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8화
제74장. 종남후예(終南後裔)
유소응이 깨어난 것은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삼경(三更) 무렵이었다. 처음에 유소응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무심코 몸을 뒤척거리다가 온몸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으윽!”
마치 예리한 쇠꼬챙이에 관통당하는 듯한 극렬한 아픔이었다. 그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온몸이 붕대로 친친 동여매진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침상 옆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그의 신음 소리를 들었는지 불쑥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키가 큰지 어둠이 함께 일어나는 것 같았다.
괴인이었다.
짙은 어둠 속이라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괴인의 큰 키와 비쩍 마른 몸을 보자 유소응은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저씨……”
괴인은 그의 심정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났구나. 몸은 괜찮느냐?”
유소응은 치밀어 오르려는 눈물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예……”
그토록 모진 고문을 당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지금은 속절없이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유소응은 몇 번이니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창문 사이로 살짝 들어온 달빛에 비치는 괴인의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유소응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외할아버지인 메르겐 이후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괴인이 커다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좀더 자도록 해라.”
유소응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괴인을 올려다보았다. 괴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푹 잤어요.”
“관절이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피부가 찢어진 것은 쉽게 나을 수 있으나 뼈가 다치면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너는 운(運)이 좋았던 거야.”
그렇게 맞은 게 운이 좋았다니 실감나지 않았으나, 유소응은 그의 말을 믿었다. 괴인은 절대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에게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우리가 식사를 했던 주루의 객방이다.”
유소응은 안심했다는 듯 다시 웃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저씨.”
“왜 그러느냐?”
“제가 잘못한 건가요?”
괴인은 그를 내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유소응의 얼굴은 점점 더 침울해졌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저를 그렇게 미워하시는 거죠?”
“…!”
“사랑까지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남들 대하는 것처럼만 해줘도 충분히 만족할 텐데…… 정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괴인은 유소응의 작은 얼굴이 우울함으로 가득 차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잘못한 건 네가 아니다. 어른들이지.”
이번에는 유소응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쓸데없는 시기심과 분노, 아집(我執)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불행히도 네 할아버지는 그런 함정에 빠지고 만 거야. 너는 네 할아버지를 탓해서도 안 되고, 네 자신을 탓해서도 안 된다.”
“…!”
“언젠가 너도 커서 어른이 된다면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때가 되어서야 너는 네 할아버지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려무나.”
유소응은 한동안 괴인의 말을 음미하려는 듯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괴인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머리를 한차례 더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돌리려 했다.
“아저씨.”
괴인이 돌아보자 유소응은 조금 전보다 더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한 가지 부탁해도 돼요?”
“말하려무나.”
유소응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저를 구할 때 사용한 것이 무공(武功)이라는 거지요?”
“그렇다.”
“그 무공이란 것을…… 제게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괴인의 눈이 한차례 무섭게 번뜩였다.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유소응은 열기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 무공을 배우고 싶은 거냐? 너를 때린 자들을 혼내 주고 싶으냐?”
유소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럼?”
“남을 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가 맞지 않기 위해서예요. 더 이상 힘이 없어 남에게 맞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힘이 없어서 친한 사람이 죽는 걸 지켜만 보는 게 싫어요. 더 이상 힘이 없어서……”
유소응의 작은 얼굴은 기이한 열기로 새빨갛게 상기되었다.
“슬픔을 겪고 싶지 않아요.”
괴인은 묵묵히 유소응을 내려보았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소응의 작은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을 수 있겠느냐?”
유소응은 작지만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물러서지 않겠느냐?”
“예.”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괴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떠한 최후(最後)를 맞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느냐?”
유소응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예.”
괴인은 갑자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라.”
유소응은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온몸이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물을 한 잔 따라 와라.”
유소응은 침대 옆의 탁자에서 물을 따라 왔다.
“오른 손을 내밀어라.”
유소응이 손을 내밀자 괴인은 그의 약지 끝을 손톱으로 살짝 그었다. 그러자 약지 끝이 갈라지며 피 한 방울이 흘러 나왔다. 괴인은 그 핏방울을 물잔에 떨어지게 했다.
“무릎을 꿇어라.”
유소응은 황급히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괴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 속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유소응이 들고 있는 잔을 받아 한 모금을 들이켰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 번 절을 해라.”
유소응이 절을 하는 동안 괴인은 유소응의 약지에서 흘러 나온 피가 섞인 물을 그의 주위에 뿌렸다. 절을 마치자 그는 유소응의 앞에 앉았다.
“이제 내게 아홉 번 절을 해라.”
유소응은 그것이 말로만 듣던 배사지례(拜師之禮)임을 깨닫고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괴인을 향해 아홉 번 절을 했다. 절을 모두 마치자 괴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너는 종남파의 이십이대 제자가 되었다. 네 위로는 사형(師兄)이 한 사람 있으며, 다섯 명의 사숙(師叔)과 두 명의 사고(師姑)가 있으니 잘 기억해 두기 바란다.”
유소응은 의젓하게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원래는 본파로 가서 조사(祖師)의 위패 앞에서 예식을 차려야 했으나 사정이 있어 간소하게 마쳤다.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정식으로 입문(入門) 절차를 거칠 테니 그리 알아라.”
“예.”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 보아라.”
유소응은 주저하지 않고 괴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을 물었다.
“제자는 사부님의 함자를 알고 싶습니다.”
“나는 종남파의 이십일대 장문인인 진산월이다.”
장문인이란 말에 유소응의 작은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토록 남루한 행색의 괴인이 일파(一派)의 장문인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유소응은 머뭇거리다 다시 물었다.
“본파는 어떤 문파입니까?”
“종남파란 이름을 처음 들었느냐?”
유소응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강호에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이란 유명한 문파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다른 문파는 알지 못합니다.”
진산월은 종남파의 내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본파는 시백여 년 전에 하굉도(何宏道)라는 분에 의해 세워졌다. 처음에는 도가(道家)에 많이 치우쳤으나, 오대(五代)째 장문인인 종남일수(終南逸?) 위청(葦淸) 조사 이후로 도가일색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지금부터 이백 년 전에 십이대 조사들인 종남오선 다섯 분이 활동할 때 가장 번성했고, 지금은 다시 그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종남오선이란 어떤 분들입니까?”
진산월은 종남오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소응은 눈을 반짝인 채 정신없이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오래된 전설(傳說)이나 신화(神話)를 듣는 것처럼 진산월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말로만 듣던 허공을 날며 바위를 맨손으로 부수는 신선(神仙)들이 현실로 나타나 코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산월이 종남오선과 그 외에 종남파의 이름난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쳤을 때는 벌써 동쪽 하늘에서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지금은 우선 네 몸을 완쾌하는 데 집중하도록 해라. 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본파의 기본적인 심법구결(心法口訣)을 하나씩 알려주겠다.”
유소응은 당장은 무공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진산월의 말에 내심 서운한 생각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익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몸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배우려다가는 자칫 나쁜 버릇이 들 수 있다. 그러니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우선은 치료에 전념하도록 해라.”
“예.”
그제서야 진산월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산, 새벽바람이 찰 텐데 이제 그만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며 주루의 주인이 들어왔다. 그는 진산월을 향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장문인께서 제자를 얻으신 것을 앙축(仰祝)드리옵니다.”
“당신도 참 무던하군. 문 앞에 온 지 반시진이나 되도록 들어오지 않고 그 앞에 서 있을 게 뭐요? 내가 부르지 않았다면 영영 안 들어오려고 했소?”
정산은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장문인께서 제자분과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진산월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 더 이상 그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유소응을 돌아보았다.
“소응, 이 사람은 본파의 오래된 친구로, 이름은 정산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정 대가(丁大哥)라고 불러라.”
정산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대가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냥 이름을 부르라고 하십시오.”
“사양하지 마시오. 당신은 그런 호칭을 들을 자격이 있소.”
유소응이 재빨리 정산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정 대가,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유소응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산은 그의 인사를 받자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어거 참, 소인은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유 공자(劉公子)께선 편하게 말을 놓으십시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나친 겸양은 미덕(美德)이 아니오. 그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강호(江湖)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당신이 잘 지켜보며 도와 주었으면 하오.”
“이를 말씀입니까. 미력한 힘이나마 공자를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산은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몰라했다.
정산은 원래 대대로 종남파의 식솔(食率) 중 하나였다. 정산의 아버지, 그 아버지 때부터 종남파의 녹(祿)을 먹고 살아왔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입문한 제자는 아니었고,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 정산의 아버지 때 당시 장문인인 태평검객 임장홍이 그들 집안의 그동안의 공(功)을 생각해서 그들을 하인(下人)의 적(籍)에서 삭제하고 종남산 산자락에 작은 주루를 지어 주었다.
정산 부자는 그런 임장홍을 생명(生命)의 은인(恩人)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정산의 아버지는 노환(老患)으로 세상을 떠났고, 정산 혼자 주루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주루는 종남파의 소속이 아니었고 완전한 정산의 소유였으나, 정산은 마음속으로 늘 자신이 종남파의 식솔이라 생각했다. 가끔 이 부근을 지날 때면 연락도 없이 진산월은 사제들을 데리고 불쑥 나타나 매상을 올려 주었다.
덕분에 외진 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정산의 가게는 그런대로 잘 꾸려지고 있었다.
하나 얼마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삼년 전에 진산월이 실종된 후 종남파의 제자들은 이 주루를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설강가상으로 육 개월 전에 초가보가 종남파를 침략하여 제자들을 내쫓고 종남파를 접수한 이후 손님이 끊기다시피 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도 힘들었다.
정산이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마음속의 본가(本家)로 생각하고 있던 종남파가 멸문하였는데도 자신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깊은 자괴감(自傀感)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종남파의 제자들이 무사히 살아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낙(樂)도 없이 시름에 겨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삼년 전에 신비스럽게 실종되었던 진산월이 홀연히 그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정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 전에 없던 생기(生氣)가 돌고 행동거지에 활력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산월의 외모와 풍기는 분위기는 삼년 전과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건장했던 체구는 깡말라서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고, 왼쪽 뺨에는 깊은 상처가 있어 얼굴 전체가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냉혹해 보였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던 얼굴 표정 또한 얼음을 한 겹 씌워 놓은 것처럼 차갑고 냉랭했다.
그래도 정산은 그렇게 변한 그의 모습이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외모야 어떻게 변했건, 그의 마음속 본성(本性)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 비슷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진산월이란 인간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심한 고통을 겪었다 할지라도 본연의 순수함과 선량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진산월이었다.
오히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만 머금고 있어서 가끔은 답답함을 느끼게 했던 진산월의 인상이 일파의 장문인다운 묵직함과 엄격함을 풍기는 것 같아 듬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제 진산월은 처음으로 정식 제자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비록 볼품없고 왜소한 어린 소년이었으나, 문파의 제자를 새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나름대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종남파가 아직 죽지 않았으며, 그 생명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산은 종남파가 다시 일어나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벅차 올라서 공연히 눈물이 나왔다.
잠시 말못할 감회에 젖어 있던 정산은 문득 생각난 듯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참, 장문인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오?”
“대왕루가 초가보의 손에 넘어간 건 아시고 계시지요?”
“그렇소.”
“그런데 어제 저녁에 누군가가 대왕루에 찾아와서 대왕루의 권리는 자신에게 있으니 넘기라는 소란을 피웠다고 합니다.”
진산월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게 누군지 알고 있소?”
“저도 말로만 들은 것이라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오늘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주루를 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협박을 했다고 하니 오늘 가 보시면 누군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
“정말 배짱 한번 좋은 사람입니다. 대왕루가 초가보에 넘어갔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공개적으로 초가보에 도전(挑戰)을 하다니 말입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산은 그가 상념에 잠겨 있음을 알고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그는 유소응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인께 목욕물을 데워 놓았으니 잊지 말고 꼭 목욕을 하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놓으세요, 정 대가.”
정산은 울상을 하며 도리질을 했다.
“아이고, 제발 대가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을 들으면 전 제 명에 못 삽니다. 정 부르고 싶으시면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정 아저씨.”
정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삼년 만의 목욕이었다. 뜨거운 물에 전신을 담그고 있으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회가 치밀어 올랐다. 남들은 목욕을 하면 시름을 잊는다고 하는데, 그는 오히려 더욱 많은 시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종남파에 있을 때 그의 목욕물을 주로 준비해 준 사람은 임영옥이었다. 아무리 진산월이 자기가 직접 한다고 해도 언제나 임영옥이 그보다 빨리 목욕물을 데워 놓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진산월도 포기하고 말았다.
진산월이 목욕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만 하면 임영옥이 어떻게 알았는지 꼭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다. 언젠가 진산월은 신통한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사매는 어떻게 내 마음을 그리 잘 알지? 목욕하고 싶을 때마다 꼭 미리 준비하니 말이야.”
임영옥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웃지만 말고 말해 줘.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정말 알고 싶으세요?”
“그래, 사매가 말 안 해 주면 난 목욕할 때마다 고민하다가 폭삭 늙어 버릴지도 몰라.”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형은 몸이 근지러우면 콧등을 긁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사형이 콧등을 긁을 때마다 목욕물을 준비한 거예요.”
진산월은 눈을 크게 떴다.
“어? 나한테 그런 버릇이 있었나? 난 몰랐었는데……”
“자기가 알면 버릇이 아니지요. 그것 외에도 몇 가지 버릇이 있어요. 멋쩍거나 쑥스러우면 뒤통수를 긁는다든지, 술이 마시고 싶으면 혀를 낼름거리고, 거짓말을 할 때면 아주 정색을 하지요.”
“난 거짓말 한 적이 없는데……”
“바로 지금처럼 그런 표정을 짓는 거예요.”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활짝 웃었다. 진산월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부신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한데,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생각하기만 하면 진산월의 가슴은 예리한 칼로 도려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지난 삼년 동안 그는 그녀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 모진 고생을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목표했던 일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낯선 객방에서 뜨거운 물에 전신을 담그고 있으니 그녀에 대한 생각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물밀듯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것은 그리움이기도 했고, 애절함이기도 했다. 또 표현 못할 깊은 슬픔이기도 했다.
그녀와의 약속은 일년이나 지나 있었다. 그녀에게 반드시 데리러 가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그는 지키지 못한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녀와의 약속을 어겨 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마음속의 비통함은 더욱 절절했다.
지금의 그녀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을지 그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그녀에게 달려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하나 지금은 갈 수 없었다. 적어도 흩어진 사제들을 찾고 종남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전에는 그녀에게 갈 수 없었다.
무슨 낯으로 그녀를 만난단 말인가?
‘사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우리의 꿈을 이룰 때까지 조금만 더……’
진산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목욕을 마친 진산월은 거울엥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본 것은 삼년 만이었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벌거벗은 알몸은 뼈 위에 근육만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예전의 당당하고 풍채 좋았던 모습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얼굴 자체도 변한 것 같았다.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거울 속의 인물이 자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굴의 살이 모두 빠져서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와 있었고, 움푹 파인 눈밑으로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져서 얼굴을 더욱 강퍅하게 보이게 했다.
그런데도 왼쪽 뺨의 흉터는 오히려 두드러져 보였다.
입술을 조금 움직이자 흉터 전체가 괴이하게 꿈틀거려 얼굴 전체를 냉혹한 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전에는 수염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방금 깎았는데도 턱밑으로 검은 수염 자국이 나 있었다.
진산월은 손을 들어 자신의 메마른 뺨과 흉터를 만져 보았다.
거울 속의 사람이 자신과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누구라도 삼년 동안 자신과 같은 생활을 했다면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처절한 싸움의 연속뿐이었다.
검과의 싸움,
자신과의 싸움,
신념과의 싸움……
그 모든 싸움에서 단 한 번이라도 졌다면 그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정작 중요한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하고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꿈(몽)과의 싸움……
사부가 꾸었던 싸움,
사제들이 꾸었던 꿈,
그리고 사매와 자신이 함께 꾸었던 그 꿈……
그 싸움을 과연 이길 수 있을지 그는 솔직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길 수도 있고, 어쩌면 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기지도 패하지도 않는 싸움을 언제까지고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 그 꿈마저 없다면 살아 있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진산월은 거울 속의 비쩍 마르고 우울한 눈빛의 사나이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거대한 꿈에 짓눌려지지 않기를 정말 간절히 바랐다.
그 사나이가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되찾을 수 있기를 절실히 염원했다.
‘할 수 있는 거지?’
진산월은 거울 속의 사나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정말 할 수 있는 거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 꿈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거지?’
사나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진산월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사나이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나 사나이의 대답은 결코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