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7화
제73장. 험로생로(險路生路)
종남산의 서북쪽은 유달리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수려하여 명승절경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고래(古來)로 이 일대에는 크고 작은 사찰(寺刹)과 도관(道觀)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정업사(淨業寺)도 풍욕구 산자락에 있는 많은 사찰들 중의 하나였다. 정업사는 원래 불교 율종(律宗)의 조정이었다. 세워지긴 수(隋) 때 세워졌으나 유명해진 것은 당(唐) 나라 때 도선율사(道宣律師)가 이곳에서 저술에 전념하면서부터였다.
도선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절 뒷산의 봉우리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그 이후 이곳은 율종이 창시된 고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나 무척 험한 곳에 위치해 있어 명성에 비해 향화객(香火客)들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西山)으로 기울어 갈 무렵, 정업사의 입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갈색 유삼(儒衫)을 걸친 오십대 중반의 장년인이었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턱밑으로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젊은 시절에는 적지 않은 여인들의 환심을 샀을 것이 틀림없었다. 갈색 유삼의 장년인은 주위의 경승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업사의 산문(山門)에 다다른 장년인은 고개를 들어 산문 위에 걸린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현판에는 <이법호법(以法護法)> 이란 네 글자가 쓰인 편액이 걸려 있었다.
“법으로 법을 지킨다라…… 정말 마음에 드는 문구로군.”
장년인은 나직이 감탄성을 발하며 한참이나 편액을 올려다보더니 이윽고 다시 걸음을 옮겨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업사는 종남산에서도 가장 험한 곳에 있는 절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산길을 오르기는 힘들지만 그만큼 주위의 경치도 뛰어났다. 장년인은 산세의 기기묘묘한 변화에 넋을 잃어 힘든 줄도 모르고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창한 수림 사이로 울긋불긋한 단청의 지붕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장년인의 발걸음이 한층 더 경쾌해졌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직한 불호(佛號)가 들려 왔다.
“아미타불, 시주는 잠깐 걸음을 멈추십시오.”
장년인은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체구가 건장한 두 명의 중년 승려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시주께선 본사에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두 명의 승려 중 우측의 이마에 점이 있는 승려가 합장을 하며 물었다. 장년인은 온화한 얼굴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나는 이곳의 지복당(知福堂)에 기거하는 당초(唐草) 스님을 만나러 왔소.”
“그러셨군요. 하지만 당초 스님은 얼마 전부터 백일수도(百日修道)에 들어가셔서 지금은 누구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장년인의 얼굴에 낭패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허어, 이를 어쩐다. 그를 만나기 위해 멀리 개봉(開封)에서 여기까지 왔거늘. 얼굴만 봐도 좋으니 잠시 만나면 안 되겠소?”
“사정은 딱하지만 소승으로서는 어쩔 수 없군요. 본사의 규칙은 상당히 엄해서, 일단 수도에 들어가면 외출은커녕 면회도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장년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나저나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오늘만 여기서 묵고 갈 수 있겠소? 지금 산을 내려가기는 너무 늦었는데.”
승려는 차마 그것까지는 거절하지 못하겠는지 옆 사람과 잠시 귓속말을 주고받고는 이내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승을 따라오시지요.”
두 사람의 승려는 먼저 몸을 돌려 산 위로 올라갔다. 장년인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작은 고갯길을 넘자 시야가 탁 트이며 몇 채의 불당(佛堂)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중앙에 있는 본당(本堂)에는 산문과 마찬가지로 <이법호법>이라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 본당이 ‘남산율종(南山律宗)’의 본산(本山)인 셈이다. 천하에 명성이 알려진 종남(宗南)의 본산치고는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지만, 주위의 깊은 산세와 어울려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특히 본당의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있어 보는 이를 압도케 했다.
두 명의 승려가 장년인을 데려간 곳은 본당에서 조금 떨어진 후원의 객방(客房)이었다. 정업사의 객방은 십여 칸이 되었는데, 계절이 계절인지라 대부분이 비어 있었고 끝 쪽의 한 칸만이 사람이 있는지 방문 앞에 신발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장년인은 승려가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가려다 끝 쪽의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에도 사람이 있는 것 같구려.”
승려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몇 달 전부터 젊은 부부가 기거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몸이 불편하여 이곳에서 정양(靜養)하면서 불공(佛供)을 드리고 있습니다.”
“쯧, 안타까운 일이오. 이따가 적적하면 말동무나 하렸더니 안 되겠구려.”
“아마 그럴 겁니다. 워낙 조용한 부부들이라 외인(外人) 만나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더군요.”
장년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별 수 없이 달을 보며 혼자 떠들어야겠군.”
“그럼 쉬십시오. 저녁은 조금 있다 갖다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두 명의 승려가 물러가자 장년인은 한차례 기지개를 켜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긴 먹었군. 이 정도 산을 올랐다고 온몸이 뻐근하니 말이야. 더 늙기 전에 그동안 못 본 곳을 다 돌아다녀야 하는데 걱정이군.”
소인불견고시월(小人不見古時月),
금월회경조고인(今月會經照古人),
고인금인약유수(古人今人若流水),
공간명월개여차(共看明月皆如此)……
지금 사람은 예전의 달을 못 보았으나, 지금의 달은 옛날 사람을 비추었으리.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유수와 같으니, 명월을 보는 마음은 늘 한결같구나……
산사(山寺)의 밤은 야릇한 정취가 있었다.
더구나 추운 겨울에 조각달이라도 떠 있으면 그 정취는 더욱 각별하다.
장년인은 객방의 한쪽에 나 있는 조그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조각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감회가 어려 있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풍진강호(風塵江湖)에 몸을 담근 지 어언 삼십 년이 흘렀건만 는 건 이마의 주름살과 마음속 시름뿐이군.”
그의 입가에 고졸(古拙)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확실히 늙었나? 혼자 산사에서 달을 보고 처량한 넋두리나 하고 있다니…… 어떤가? 자네도 적적한 모양인데 서로 말동무나 하는 것이?”
장년인은 대체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일까?
장년인이 있는 객방의 창문 밖에는 작은 뜰이 있었다.
그 뜰 주위를 서성이는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은 장년인의 말을 들었는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장년인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두 눈이 유난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장년인은 그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젊은 친구가 좋은 눈을 가졌군. 노부도 한때는 그런 패기와 신념에 찬 눈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렸네. 자네를 보니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흥겨운 마음이 드는군.”
그 인영은 묵묵히 장년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보아하니 뜰을 지나 객방의 끝에 있는 방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장년인은 나직이 혀를 찼다.
“쯧, 기나긴 겨울밤에 처음 만난 사람끼리 이야기 좀 나누자는데 그게 그렇게 거슬린단 말인가? 눈은 좋은데 마음은 시들었군 그래.”
그 말을 들었는지 그 인영의 걸음이 다시 멈춰졌다.
장년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는 내일 아침이면 이곳을 떠날 사람일세. 오늘이 아니면 우리는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이것도 짧은 인연(因緣)이 아니겠는가?”
인영은 생각을 바꾼 듯 장년인이 있는 방 쪽으로 다가왔다.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인영의 모습이 문 앞에 나타났다.
인영은 마치 살피듯 문밖에 우뚝 서서 장년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들어오게.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 아니니 두려워할 필요 없네.”
인영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장년인이 유심한 시선으로 인영을 쳐다보았다.
인영은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이십대의 청년이었다.
의복이 허름하고 머리를 제대로 빗지 않아 헝클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왼팔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얼굴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장년인은 청년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반갑네. 나는 조가(趙家)일세.”
청년의 음성은 무뚝뚝했다.
“나는 소가(蘇家)입니다.”
장년인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청년이 의자에 앉자 장년인은 탁자에 있는 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마시게. 비록 용정(龍亭)이나 천지(天池) 같은 좋은 차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마실 만하네.”
청년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장년인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그런 따가운 시선에 머쓱함을 느낄 법도 한데 장년인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향이 어딘가?”
“산음(山陰).”
청년의 대답은 너무 투박해서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절강성(折江省) 산음현(山陰縣) 말인가? 정말 멀리서 왔군. 나는 산동(山東) 사람일세. 황강집(黃崗集)이 내 고향이지.”
“……”
“고향을 떠난 지도 수십 년이나 되어서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네. 그런데도 툭하면 아련히 그리워지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장년인의 말에 청년은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하나 장년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혼자서 떠들었다.
“고향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여자가 있었네. 나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 눈이 커다랗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였지. 아주 이쁜 것은 아니었으나 귀엽고 깜찍했지. 내가 고향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녀는 말없이 울기만 했네.”
장년인의 음성은 야릇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때는 그녀가 우는 게 몹시 싫었네. 그래서 그녀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지. 강호에 나와서 많은 여자들을 만나면서 그녀를 잊어버렸네. 내가 만난 여자들 중 누구도 그녀보다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었거든. 그런데 좀 더 세월이 흐르자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생각나기 시작하더군.”
장년인의 눈은 마치 아련한 과거를 쫓아가듯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 그녀의 울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그녀가 울던 날도 지금처럼 조각달 하나가 검은 하늘에 결려 있었지. 달빛 아래 울고 있는 그녀는 정말 예뻣다네. 그런데 왜 그때는 그렇게 그녀가 미웠는지……”
장년인의 음성은 점차로 낮게 가라앉았다.
“세월은 사람의 기억을 바꾸어 놓는 모양일세. 솔직히 말하면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우는 모습은 그렇게 예쁘지 않았거든. 그런데도 그녀를 떠올릴 때면 그녀의 우는 모습이 떠오른다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말을 끝으로 장년인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쓸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잠시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장년인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하…… 나도 참 청승맞군. 생면부지의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말일세.”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만 있던 청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원래 그 말을 하기 위해 나를 부른 게 아니었습니까?”
장년인은 움찔하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다네. 사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자네에게 억지를 부린 걸세. 가슴속에 혼자 담고 있기에는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네. 자네는 재수 없게 내 넋두리의 희생양이 된 걸세.”
“……”
“자네에게 부인이 있다고 들었네. 그녀를 소중히 아껴 주게. 언젠가 나처럼 혼자 달을 보면서 시름에 젖어 한숨짓는 바보짓을 하지 않으려면.”
청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년인의 말을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도 아니면 원래 말수가 유난히 적은 성격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장년인도 그 점이 궁금했는지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정말 과묵하군. 하지만 자네같이 젊은 사람이 그렇게 말을 마음속으로 담아 두기만 하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네. 몸 속의 혈기(血氣)가 배출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두어야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장년인의 말을 수긍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장년인은 분위기가 딱딱해진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바꾸었다.
“아까 승려에게 듣자니 자네 몸에 병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진맥(診脈)을 해봐도 되겠나?”
청년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의원이십니까?”
장년인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그렇지는 않네. 다만 그동안 여기저기서 굴러먹다 보니 주워 들은 풍월이 조금 있을 뿐이네. 괜찮다면 손을 내밀어 보게.”
청년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장년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반대쪽 손을 내밀게.”
청년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다시 장년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칼날처럼 예리한 시선이었다.
장년인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그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었다. 무언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청년은 마음을 결정했는지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그가 왼손을 내미는 자세는 몹시 어색하고 경직된 것이었다. 마치 팔 대신에 길다란 나무막대를 매달고 있는 것 같았다. 한눈에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장년인은 청년이 내민 왼팔의 맥문(脈門)을 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장년인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윗도리를 벗어 보겠나?”
청년은 말없이 상의를 벗었다. 평범한 외모와는 달리 다부진 근육으로 뒤덮인 상체가 드러났다. 하나 장년인은 청년의 다른 곳은 신경도 쓰지 않고 왼쪽 어깨와 팔꿈치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팔꿈치 중간에 끔찍한 흉터가 나 있었다. 흉터를 자세히 관찰한 장년인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됐네. 옷을 입게.”
청년이 옷을 다시 입자 장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경솔하게 자네의 상처를 보자고 한 것 같군. 그 흉터는 도(刀)에 의한 것인가?”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년인은 다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칼자국이 자네의 왼팔 근육을 절단해 버렸네. 다행히 신경(神經)은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잘려진 근육을 복원하기 전에는 왼팔을 쓸 수 없을걸세.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세.”
청년은 이미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장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당금 무림에서 잘려진 근육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두 명이 있네. 하나 그들도 완벽히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걸세. 한 사람은 무림제일신의라고 알려진 철면군자 노방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의술에서 그와 쌍벽(雙璧)을 이룬다고 알려진 제갈세가의 당대 가주, 신수무정(神手無情) 제갈외(諸葛畏)일세.”
“…!”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제갈외가 더 가능성이 있네. 대대로 제갈세가는 외상(外傷)에 관한 한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 왔네. 그에 비해 노방은 내상(內傷)에 더 정통하지. 하지만 제갈외가 자네를 치료해 줄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네.”
제갈외는 무림에서 괴인(怪人) 중의 괴인(怪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강호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신의(神醫)이지만 사람을 고친 적은 불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상처를 치료해 준 대가로 그가 요구하는 것은 부상자의 팔이나 다리 같은 신체의 일부였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살려 주고는 팔다리를 다시 잘라 버리는 것이다. 금은보화나 절세기보(絶世奇寶)를 제시해도 소용없었다.
이러니 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도 제갈외에게 치료 받으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야말로 죽음 직전에 처해야만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그에게 치료를 부탁하게 되는 것이다. 또 치료를 부탁한다고 아무나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제갈외의 그날 기분에 따라 치료를 할지 말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별호에 ‘무정(無情)’ 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년인은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되었다고 해서 살아가는 데 큰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세. 나는 관상(觀相)을 조금 볼 줄 아는데, 자네는 늦게 꽃피우는 상이네. 지금은 비록 고단하겠지만, 언젠가는 노력한 보답을 받게 될 걸세.”
청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장년인은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내 정신 좀 보게. 밤이 이미 상당히 깊었군.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놓고 있었던 것 같네.”
“즐거웠습니다.”
청년으로서는 모처럼 내뱉은 긍정적인 말투였다. 장년인은 빙긋 웃었다.
“그랬다면 다행이군. 나도 마음속에 얹혔던 넋두리를 할 수 있어서 기뻤네.”
청년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막 그가 방문을 벗어나려 할 때 장년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청년이 돌아보자 장년인은 돌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네. 앞으로 어떠한 위기를 겪게 되더라도 한 가지를 명심하게. 험로(險路)가 곧 생로(生路)일세. 겉으로는 위험해 보이는 길이 사실은 살아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되는 걸세. 이게 지난 삼십 년 간 강호를 살아오면서 내가 터득한 생존(生存)의 법칙일세.”
청년은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음미하려는지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이어 몸을 돌려 방문을 빠져 나갔다. 장년인은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뜻을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 내게 다른 일만 없었어도 쓸 만한 재목으로 만들어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입가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나와 함께 있다가는 평생을 피바람 속에 살게 될 테니 말이야.”
청년이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여자가 아직 자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어디 갔다왔어요?”
“생각할 것이 있어서 잠시 산책을 하고 왔어.”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 누구를 만나고 왔죠?”
여인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사형의 마음속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라구요. 그러니 내 앞에서 허튼수작을 할 생각은 말아요.”
청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또 맞혀 볼까요? 사형은 그 사람을 만났죠? 저녁때 이곳에 온 그 갈색 유삼을 입은 사람.”
청년의 고개라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끄덕여졌다. 여인은 신이 났는지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틀림없이 그 사람이 사형을 꼬드겨 불러낸 거겠죠? 그 사람, 아까부터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고 싶어 죽을 것 같은 표정이더라구요. 사형같이 말없는 사람이 지금까지 붙잡혀 있었던 걸보니 그 사람은 정말 대단한 수다쟁이인 모양이죠.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청년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 그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면 여인이 밤새 자지 않고 그의 옆에서 채근거릴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는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자기 넋두리를 했어.”
여인의 눈이 별빛처럼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여자 얘기죠?”
청년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죠? 내 짐작대로군요. 생긴 걸로 봐서 젊었을 때는 여자깨나 울리고 다녔겠더라구요. 아주 의젓하고 준수해 보이잖아요. 그런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바람둥이라구요. 사형하고는 정반대죠.”
청년은 더 들을 말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나 그녀는 집요하게 계속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다른 수상한 기미는 없었나요? 우리를 찾으러 온 것 같지는 않았어요?”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인은 의자에 앉아 손으로 턱을 고이며 조잘거렸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게 뭘까? 그런 바람둥이가 비구니도 없는 이곳에 여자를 찾아왔을 리는 없고, 우리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만나러 온 거지?”
청년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쪽에 놓인 침상에 가서 팔베개를 한 채 벌렁 드러누웠다. 여자는 한참 동안 혼자 무어라고 중얼거리다가 청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청년은 그때까지도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여자는 침상으로 다가오더니 청년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청년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사형이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한 건 처음 보았어요.”
청년은 팔베개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내일 산을 내려가자.”
뜻밖의 말에 여인은 깜짝 놀라 짤막하게 소리쳤다.
“뭐라고요?”
청년의 표정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의 추격을 피해 이곳에 숨어 있다는 애초의 생각은 잘못되었어. 우리는 너무 편하고 안전한 길로만 피해 다녔던 거야.”
여인은 한동안 망연자실한 모습이더니 이내 도리질을 했다.
“안 돼요!”
“……”
“사형도 아시잖아요.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는 걸. 사형은 팔을 못 쓰게 되었고, 다른 사형들과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어요. 우리들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청년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여인은 조바심이 나는지 붉은 혀로 입술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형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겨울만이라도 여기서 보낸 후 다시 진로(進路)를 결정하기로 해요. 이보(二步) 전진을 위해서는 때로는 일보(一步) 후퇴할 필요도 있는 법이란 말이에요.”
청년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사형!”
그래도 그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를 흔들려 했다. 그때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봄이 온다고 내 팔은 낫지 않아. 그건 사매도 알잖아. 지금 우리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일을 더 미루었다가는 천추(千秋)의 한(恨)이 될지도 몰라.”
“그게 뭐죠?”
“종남파가 아직 멸문(滅門)하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거야.”
“…!”
“이대로 시일이 지나면 종남파는 영원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문파가 되어 버려. 그때는 정말 되돌릴 수가 없는 사태가 되고 마는 거야. 종남이 아직은 존재해 있다는 것을, 비록 본거지에서도 쫓겨나고 몇 명 남지도 않은 채 뿌리를 잃은 떠돌이처럼 강호를 헤매고 있을지라도 종남파의 제자들이 아직은 종남의 혼(魂)을 간직한 채 중흥(中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해.”
여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형!”
여인은 청년을 안 지 십 년 가까이 되었으나 그가 지금처럼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지금처럼 가슴이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도 없었다. 여인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청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러다 잘못되면……”
“사매는 잊었어? 우리의 목숨은 이미 종남파에 들어왔을 때 바쳐진 거야. ‘군림천하’를 꿈꾸었던 바로 그 순간에.”
그 말을 듣자 여인의 가녀린 어깨가 격동으로 떨려 왔다. 그녀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마침내 뺨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동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돌연 청년을 향해 물었다.
“사형은 알아요?”
청년은 그녀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여인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청년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사형이 이렇게 멋있어 보인 적이 없다는 걸. 항상 지저분하고 게으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제는 사형이 천하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