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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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10화


제76장. 쾌도난마(快刀亂麻)

백학사로 가는 길은 제법 넓었다. 도로의 폭은 마차 하나가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으며, 바닥은 돌이 깔려 있어서 걷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단지 어젯밤에 내린 폭설로 돌로 된 바닥이 눈에 뒤덮여 상당히 미끄럽다는 것이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백학사의 정문이 보이자 장승표는 동중산을 돌아보며 웃었다.

“저기서 친구 녀석을 만나면 배 터지게 먹고 마십시다. 며칠 동안 음식다운 음식을 먹지 못했더니 뱃속에서 아귀(餓鬼)들이 요동을 치는구려.”

동중산 또한 그동안 계속 산에서만 지내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지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동중산의 옆에는 왼팔에 붕대를 맨 곽우초가 걷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혜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장승표가 동중산과 곽우초에게 점심을 대접한다면서 그들만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혜공은 아직도 갈 노인의 집에서 누워 있는 중이었다.

동중산은 갈 노인의 방에서 치료가 끝난 혜공을 보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조금 전만 해도 거의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던 혜공이 원래의 혈색을 되찾은 채 되살아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않았으나, 거의 꺼져 가던 숨결도 고르게 유지되고 있었고, 피부 또한 생기가 돌아서 금시라도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만 같았다. 동중산은 다시 한 번 갈 노인의 놀라운 의술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비록 성질이 괴팍하고 입이 험하기는 하지만 갈 노인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뛰어난 의술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혜공이 위급함을 넘긴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동중산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장승표를 따라나설 수 있었다.

백학사의 정문에 다다른 장승표는 무엇을 보았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어? 현판이 바뀌었네?”

동중산이 보니 과연 백학사의 정문 위에는 <승광별원(勝光別院)> 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상하네. 예전에는 <백학선사(白鶴禪寺)> 라고 씌어져 있었는데……”

장승표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백학사의 정문을 두드렸다.

탕! 탕!

문고리를 몇 번 두드리자 문이 삐끔 열리며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요?”

얼굴을 내민 사람은 험상궂은 얼굴을 한 중년인이었다. 장승표는 중이 나올 줄 알았다가 움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중년인은 장승표와 그의 뒤에 서 있는 동중산, 곽우초를 쓸어보더니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장승표는 의혹에 젖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기는 백학사가 아니오?”

중년인은 다시 한 번 장승표를 쳐다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으로 대꾸했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오.”

“언제 바뀌었단 말이오?”

“몇 달 되었소. 그나저나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무슨 일로 여기를 찾아온 거요?”

장승표는 망설이다가 더듬거렸다.

“저…… 이곳에 혹시 감승(甘勝)이란 사람이 있소?”

중년인이 흠칫 놀라더니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는 그분과 어떤 사이요?”

그의 반응에 용기를 얻은 장승표가 조금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감승의 친구요. 그에게 백석촌의 장승표가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오.”

“기다리시오.”

중년인의 모습이 다시 문 뒤로 사라졌다. 장승표는 동중산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 녀석이 중이 되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곳은 이미 절이 아니었구려.”

동중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의 마음속에는 무언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일었다. 아마 그때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되돌아 가버렸을지도 몰랐다.

크르릉!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 장승표, 이 녀석! 마침내 왔구나!”

호탕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나오는 사람은 비단장포를 입고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턱밑으로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어 몹시 위풍당당해 보였다. 장승표는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감승, 아주 신수가 훤해졌구나!”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더니 끌어안고 뺨을 부비는 등 법석을 떨었다. 중년의 사내들이 마치 어린 소년들처럼 손을 맞잡고 좋아하는 모습은 한없이 정겨운 것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감승의 시선이 동중산과 곽우초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분들은?”

장승표는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내 정신 좀 보게. 이분들은 나와 동행일세. 이분은 동중산이라 하고……”

동중산이 황급히 장승표의 말을 제지하려 했을 때는 이미 장승표가 동중산의 이름을 밝힌 후였다. 동중산의 이름을 듣자 감승의 얼굴에 한 줄기 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감승은 이내 다시 원래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험…… 그렇구려. 반갑소, 나는 감승이라 하오.”

하나 동중산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동중산은 이곳에 오기 전에 장승표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미리 언질을 했어야 했다고 내심 자신의 실책을 탓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무림과는 거리가 먼 장승표의 친구가 설마 무림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감승의 태도로 보아 비단 무공의 고수일 뿐 아니라 동중산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승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곽우초마저 감승에게 소개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감승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 상 근사하게 차려놨겠지?”

“이를 말이냐? 안으로 들어가자.”

감승은 동중산과 곽우초를 향해 웃어 보였다.

“두 분도 안으로 드시지요.”

동중산은 내심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원칙적으로는 이대로 몸을 돌려 떠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나 감승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감승이 만약 초가보와 관련이 있어서 자기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자리를 피한다고 해도 꼬리를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반면에 감승이 초가보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자신의 이름을 아는 정도라면 지레 겁을 먹고 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동중산은 마음을 결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면에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오.”

“별말씀을, 승표의 친구는 곧 내 친구요. 전혀 개의치 마시오.”

감승과 장승표가 서로 어깨를 끌어안은 채 앞서고, 동중산과 곽우초가 그 뒤를 따랐다. 정문을 지나자 넓은 화원이 나타났다. 화원은 각종 나무와 꽃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겨울임에도 대부분의 꽃들이 시들지 않고 있었다. 동중산은 한눈에 그 화원이 절진(絶陳)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차리고 내심 마음이 어두워졌다.

‘내가 너무 경솔한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갈까?’

하나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들의 몸은 어느새 화원 앞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화원을 가로질러 형형색색의 돌로 이루어진 좁은 길이 나 있었고, 감승은 장승표의 어깨를 꼭 끌어안은 채 그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동중산이 화원 입구에서 조금 지체하는 듯 하자 감승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이 화원에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해놓았소. 그러니 두 분은 내가 밟는 곳을 그대로 따라오셔야 하오.”

동중산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감승의 뒤를 따라 화원으로 발을 디뎠다. 곽우초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동중산은 감승이 밟는 돌의 색깔을 유심히 관찰했다. 곧, 그는 감승이 검은색 돌을 세 번 밟고는 흰색 돌을 한 번 밟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시 검은색 돌 세 번, 흰색 돌 한 번의 차례로 이어졌다.

동중산은 곽우초에게 눈짓을 하고는 자신이 먼저 화원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뒤를 곽우초가 조심스레 따랐다. 흑삼백일(黑三白一)의 방법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화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화원 밖에는 십여 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단층 건물이었는데, 여타의 건물보다 두 배는 더 지붕이 높았던 것이다. 동중산이 그 건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 감승이 웃으면서 말했다.

“동 대협의 안목이 대단하군요. 아시겠지만 이곳은 원래 백학사라는 절이었는데, 얼마 전에 구입을 한 거요. 저 건물은 대웅전(大雄殿)으로 사용하던 것인데, 일부를 수리하여 지금은 내 거처로 사용하고 있소.”

감승은 노골적으로 동 대협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동중산이 무림인임을 자신이 알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과연 동중산이 알아차려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동중산은 감승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감 형은 상당한 재력가인 모양이구려. 이만한 절을 구입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허허…… 생각만큼 비싸지는 않았소.”

“그런데 감 형은 무엇을 하는 분인지 알 수 있겠소? 이렇게 넓은 장소가 필요하다면 필시 범상치 않은 일을 하는 것 같구려.”

동중산의 말속에는 은근한 가시가 들어 있었다. 감승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너털웃음을 날렸다.

“허허…… 별로 대단한 건 아니오. 작은 문파의 분타(分舵)를 맡고 있을 뿐이오.”

동중산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어떤 문파인지는 알 수 있겠소?”

감승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 눈앞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서 시비들이 쪼르르 달려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감승은 호탕하게 웃으며 장승표의 어깨를 잡고 건물로 들어섰다.

“하하…… 어서 들어오시오.”

동중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어쩔 수 없는지 천천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곽우초가 그의 뒤를 따라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장승표의 친구가 무림인인 줄은 몰랐소. 동 형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지금으로썬 어쩔 수 없소.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가 볼 수밖에.”

그들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호화스러웠다. 장승표는 눈을 크게 뜨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야, 너 대단하구나. 대체 언제 돈을 모아 이런 걸 다 장만한거냐?”

감승은 빙그레 웃었다.

“이십 년 가까이 고생한 결과다. 그러기에 너도 쓸데없는 사냥이나 다니지 말고 나와 함께 나왔으면 됐을 거 아니냐?”

“그런 소리 마라. 내 체질에 이런 곳에서 살았다가는 숨이 막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난 그냥 지금처럼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며 짐승이나 쫓아다니는 게 제일 속 편하다.”

“누가 사냥꾼의 자식 아니랄까 봐 꼭 티를 내는군. 아무튼 잘 왔다. 오늘은 정말 실컷 먹어 보자.”

감승은 손뼉을 쳤다.

짝!

그러자 시비들이 줄지어 다시 들어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담긴 접시들이 들려 있었다. 곧 넓은 대청에는 성대한 술상이 차려졌다. 장승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음식들이 커다란 상에 넘칠 듯이 계속 올라왔다. 장승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다가 음식 행렬이 끝이 없는 것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아이구, 됐다. 내가 아무리 식성이 좋아도 이걸 어떻게 다 먹느냐? 그만 가져오라고 해라.”

“이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 아직 절반도 안 나왔는데……”

“됐다니까, 그보다 술이나 몇 병 가져와라.”

“이미 여기 대령했다.”

감승은 시비에게서 술병을 받아 장승표의 앞에 놓인 술잔에 가득 따랐다. 이어 동중산에게 잔을 내밀었다.

“동 대협도 한잔 받으시오.”

아무리 동중산이 담대하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술을 마시고 싶을 리가 없었다.

“이분과 나는 몸이 성치 않아서 아직은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양해하기 바라오.”

감승은 동중산의 외눈과 팔에 붕대를 맨 곽우초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 장승표가 감승의 손에서 술병을 받아 그에게 따랐다.

“자, 받아라!”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따라 마셨다. 이어 권커니 작(酌)커니 순식간에 몇 순배를 돌았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십년쯤 되었지. 네가 화산 아래로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나와 마주치지 않았느냐?”

“그랬지.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십년이나 되었군.”

“내가 집을 나온 지가 이십 년이 넘었다. 정말 아득한 세월이었지.”

두 사람은 지나온 과거 이야기를 하며 계속 술을 마셨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술내기를 하는 줄 알았을 정도로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대여섯 병의 술이 금세 바닥이 났다. 장승표가 빈 술병을 흔들며 큰소리로 말했다.

“아예 열댓 병 더 가져와라.”

그런데 의외로 감승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마시자.”

장승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이제 슬슬 발동이 걸리려고 하는데……”

감승은 기이한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정말 전혀 변한 게 없구나. 예전에도 무언가 멋쩍은 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호기를 부렸지.”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일부러 나를 술 취하게 하려고 급하게 술을 권한 걸 안다.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마셨으며 진작에 취했겠지. 하지만 무공을 배운 무림인들은 이런 식으로는 취하지 않는다.”

장승표는 안색이 굳어진 채 입을 다물었다. 감승은 다시 탄식을 했다.

“나도 정말 너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싶었다. 조금 전에 너를 보았을 때만 해도 오늘 마음껏 마시고 예전처럼 취해서 너와 함께 팔베개를 하고 아무데서나 자고 싶었다. 공력(功力)을 끌어올려 취기를 없애는 짓 같은 건 안 하고 진짜로 취해 보고 싶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구나. 미안하다, 친구야.”

장승표가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

감승이 무거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장승표는 눈을 부릅뜨고 털북숭이 얼굴을 시뻘겋게 상기시킨 채로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와 같이 진짜로 취하면 되잖아. 저 사람들은 내 동행이야. 나를 믿고 이곳까지 따라온 거야.”

이번에는 감승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비록 산골에서만 살아온 무식한 사냥꾼이지만 그대로 최소한의 눈치는 가지고 있다. 네가 동 형을 본 후로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걸 몰랐던 게 아니야.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조용히 술만 마시고 돌아가고 싶었다. 난 이곳에 친구를 만나러 온 거지 싸움을 붙이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장승표는 감승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감승, 우리는 친구지?”

감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승표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저 사람들을 무사히 돌아가게 내버려둬. 대신 나와 술이나 마시자. 내가 밤새도록 네 상대가 되어 줄게.”

“…!”

“원래 저들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 아니냐?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우리 둘이 모처럼 만난 회포나 풀자.”

감승의 얼굴에 한순간 갈등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장승표가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그런 다음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나는 네 말을 따를 수 없다.”

“미안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냥 우리끼리……”

감승은 장승표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자들이다. 내 혼자만의 일이라면 너를 봐서라도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만, 나는 이미 조직에 묶인 몸이다.”

“조직이라니……”

“내가 속한 초가보는 동중산의 종남파와는 서로 양립(兩立)할 수 없는 사이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 그러니 너도 이번 일에 끼여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우리 사이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게 되지.”

장승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럼 나보고 저들이 네 손에 쓰러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구? 나를 믿고 이곳까지 온 사람들이 죽는 걸 지켜보고만 있으라구?”

감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이 일은 이제 내 손을 떠난 것 같다.”

장승표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 옳은 말이다. 감승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두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동중산과 곽우초의 얼굴은 더 이상 굳어질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졌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백동일과 위지독이었던 것이다. 백동일은 동중산과 시선이 마주치자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우리는 다시 만났구나. 가만있자, 내가 사손(師孫)이라고 불러야 하나?”

동중산은 이미 냉정을 회복하고 차갑게 대꾸했다.

“너 같은 사숙조는 둔 기억이 없는걸.”

“나도 너 같은 사손은 바라지 않았다. 사실 종남파 따위는 내 사문이 될 수 없지.”

위지독이 옆에서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이를 두고 꿩이 제 발로 둥지 속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겁니다. 네놈들도 참으로 운이 없구나. 얕은 꾀를 부리며 간신히 도망갔나 했더니 스스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건 하늘도 네놈들을 돕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동중산으로서도 어이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심코 장승표를 따라온 곳이 하필이면 초가보의 분타였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백동일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몇 달 전부터 종남산 일대의 요충지에 분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 효과를 보았군. 감 타주(甘舵主)는 친구를 데리고 물러가라.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다.”

감승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백동일의 신분은 초가보에서도 특수한 칠대빈객(七大賓客) 중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개 분타주인 감승으로서는 감히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의 옆에는 누구나가 두려워하는 팔수 중의 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동중산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이번에야말로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감승은 장승표의 손을 잡았다.

“승표, 우리는 이만 가자.”

장승표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나는 가지 않는다.”

감승은 그의 고집스런 얼굴을 보고 있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 하여금 네게 손을 쓰도록 하지 마라.”

“넌 이미 내 가슴에 난도질을 했다. 그러니 손을 쓰든 쓰지 않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감승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을 때, 백동일의 음성이 들려 왔다.

“싫다고 하는 사람을 굳이 끌고 갈 건 없다. 어차피 한 명쯤 더 늘어난다고 해도 우리에겐 마찬가지니 말이야.”

담담한 말이었으나, 그 안에 포함된 의미를 깨닫자 감승은 표정이 무거워졌다.

“백 대협……”

“감 타주는 지금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감승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닙니다.”

백동일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며칠 전에 끝내야 했을 일을 이틀이나 지체했군. 동중산, 네 잔꾀는 제법 뛰어났다. 그건 인정해 주지.”

동중산은 오히려 담담한 심정이 되었다.

“속은 자가 바보인 거지.”

동중산의 비웃은 말에도 백동일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하하…… 맞는 말이다. 확실히 내가 방심하기는 했지.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결코 두 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과연 그럴까?”

“지금의 네 실력으로는 내 검을 삼 초도 받아낼 수 없다. 그 옆의 외팔이도 마찬가지고. 설사 네가 내 검을 피해 이 건물을 빠져 나간다 해도 화원을 벗어날 수는 없다. 화원에는 절진(絶陳)이 펼쳐져 있는데다 단혼지음독(斷魂地陰毒)이 뿌려져 있어 뛰어드는 순간 중독되고 만다. 결국 너희들은 오늘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이지.”

단혼지음독이란 말에 동중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하게 굳어졌다. 사실 동중산은 화원에 펼쳐진 절진은 얼마쯤 뚫고 나갈 자신이 있었다. 평소에도 진법(陳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안목이 있는데다, 조금 전에 감승의 뒤를 따라오면서 그 파해법을 대충 생각해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동일의 검을 피해 건물을 벗어나기만 하면 이곳을 빠져 나갈 확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혼지음독이라니……

단혼지음독은 천하에 산재한 수많은 음독(陰毒)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것 중의 하나였다. 땅에 접해 있는 물체에만 펼칠 수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독성(毒性)이나 미치는 범위가 강력하여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극독(劇毒) 중의 극독이었다.

화원에 단혼지음독이 뿌려져 있다는 말을 듣자 동중산은 한순간 심한 절망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백동일과 위지독의 살수를 피해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늘, 화원에 펼쳐져진 단혼지음독을 무슨 수로 뚫고 나간단 말인가?

‘여기까지인가?’

동중산은 암담한 생각에 눈빛이 흐려졌다. 떠돌이였던 자신이 종남파에 입문하여 지내온 몇 년 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비록 편안한 생활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이제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자 동중산은 문득 장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삼년 전에 별다른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려 원망도 많이 했고, 걱정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의 듬직하고 차분한 얼굴이 보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성이 듣고 싶었다.

‘장문인, 아무래도 먼저 가야 할까 봅니다. 장문인과 함께 꼭 군림천하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싶었는데……’

문득 장문인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만 있으면 문파는 얼마든지 재건할 수 있다.

육 개월 전에 초가보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생사지경(生死之境)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소지산은 모든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때의 비장한 분위기와 가슴 가득 치밀어 올랐던 뜨거운 열정을 동중산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초가보의 엄밀한 포위망을 뚫기 위해 각기 다른 방위로 빠져나왔을 때, 동중산은 그 말만을 되새기며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 싸움은 처절한 것이었다. 종남파를 에워싼 초가보의 고수들은 수백 명이나 되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암기를 뿌리며 포위망을 뚫던 동중산의 시야에 문득 위기에 빠진 낙일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낙일방은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명의 초가보 고수에게 에워싸인 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동중산은 자신의 목숨도 도외시한 채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 한쪽 눈을 잃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늑대의 이빨과도 같은 낭아곤(狼牙棍)을 든 사내에게 왼쪽 눈을 정면으로 가격당한 것이다. 나중에야 그 사내가 초가팔웅 중의 한 명인 분랑(奔狼) 척시림(戚施霖) 임을 알았다. 눈알이 빠져 나가는 통증에 몸부림치던 동중산이 하나 남은 눈으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두 명의 고수의 합공을 당해내지 못하고 입으로 폭포수 같은 피를 뿌리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낙일방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그는 광폭한 분노에 휩싸여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어디서 솟아 나왔는지 모를 괴이한 힘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이 초가보의 그 엄밀한 포위망을 뚫고 어느 이름 모를 야산(野山)에 쓰러져 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었다. 초가보에서는 살아 남은 종남파의 제자들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전개했다.

그들의 세력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거대했으며,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몇 번이나 그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던 동중산은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가 혜공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후로 그는 절대로 거처를 한군데에 두지 않았다. 수시로 거처를 옮기고 다녔으며, 어디에 있더라도 반드시 두 개 이상의 퇴로(退路)를 미리 확보해 두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노고도 헛되이 지금은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동중산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이곳으로 들어온 자신의 부주의를 탓했으나, 그건 너무 때늦은 후회였다. 애초에 우연히 만난 일개 사냥꾼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제 그를 만난 것은 그것으로 그쳤어야 했다. 왜 오늘 아침에 그와 헤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를 따라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동중산은 물론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짧은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그는 장승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철통같던 경계심이 자신도 모르게 흐트러졌고, 그 때문에 지금 이런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동중산은 장승표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탓하려면 자신을 탓해야 한다. 자신 외에 다른 누구도 탓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백동일이 어깨를 쭉 편 채 동중산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초가보의 초빙을 받아들일 때부터 마음속으로 작심한 것이 있다. 종남파의 제자는 꼭 내 손으로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것이지. 너는 이제 그 첫번째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냉정하게 가라앉은 두 눈에 점차로 기이한 광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끔찍한 살기였다. 한때 종남의 제자였던 그가 왜 이토록 종남파에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을까? 동중산은 수중의 장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반항도 못해 보고 죽을 수는 없었다. 최후의 그 순간까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 남아야 한다. 살아서 다시 그들을 만나야 한다.’

동중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백동일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검을 뽑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장검이 가공할 속도로 동중산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일검(一劍) 속에 담긴 악독함과 잔인함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가히 절명검이란 이름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동중산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수중의 장검을 휘둘러 정면으로 맞서 갔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무모한 동작 같았다. 동중산의 실력으로 장성 이북에서 가장 무서운 고수 중 하나인 절명검과 정면으로 격돌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빙글!

금시라도 동중산의 몸을 찢어발길 듯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던 백동일의 검이 막 동중산의 검과 부딪치려는 순간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비폭의 동굴에서 당한 일로 백동일은 동중산이 무슨 수를 쓸지 몰라 첫번째 공격을 허초(虛招)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중산이 노리던 순간이었다.

“차압!”

동중산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더욱 빠르게 백동일의 앞가슴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배운 종남파의 무공 중 가장 위력적인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도도(天河濤濤)를 펼쳐냈다. 백동일의 앞가슴이 그의 공세 하에 훤하게 노출되었다. 막 자신의 검이 백동일의 앞가슴을 가르려는 순간, 문득 동중산은 백동일의 얼굴을 보았다. 백동일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당했구나.’

그 미소를 보자 동중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물러난 줄 알았던 백동일의 검이 돌연 동중산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방금 전만 해도 동중산의 검세 하에 완전히 노출되었던 백동일의 몸은 어느새 저만치 멀리로 떨어져 있었다. 실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몸놀림과 검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중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비트는 것뿐이었다.

쏴아악!

마치 거대한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동중산의 앞가슴에 핏물이 뿜어 나왔다. 비록 상대의 살인적인 일검을 기적적으로 피하기는 했으나, 그 검기의 일부에 앞가슴이 두 자 가까이 베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 지혈(止血)할 시간도 없이 그의 앞가슴을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하던 장검이 꿈틀거리며 다시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헙!”

동중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와 같은 신묘한 검초는 보기는커녕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동중산은 비틀던 몸을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을 사용하여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파앗!

이번에는 그의 등짝이 쩌억 갈라지며 핏물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몸을 뒤집어 누웠기 때문에 앞이 아닌 뒤가 베어진 것이다. 동중산은 누웠던 몸을 떼구르르 굴러 이 장이나 지난 다음에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이내 당혹감이 어렸다. 백동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 왔다.

“머리 위요!”

동중산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장검을 머리 위로 찔렀다.

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동중산은 오른손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윽!’

그는 숙이던 몸의 반동을 이용하여 바닥을 두 바퀴 구르면서 슬쩍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장검은 어느새 반 토막이 나 있었고,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나 그가 채 바닥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의 귓전으로 악마의 소리 같은 백동일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용케도 삼 초를 피했군. 그렇다면 이제부터 공력을 조금 더 올려 볼까?”

동중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까지 백동일이 펼쳐 보인 세 수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동중산으로서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무시무시한 살수(殺手)들이었다.

자신이 그것을 피한 것은 절반의 행운과 누군가가 소리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백동일은 더욱 무서운 공격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단 이 초도 더 견딜 수 없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동중산은 백동일의 음성이 들려 온 곳을 향해 왼쪽 소매를 흔들었다.

파파파!

쇠털같이 작은 암기들이 그쪽을 향해 쏘아져 갔다.

“흐흐…… 아직도 얕은 수작을 부리는군. 하지만 이제는 끝이다.”

암기들이 격중당한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동중산은 확인해 보지 않아도 자신이 펼쳐낸 쇄혼우모침(碎魂牛毛針)이 모두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정면으로 한 줄기 가공할 압력이 밀어닥쳤다.

고개를 쳐든 동중산의 눈에 암담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하나의 검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검은 그의 미간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고 있었는데, 검끝이 미묘하게 떨려서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게다가 검 주위에 기이한 압력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대체 이자의 검법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무섭단 말인가?’

동중산의 머리 속으로 종남파의 제자였던 백동일이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검법을 익힐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백동일이 찌른 일검은 지금의 동중산으로서는 결코 감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동중산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 검을 향해 천하도도의 일식을 펼쳤다.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막 검과 검이 부딪치기 직전, 문득 동중산은 백동일이 찔러낸 일검이 자신의 천하도도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그 위력과 변화는 천양지차(天壤之差)로 틀렸지만 그 형태만큼은 흡사해 보였던 것이다.

‘그럴 리가……’

동중산이 그 생각을 부정(否定)하려는 듯 도리질을 할 때,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받아라!”

동중산이 고개를 돌릴 여유가 있었다면 장승표가 백동일을 향해 다섯 개의 단도를 거푸 던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 외침을 듣자마자 그의 검은 백동일의 검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쾅!

검과 검이 마주친 순간 동중산의 반 토막 남은 검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동중산의 몸은 뒤로 훨훨 날아갔다.

비명도 없었다.

그의 몸은 축 늘어진 오공(五孔)으로 시커먼 죽은 피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너무도 거대한 압력으로 전신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버린 것이다.

하나 동중산은 용케도 죽지 않았다.

오 장 밖으로 나가떨어진 그는 무슨 힘이 남았는지 꿈틀거리며 고개를 쳐든 것이다.

얼굴이 흘러내리는 피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였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 장승표를 향해 날아가는 백동일의 모습이 들어왔다.

동중산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에 백동일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단도를 물리치기 위해 검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동중산의 검이 박살나는 그 순간에 백동일은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두어 단도를 후려쳤던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동중산의 몸은 백동일의 검에 그대로 관통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덕분에 동중산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으나, 대신 장승표가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고 말았다.

분노한 백동일이 그를 향해 무자비한 살수(殺手)를 날렸던 것이다.

“백 대협! 사정을 봐주십시오!”

장승표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을 때, 이제까지 한쪽에 서 있던 감승이 큰소리로 외치며 백동일의 검 앞으로 뛰어들었다.

창!

백동일이 장승표의 목덜미를 향해 찔러낸 살인적인 일검은 감승이 내민 칼등에 맞고 튕겨져 올랐다.

“감승, 네놈이 감히!”

백동일이 발연 대로하여 감승에게로 공격 방향을 돌렸다.

감승은 폭이 넓은 감산도(?山刀)를 뽑아 든 채 장승표를 돌아보았다.

“승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빨리 저자를 구해 도망쳐라!”

장승표는 감승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내던졌음을 알고 얼굴을 실룩거렸다.

“감승……”

“어서, 시간이 없어. 난 저자의 검을 삼 초(三招) 이상 받아낼 자신이 없다.”

백동일이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삼 초라구? 착각이 대단하구나, 감승! 넌 내 일초지적(一招之敵)도 안 된다!”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동일의 검은 가공할 검광을 뿌리며 감승을 향해 날아들었다.

“승표, 어서 가라! 날 헛되이 죽게 할 생각이냐?”

감승은 장승표를 향해 마지막 외침을 내지르며 수중의 감산도를 마구 휘둘러 백동일의 검광에 맞서 갔다. 장승표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 털북숭이 얼굴을 흠뻑 적시었다.

“으아아……”

장승표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중산을 들쳐업더니 슬픔이 가득 담긴 고함을 내지르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위지독이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때 곽우초가 결사적으로 그의 앞길을 막았다.

“이런 제길!”

위지독은 이를 부드득 갈며 곽우초를 세차게 몰아붙였다. 두 팔이 멀쩡했을 때도 위지독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곽우초가 어찌 그의 상대가 되겠는가? 불과 삼 초도 되지 않아 곽우초는 위지독의 장력에 머리통이 부서져 즉사하고 말았다.

하나 그때는 이미 장승표의 모습은 건물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위지독은 발을 세차게 구르더니 그 뒤를 따라가려 했다.

그때 백동일의 음성이 들렸다.

“서두를 필요 없네.”

위지독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백동일이 검을 든 채 우뚝 서 있었고, 그의 발 아래에는 목이 잘린 감승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백동일은 검을 든 손을 가볍게 흔들어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내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놈들은 화원의 절진을 통과할 수 없네. 설사 통과한다 하더라도 극독에 중독되어 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걸세.”

그제서야 위지독은 백동일의 말뜻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백동일은 목이 잘려 나간 감승의 시체를 발로 툭 찼다.

“그나저나 이놈은 무슨 생각으로 감히 내게 덤벼들었는지 모르겠군. 친구 대신 죽겠다는 건가? 우정(友情) 따위에 목숨을 걸다니 한심한 놈이로군.”

백동일은 혀를 차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위지독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화원 앞까지 걸어온 백동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위지독이 급히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놈들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군.”

위지독이 퍼뜩 놀라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동일의 말대로였다. 의당 화원에 쓰러져 있어야 할 장승표와 동중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절진의 파해법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요? 감승이 털보놈에게 미리 귀띔해 주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쳐도 이 화진(花陳)에는 단혼지음독이 뿌려져 있는데 그들이 어찌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백독불침지심(百毒不侵之身)일 리는 없을 테고, 몸 속에 피독주(避毒珠)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위지독도 영문을 알 수 없는지라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백동일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말없이 화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것이었다.

“하하하……”

위지독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백 대협……”

백동일은 한참 동안 허리를 잡고 웃다가 차츰 웃음을 멈추었다. 어찌나 웃었는지 그의 눈에는 눈물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재밌지 않은가? 그 동중산이란 놈은 한 번은 자기 힘으로, 한 번은 남의 힘으로 목숨을 부지했네. 그러니 다음에는 그놈이 과연 누구의 힘을 빌어 살아날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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