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4화
제70장. 동중괴변(洞中怪變)
종남산의 북쪽 산자락에는 유난히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많은 계곡이 있다.
계곡의 주위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었고, 기괴한 모양의 암석들이 사방으로 늘어서 있어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계곡의 한쪽에는 폭은 좁지만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는 폭포(瀑布)가 날아갈 듯한 형태로 있었고, 폭포 아래에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깊고 큰 소(沼)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폭포는 비폭(飛瀑)이라 했는데, 종남산의 서북쪽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멀리 새벽 해가 떠오를 무렵,
비폭이 보이는 계곡 아래에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한 명의 노승과 두 명의 중년인.
그들은 다름아닌 혜공과 곽우초, 그리고 백일동이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비폭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평소에도 그다지 수량(水量)이 많지 않은 비폭은 줄기줄기 얼음기둥을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마치 하얀 백룡이 얼음기둥을 타고 폭포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아마도 비폭이란 이러한 형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모양이었다.
눈 덮인 계곡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혜공은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고, 그때마다 곽우초가 재빨리 그를 부축해서 쓰러지지 않게 했다.
비폭이 지척에 이르자 혜공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갈수록 몸이 처지는군. 몇 년 전만 해도 이 일대를 앞마당처럼 돌아 다녔는데 지금은 한 번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드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백일동이 조용히 웃었다.
“이곳의 산세(山勢)는 젊은 사람들도 쉽게 올라오지 못할 정도로 험합니다. 그 연세에 여기까지 오시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요.”
“이곳은 원래 노납이 젊은 시절부터 자주 찾아온 곳일세. 지세가 험하긴 해도 산이 깊고 물이 맑아서 더위를 피하기에는 아주 적당했지.”
“그래서 이곳에 사람을 숨겨놓을 생각을 하셨군요.”
혜공은 손으로 비폭을 가리켰다.
“저 폭포 아래를 고관담(高冠潭)이라고 하는데, 그 일대에는 크고 작은 동굴들이 많아서 몸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네.”
백동일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럼 대사님께서 구하신 종남파의 제자는 그곳에 숨어 있습니까?”
“일단 가 보세.”
혜공은 자신이 먼저 비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폭으로 가까이 갈수록 크고 작은 못들이 계속 나타나더니 이내 하나의 커다란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못은 두터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주위의 설경(雪景)과 어울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연못의 끝 쪽은 비폭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폭으로 오르는 가파른 절벽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십여 개나 뚫려 있었다.
그 구멍들은 대부분이 그리 깊지 않은 것들이지만, 개중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깊은 동굴도 있었다.
혜공이 백동일과 곽우초를 데리고 간 곳도 그런 동굴들 중 하나였다.
그 동굴은 비폭의 절벽에서도 가장 끝 쪽의 움푹 파인 곳에 위치해 있어서 가까이 가기 전에는 이런 곳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동굴의 입구는 어른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혜공이 제일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백동일과 곽우초가 차례로 따라 들어왔다.
“머리를 조심하게.”
혜공의 말이 아니더라도 동굴 입구는 천장이 몹시 낮아서 키가 큰 백동일과 곽우초는 허리를 숙인 채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하나 오 장쯤 들어가자 동굴의 높이도 점차로 높아지고 폭도 넓어져서 서너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혜공의 뒤를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가던 백동일과 곽우초는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동굴 안은 점점 넓어져서 충분히 사람이 기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누군가가 머무른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내부에는 동굴 특유의 비릿한 공기와 눅눅한 습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동굴 내부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서 걸어가던 혜공의 모습이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엇?”
백동일이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리며 황급히 조금 전에 혜공이 있던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어 보이는 걸음으로 걷고 있던 혜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끝없이 길게 이어져 있는 동굴의 깊은 어둠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대사님!”
곽우초가 깜짝 놀라 큰소리로 혜공을 불렀다.
그의 음성이 동굴 안으로 거대한 울림이 되어 퍼져 나갈 때,
멀지 않은 곳에서 혜공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여기 있네.”
그들은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일시지간 혜공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안력을 돋구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이 장쯤 떨어진 곳에 갈라진 틈이 있으며, 그 틈 사이에 혜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틈은 의외로 넓어서 사람 하나가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틈이 동굴의 구부러진 구석에 있는데다 주위가 워낙 어두워서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혜공은 틈 사이에 몸을 반쯤 내민 채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게.”
백동일과 곽우초는 몸을 비틀어 차례로 좁은 틈 사이를 빠져나갔다. 틈을 빠져 나오니 의외로 상당히 넓은 공동(空洞)이 나왔다. 공동의 반경은 십여 장이나 되어서 마치 커다란 연무장을 연상케 했다. 사방의 벽이 모두 막혀 있어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그들이 들어왔던 작은 틈밖에는 없었다. 동굴 속의 작은 틈 안에 이토록 커다란 공간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그 공동의 가운데 쯤에 한 사람이 우뚝 선 채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짙은 흑의를 입고 머리를 헝클어뜨린 중년인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키에 체구도 왜소했지만,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은 야수의 그것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하나 그를 본 백동일과 곽우초는 모두 몸을 움찔거렸다. 흑의인의 번뜩이는 눈동자는 하나뿐이었다. 뜻밖에도 흑의인은 애꾸였던 것이다. 혜공이 앞으로 나서며 흑의인에게 다가갔다.
“이들은 노납과 함께 온 사람들일세.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두 사람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의혹과 경계의 빛이 담겨 있었다. 누구라도 처음 보는 외인(外人)에게서 그런 눈빛을 받는다면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 백동일은 오히려 활짝 웃으며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귀하가 종남파의 제자요? 반갑소.”
백동일이 다가오자 흑의인이 슬쩍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백동일은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혜공을 돌아보며 도움을 청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혜공은 주름진 얼굴에 한 줄기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흑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사람도 종남파의 후예라네. 그리고 저쪽은 노납이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일세. 이번에 도움이 될까 하여 부른 사람들인 너무 경계심을 가질 필요는 없네.”
종남파의 후예라는 말에 흑의인의 시선이 못박이듯 백동일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백동일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불쑥 물었다.
“귀하가 본파(本派)의 사람이란 말이오?”
백동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흑의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칼날 같은 예리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본파의 제자는 장문인 외에 여섯 명의 일대제자와 한 명의 이대제자가 있을 뿐이오. 귀하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소.”
백동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물론 그럴 거요. 하지만 나도 엄연히 종남의 제자요. 벌써 이십오 년 전부터 종남의 제자였소.”
“이십오 년 전?”
“나는 종남삼검의 수좌(首座)이신 풍뢰검 관소양 노사의 제자인 백동일이라 하오.”
흑의인의 외눈에서 흘러 나오는 안광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종남삼검이라면 예전의 천치검 하원지 조사(祖師)의 사제분들이셨던……”
“그렇소.”
백동일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흑의인이 반색을 하며 기뻐할 줄 알았다. 하나 흑의인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백동일이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흑의인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귀하는 나한테 사숙조(師叔祖)가 되니 나는 마땅히 귀하에게 절을 해야 하오. 하지만 보다 확실한 것을 알기 전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으니 양해하기 바라오.”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곽우초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이분의 말씀은 사실이오. 그건 혜공대사님께서 증명하실 수 있을 거요.”
하나 곽우초의 말을 듣고도 흑의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직접 확인한 것 외에는 어느 것도 믿지 않는 성미요.”
곽우초가 어처구니없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혜공대사님께 구원을 받았다면서 그분도 믿지 못한단 말이오?”
“나는 내가 겪어 본 사람만 믿소.”
흑의인의 단호한 말에 곽우초는 더 할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흑의인의 말인즉, 혜공은 자신이 겪어 보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지만 백동일과 곽우초는 자신이 처음 본 인물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혜공이 소개를 했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야 옳을지 몰라도 이런 말을 면전(面前)에서 직접 듣고도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체 이 사람은 과거에 무슨 일을 당했기에 이토록 사람을 불신(不信)하는 것일까?’
그때 혜공이 주름진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앞으로 나섰다.
“노납이 비록 이 사람을 구해 주기는 했으나 그의 개성이 남달라서 노납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그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네. 그래서 기꺼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혜공의 말은 곽우초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곽우초는 혜공에게 구원을 받고도 그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이 대단한 흑의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혜공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혜공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종남파의 하나뿐인 이대제자이며, 노납이 가장 최근에 사귄 친구라네. 그의 이름은……”
흑의인이 불쑥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동중산이오.”
“동중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곽우초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당신이 비천호리 동중산이란 말이오?”
“그렇소.”
둥중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곽우초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듣자하니 이자는 잔꾀가 많고 심계가 깊어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처럼 상대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이자가 종남파의 이대제자였다니 정말 뜻밖이구나.’
이어 그의 시선은 자연히 동중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외눈으로 향했다. 동중산이 외눈의 애꾸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곽우초가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동중산은 다소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내 눈알 하나는 육 개월 전에 늑대에게 줘 버렸소. 그보다 이제는 당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순서 아니겠소?”
동중산의 시비를 거는 듯한 말에도 곽우초는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인사가 늦었구려. 내 이름은 곽우초요.”
동중산은 별다른 대꾸도 없이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이 비록 강호를 진동시키는 절정고수는 아닐지라도 섬서성 일대에서는 나름대로 알려진 인물인데 상대방이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자 곽우초는 머쓱해져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소문으로는 약삭빠르고 떠들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영 딴판이로군. 모르는 사람들이 둘이나 찾아와서 화가 났나?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을 건 없지 않은가?’
장내의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혜공이 사태를 수습하려는 듯 백동일을 가리키며 동중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백 대협은 노납이 이십여 년 전에 풍뢰검 관 대협을 만났을 때 함께 왔던 사람일세.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가 종남파의 제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니 무례를 범하지 말게.”
동중산의 시선이 다시 백동일에게로 향했다. 백동일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가 지금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동중산의 외눈이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며 백동일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선사의 말씀이시라면 분명한 사실이겠지요. 다만 저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백동일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말해 보게.”
그의 말토는 어느새 은근한 하대(下待)로 바뀌어 있었다. 하나 동중산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듯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귀하는 이십오년 전부터 본파의 제자였으며, 전전대(前前代)의 조사들인 종남삼검의 후예라고 했소. 그렇다면 그동안 본파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게 아니겠소?”
“…!”
“본파가 존망(存亡)의 위난(危難)에 처한 것은 벌써 여러 달이 되었소. 그런데 지금까지 전혀 존재 유무조차 알려지지 않던 귀하가 이렇듯 갑자기 본파의 제자임을 자처하며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구려.”
묵묵히 동중산의 말을 듣고 있던 백동일이 갑자기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흐음, 자네의 말은 충분히 이해하네. 그동안 종남파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종남산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선사(先師)의 유지(遺志)를 받들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늦게라도 종남산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종남파가 이대로 멸문(滅門)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네.”
백동일의 설명을 듣고도 동중산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관소양 조사의 유지가 어떤 것이었소?”
백동일은 자신을 추궁하는 듯한 동중산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선사께선 이십여 년 전 숭산에서 당한 수모를 씻지 않는 한 종남파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셨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자네에게 설명해야겠나?”
곽우초도 내심 동중산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종남파의 지금 처지가 위태롭다고 해도 명색이 사문의 사조뻘 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는 지나치다 못해 무례한 것이었다.
게다가 백동일은 종남파에 도움의 손길을 주러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이 아닌가? 멀리서 찾아온 사문의 존장(尊長)조차도 이런 냉대를 받는다면 앞으로 누가 종남파를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단 말인가?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해지자 혜공이 조금은 씁쓸하게 웃으며 동중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노납이 너무 성급하게 일을 처리한 것 같군. 먼저 자네의 의사를 물어 봐야 했었지만 사태가 급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네.”
혜공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동중산의 태도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확실히 성급하셨습니다. 제 허락을 받지 않고는 외인(外人)을 이곳으로 데려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보다못한 곽우초가 버럭 노성을 질렀다.
“듣자하니 정말 너무하는군. 대사님께선 당신을 도우려는 의미에서 하신 일인데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동중산의 대꾸는 싸늘하기만 했다.
“내게 도움이 될지 해(害)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오.”
“뭐라고? 이자가 정말……”
곽우초가 분기탱천하여 금시라도 동중산을 향해 달려들 듯하자 혜공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참게. 그의 말대로일세. 그는 자신의 행적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누차 노납에게 당부했었네. 아무래도 노납이 경솔했던 게지.”
“하지만 대사님이 나쁜 의도로 하신 일도 아니고, 게다가 저분 백 형은 저자의 사문의 어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토록 대사님을 윽박지르다니 이게 종남파의 법도란 말입니까? 명문정파로 이름을 날리던 종남파가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동중산의 외눈이 더 이상 매서울 수 없을 만큼 날카롭게 번뜩거렸다. 그는 곽우초를 한참 동안이나 쏘아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종남파에 법도란 없소.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거요.”
그 말을 듣자 곽우초는 일시지간 할말이 막혀 버렸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지 모를 비장함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야 귀파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니 상관없지만, 저분 백 형에게는 무척이나 서운한 말일 거요.”
동중산의 시선이 힐끗 백동일을 향했다. 곽우초는 이번에야 말로 동중산이 백동일에게 사문의 어른에 대한 예우를 갖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동중산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음성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별로 그렇지도 않을걸, 서운하다는 말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의미라면 모르지만.”
곽우초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동중산은 시선을 백동일에게 고정시킨 채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래 전에 나는 장성(長城) 부근에 놀라운 검술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그의 검술은 빠르고 날카로울 뿐 아니라 대단히 사나워서 일단 그와 검을 겨루게 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한다는 거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절명검(絶命劍)이라 부른다고 하오.”
곽우초는 동중산이 왜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 말을 듣는 백동일의 안색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동중산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친구를 따라 장성으로 갔다가 우연히 먼발치에서 절명검이 싸우는 광경을 목격했소. 그의 검은 정말 무서워서 그는 순식간에 세 명의 일류검객들을 검하고혼(劍下孤魂)으로 만들고 말았소. 실로 절명검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놀라운 솜씨였지.”
“…!”
“그리고 다시 일년 전에 나는 절명검이 어떤 문파에 초빙되어 장성을 떠나 섬서성 쪽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곽우초는 급히 물었다.
“그 문파가 어디요?”
동중산의 대답은 짤막했다.
“초가보.”
곽우초는 입을 반쯤 벌렸다. 무언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갑자기 뇌리를 엄습했던 것이다. 그의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동중산은 백동일을 응시한 채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나는 몇 년 만에 다시 절명검의 얼굴을 보게 되는구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러니 그가 사문의 어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 해도 내가 어찌 머리를 조아릴 수 있겠소?”
백동일의 표정은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가면을 쓴 듯한 그 얼굴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서 섬뜩한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무어라 입을 열려던 곽우초는 그 귀기 어린 얼굴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혜공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지 주름진 눈을 부릅뜨고 백동일을 쳐다본 채 더듬거렸다.
“자…… 자네가 정녕 초가보에서 왔단 말인가?”
백동일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엷은 웃음이었으나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갑고 싸늘한 미소였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세상일이라고 하더니…… 완벽하게 속여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확실히 강호(江湖)의 일에는 묘한 재미가 있어.”
그 말을 듣자 혜공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그렇다면 진정으로……”
백동일은 혜공을 돌아보며 웃었다.
“대사를 속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소. 그나마 선사의 몇 안 되는 벗이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대사가 너무 완고하여 나로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소.”
혜공은 아직도 백동일의 변절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자네는 종남파의 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하하…… 이미 현판도 깨어지고 본산(本山)도 무너진 종남파에 무슨 미련이 있겠소? 선사가 종남파를 떠난 후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종남의 제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그런 허명(虛名)을 지고 사느니 내 자신의 검을 믿고 사는 것이 더 낫지.”
혜공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렸다. 옆에서 곽우초가 부축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백동일은 더 이상 혜공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동중산을 쳐다보며 빙글거렸다.
“확실히 비천호리란 이름이 거짓은 아니었군. 그런데 첫눈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으면서도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며 이리저리 시간을 끌었나?”
동중산은 무표정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난 단지 당신이 절명검의 신분으로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종남파의 제자로서 찾아온 것인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오.”
“오, 과연 그럴듯하군. 그래서 이제는 결론을 내렸나?”
“결론을 내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당신이 뒤늦게 이곳에 온 이유를 거추장스럽게 말했을 때 나는 이미 당신이 변절자라는 걸 알아차렸소. 선사의 유지 때문이라니…… 절명검답지 않은 치졸한 변명이었소.”
백동일은 껄걸 웃었다.
“하하…… 그래도 저 늙은 중은 곧이곧대로 믿던 걸. 모처럼 해본 거짓말이었지만 잘 속아넘어가 주어서 아주 유쾌하더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재미있었어.”
학자처럼 점잖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섬뜩한 말이었다. 하나 동중산은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성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단번에 알아봤지. 당신은 천부적인 살인마(殺人魔)요. 그때도 세 사람을 죽일 때 당신의 얼굴에는 쾌감에 젖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소. 그건 전형적인 살인마의 미소였소.”
백동일은 어깨를 들썩이며 더욱 크게 웃었다.
“크하하…… 나를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다는 자네가 나를 그토록 잘 이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정말 반가운 일이야. 그 보답으로 천천히 숨통을 끊어 주지. 갖은 고통을 느끼며 온갖 절규를 마음껏 내지를 수 있게 말이야.”
활짝 웃으며 끔찍한 말을 하고 있는 백동일을 보는 혜공과 곽우초는 자신들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도저히 조금 전에 자신들을 구하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똑같은 얼굴에 미소이건만 이토록 사악(邪惡)하고 살기 어린 모습은 지금까지 본 적도 없었다. 백동일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종남의 다른 떨거지들은 어디 있나?”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그러리라 짐작했지. 그때 용케도 도망친 놈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져서 아직까지 서로 생사(生死)조차 확인 못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지. 자네 한쪽 눈알도 그때 달아난 거지?”
동중산의 눈자위가 가늘게 떨렸다.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뇌리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백동일은 동중산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운지 연신 빙글거리며 웃었다.
“나중에 들으니 자네는 종남파의 애송이 하나를 보호하려다 그런 꼴을 당했으며, 그 애송이는 결국 자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고 하더군. 남을 위해 자신의 눈을 버리다니 멋진 일이야. 하지만 오늘은 자네를 위해서 희생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닌가?”
그때 혜공을 부축하고 있던 곽우초가 자신이 들어왔던 틈이 있는 곳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태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혜공만이라도 몸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백동일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웃으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말하겠는데,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나운 매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틈을 향해 다가가던 곽우초의 몸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묻지 않아도 밖에 누가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틈의 밖에서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백 대협! 웬만하면 그들 중 한두 사람은 제게 넘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목소리가 독응 위지독의 것임을 알아차린 곽우초는 전신의 기운이 쭉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위지독이 어느새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아아…… 앞에는 호랑이, 뒤에는 범이 있으니 정녕 이들의 손을 피할 수 없단 말인가?’
곽우초는 암담한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백동일의 악마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 넘보지 말게.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오늘 일은 전적으로 내 몫일세.”
스릉!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검집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곽우초가 흠칫 놀라 보니 백동일의 손에는 어느새 예리한 검광(劍光)을 발하는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강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검이었으나, 그것이 백동일의 손에 쥐어지자 하나의 무시무시한 살인 흉기로 보였다. 장검을 든 백동일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품위 있고 우아한 학사(學士) 같은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피에 굶주린 잔인한 검귀(劍鬼)의 분위기가 짙게 풍겨 나왔다. 더구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는 미소는 너무나 비정해서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백동일은 장검을 뽑아 든 채 천천히 동중산을 향해 걸어왔다.
“언제 입문(入門)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대제자라면 천하삼십육검과 장괘장권구식까지는 배웠겠군. 가장 자신하는 초식을 한번 펼쳐보지 그래. 마음에 들면 몇 초 정도는 양보해 줄 수도 있는데……”
상대의 조롱 어린 음성에도 동중산은 화를 내지 내거나 흥분하지 않고 뒤로 한걸음씩 물러서고 있었다. 백동일은 손에 든 장검을 가볍게 흔들며 계속 다가왔다.
그의 눈은 기이한 광기(狂氣)로 번들거리고 있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내가 왜 절명검으로 불렸는지 잘 알겠지? 나는 일단 손을 쓰면 누구도 살려두지 않아. 그러니 내가 손을 쓰기 전에 실컷 솜씨를 발휘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백동일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시퍼런 검기(劍氣)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곽우초의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곽우초도 검을 익힌 사람인 만큼 눈앞의 광경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이와 같은 검기를 발출한다는 것은 백동일의 검법이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단 그 검이 휘둘러지면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종남파의 검법은 대체로 장중(莊重)한 가운데 온유한 힘이 있다고 하는데 대체 이자는 어디서 이토록 무서운 검법을 익혔단 말인가?’
백동일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항하는 것도 포기한 건가? 그게 요즘 종남의 방식인가? 하지만 내 방식은 그 반대야. 반항하든 반항하지 않든 일단 노린 놈은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고 말지.”
백동일의 어깨가 한차례 들썩거리며 그의 손에 들린 장검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 뒤로 물러서기만 하고 있던 동중산이 갑자기 앞으로 성큼 나서며 양쪽 소맷자락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소매에서 무언가 시커먼 것이 튀어나와 백동일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백동일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냉랭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 허튼수작을 하는군.”
백동일의 손목이 한차례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의 손에 들린 장검이 찬란한 검광을 뿌리며 동중산이 날려보낸 검은 물체들을 마주쳐 갔다.
펑!
검광과 부딪혀 튕겨져 나갈 줄 알았던 물체들이 폭음을 내며 터졌다. 그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동굴 안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백동일이 버럭 폭갈을 터뜨리며 장검을 세차게 흔들었다. 빛살 같은 검광이 연기 속을 헤집었다. 하나 무시무시한 검광과 검풍(劍風)이 몰아치는데도 연기는 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아마도 특이한 성분으로 이루어진 연막탄인 모양이었다. 삽시간에 동굴은 짙은 연기에 휩싸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연기는 거의 일각(一刻)이 넘어서야 겨우 가라앉기 시작했다. 연기가 얼마쯤 사라지자 동굴의 틈에서 위지독과 네 명의 중년인이 뛰어들어왔다. 위지독은 공동의 중앙에 백동일이 혼자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물었다.
“다른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도망쳤네. 내가 동중산을 너무 얕보았던 게 실수인 것 같네.”
위지독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고생한 게 모두 헛수고가 되었단 말입니까? 이거 큰일이군요. 보주님께서 진노하실 텐데……”
백동일은 의외로 담담한 신색이었다.
“너무 걱정 말게. 도망쳐 보았자 이 근처일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동일은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을 슬쩍 흔들었다.
“동중산은 여우같이 약삭빨라서 미리 알고 내 검을 피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그러지 못했네. 그러니 아무리 동중산이 날고 뛰는 재주가 있어도 부상당한 사람을 둘씩이나 데리고 멀리 가지는 못할 거란 말일세.”
위지독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안력을 돋구어 보니 백동일의 장검 끝에는 진득한 선혈이 묻어 있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멀지 않은 바닥에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핏물의 양이 적지 않고, 그 범위가 한 사람이 흘린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것으로 보아 백동일의 말대로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흘린 것이 분명했다.
위지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제가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는 이곳은 철저하게 막혀 있는데 대체 동중산은 어디로 빠져 나갔을까요?”
아닌게 아니라 이 공동은 비록 넓기는 했으나 위지독이 들어온 조그만 틈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모두 석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동중산은 혼자도 아니고 부상당한 두 사람을 모두 데리고 사라졌으니 위지독이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동일은 한차례 손을 흔들어 장검에 묻은 핏물을 바닥에 뿌리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틈만으로는 연기가 쉽게 빠져 나갔을 리 없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어딘가에 밖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을걸세. 동중산이 나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그 구멍으로 몸을 쉽게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네.”
이어 백동일은 턱으로 동중산이 자신을 향해 연막탄을 던질 때 서 있던 장소를 가리켰다.
“저 일대를 잘 살펴보도록 하게.”
위지독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중년인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자신도 그들을 따라 백동일이 가리킨 부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여깁니다.”
머지않아 네 명의 중년인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곳은 동굴의 벽에서 조금 튀어나온 부분이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여느 벽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하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벽의 한 부분이 다른 곳과 조금 색이 틀렸다.
위지독은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그것이 벽이 아니라 벽과 같은 색으로 칠해진 천임을 알 수 있었다. 상당히 두꺼운 천을 아주 정교하게 색칠하여 벽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천을 들추자 찬바람이 불어오며 눈부신 설경(雪景)이 나타났다. 천 밖을 내다본 위지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제길, 비폭의 바로 아래로 통해 있군.”
백동일이 다가와 천을 살펴보고는 피식 웃었다.
“일부러 동굴과 좁은 틈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해놓고 자신은 이곳을 통해 들락거렸군. 정말 단순하면서도 절묘한 방법이야. 과연 비천호리란 이름이 거짓이 아니었군.”
검을 들지 않은 백동일은 아무리 보아도 점잖고 온유한 학자를 연상케 했다. 누구라도 이런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사람을 살해하는 무서운 살인마라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 백동일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이런 점이 그의 검술만큼이나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검을 잡으면 살기에 휩싸이는 백동일이지만 평소에는 비상하고 냉정한 두뇌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초가보에서 많은 정성을 기울여 그를 초빙한 것도 그의 이런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가보의 칠대빈객(七大賓客) 중의 일인(一人)이며, 팔웅보다도 지위가 높았다.
위지독은 백동일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중산이 그들을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요? 짚이시는 데라도 있습니까?”
백동일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자네는 상당히 충성스럽고 유능한 친구지만, 너무 성급한 게 탈이야. 조그만 더 주위를 돌아보게. 상대가 저렇게 훤히 길 안내를 해주고 있지 않나?”
위지독은 눈을 번쩍이며 백동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음!”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짤막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눈길 위에 너무도 선명한 핏자국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 붉은 핏자국은 마치 죽음을 예고하듯 고관담의 연못들 사이를 가로질러 계곡 저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위지독은 네 명의 중년인들을 이끌고 그 핏자국을 따라 추적을 계속했다.
하나 반시진 가까이 핏자국을 따라간 끝에 그들이 발견한 것은 뒷다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토끼 한 마리였다. 위지독은 너무도 화가 나고 허탈해서 토끼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백동일도 그때만은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나 이내 그는 안광을 번뜩이며 허공을 응시하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계속 약은 수를 쓰겠단 말이지? 하지만 이 일대에서 부상이 심한 사람을 데리고 갈 만한 곳은 정해져 있지. 너는 결코 내 수중을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