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3화
제69장. 소응소사(小鷹小事)
유소응의 나이는 올해 열한 살.
아버지는 제법 유복한 상인(商人)의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대대로 대초원에서 생활하는 몽고족이었다.
서안(西安)에 있는 유화상단(劉華商團)은 섬서성 일대에서는 상당히 규모가 큰 상인 집안이었다.
유화상단의 셋째 공자인 유천상(劉天翔)은 날 때부터 두뇌가 영특했으나, 이재(理財)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
유천상의 아버지이자 유화상단을 이끌고 있는 유방현(劉方玹)은 그것이 못마땅해서 유천상으로 하여금 대막(大漠)을 왕복하는 상행(商行)에 동행하도록 했다.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첫 장삿길에서 유천상은 심한 열병을 앓고 말았다.
마침 근처의 몽고족들이 머무는 야영장에서 병을 치료하던 유천상은 그곳에서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예쁘고 날씬한 몽고족 처녀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을 느꼈고, 유천상은 부친인 유방현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녀와 살림을 차렸다.
유방현이 나중에 서안으로 돌아온 상단의 무리들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는 이미 유천상은 몽고에서 가정을 이룬 후였다.
불같이 화가 난 유방현은 즉시 유천상을 가문에서 파문(破門)시켜 버렸다.
그래도 유천상은 행복을 느꼈다.
그의 아내는 몽고족에서도 소수의 부족인 부르칸족의 후예였으며, 이름은 쿨란 알타니였다.
‘야생마’ 라는 뜻이었다.
쿨란 알타니는 이름 그대로 싱싱하고 건강한 처녀였으며, 머지않아 두 사람의 사랑의 증표인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하나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초원에 유난히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우연히 그들의 파오 근처를 지나던 몇 명의 방랑자들이 쿨란 알타니를 보게 되었다.
몽고족 여인답지 않게 아름다운 쿨란 알타니를 보고 혹한 방랑자들은 그날 밤에 유천상의 파오로 쳐들어왔으며, 그로 인해 참극(慘劇)이 벌어졌다.
방랑자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처참하게 살해된 유천상과 쿨란 알타니의 시신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다음 날, 그들의 파오를 찾아온 부르칸 족 사람들은 피로 뒤덮여진 파오 밖의 말구유 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유소응을 발견했다.
최후의 순간에 유천상은 유소응을 기절시켜 말구유 속에 숨겼던 것이다.
그때 유소응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유소응이 깨어나서 처음으로 본 것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키가 크고 나이를 먹은 몽고인의 모습이었다.
그 몽고인은 머리가 거의 백발이었고, 피부는 깊게 파인 주름살투성이였다.
머리에는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털모자를 썼고, 허리에는 황토색 요대를 둘렀으며, 발에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고 있었다.
노인답지 않게 키는 다른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컸는데,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유소응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소응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크던지 산에서 보았던 커다란 바위 기둥 같았다.
노인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유소응이 그 손을 잡자 노인은 유소응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휭하니 몸을 돌렸다.
“나를 따라와라.”
그것이 노인의 첫마디였다.
유소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낯익은 부르칸족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주변을 살폈으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소응은 부르칸족이 서 있는 뒤쪽 구릉 위에 두 개의 새로운 무덤이 생겨난 것을 보았다.
그가 그 무덤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리니 저만치 멀리서 노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소응은 한차례 더 무덤을 바라보다가 노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노인은 벌써 저만큼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유소응은 그 뒤를 따라가시 시작했다.
노인이 한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유소응은 대여섯 걸음이나 걸어야 했다.
말이 있는 곳까지 가자 노인은 유소응을 그중 검은 말 위에 태우고 자신은 고동색 말에 올라탔다.
“그건 니둔 콰라이고, 이건 후네겐이다.”
노인의 갑작스런 말에 유소응은 어리둥절했다.
노인은 더 입을 열지 않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노인이 말한 것이 자시들이 타고 있는 말의 이름임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니둔 콰라는 ‘검은 눈’ 이라는 뜻이니 유소응이 타고 있는 잡털 하나 없는 검은 말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후네겐이라니……
후네겐은 ‘여우’ 라는 뜻이었다.
말 이름에 여우라는 이름이 붙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소응은 노인이 타고 있는 말을 몇 번이나 힐끔거렸나, 어디를 보아도 여우 같은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말보다 근육도 잘 발달되었고, 골격도 좋아서 키가 큰 노인과 잘 어울려 보였다.
노인이 향하고 있는 곳은 푸른 대초원에서도 한참이나 더 깊은 곳이었다.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노인은 커다란 파오 앞에 말을 멈추었다.
노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유소응은 그 파오가 이제부터 자신이 거주할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야 유소응은 그 노인이 자신의 어머니인 쿨란 알타니의 아버지, 즉 자신에게는 외할아버지인 부쿠 메르겐임을 알게 되었다.
부쿠는 ‘장사(壯士)’ 라는 뜻이고, 메르겐은 ‘명사수’ 라는 뜻이었다.
이름에 이 두 개를 붙인 것만 보아도 그가 젊었을 적에 대초원의 누구 못지않은 용사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부쿠 메르겐은 오래 전에 아내를 잃었고, 용맹스럽던 두 아들도 전쟁으로 잃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사랑스러운 딸밖에 없었는데, 그 딸은 낯선 이방인과 결혼을 하여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딸 부부가 죽어서 그 아들이 고아가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딸의 파오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메르겐은 유소응을 ‘작은 매’ 라 불렀다.
유소응은 그것이 자신의 한자 이름과 똑 같은 것을 알고 몹시 신기해했다.
좀더 시일이 흐르자 전쟁터에서 죽은 메르겐의 큰아들이 ‘큰 매’ 라 불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메르겐이 왜 자신을 ‘작은 매’ 라 부를 때마다 그렇게 표정이 침침해졌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메르겐은 유소응의 부모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유소응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일전에 보았던 구릉 위에 있는 두 개의 무덤이 언제까지고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부터 삼년 동안 유소응은 부쿠 메르겐과 함께 생활했다. 메르겐과의 생활은 편안하고 안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소응은 만족해했다. 무엇보다 메르겐은 완고하고 거친 외모와는 달리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소응에게 대초원에서 생활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으며, 한 명의 남자로서 당당해질 수 있는 자긍심을 길러주었다. 어느 날인가 메르겐은 유소응 혼자 생활하게 내버려두고 어디론가로 훌쩍 떠났다가 돌아왔다. 여섯 살짜리 꼬마가 돌봐주는 어른 하나 없이 대초원에서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유소응은 메르겐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가 없는 동안에도 혼자서 잘 견디어 냈다. 며칠 만에 돌아온 메르겐을 보고도 유소응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메르겐도 자신이 어디를 갔다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유소응을 한참동안이나 내려보더니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들을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날 이후로도 메르겐은 두세 달에 한 번씩은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유소응은 그때 메르겐이 말한 ‘그들’ 이 자신의 부모를 해친 방랑자들이며, 메르겐이 집을 비운 이유가 그들의 행방을 쫓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자 메르겐은 방랑자들을 찾는 것을 중지했다. 그 대신 유소응을 키우는 일에만 주력했다. 자신의 생(生)이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메르겐은 너무 나이를 먹어 누군가를 쫓고 복수(復讐)를 하기에는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메르겐은 그로부터 불과 일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자신이 죽을 때가 온 것을 알자 메르겐은 유소응을 머리맡으로 불렀다.
“작은 매야, 네게 좀더 많은 것을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나는 이제 대초원의 그늘 속에 쉬어야겠다. 너는 네 할아버지를 찾아가라.”
유소응은 울지 않으려는 듯 작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내게 할아버지는 메르겐 밖에 없어요.”
메르겐은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유소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초원을 가로질러 밑으로 내려가면 서안이라는 커다란 도시가 나온다. 그곳에 가면 너와 같은 성(姓)을 쓰는 일족(一族)이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네 혈족이니 너를 받아줄 것이다.”
“나는 가지 않을래요. 이곳에서 메르겐과 함께 살래요.”
“이 세상에 영원(永遠)한 것은 없다. 우리의 만남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이별도 영원하지는 않다. 언제고 우리는 대초원의 하늘 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항상 엄격하고 말수가 적었던 메르겐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유달리 많은 말을 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네가 부르칸족의 후예이며, 메르겐의 손자임을 잊지 마라.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가슴속에 소중한 사람을 담고 있다면 견뎌 낼 수 있다……”
메르겐의 말소리는 점차로 적어졌고, 때로는 끊어지기도 했다. 유소응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느라 작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적어도 메르겐의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부르칸족 남자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였다. 메르겐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침상 밑에서 하나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메르겐이 젊은 시절에 입수한 것으로, 수많은 세월 속에서 그를 지켜주었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이름도 없는 그 단도는 고색 창연한 단도집 속에 들어 있었으며, 길이는 한 뼘이 조금 넘었다. 평소에 메르겐은 이 단도를 절대로 단도집에서 꺼낸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 침상에 누운 채로 단도를 뽑아 드는 메르겐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달리 기이한 생기(生氣)가 번뜩이고 있었다. 유소응은 그것이 회광반조(廻光反照)의 현상인 줄도 모르고 메르겐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좋아했다. 메르겐은 단도를 손에 쥔 채 그 푸르스름한 인광(刃光)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신의 왼손을 갖다 대었다. 손가락이 칼날에 닿자 저절로 베어져 한 방울의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메르겐은 단도를 다시 단도집에 꽂은 다음 유소응에게 내밀었다.
“이제부터 이것은 네 것이다. 네 목숨을 지켜야 할 때 쓰도록 해라.”
유소응은 할아버지가 그 단도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나 주름살투성이의 메르겐의 눈빛이 점차로 흐려지는 것을 보고는 손을 내밀어 단도를 받아들었다. 그제서야 메르겐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유소응은 그날 밤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메르겐이 다시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메르겐의 시신이 싸늘하게 굳은 것을 알면서도 그는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삼 일째 되는 날, 유소응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젖과 양고기를 찾아서 먹었다. 막 양고기 한 점이 목구멍을 넘어갔을 때 비로소 메르겐이 죽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자 음식이 넘어갔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는 것이 치밀었다.
‘나는 울지 않아. 부르칸족의 남자는 절대로 울지 않아!’
유소응은 속으로 절규했으나, 그의 양쪽 뺨은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유소응은 차갑게 식은 메르겐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고 짐을 꾸려 그곳을 떠났다. 메르겐의 유언(遺言)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가 대초원을 넘어 서안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후였다. 아홉 살 꼬마가 거친 대초원을 지나고 메마른 사막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그는 필사의 정신으로 극복해 냈다. 메르겐의 가르침을 쉬지 않고 되새긴 결과였다. 서안에 도착했을 때 그의 행색은 영락없는 거렁뱅이였다. 입고 있는 옷은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하게 해어졌고, 제대로 씻지 못한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에는 부스럼이 생겨서 여기저기에 머리칼이 한 움큼씩 빠져 있었고, 피부는 쩍쩍 갈라져서 거북의 등을 연상케 했다. 그런 몰골로 그는 유화상단을 찾아갔다.
“대초원에서 왔어요.”
그의 말에 유화상단 사람들은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는 표정이었으나, 그가 아버지의 유품인 유씨 문중의 옥패(玉佩)를 보여주자 순순히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들은 제일 처음 그를 목욕부터 시켰다. 일년 만에 목욕다운 목욕을 하고 나오자 이번에는 시녀들이 들어와 머리를 빗겨 주고 비단옷을 입혔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친할아버지인 유방현을 만날 수 있었다. 유방현은 비쩍 마르고 왜소한 체구의 볼품없는 늙은이였다. 눈밑에 검버섯이 피어 있고 얼굴에는 신경질적인 표정이 가시지 않아 유소응은 첫인상부터 그에게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유방현은 유난히 작고 검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유소응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딱 한마디만 물었다.
“네 아비는?”
유소응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유방현은 한차례 더 기분 나쁜 눈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소응은 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몰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참 후에 몇 사람이 나타나 그를 어디론가로 끌고 가더니 비단옷을 벗겨내고 거친 마의(麻衣)를 입혔다. 그가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그는 유화상단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처박힌 채로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만 나왔을 뿐이며, 그나마도 차디차게 식거나 불어터진 것들뿐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온갖 잡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열 살짜리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하나 무엇보다도 그를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러한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유방현은 그 뒤로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전 노대(錢老大)라는 중늙은이 하나가 그에게 일을 맡길 뿐이었다. 전 노대는 오직 두 마디밖에는 하지 않았다.
“오늘 내로 저걸 해치워라.”
“아니면 저녁밥은 없다.”
그가 맡긴 일들 중 절반 이상은 도저히 하루 안에 해치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유소응은 두 끼 식사 중 한 끼만 먹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가혹한 일에 시달려서 그는 점점 비쩍 마르고 앙상해졌다. 그렇게 몇 달의 세월이 흘렀다.
그의 하루 일과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간혹 유소응은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지금 유화상단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거처에서 오십 장만 벗어나도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장정들이 그를 붙잡았다. 두 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유소응은 더 이상 엉뚱한 짓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자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그를 감시하는 눈길이 조금씩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차가운 날씨에 어린 소년을 몰래 감시한다는 것은 여간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몇 달 동안 그가 얌전하게 행동하여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자 점차 경계심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일부러 슬쩍 오십 장 너머까지 가 보았으나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유소응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끈질기게 때를 기다렸다. 기회는 의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항상 조용하고 정적이 흐르던 유화상단에 어느 날 평소와는 다른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유방현의 큰손자이며 유화상단의 실질적인 후계자인 유종명(劉宗明)이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유소응은 멀리 담 너머에서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와 흥겨운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난 육 개월 동안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소리들이었다. 유소응은 자신의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기회가 다가왔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날 밤, 유소응은 자신의 골방에 쭈그리고 앉은 채 주위가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아련히 들려 오던 풍악과 노랫소리가 점차 사라지고 고요한 정적이 감돌기 시작할 즈음,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 그의 손끝은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가느다란 초승달만이 외롭게 걸려 있었고, 흐릿한 달빛 아래 드러난 주위는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유소응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일부러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함! 저녁 때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그는 바지춤을 움켜쥐며 종종걸음으로 측간(?間)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측간 앞에서 그는 귀를 기울였으나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유소응은 계속 하품을 하면서 측간을 지나쳐 월동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떨리고 있으면서도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영락없이 잠이 미처 덜 깨어서 헤매는 소년 같았다. 월동문 가까이가지 왔는데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소응은 월동문을 지나 작은 뜰을 거쳐 후원(後園)까지 걸어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하품을 하지도 않았고, 졸린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나온 이상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희미한 월광(月光) 아래 드러난 후원은 한낮의 화사함은 찾아볼 수 없이 을씨년스럽고 괴기스럽기만 했다. 유소응은 빠른 걸음으로 후원을 가로질러 반대쪽에 있는 작은 뒷문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뒤를 돌아보기만 하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목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서 그는 오직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뒷문은 일꾼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어서 평상시에도 잠겨 있지 않았다. 뒷문을 소리 없이 열자 널찍한 대로(大路)가 눈에 들어왔다. 유소응은 그 대로를 보자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몇 달 전에 부푼 꿈을 안고 이 길을 따라 유화상단에 찾아왔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커다란 마차 세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대로는 인기척이 완전히 끊긴 채 괴괴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유소응은 몇 차례나 주위를 두리번거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대로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작고 왜소한 몸이 긴 그림자를 그리며 어둠 속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까지는 촌음(寸陰)의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유화상단을 빠져 나온 유소응은 쉬지 않고 달렸다. 날이 밝기 전에 서안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다시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서안을 정신없이 빠져 나오는 그의 눈에 문득 멀리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이 들어왔다. 종남산이었다. 그것을 보자 그는 마음을 굳혔다.
‘저곳으로 가자. 저 산을 돌아가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고향인 대초원으로 가고 싶은 일념(一念)만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가 종남산에서도 가장 험준한 자각봉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정오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運命)을 바꾸어 줄 사람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자각봉을 내려오는 길은 무척 위태로웠다. 밤새 내린 눈이 꽁꽁 얼어붙어 주위가 온통 빙판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경사가 워낙 가팔라서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는 크나큰 부상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도 괴인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유소응은 그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따라가야 했으며,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그때마다 괴인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몸을 잡아 주었다. 유소응은 이렇게 미끄러운 길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걸어가는 괴인이 무척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자신도 따라서 해보려고 해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자각봉을 거의 내려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괴인도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유소응도 떠드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어서 그들은 묵묵히 산을 내려오는 것에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어색하거나 딱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소응은 대초원을 벗어난 이후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에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비쩍 마르고 얼굴에 흉터가 있어 무섭게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괴인의 냉정해 보이는 눈빛에는 무언지 모를 따스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괴인은 그 위태로울 정도로 앙상한 몸에도 불구하고 태도가 진중했고, 침착하면서도 안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 보는 이에게 믿음직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산 아래에 내려왔을 즈음에는 유소응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집안어른과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각봉을 내려오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나왔다. 하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각봉 옆의 다른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 두 갈래 길의 앞에서 괴인은 잠시 멈추어 섰다. 유소응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괴인도 자신처럼 뚜렷하게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때 괴인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가 선택한 것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유소응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때 유소응은 너무 추워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산 아래를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했다. 양쪽으로 울창한 수림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춥긴 했어도 충분히 견딜 만 했다. 그때까지도 괴인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유소응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는지 물어 봐도 돼요?”
괴인은 그를 힐끗 내려보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몸을 녹일 만한 곳을 찾고 있다.”
무뚝뚝한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듣자 유소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렇게 추운 날에 따끈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 산을 내려서 조금 더 걸어가니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의 중심을 가로질러 일각(一刻)쯤 가자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커다란 주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왕루>라는 글씨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그 주루는 언뜻 보기에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대왕루로 막 들어서려 할 때 누군가가 갑자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점원 복장을 한 사람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막아 선 채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유소응은 절로 찔끔하여 괴인의 손을 더욱 꼬옥 잡았다. 괴인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선 채로 점원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점원은 얇은 홑옷만을 걸친 괴인의 남루한 행색을 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지금은 자리가 없으니 돌아가시오.”
하나 점원의 말과는 달리 점원의 뒤쪽으로 보이는 주루 안은 손님들이 절반도 채 있지 않았고, 사방에 빈자리가 있었다. 괴인은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빈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곳은 뭐요?’
점원은 괴인이 가리킨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예약되어 있는 곳이오. 여기는 당신들 있을 자리가 없으니 다른 곳에나 가 보시오.”
괴인이 그래도 여전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자, 점원의 얼굴에 험악한 빛이 떠올랐다.
“이봐,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음성 또한 거칠어져서 주루의 점원이 아니라 거리의 불량배를 보는 것 같았다.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여차하면 완력이라도 써서 내쫓겠다는 심산인 듯 했다.
“도 장방(都?房)을 불러 주시오.”
괴인의 느닷없는 말에 막 소리를 지르려던 점원은 약간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 장방? 도충(都沖) 말이냐?”
“그렇소.”
“그자는 관뒀다. 그러니 어서 썩 꺼져라.”
그의 말투는 도저히 손님을 대하는 점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걷어올린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뚝과 손은 거칠고 투박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 심장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괴인은 한차례 더 주루를 훑어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점원은 주루를 벗어나는 괴인의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더니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어디서 피죽도 한 그릇 못 얻어먹은 거렁뱅이 같은 놈이 여길 들어오려고 해? 아마 도충이 있었을 때는 불쌍해서 그냥 들어오게 한 모양이다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그때 그의 등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점원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머리를 조아렸다.
“삼총관(三總官)님……”
그의 뒤에는 얼굴이 네모지고 눈빛이 서늘한 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 우뚝 서 있었다.
중년인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섭게 번뜩였다.
“이곳에 있을 때는 호칭을 조심하란 말을 잊었느냐?”
점원은 찔끔하여 다시 머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장방님……”
중년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보다 거동이 수상하거나 신분이 확실치 않은 인물들을 보지 못했느냐?”
“그런 자들은 없었습니다.”
“단 한시라도 이곳에 출입하는 자들에게 시선을 떼지 마라. 알겠느냐?”
“예.”
중년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주루 안의 내실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점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이 짓도 못해먹겠군. 제기랄, 기껏 주루의 점소이라니…… 신세 처량하게 됐네.”
그는 무어라고 투덜거리더니 이내 다시 주루 입구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왕루를 벗어난 괴인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유소응은 그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거의 뛰다시피 해야만 했다.
유소응이 괴인의 손을 꼭 잡고 올려다보니 괴인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 했다.
유소응은 그가 주루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서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고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괴인이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반각(半刻) 가까이 시간이 흐른 후였다.
괴인은 고개를 떨구어 유소응을 내려보더니 그의 얼굴에서 힘들어하는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쉴 만한 곳이 있다.”
유소응은 배도 고프고 몸도 지쳐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으나 억지로 웃어 보였다.
모퉁이를 돌자 과연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주루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주루는 대왕루처럼 크고 화려하지도 않았고, 골목의 한 귀퉁이에 있어서 위치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때가 덕지덕지 끼고 빛이 바랜 깃발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주 (酒)> 라는 글씨가 써 있는 그 깃발은 여기저기가 찢겨져 있었고, 한쪽 모퉁이에는 검은 얼룩마저 묻어 있어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괴인은 그 깃발을 힐끗 쳐다보고는 주저하지 않고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반대쪽 길에서 걸어오던 사람 하나가 주루 안으로 들어가는 괴인과 유소응을 보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거렸다.
그 사람은 황급히 주루 앞까지 와서 주루 안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그이 시선은 줄곧 두 사람 중 유소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한참을 기웃거리더니 다시 부리나케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주루는 밖에서 본 것보다는 제법 넓었으나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부준의 탁자들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천장에는 거미줄까지 쳐져 있어 그야말로 주루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손님이 있을 리 없었다.
텅 빈 주루의 구석에 있는 탁자에는 주인인 듯한 사람이 멍하니 턱을 고이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시름과 걱정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괴인과 유소응이 들어오자 그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다가왔다.
괴인은 창가에 있는 탁자로 가서 앉았다.
주인은 별로 깨끗하지 않은 걸레로 탁자를 대충 닦고는 심드렁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얼 드시겠소?”
그 음성에는 피곤함과 절망, 짜증 같은 것이 잔뜩 담겨 있어 듣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괴인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찐만두와 닭다리튀김, 그리고 화과자(火鍋子)를 주시오.”
주인은 남루한 옷을 걸친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삶에 아무런 희망이나 기대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괴인은 주방으로 사라지는 주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도 많이 늙었군. 무엇이 그를 저토록 늙게 만들었을까?”
유소응은 의아한 눈으로 괴인을 빤히 응시했다.
보아하니 괴인은 주인과 이미 오랜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주인은 괴인을 못 알아본 것일까?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괴인은 다시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 아무런 말이 없었고,
유소응 또한 그를 방해하기 싫어 혼자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유소응은 턱을 괸 채 눈알을 떼구르르 굴려 주루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이런 주루에 들어온 것이 생전처음이었다.
이런 곳에서 돈을 내고 음식을 사먹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주루는 더럽고 지저분했으나 유소응에게는 한없이 넓고 화려하게만 보였다.
조금 있자니 주방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뱃속에서 아귀(餓鬼)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입가에는 어느사이에 침이 가득 고였다.
유소응은 좀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는 소년이었으나,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곧 이어 주방 안에서 주인이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주인은 여전히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다가와 쟁반에 담긴 음식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괴인은 불쑥 입을 열었다.
“여아홍 한 병만 주시오.”
주인은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그 권태로운 얼굴에 귀찮아하는 표정이 너무도 역력했으므로 유소응은 자신도 모르게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괴인과 자신의 행색이 너무 남루해서 여기서도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다행히 주인은 다시 어슬렁거리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밖으로 나온 주인의 손에는 여아홍 한 병과 술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탁!
술잔과 술병을 탁자에 놓는 주인의 손길은 거칠고 투박해 보였다.
그런데 주인이 몸을 돌리려 할 때 괴인이 다시 말했다.
“잔을 하나 더 가져다 주시오.”
주인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유소응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실 사람은 괴인 혼자밖에 없는데 왜 술잔이 하나 더 필요할까?
설마 괴인은 유소응에게도 술을 권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에게 이것저것 쓸데없는 심부름을 시켜 그를 골탕먹이려는 것일까?
주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괴인을 쏘아보더니 휑하니 몸을 돌렸다.
유소응은 그가 괴인의 주문을 듣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곧 이어 주방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술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주인이 들고 온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려 할 때 돌연 괴인이 술병을 들어 그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주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두커니 선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사이에 괴인은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에도 술을 따르더니 천천히 술잔을 쳐들었다.
주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괴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을 느릿느릿 입으로 가져가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음성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술맛은 그대로군. 정산(丁霰), 그동안 잘 있었소?”
괴인의 얼굴에 못박인 듯 고정되어 있던 주인의 눈이 점차로 크게 뜨여졌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안면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입이 반쯤 벌어지며 의미 모를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 맙소사!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주인의 주름지고 피곤에 찌들었던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며 부릅떠진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동안 소리 죽여 흐느끼던 주인은 이내 눈물을 훔치며 괴인을 향해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괴인의 차가운 얼굴에도 한 줄기 형용할 수 없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더니 이윽고 한숨과 탄식이 묘하게 뒤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소. 정말 오랜 세월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