의 손에 들린 비발이 한차례 번득였다 싶은 순간, 도일기의 손을 물고 있던 녹색 뱀의 허리가 그대로 잘려져 나갔다.

파아아…

녹색 뱀의 잘려진 몸통에서 진한 녹색의 피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 함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느끼한 비린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냄새에 담긴 악취가 어찌나 지독하던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상원건조차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상원건은 자신이 신뢰선으로 그렇게 가격해도 끄떡도 없던 녹색 뱀이 젊은 승려의 비발에는 맥없이 잘려 나가자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안력을 돋구어 보고서야 젊은 승려의 손에 들린 비발이 단순한 비발이 아니라 무언가 특수한 합금으로 만든 기병(奇兵)임을 알아보았다. 은은한 은색 광채를 띤 그 비발을 보자 상원건은 문득 아미파에서 보물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신병(神兵)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녹색 뱀이 두 동강이 나며 피를 뿌리자 도일기는 꼼짝없이 그 피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다음 순간,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츠츠측…

녹색 피에 닿은 도일기의 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녹아 내리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

도일기는 마구 몸부림을 치며 경련을 일으키다가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어찌나 경련이 심하게 일어났던지 막혔던 혈도마저 뚫려 버린 모양이었다. 녹색 피에 닿지 않은 다른 부분의 살색 또한 이상했다. 몸 전체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면서 전신의 혈맥(血脈)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시뻘건 혈맥이 사방으로 튀어나온 도일기의 몸은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파앗!

마침내 부풀어오른 혈맥이 터져 나가며 도일기는 말 그대로 혈인(血人)이 되고 말았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고 경련을 일으키던 도일기의 몸이 잠잠해질 때까지도 장내의 사람들은 우두커니 선 채로 아무 말이 없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에 놀라 모두들 할말을 잃은 것이다. 도일기의 몸은 순식간에 한줌의 핏물로 변해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푸르고 붉은 핏물 뿐이었다. 도일기가 녹색 뱀에 물리고, 젊은 승려가 녹색 뱀을 토막내고, 다시 그 피를 도일기가 뒤집어쓴 다음에 핏물로 변해 버릴 때까지의 시간은 불과 숨을 몇 번 내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미타불… 세상에 이토록 지독한 독물(毒物)이 있다니… 실로 끔찍한 일이로고.”

젊은 승려가 도일기의 잔해를 향해 합장을 했다. 이어 그는 상원건을 돌아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시주께선 비룡객 상 대협이시죠? 얼마 전 소림사에서 뵈었는데 기억나십니까?”

그 음성에 퍼뜩 정신이 든 상원건은 황급히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소. 대사께선 아미파의 고제(高弟)이신 계명선사가 아니시오?”

“선사라니 당치 않습니다. 제가 바로 계명입니다.”

이제 보니 젊은 승려는 아미파의 일대제자인 홍두타 계명이었다. 뒤늦게 나타나 비소독을 제압한 승려 또한 아미파의 고수로, 쌍이승 중의 독나한 계조였다. 상원건은 일전에 소림사에 마련된 주루에서 흑미륵 원정을 비롯한 이들 아미파의 젊은 고수들을 잠깐 만난 적이 있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계명은 한줌 핏물로 변한 도일기의 시신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상원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 대협께서도 검각으로 가시던 모양이군요. 그런데 상 대협께선 이곳에서 어인 일로 이자들과 시비가 붙게 되었습니까?”

상원건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참,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내 일행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소. 그들을 좀 구해 주시오.”

상원건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낙일방 등이 있는 공터로 몸을 날렸다.
계명은 주저하지 않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계조는 비소독을 옆구리에 든 채로 그를 따라왔다.
계명은 딱딱하게 굳어진 상원건의 옆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일행이라면… 종남파의 고수들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상원건은 달려가면서도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너무 경과하여 낙일방 등이 흡정묵질에 이미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크게 불안했던 것이다.
계명은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려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해서 아무 말 없이 더욱 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곧 그들은 낙일방 등이 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한데 공터에서는 전혀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터에 도달하기도 전부터 무언가 고기가 타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막상 와서 보니 공터의 한가운데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흡정묵질 무리는 그 불길에 절반 가까이가 타 죽고, 나머지는 우왕좌왕하며 우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상원건은 어리둥절하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찌푸려졌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조금씩 사그라져 가는 불길 너머로 낙일방과 동중산 등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구나!”

그제서야 그는 동중산이 말했던 마지막 한 수가 바로 이를 뜻함을 깨달았다.
동중산은 흡정묵질의 접근을 막기 위해 울타리로 만들었던 시체 더리에 술을 붓고는 시체를 태웠던 것이다.
그 효과는 대단해서, 그 무서운 흡정묵질도 불길 속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동중산과 낙일방 등도 상원건을 발견했는지 손을 휘두르며 그를 반겼다.

“상 대협, 흡정묵질을 부린 자를 잡았습니까?”

동중산이 소리쳐 묻자 상원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조와 그가 붙들고 있는 비소독을 가리켰다.

“때마침 아미파 분들의 도움으로 일을 마칠 수 있었소. 모두 무사하오?”

동중산의 얼굴은 여기저기에 숯검정이 묻고 불길에 달구어져서 붉게 변해 있었다.
하나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다행히 우린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 거머리들 타는 냄새가 너무 지독하군요. 불길이 걷히면 어서 빨리 구해 주십시오.”

그제서야 한숨 돌린 상원건은 계명을 돌아보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군요. 조금 전에 들렸던 음성은 흑미륵 원정 대사님 같은데, 그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 일대에서 무림맹의 고수들이 자꾸 실종된다는 말을 듣고 탐문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저쪽 숲 속에 이들 외에도 몇 명의 서장무림 인물들이 숨어 있는 듯하여 사숙께선 그들을 소탕하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저 시신들은 모두 이들에게 당한 사람들 입니까?”

상원건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왔을 때는 이미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었소. 그나저나 시신들을 저렇게 훼손했으니 나중에 그들의 친지들이 알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겠구려.”

“사정이 워낙 다급했으니 이해해 줄 겁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고 죽은 후에도 몸을 태워 공양(供養)했으니, 살신성인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 아닙니까?”

계명이 너무 괘념치 말라는 뜻으로 빙긋 웃자 그제서야 상원건은 무거운 돌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자들은 운남성에서만 활동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서장무림과 손을 잡고 무림맹을 공격해 오다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또 이런 일을 당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구려.”

“서장무림과의 격전이 흉험(兇險)하리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예상한 일 아닙니까? 모르긴 해도 검각까지 가는 동안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원건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그의 손에 들린 비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비발은 혹시 아미파의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라는 은발(銀鉢)이 아니오?”

계명은 준수한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상 대협의 눈은 정말 예리하군요. 잘 보셨습니다.”

상원건은 자신의 짐작이 맞자 새삼스러운 눈으로 계명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미삼보(峨嵋三寶)란 금탁은발동주(金鐸銀鉢銅珠)를 말하는 것으로, 아미파에서는 후기지수 중 가장 촉망받는 세 사람에게 이 보물을 각기 하나씩 물려준다고 한다.
후대 장문인은 그 아미삼보를 지닌 인물들 중 한사람으로 정해지며, 장문인이 결정되면 아미삼보는 다시 아미파에 회수되었다가 다음대의 가장 뛰어난 세 명의 제자에게 다시 전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전수 방식은 아미파 고유의 인재양성법으로, 아미파에서는 이들을 삼보지재(三寶之才)라 불렀다.
천하무림에 명성을 날리는 아미파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삼보지재의 출신들이었다.
상원건은 홍두타 계명이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무공이 고강하고 뛰어난 인물임은 알고 있었으나, 설마 삼보지재 중 한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문득 계명이 한쪽을 쳐다보고는 반색을 했다.

“아! 저기 사숙께서 오시는군요.”

상원건이 고개를 돌리니 과연 멀리서 하나의 인영이 질풍 같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신법은 조금 전에 보았던 계명보다 한 배 반은 더 빠른 속도였다.
그 인영의 뒤로 다시 두 개의 인영이 멀리서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앞의 인영은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람한 체구에 검은 얼굴을 한 승려였다.
상원건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흑미륵 원정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일남일녀(一男一女)는 쌍이승 중의 온미륵 계통과 장옥연임이 분명했다.
상원건이 보고 있는 동안에도 흑미륵 원정이 신형은 한 번에 십여 장씩 쑥쑥 도약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아미파의 독보적인 추서십육섬(追絮十六閃)이로군. 과연 대단한 신법이다.’

상원건은 재삼 감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일말의 위안을 느꼈다.
아미파의 고수들과 합류한 이상 검각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해도 충분히 뚫고 나갈 자신이 생겼던 것이다.
사그라지는 불길을 보고 있던 상원건은 고개를 돌려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기울면서 하늘 저편에는 조금씩 붉은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벌어질 피의 바람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상원건은 마음속으로 소리쳐 물었다.

‘진 장문인,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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