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8화
제55장. 살수중첩(殺手重疊)
이곳은 아주 조용한 장소였다.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인 건물에는 장지문을 제외하고는 한쪽 벽에 작은 창문만이 나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펼쳐져 있었고, 장지문 밖에는 작은 연못을 갖춘 뜨락이 있었다.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면 별다른 장식이 되어 있지 않은 단출한 방이 나타난다. 방 한가운데에는 향(香)이 타오르는 작은 청동향로가 놓여 있고, 그 너머로 제단(祭壇)이 마련되어 있었다.
제단 위에 놓인 육중한 관(棺)만 아니라면 책을 읽거나 사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제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등이 유난히 넓고 체격이 건장한 마의중년인이었다. 마의중년인은 상당한 시간을 앉아 있었는데도 전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낮이 되기에는 아직 일렀지만, 아침은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창문 너머로 밝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지만, 실내는 아직도 무거운 정적(靜寂)에 휩싸여 있었다.
갑자기 장지문 밖의 작은 뜨락에 몇 개의 인영이 어른거리더니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가장 우측의 인물은 우람한 체구를 지닌 칠 척(七尺)의 거한(巨漢)이었다. 거한은 삼십대의 한창 나이에,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남성다운 강인함이 물씬 풍기는 얼굴, 그리고 강철이라도 뚫을 것 같은 예리한 안광을 지니고 있었다.
좌측의 인물은 그와는 반대로 호리호리한 체구에 피부가 백지장처럼 창백한 회의인(灰衣人)이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조금 많았고, 그렇다고 아직 중년으로는 접어들지 않은 나이였다.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문 양쪽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그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화의를 입은 노인이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체구가 다섯 자를 간신히 넘을 것 같은 작은 키에 반백(半白)의 머리, 그리고 유난히 붉은 얼굴을 한 육십대의 노인이었다. 주름살이 가득 뒤덮인 얼굴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두 개의 눈이 박혀 있었는데, 가뜩이나 작은 눈이 거의 감겨 있어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참으로 볼품없고 왜소한 노인이었다.
그런데 화의노인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지금까지 등을 돌린 채 미동도 않고 앉아 있던 마의사나이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화의노인을 향해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을 뵈옵니다.”
화의노인은 그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여전히 반쯤 감은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향로를 지나 관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 언뜻 실줄기 같은 안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화의노인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욱아(旭兒)가 저 안에 들어 있다고?”
그 음성을 듣자 마의사나이는 한차례 몸을 떨더니 더욱 깊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습니다.”
마의사나이는 물론 감종간이었다. 감종간은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평소에는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처럼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이유는 화의노인이 그의 사부이자 서장무림의 제일지자(第一智者)인 천애치수 단목초이기 때문이었다.
단목초와 함께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은 그의 오랜 수신쌍위(守身雙衛)였다. 거한은 적령철조(赤翎鐵雕) 양벽(梁霹)이라 했고, 회의인은 비랑(飛狼) 나안(羅雁)이라 했다.
이들은 십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단목초의 옆에서 그를 지켜주는 충직한 수하들이었다.
단목초는 감종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은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제단 위에 놓여진 관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관 안에 든 시신은 단목초가 네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아끼던 상관욱이었다.
대제자인 감종간은 비록 맡은 일을 처리하는 데는 완벽한 인물이었지만 그만큼 인간적인 매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셋째인 위태심은 두뇌가 비상하고 재지가 탁월했으나 이기적이고 시기심이 많아서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고, 막내인 백석기는 배포가 크고 아랫사람을 잘 부렸으나 모든 면에서 아직 풋내가 나는 애송이였다.
그들에 비해 상관욱은 서열은 감종간보다는 뒤졌으나 조직을 관리하는 데 명수(名手)였고,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알았다.
특히 그는 인물됨이 깔끔하고 풍류(風流)를 즐길 줄 알아서 단목초는 내심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아끼고 있었다.
투박한 외모의 단목초는 상관욱을 통해서 자신이 지니지 못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관욱이 차디찬 시신이 되어 딱딱한 관 속에 누워 있으니 이를 보는 단목초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누구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목초는 여전히 관을 응시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욱아를 해친 흉수는 누구냐?”
감종간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무림맹의 이정문인 듯합니다.”
단목초의 주름진 눈에 한순간 광채와도 같은 섬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이정문이라… 욱아의 소식이 끊겼을 때부터 최악의 경우를 예상했었지. 그런데 역시 그자의 짓이었군.”
감종간은 무어라 할말이 없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단목초도 한동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는 쥐죽은 듯이 조용한 가운데 무언지 모를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한동안 상관욱의 시신이 담긴 관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단목초의 입이 살짝 열리며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뚜껑을 열어라. 욱아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구나.”
감종간은 다시 한차례 머리를 조아리고는 관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우선 관 뚜껑의 봉인을 제거했다. 이어 관 앞에 있는 청동향로를 치우기 위해 한쪽으로 들고 가면서 단목초의 뒤에 시립해 있는 양벽과 나안을 바라보았다.
“관을 여는 것은 두 분이 수고해 주셔야겠소.”
양벽과 나안은 서로 시선을 마주보더니 이내 관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각기 양쪽에 나누어 서서 관 뚜껑을 움켜잡았다.
스르릉!
무거운 관 뚜껑은 의외로 가볍게 열리기 시작했다. 관 뚜껑이 열리면서 방부제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관 안에는 하얗게 표백된 상관욱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그 시신을 보자 단목초는 자신도 모르게 관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바로 그때였다.
꼼짝도 않고 누워 있던 상관욱의 시신이 돌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시신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시신이 누워 있던 바닥이 번쩍 들리며 시신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와 함께 시신의 옆구리에서 하나의 섬광이 튀어나왔다. 그 섬광은 정확하게 단목초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팍!
그것은 너무도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지척에 있던 양벽과 나안은 관 뚜껑을 든 채로 우두커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묘한 정적이 실내에 감돌았다.
느닷없이 상관욱의 시신 뒤에서 튀어나온 섬광은 한 자루의 예리한 검이었다. 그 검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단목초의 심장에 명중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장내에는 어떠한 선혈도 내비치지 않았다.
상관욱의 시신 뒤에서 검을 찔렀던 인영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재차 장검으로 단목초의 목을 찌르려 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양쪽에서 관 뚜껑을 잡고 있던 양벽과 나안이 들고 있던 관 뚜껑으로 상관욱의 시신을 가격해 버렸다.
파악!
관 뚜껑이 박살이 나며 상관욱의 시신이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시신의 뒤에 있던 인영 또한 박살난 파편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양벽과 나안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바닥에 쓰러진 인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맹렬한 기세로 보아 바닥에 쓰러진 인영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때 너무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나중에까지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목초의 뒤에서 눈앞의 격변을 지켜보고 있던 감종간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청동향로를 단목초의 머리 위에 부어 버렸던 것이다.
청동향로에는 향 대신에 시커먼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 액체는 전혀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단목초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치이익…
검은 액체가 닿는 순간, 매캐한 냄새와 함께 단목초의 머리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놈!”
단목초가 버럭 폭갈을 터뜨리며 감종간을 향해 쌍장(雙掌)을 휘둘렀다.
하나 그때는 이미 감종간의 신형은 창문이 있는 방의 반대쪽 구석으로 이동해 있은 후였다.
츠츠측…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단목초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해 버렸고,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마구 피어올랐다. 단목초는 다시 감종간을 향해 몸을 날렸으나, 채 허공을 반도 날기 전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공교롭게도 그가 쓰러진 곳은 상관욱의 시신 뒤에 숨어 있다가 관 뚜껑에 맞고 쓰러진 인영이 있는 곳과 지척이었다.
“크으으…”
얼굴을 비롯한 전신의 피부가 시커멓게 변색된 단목초는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더니 돌연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감종간! 네놈이 나를…”
그의 장포가 갑자기 부풀어오르더니 이내 풍선처럼 팽팽해졌다.
다음 순간,
콰아앙!
그의 몸은 그대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 폭발의 위력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방 전체가 박살났을 뿐 아니라 건물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렸다. 하나 감종간은 어느새 창문 밖으로 빠져 나가 송림 사이로 숨어들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에서 자욱한 연기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심한 악취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연기는 반 시진 가까이 지나도록 계속 피어올랐다.
그동안 아무도 나타나는 사람은 없었다. 건물 안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송림 사이로 모습을 감춘 감종간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정적만이 장내에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멀리서 세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인영들은 악취가 진동하는 장내에 접근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악취가 완전히 가신 후에야 조심스럽게 장내에 접근했다.
그들은 다름아닌 이정문과 육난음, 그리고 백랑군 송악이었다.
이정문과 송악은 여전히 담담한 신색인 데 반해 육난음은 경악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조금 전의 폭발은 대체 뭐였지요? 얼마나 화력(火力)이 대단하기에 건물 하나를 통째로 날려보낸 건가요?”
육난음의 물음에 이정문은 고개를 저었다.
“화기(火器)가 아니야. 저건 폭혈마공(暴血魔功)의 흔적이야.”
그 말에 육난음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공의 흔적이란 말이에요?”
“그래. 폭혈마공은 체내의 잠(潛力)을 모두 끌어올렸다가 한순간에 터뜨리는 무공으로, 동귀어진(同歸於盡)할 때 쓰는 수법이지. 그 위력이 너무나 강해서 오래 전에 절전(絶傳)된 거서으로 알려졌었는데 단목초가 그것을 익히고 있었나 봐.”
육난음은 놀람이 너무나 커서 생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그럼 단목초가 동귀어진을 했단 말이에요?”
이정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귀어진을 하려고 했겠지. 하지만 상대는 약삭빠르게 빠져나간 모양이야.”
“누가요? 진 장문인이요?”
이정문은 피식 웃었다. 입꼬리를 비틀며 웃는 웃음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냉정해 보였다.
“그였다면 단목초가 동귀어진까지 했을 리가 없었겠지.”
“그럼 누구예요?”
이정문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 폐허 더미를 뒤적거리고 있던 송악이 그를 불렀다.
“여기 와 보게.”
폐허 더미 속에서 송악이 찾아낸 것은 한 구의 참혹한 시신이었다. 살아 생전에는 무척 거구였을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한 쪽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잘려져 나가 상반신만이 간신히 남아 있었다. 이정문은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자는 양벽이로군요.”
송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벽이 죽었다면 나안의 시체도 이 근처에 있을 텐데…”
그의 짐작대로 나안의 시체는 양벽에게서 이 장 떨어진 폐허 속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이자들은 살아생전에도 단목초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더니 죽을 때도 그의 곁을 따라갔군.”
이정문은 그들의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른 곳을 뒤적거렸다. 곧, 그는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처참한 몰골의 인간이었다. 머리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되어 혈인(血人)이 따로 없었다. 입고 있는 의복은 누더기로 변한 지 오래였고, 몸의 피부는 검은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이정문은 그의 코에 손가락을 대보고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흐음, 정말 목숨이 질기군. 확실히 운(運)이 좋은 사람이야.”
육난음은 이정문이 그에게 관심을 보일 때부터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와 쳐다보다가 이 말을 듣자 무언가를 느낀 듯 안색이 싹 변했다.
“그… 그럼 이 사람이 바로 진 장문인이란 말이에요?”
이정문은 힐끗 그녀를 쳐다보더니 턱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검을 보면 알 거 아냐.”
과연, 그 누더기 괴인의 한 손에는 아직도 한 자루 검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그 검을 보자 그녀는 짤막한 비명을 토해냈다.
“맙소사, 진짜 진 장문인이군요.”
그녀가 황급히 괴인, 진산월을 끌어안으려 하자 이정문이 그녀를 제지했다.
“만지지 마.”
육난음은 힐난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이 사람은 당신의 부탁을 받고 도와주려다 이런 꼴이 되었어요. 그런데 왜 치료도 못하게 하려는 거죠?”
이정문의 얼굴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앙천지독(殃天之毒)에 중독되었어. 지금 그를 만지면 당신도 중독될 거야.”
앙천지독이란 마라에 육난음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녀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처… 천하삼대극독(天下三大劇毒) 중의 그 앙천지독 말인가요?”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단목초가 스스로 살기를 포기하고 동귀어진을 선택할 리가 있겠어?”
천하삼대극독은 이름 그대로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세 가지 맹독(猛毒)으로, 달리 해독약(解毒藥)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세 가지 독은 앙천지독과 무형심인지독(無形心印之毒), 그리고 귀화(龜火)라는 것이었다.
이 세 극독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것들로, 이중 어느 하나에라도 중독되면 살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진산월이 앙천지독에 중독되었다는 말에 육난음은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럼 이대로 그를 죽게끔 내버려두자는 말이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물론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지금은 잠시만 기다려야 돼.”
“왜요?”
“조금 후에 노방(盧蚌)이 오기로 했거든.”
노방이라는 말에 육난음은 일말의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노방은 강호무림에서 제일신의(第一神醫)로 소문난 사람으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까지 알려져 있었다. 다만 행적이 신비하고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싫어해서 좀처럼 그를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정문은 어떻게 노방을 이곳에 오도록 안배했을까? 육난음은 이정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른 대로 말해요. 당신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죠?”
이정문은 그녀의 성난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혼자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난 천재라구. 천재라면 이 정도 일쯤은 예상할 수 있는 법이지.”
육난음은 그가 태연히 수긍을 하자 막상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다… 당신은… 당신은 정말 냉혈한(冷血漢)이군요. 어쩌면 그럴 수가…”
이정문은 돌연 정색을 했다.
“이번 일의 위험에 대해서 나는 미리 그에게 충분한 언질을 주었어. 결정은 그가 한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일을 최대한 완벽하게 꾸미는 것뿐이었어.”
“하지만… 그의 대가가 너무 컸어요.”
이정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노방이 그를 살려낼 거야.”
그녀는 아무리 노방이더라도 앙천지독을 해독시킬 수는 없다고 소리치려다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만에 하나 정말 일이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진산월과는 별다른 관계도 없는 사이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느끼거나 특별한 친밀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순수한 마음에서 무림맹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나선 한 젊은이가 당초 의도와는 달리 철저하게 남의 꼭두각시가 되어 비참한 몰골로 변해 있는 것을 지켜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정문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듯 가만히 위로의 말을 던졌다.
“어쨌든 단목초는 제거되었고, 서장무림은 두뇌를 잃게 되었어. 이번 일에 그는 커다란 공(功)을 세운 거야. 그가 살아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분명한 사실이며, 이것으로 종남파도 떳떳이 강호에서 행세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으로 그도 만족할 거야.”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온몸이 검게 변색되고 만신창이가 된 채 폐허 속에 누워 있는 진산월은 숨결조차 점차로 가늘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는 한두 시진을 넘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녀는 간신히 가느다란 숨결만을 유지하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족이라고? 그럴 리 없어요. 그가 이대로 숨이 끊어진다면 모르지만… 만약 살아나게 된다면 당신은 정말 무서운 적(敵)을 가지게 될 거예요.’
“세 가지 문제가 있네.”
이정문은 묵묵히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청의인은 아주 냉정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첫째는 내상(內傷)이 심해서 앙천지독의 독기(毒氣)가 이미 골수(骨髓)에까지 침투해 있다는 것일세. 내상 때문에 저항력이 거의 없어져서 독기가 수월하게 몸 속으로 뚫고 들어왔네.”
이정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은 앙천지독을 정면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아마도 폭발할 때의 여력(餘力)으로 단목초의 몸에 묻은 독에 조금 노출되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상태가 심각합니까?”
“정확히는 단목초의 살점 몇 개에 맞은 것이네. 몸의 세 군데에 아주 강한 반점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걸세. 그나마 그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지. 제대로 중독되었다면 이미 한줌의 핏물로 변해 있겠지.”
이정문은 수긍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너무 가까이에서 폭발이 일어나 상당히 많은 피부가 손상을 입었네. 특히 얼굴의 왼쪽 부분이 많이 상했는데, 독기 때문에 상처가 썩어 들어가서 완치(完治)는 힘들 것 같네.”
청의인의 음성은 마치 칼로 자르는 듯 맺고 끊음이 분명해서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싸늘하게 느껴졌다.
하나 이정문은 청의인이 엄격해 보이는 외모나 냉정한 음성과는 달리 누구보다도 가슴이 따뜻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의인이야말로 무림제일신의로 알려진 철면군자(鐵面君子) 노방이었던 것이다.
노방의 의술에 견줄 만한 사람은 강호에서 오랫동안 의술(醫術)로 명성을 떨치던 제갈세가의 당대 가주인 신수무정(神手無情) 제갈외(諸葛畏) 밖에 없었다.
이정문은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노방의 얼굴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어 마치 가면을 씌워 놓은 것 같았다.
그의 이런 모습 때문에 그의 외호에 ‘철면’ 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세 번째가 사실 제일 문제일세. 그는 앙천지독에 중독되기 전에 이미 또 다른 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네.”
이정문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는지 눈꼬리가 한차례 크게 꿈틀거렸다.
“그렇습니까? 그건 금시초문이군요. 무슨 독에 중독되었습니까?”
“음독(陰毒) 중에서도 최고로 지독한 부시독(腐屍毒)일세.”
이정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그가 비록 시체와 함께 관에 있기는 했지만 그 시체는 방부 처리를 한 것이라 별문제가 없었을 텐데요.”
“방부 처리를 했다고? 그럼 혹시 방부 처리한 시체에 음기(陰氣)가 강한 약물이나 물건을 둔 적이 있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 관은 왕방이 만든 것인데, 아직 왕방이 만든 관에서 부시독이 발생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군요.”
노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방이 이번에만 특별히 약물 처리를 달리했거나 아니면 무언가 실수를 했던 게지.”
그 말을 듣고서야 이정문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노방은 그의 얼굴에 한차례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감을 놓치지 않았다.
“알고 있는 사실이 있으면 모두 말해 보게. 조그만 것이라도 중요한 도뭉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일세.”
“그 부시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제가 왕방에게 관을 부탁하면서 그 관의 겉에 천리향을 뿌려 두라고 지시했거든요.”
“바로 그거로군. 천리향은 음기가 강한 약물일세. 그 음기에 방부 처리된 시체가 노출되어 부시독이 발생한걸세.”
이정문은 진산월의 중독이 무심코 저지른 자신의 부주의 때문임을 알게 되자 여러모로 입맛이 썼다.
“해독하기 힘드시겠습니까?”
노방은 여전히 철갑을 씌운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음성에는 한 줄기 당혹감이 어려있었다.
“그 때문에 일이 묘하게 되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앙천지독에 살짝 노출된 정도라면 내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있겠는데, 내상을 입은 데다 부시독에마저 중독되어 지금은 두 가지 독이 모두 골수까지 스며들어 있네. 다시 말해서 내가 손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지.”
“그럼 그를 살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또 묘한 게, 두 가지 독 중 어느 한 가지가 그렇게 골수로 깊숙이 파고들었으면 이미 진작에 숨이 끊어졌을 텐데, 지금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독이 함께 있는 바람에 아주 복잡하게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