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3화
제59장. 살기엄상(殺氣嚴霜)
누군가가 달빛은 그리운 사람의 눈빛을 닮았다고 했다.
낙일방은 자신의 머리 위를 하얗게 비추는 달빛이 임영옥의 눈빛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일방이 임영옥을 처음 만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그때 그는 돈도 별로 없이 낙양 일대를 떠돌다가 섬서성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그는 은근히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화산파에 가입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나 화산파의 입문(入門) 조건은 구대문파에서도 까다롭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것이어서, 내력도 없는 떠돌이에 무공에 대한 재질도 썩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그로서는 입문 심사는커녕 그 문턱에도 가 볼 수 없었다.
며칠째 화산파 주위만 얼쩡거리던 낙일방이 결국 화산파에 입문하기를 포기하고 힘없이 몸을 돌려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가 도착한 곳이 바로 종남산이었다. 그는 종남산에 종남파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사실 종남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당시 종남파는 이미 유명무실하여 강호상에서 그 존재 여부조차 불투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이런 생각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종남산 일대를 어슬렁거리다 가진 돈이 모두 떨어진 낙일방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종남산 산자락의 대왕루(大王樓)라는 주루를 찾았다. 그 주루가 이 일대에서 제일 크고 장사가 잘되는 곳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 그곳에서 입도 뻥긋 열기 전에 쫓겨나고 만 낙일방은 이내 분노가 솟구쳐 점소이들과 시비를 벌이게 되었다.
한참 점소이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낙일방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힐끗 고개를 돌려보았다. 주루의 입구에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청년과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나란히 선 채로 장내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낙일방은 첫눈에 그들에게 묘한 호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너무도 선량한 데다 그 속에 어떤 따뜻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체격이 건장한 청년은 낙일방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넉넉한 웃음이었다.
“점소이가 되고 싶다고?”
청년이 대뜸 반말을 했는데도 낙일방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낙일방은 그와 여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왜 안 되나요?”
청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안 될 건 없겠지. 하지만 이왕이면 점소이보다 좀더 나은 걸 꿈꾸는 게 더 낫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지.”
“좀더 나은 거라니요?”
“예를 들면 강호의 고수라든지……”
낙일방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거야 말하나마나지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고수로 만들 수 있단 말이에요?”
청년은 다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내게 그런 재주가 있을 리 있나? 하지만 네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길 안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낙일방은 긴가민가 싶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들은 그런 노골적인 시선을 받으면 크게 화를 내거나 아니면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낙일방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미소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낙일방은 이상하게 마음이 포근해졌다. 청년은 다시 물었다.
“어떠냐?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 테냐?”
낙일방은 한참 더 그를 쳐다보다 마침내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대답치고는 참 맥없는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낙일방의 붉게 상기된 얼굴과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빛만으로도 그의 심정과 마음속 열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옆에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사매, 지금 가도 되겠지?”
여자는 찬찬한 눈길로 낙일방을 응시하더니 이내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그 모습은 여인다운 온유함과 침착함이 겸비된 것이어서 낙일방은 더욱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주루의 장방(?房)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난 청년은 여자와 낙일방을 데리고 주루를 벗어났다.
주루를 빠져 나오자마자 청년은 다시 낙일방을 향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낙일방이에요. 당신들은……”
“나는 진산월이라 하고, 이쪽은 임영옥이다.”
이어 그는 낙일방이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짐작하고 있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종남에서 왔다. 이곳은 본 파의 보호를 받고 있는 곳 중의 하나지.”
그제서야 낙일방은 그들이 종남파의 일대제자들이며, 대왕루가 종남파의 세력에 있는 자금원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년은 종남파의 수제자인 진산월이었고, 여자는 종남파 장문인의 외동딸인 임영옥이었다.
그들이 종남파의 인물들임을 알고 낙일방은 조금 실망하기도 했으나, 이내 그런 마음을 훌훌 털어 버리고 기꺼이 종남파에 입문(入門)했던 것이다.
나중에 낙일방은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진산월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 사형은 왜 저한테 그런 친절을 베풀었던 거죠?”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습관적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너를 보니까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왠지 낯선 사람 같지 않더구나.”
낙일방이 종남파에 정식으로 입문한 것은 진산월을 따라 종남산에 온 지 정확히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낙일방이 입문식(入門式)을 마쳤을 때, 임영옥은 곱게 접은 백의 한 벌과 영웅건(英雄巾)을 그에게 내밀었다. 낙일방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남에게 무언가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고마워요, 사저.”
임영옥은 어린 동생을 보는 큰누나처럼 부드러운 시선으로 낙일방을 바라보았다.
“눈대중으로 만든 것이라 잘 맞을지 모르겠네.”
낙일방이 백의를 갈아입고 이마에 영웅건을 질끈 동여맨 다음 밖으로 나오자 임영옥은 그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제가 무림에 나가면 반드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거야.”
낙일방은 눈을 반짝 빛냈다.
“내가 그렇게 무공에 재질이 많아 보여요?”
임영옥은 입을 가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강호의 소녀들이 사제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시끄러워질 거란 말이지.”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되었고, 주위에 있던 다른 사형제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사저도 참…… 보기보단 짓궂은 데가 있군요.”
낙일방은 붉게 물든 얼굴로 투덜거렸으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샘물 같은 것이 솟아 나와 몸을 적셔 주는 듯한 포근함을 느꼈다. 항상 떠돌이로만 지내던 자신에게도 이제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사형제들이 생긴 것이다. 낙일방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향해 웃음짓던 임영옥의 따스한 눈빛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유난히 밝은 달빛이 온 누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광경을 보자 왠지 당시의 임영옥이 생각나는 것은 그가 너무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낙일방의 옆에서 그와 나란히 달빛을 감상하고 있던 응계성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낙일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시무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냥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응계성의 얼굴에 심술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 여자드르을 생각하고 있었지? 천봉팔선자의 그 늘씬한 미녀들 말이야.”
낙일방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사형이야말로 그런가 보죠. 그러니까 툭하면 그 여자들 얘기나 하고……”
“뭐라고? 이 자식이……”
응계성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쳐들었다. 그런데 낙일방의 태도가 이상했다. 평상시라면 어마 뜨거라고 머리를 싸매고 도망갔을 텐데, 지금은 그냥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눈가에 수심(愁心)이 가득한 채 멍하니 텅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던지 응계성은 쳐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달빛이 좋아서 참는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네놈은……”
응계성은 몇 마디 더 하려다 특별히 할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더니 이내 등을 돌리고 말았다.
“에이, 제기랄……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저놈까지 속썩이는군.”
응계성도 바보는 아닌 이상 낙일방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를 리 없었다. 단지 그의 성격상 남들 앞에서 궁상을 떠는 것을 극도로 싫어할 뿐이었다. 그때 먼 산을 쳐다보고 있던 낙일방이 갑자기 반색을 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장문사형!”
응계성이 황급히 돌아보니 과연 멀지 않은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그들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진산월이었다. 달빛을 등에 지고 있어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유난히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져 있었다. 낙일방은 진산월의 앞까지 다가가더니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저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았다.”
낙일방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가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진산월은 그의 앞을 지나쳐 마차로 다가갔다.
“피곤하구나. 더 늦기 전에 어서 출발하자.”
진산월이 휑하니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낙일방은 아쉬움과 의구심이 범벅이 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당장에라도 어둠 속에서 임영옥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하나 임영옥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돌린 낙일방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응계성의 성난 얼굴이었다.
“이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바보 같은 자식……”
응계성은 다짜고짜 낙일방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사형, 왜 그래요?”
“보고도 모르냐?”
응계성은 낙일방의 목덜미를 움켜잡고는 그의 귀에 대고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사형의 얼굴을 보면 모르겠냐? 누구보다도 사저를 데려오고 싶어했던 장문사형이 결국 혼자 돌아왔으니 그 심정이 어떻겠느냐? 그런데 네놈은 남의 속도 모르고 이러고만 있으니……”
그제서야 낙일방은 응계서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군요. 장문사형도 사저를 못 데리고 왔군요……”
낙일방의 눈에는 금세 그렁그렁 눈물 방울이 매달렸다. 응계성은 그걸 보고 다시 낙일방을 윽박지르려다 간신히 눌러 참았다. 대신 그는 낙일방의 손목을 끌고 가서 마부석에 반강제로 눌러앉혔다.
“넌 아무 소리 말고 마차나 몰아라.”
마차 옆에 서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상원건이 눈치 빠르게 다가오더니 낙일방의 옆자리로 올라왔다.
“내가 도와주지.”
이어 상원건은 응계성을 향해 안심하라는 눈짓을 하고는 천천히 마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랴……”
마차가 움직이자 응계성은 갑자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것은 평소의 그에게서는 좀처러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멀어져 가는 마차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낙일방처럼 수심 가득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등을 툭 쳤다.
“우리도 슬슬 가는 게 좋겠군요.”
응계성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중산이 세 필의 말을 끌고 그의 뒤에 와 있었다. 응계성은 마음속의 근심을 떨쳐 버리려는 듯 한차례 어깻짓을 하고는 이내 말 위로 뛰어올랐다.
히히힝!
그가 박차를 가하자 말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질풍처럼 검은 먼지를 일으키며 마차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동중산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갈수록 태산(泰山)이라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문파의 유일한 절정고수 마저 떨어져 나갔으니 앞으로 이 난관을 어찌 헤쳐 나갈지……”
동중산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모처럼 작정하고 들어간 문파가 이 모양이니 내 운명(運命)도 참으로 얄궂구나. 종남산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야겠군.”
동중산은 어두운 하늘을 한차례 올려다보더니 이내 자신도 말들을 몰아 마차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종남산으로 가는 여정(旅程)은 고달픈 것이었다. 처음 소림사에서 대파산을 넘어 사천성으로 왔을 때는 나름대로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에 힘든 줄도 몰랐으나, 돌아가는 길은 그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진산월은 아직도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 하루의 절반 이상을 마차에 마련된 침상에 누워지냈으며, 낙일방과 응계성은 심신(心身)의 피로에 지쳤는지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는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상원건마저 별다른 말이 없이 마차를 모는 데만 열중했다. 상황이 이러니 여정이 흥이 날 리 없었다. 그들이 넘고 있는 곳은 대파산맥 중의 지봉(支峯)인 미창산(米倉山)으로, 비록 대파산의 다른 곳보다 험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산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울창해서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미창산의 서쪽은 유명한 촉잔(蜀棧)이 있는 천하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이어서 마차가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상원건은 주로 미창산의 동쪽 기슭을 따라 마차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상원건과 낙일방이 앉았고, 응계성과 동중산은 식량과 짐을 실은 말 몇 마리를 끌고 마차 뒤를 따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차를 모는 것은 상원건이 거의 도맡았고, 낙일방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상원건은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분위기를 돋우려 해보았자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묵묵히 마차를 모는 일에만 주력했다. 미창산을 넘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얇은 옷을 뚫고 피부에 소름을 돋게 했고, 바람은 칼날처럼 예리해져서 한겨울 못지않았다. 그들은 새삼 사천성의 따뜻하고 온후한 기온이 그리워졌으나, 지금은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상원건은 마부석에 앉아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눈발이 조금씩 내비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한바탕 눈이 쏟아지겠군. 더 늦기 전에 몸을 쉴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네.”
마차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동중산이 서쪽의 능선을 가리켰다.
“저 능선 너머에 어도진(漁渡津)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쓸만한 객잔이 있을 겁니다.”
응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도진? 거기에 무슨 강(江)이라도 있나?”
“있지요. 여기선 안 보이지만 저 능선 아래에는 대통강(大通江)의 제법 큰 지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도진은 그 강가에 있는 나루터를 겸한 마을입니다.”
이제껏 시무룩하게 있던 낙일방이 귀가 번쩍 뜨이는지 모처럼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나루터라면 물고기 요리도 있겠군요. 며칠 동안 계속 산길을 걸었더니 녹두활어(綠豆活魚) 같은 생선 요리가 먹고 싶어졌어요.”
“또 먹는 타령이냐?”
응계성은 한마디 쏘아붙이기는 했으나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리 싫은 얼굴이 아니었다. 상원건이 재빨리 그들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빙긋 웃으며 마차를 몰았다.
“그럼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갑시다. 오늘 같은 날은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군.”
능선을 넘자 과연 동중산의 말대로 눈앞이 탁 트이며 하나의 길고 구불한 강이 나타났다. 산 능선에서 내려보이는 강줄기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을 이루어 마치 실개천이라도 흐르는 것 같았으나, 능선을 내려갈수록 점차로 굵어지더니 종내에는 상당히 커다란 강물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도진은 그 강의 강둑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나루터라고는 해도 강을 건너는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미창산 일대를 다니는 사냥꾼들과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주로 몰려오는 한적한 곳이었다. 진산월 일행이 그곳애 도착한 것은 해가 막 떨어지기 직전인 유시(酉時)경이었다. 그때는 벌써 주위가 어두워지고 날씨가 한층 쌀쌀해져서 길을 지나가는 행인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도진에는 주루도 몇 군데 되지 않았고 객잔은 단 두 군데 뿐이었으나, 일행은 운 좋게도 그중 한 객잔에서 제법 크고 깨끗한 방 몇 개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방들은 작은 뜰을 사이에 두고 삼각형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진산월 일행 같은 적은 수의 무리들이 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객잔의 주인은 땅딸만한 체구에 알록달록한 화의(華衣)를 입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는데, 진산월 일행을 안내하면서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아마도 늦은 저녁에 손님들이 들이닥치니 절로 신이 난 모양이었다.
“식사들은 하셨습니까?”
주인의 물음에 상원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지 않았소. 이곳에서 식사도 되오?”
주인은 두 눈이 감겨질 정도로 활짝 웃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하고말고요. 주문만 하시면 직접 방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따로 주루에 갈 필요 없이 방까지 식사가 배달된다고 하자 상원건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험준한 미창산을 넘어오느라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상원건은 낙일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무얼 먹겠나?”
낙일방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주섬주섬 몇 가지 요리를 입에 올렸다.
“녹두활어와 청증가어(淸蒸加魚), 그리고 홍소육(紅燒肉) 한 접시하고 술 한병이면 돼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응계성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똑 같은 걸로 하지.”
낙일방은 응계성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사형 입맛도 변했군요. 원래 홍소육은 기름기가 많아서 싫어했잖아요?”
응계성은 눈을 부라렸다.
“오늘은 날이 추워서 기름진 게 먹고 싶어서 그런다. 오 기분 나쁘냐?”
낙일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왕이면 화과(火鍋)도 시키시지 그래요.”
“그래, 맞아. 그것도 하나 추가.”
응계성이 넙죽 고개를 끄덕이자 낙일방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튼 먹는 거 하나는 무지하게 밝힌다니까. 이러다간 가지고 있는 돈이 식비로 몽땅 다 달아나게 생겼군.’
원래 이번 여정에서 경비를 담당했던 사람은 계산이 빠르고 두뇌가 명석한 정해였으나, 정해가 석가장으로 간 후 제일 막내인 낙일방이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 종남산을 떠나올 때 여비를 제법 두둑하게 가지고 왔는데도 그동안의 지출이 만만치 않아서 자칫하면 종남산에 도착하기 전에 돈이 모두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낙일방은 재빨리 머리 속으로 돈 계산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원건을 돌아보았다.
“상 대협도 주문을 하고 계세요. 저는 장문사형을 모시고 올게요.”
“그러게.”
낙일방은 빠른 걸음으로 객잔의 입구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진산월은 아직 몸이 성치 않아서 낙일방과 상원건 등이 방을 정할 때까지 마차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낙일방은 마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장문사형, 숙소를 정했습니다. 내려오시죠.”
마차 안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낙일방이 다시 문을 두드리려 할 때 비로소 문이 열리면 진산월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산월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하고 핼쑥했으며, 눈빛도 예전의 초롱하고 맑은 빛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때마침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진산월은 오한(惡寒)이 치미는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차 옆을 호위하듯 지키고 서 있던 동중산이 황급히 진산월을 부축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진산월은 동중산의 부축을 받으며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낙일방은 그 광경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장문사형의 병세가 전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정말 큰일이군.”
한동안 회복된 듯 보였던 진산월의 상세(傷勢)는 임영옥을 만나고 온 후로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었다. 더구나 미창산을 넘으면서 기온이 급강하하자 감기 기운까지 있어서 혼자의 힘으로는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사천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줄곧 마차 안에만 있었으며,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낙일방은 동중산과 함께 진산월의 몸을 부축하려 했으나, 진산월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나는 괜찮다. 이 정도는 혼자 갈 수 있다.”
하나 말과는 달리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그는 다시 몸을 휘청거렸다. 낙일방은 황급히 진산월의 옆구리를 끌어안았다.
“무리하지 마세요.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했으니, 씻고난 다음 한잠 푹 주무시면 한결 개운해지실 거예요.”
낙일방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진산월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항상 어리게만 생각했던 낙일방에게도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의 거처는 뜰에 있는 세 개의 방들 중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 왼쪽 방에는 낙일방과 응계성이, 오른쪽 방은 상원건과 동중산이 묵게 되었다. 방의 침상에 진산월을 앉힌 낙일방은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간단한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냥 쉬고 싶구나……”
진산월의 얼굴에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으므로 낙일방은 그를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동중산과 함께 방을 빠져 나왔다. 텅 빈 방에 혼자 남게 되자 그제서야 진산월은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었다.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유난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후, 잠이 들었는지 나직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고,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자취를 감춰 적막감마저 느끼게 했다.
똑똑……
나직하게 문을 두르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진산월은 퍼뜩 선잠에서 깨어나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목욕물을 준비했다고 알리러 온 것이리라. 과연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진산월은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들어온 사람은 눈부실 정도로 새햐얀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그는 입고 있는 백의만큼이나 맑고 깨끗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저었다.
“굳이 일어날 필요는 없소.”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차피 잠시 후면 다시 눕게 될 테니까.”
진산월을 향해 한없이 친근하고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사람은 뜻밖에도 운자추였다. 신목령의 고수로, 쾌의당과 흥정을 위해 중원을 배반해서 무림인들의 공분(公憤)을 샀던 그가 느닷없이 진산월의 눈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진산월은 그의 출현이 너무도 의외였는지 한동안 그를 쳐다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운자추는 아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배짱이 좋기로 소문난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니 정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다니까.”
운자추야 이런 상황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진산월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운자추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느릿느릿 진산월이 앉아 있는 침상으로 다가왔다.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꼬박 한나절을 웅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하군. 하지만 이제 이렇게 당신을 만났으니 내 고생도 보답을 받은 셈이오.”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쳐다보고 있더니 돌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나를 그토록 보고 싶어할 줄은 미처 몰랐소.”
“나는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미요. 당신에게 받은 각별한 은혜를 갚기 전까지는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소.”
“내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지 당신에게 은혜 같은 걸 베푼 기억이 전혀 없소 오히려 당신 때문에 고생한 기억만 나는군.”
운자추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눈가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거야 모두 당신이 자초한 일이지. 애초부터 당신이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여 들지만 않았다면 나도 불필요한 수고는 하지 않았을 테고, 당신도 자기 여자를 남에게 빼앗기는 일 같은 건 당하지 않았겠지.”
운자추의 마지막 말은 진산월에게 커다란 철퇴로 가슴을 맞은 듯한 충격을 전해 주었다. 운자추는 핼쑥하게 굳어진 진산월의 얼굴을 주시하며 빙글거렸다.
“당신 사매는 정말 남 주기에는 아까운 여자였소. 태음신맥을 타고난 여자라니… 그런 여자를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남의 손에 넘어가게 한 건 정말 당신답지 않은 멍청한 짓이었지.”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예리한 비수가 되어 진산월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찔렀다.
“내 손에 넘어오지 않은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상대가 모용봉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진산월은 그의 말에 순간적인 의혹을 느끼고 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운자추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른다면 할 수 없지. 어쨌든 이제 슬슬 우리 사이의 일을 종결(終結)지을 시간이 된 것 같군.”
그와 함께 운자추의 전신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내가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운자추는 이미 살심(殺心)이 발동했는지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감돌았다.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훤하게 꿰뚫고 있지. 당가타에서 당신이 사매를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이미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소.”
“그럼 우리 뒤를 계속 따라왔단 말이오?”
“흐흐…… 그럴 필요도 없었지. 어차피 당신들의 목적지는 종남산이니 갈 수 있는 길도 한정되어 있지. 특히 미창산을 넘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니 당신들이 미창산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하루 전에 이곳 어도진에 자리를 잡은 거요.”
“…!”
“어도진에 객잔은 두 개뿐이오. 그러니 그중 한 객잔의 방을 모두 차지해 놓으면 당신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뻔해지지. 다시 말해서 당신들이 이곳에 묵기로 결정한 순간, 당신은 이미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운자추의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아주 효과적인 것이어서 진산월로서는 도저히 그의 눈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아마 진산월 일행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운자추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애초부터 운자추 같은 인물을 적(敵)으로 삼은 것이 잘못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진산월의 시선이 슬쩍 문 쪽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제법 큰 소리로 말했음에도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운자추는 그것을 보고 음산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누가 도와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해 주고 싶군. 다시 말해서 이곳을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오.”
진산월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소?”
“당신 일행들 말이오? 그런 피라미들에게 내가 독수(毒手)를 썼을 것 같소? 안심 하시오. 그냥 그들의 음식에 수면제를 넣어두었을 뿐이오. 아마 그들은 아침까지 늘어지게 잔 다음 그제서야 당신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거요. 그들은 당신이 상처가 도져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결국 당신이 내 손에 죽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게 되는 거요. 당신의 충고를 따라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해치웠소. 어떻소? 내 방식이 마음에 드시오?”
진산월은 여러 차례 표정이 변하더니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당신다운 교묘한 수법이오.”
“하하…… 당신 입에서 그런 칭찬을 듣다니 기쁘군.”
운자추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오른손은 여인의 섬섬옥수처럼 희고 고왔다. 단지 장심(掌心)에 푸른 선(線) 한 가닥이 중지(中指)까지 뻗어 올라간 것이 특이할 뿐이었다. 운자추는 그 손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것은 청옥수(靑玉手)라는 것인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람의 심맥(心脈) 만을 전문적으로 끊어 놓는 효용이 있소. 당신의 최후를 장식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무공이지.”
진산월이 정상적인 몸이었을 때도 본신(본신)의 실력은 운자추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부상이 심한 상태였으니 그가 운자추의 손을 벗어날 확률은 전혀 없어 보였다. 운자추는 이번에야말로 저 밉살스런 종남파의 장문인을 죽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숨통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끊는다고 생각하니 묘한 희열이 전신을 치달려 갔다. 진산월은 반항하는 것도 포기해 버렸는지 이불을 덮고 침상 위에 앉은 채로 꼼짝도 않고 있던. 운자추는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쳐들었던 손을 서서히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진산월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이내 가벼운 실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우두커니 텅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진산월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던 것이다.
‘끝까지 처량한 모습을 보이긴 싫단 말이지. 어디 죽는 순간까지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마침내 운자추는 쳐들었던 오른손으로 진산월의 관자놀이를 빠르게 후려쳐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때까지 미동도 않고 있던 진산월이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운자추에게 집어던졌다.
“흥!”
운자추는 그 정도는 예상을 했다는 듯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왼손을 슬쩍 흔들었다.
파아아…
그를 덮어씌워 오던 이불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하나 그때 운자추의 눈에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방금 전만 해도 침상 위에 앉아 있었던 진산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자추는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하나 허공에도 없었다.
‘아래구나!’
운자추의 안색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미처 아래를 내려다 볼 여유도 없이 뒤로 몸을 날리며 오른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앙!
침상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나갔다. 그 순간, 운자추는 무언가 부드러운 기운이 발 밑에서 위로 솟아올라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은 마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 산들바람 같았다. 하나 다음에 벌어진 일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뿌드득!
내가기공(內家氣功)으로 보호된 운자추의 가슴뼈가 그대로 부서져 나가며 몸 안의 핏줄들이 모조리 터져 버린 것이다.
“크윽!”
운자추는 참으려 했으나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가슴은 안으로 움푹 파였으며, 전신의 핏줄이 터져 칠공(七孔)으로 시커먼 핏물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양쪽 눈자위도 모두 찢어져 운자추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운자추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가슴을 부여안으며 필사적으로 바닥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나 가슴뼈가 함몰되어 조금만 움직여도 부러진 뼈가 폐를 찔러 왔다.
“쿨룩… 쿨룩…”
기침을 할 때마다 시커먼 죽은 피에 잘려진 폐 조각이 함께 흘러 나왔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만 해도 시체처럼 창백하고 핏기 없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불그스름한 혈색이 감도는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자세로 우뚝 선 채 바닥에서 일어서려 애쓰고 있는 운자추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별반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눈빛에는 전에 없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크으… 나… 나를 속였군. 너… 너는 부상 따위는… 입지 않았던 거야…”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부상을 입긴 했지. 하지만 얼마 전에 완쾌되었소.”
“그… 그렇지만… 그 무공은…”
“그건 본 파의 비전(秘傳)인 약류장(弱柳掌)이라는 것이오.”
운자추는 눈과 코, 입으로 피를 게워 내면서도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 그런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서도 왜……”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냐는 거요? 사실은 익히고는 있었지마 그동안은 내공(內功)이 약해서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소.”
운자추의 몸이 격하게 부르르 떨렸다.
“그…… 그럼 그동안 부상이 완쾌되었을 뿐 아니라 내공마저 상승하였단 말이냐? 그…… 그런 거짓말……”
“내가 왜 당신을 속이겠소?”
진산월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앙천지독에 중독된 후 진산월은 거의 생사지경(生死之境)을 넘나들게 되었다. 하나 그 바람에 그의 몸은 앙천지독과 부시독이라는 천하에 보기 드문 두 가지 극독(劇毒)에 세척되어 몸안의 불순물이 모두 빠져 나가면서 체질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지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불문(佛門)에서 말하는 벌모세수(伐毛洗髓)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가타에서 임영옥과 헤어진 후, 진산월은 즉시 자신의 몸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운자추가 자신을 공격해 올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며칠의 여정 동안 줄곧 마차 안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부상이 악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운자추를 대비한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내공이 상승되고 체력이 좋아지긴 했으나, 진산월은 운자추와 자신이 정면으로 맞붙으면 이길 확률은 절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운자추의 대적(對敵) 경험이 자신보다 월등할 뿐 아니라 그가 익힌 신목령의 무공이 자신이 알고 있는 종남의 무공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운자추를 안심시킨 다음 일격필살 할 수 있는 수법을 연구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약류장이었다.
약류장은 사실 종남파의 무공 중에서 그리 주목받고 있지 못했다. 장력(掌力)이 너무 부드럽고 위력이 강하지 못해 비록 은밀하게 사용하여 남을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인명을 살상(殺傷)시키기는 힘든 무공이었다. 더구나 종남파는 원래 검법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장괘장권구식 같은 절학(絶學) 외에는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오래 전에 약류장의 진정한 위력을 사부인 임장홍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약류장의 또 다른 이름은 무영탈혼장(無影奪魂掌)이다. 이것을 절정에 이르도록 익히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의 목숨을 앗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지 이름이지. 두 갑자(甲子) 이상의 내공과 천부(天賦)의 오성(悟性)이 있다면 약류장을 대성(大成)할 수 있다.”
진산월은 사부가 절대 허언(虛言)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기에 사천에서 미창산을 넘는 사흘의 기간 동안 마차 안에 틀어박혀 약류장을 익히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약류장은 종남파의 고수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진산월도 그 구결과 펼치는 방법은 아미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약류장을 완벽하게 익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운자추의 살수가 언제 날아들지 몰라 진산월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약류장을 연마하는 데 심신(心身)을 경주했다.
그야말로 그로서는 목숨을 건 시간과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
비록 짧은 동안의 싸움이었지만 그는 결코 질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운자추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운자추가 청옥수를 휘두르며 덤벼드는 순간, 진산월은 먼저 손에 쥐고 있던 이불을 던져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진산월은 이불을 던짐과 동시에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이런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래보다는 위쪽으로 시선을 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자추가 이불을 먼지로 만드는 순간, 그는 운자추의 발 밑에 도달해 있었으며 운자추가 허공을 올려보는 때에는 이미 약류장을 발출하고 있었다.
운자추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던 것이었다.
이제 운자추는 쓰러졌다.
진산월을 제거하는 데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었건만, 순식간에 승패(勝敗)는 뒤바뀌고 그는 생애 최초의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하는 쓰라리니 패배였다.
가슴뼈가 박살난 고통보다도 패배의 아픔이 더 컸던지 운자추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진산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복수(復讐)……” 라는 두 글자였다.
아마도 그는 신목령의 고수들이 자신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나 그는 이번에 진산월을 은밀히 죽이기 위해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적을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진산월을 제거하는 데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던지라 다른 사람을 데려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진산월이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그가 진산월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복수’ 를 외치며 허무하게 죽어 간 그의 소망이 과연 이루어질지는 앞으로 더 두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