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9화
제75장. 인심막측(人心莫測)
겨울의 산(山)은 때로는 인자하고, 때로는 혹독하다.
가끔은 뜻하지 않은 선물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기도 한다.
동중산은 그 선물과 시련을 동시에 받았다.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눈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버렸다.
덕분에 그가 남긴 발자국과 핏자국들이 눈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비록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붙잡은 토끼를 이용해 상대의 눈을 속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에 불과했다.
다시 비폭의 동굴에서부터 그들이 추적을 시작한다면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다른 건 몰라도 눈 위의 발자국과 핏물은 어떤 방법으로도 없앨 수가 없었다.
혜공과 곽우초는 모두 부상이 적지 않았다.
특히 무공을 모르는 혜공의 상처가 심각했다.
연막탄이 터질 때 백동일이 마지막 순간에 펼쳐낸 검광은 혜공의 가슴팍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검광에 격중된 가슴이 심장이 있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혜공은 즉사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어 이런 식으로 조그만 더 지나면 출혈 과다로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곽우초의 상태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백동일의 공격을 알아차리고 급히 피했으나 왼쪽 팔에 일검을 맞고 말았다.
비록 팔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전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컸다.
동중산이 급한 대로 지혈을 하긴 했으나,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완전히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중산은 자신들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는 머지않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일단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게다가 점점 눈발이 굵어져서 종내에는 한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든 세찬 눈보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런 날 부상한 사람을 데리고 길을 간다는 것은 자살(自殺)행위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마땅히 눈보라를 피할 만한 곳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눈발이 워낙 거세게 뿌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일대의 지형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급히 도망치다 보니 앞뒤를 잴 겨를이 없이 무작정 길이 험한 곳으로만 움직였던 것이다.
원래 동중산은 비폭의 동굴 외에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몇 군데 은밀한 은신처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하나 그 은신처들은 그 혼자만이 간신히 머무를 수 있을 뿐, 두 명이나 되는 부상자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곳들이었다.
결국 그가 향한 곳은 서북방향이었다.
종남산의 동남쪽에 있는 초가보를 피해 그 반대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서북쪽의 산세 워낙 험하고 가팔라서 맑은 날에도 산을 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토록 심한 눈보라 속에서는 무림의 절정고수라 해도 함부로 운신(運身) 하기가 힘들었다.
무공도 모르는데다 부상까지 심한 사람을 둘씩이나 대동하고는 더욱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동중산은 자신이 안고 있는 혜공을 내려다보았다.
혜공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그의 팔에 축 늘어져 있었는데, 가슴에서 나오는 피는 멎었지만 전신의 피부가 푸르뎅뎅하게 얼어 있고 얼굴에는 핏기가 한 점도 없어서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출혈 과다로 죽기 전에 먼저 얼어 죽을 판이었다.
동중산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문득 그의 눈에 하나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동중산은 눈이 번쩍 뜨여졌다.
비록 그 불빛은 세찬 눈보라에 가려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순간적이나마 똑똑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저쪽으로 갑시다.”
그는 혜공을 안은 채 불빛이 반짝였던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곽우초는 왼팔을 붙잡은 채 힘겨운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십여 장쯤 전진하자 다시 한차례 불빛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좀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피워 놓은 모닥불이었다.
동중산과 곽우초는 정신이 번쩍 나서 그 모닥불이 반짝이는 곳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모닥불은 하나의 동굴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굴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가리고 있어서, 안에서 모닥불이 타오르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눈보라 속에서는 이곳을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동굴 속은 입구에 있는 바위에 막혀 눈보라도 들이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바깥과는 천지 차이로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온 동중산과 곽우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동굴의 깊이는 오 장쯤 되었는데, 그다지 크지 않아서 누군가가 있다면 발견하지 못할 리 없었다.
사람도 없는 동굴에 모닥불만 타오르고 있으니 그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함정인가?’
동중산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초가보의 고수들이 이런 날씨를 이용하여 모닥불을 피워 자신들을 유인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밖에서 한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정말 지독한 날씨로군.”
그 사람은 어깨에 쌓인 눈을 털다가 동굴 안에 자신보다 먼저 몇 사람이 와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들은 누구요?”
동중산이 보니 그 사람은 털옷을 입고 털모자를 쓴 사내였다.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어 용모를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있고 허리춤에 단도집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냥꾼인 모양이었다.
사내의 손에는 방금 잡은 듯한 토끼 한 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동중산은 사내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눈을 피하다가 이곳에 불빛이 있는 것을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오. 당신이 모닥불을 피웠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불을 피운 다음에 토끼라도 한 마리 잡아 구워 먹으려고 한 것인데, 그 사이에 당신들이 왔구려.”
사내는 자신의 손에 들린 토끼를 보더니 이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거 한 마리로 이 인원이 먹기에는 간에 기별도 안 가겠는 걸. 하지만 눈보라가 너무 심해 다른 짐승을 구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같이 나누어 먹읍시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사내는 눈을 부라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래도 내가 먼저 발견한 동굴에 찾아온 손님들인데 당신들은 굶기고 나 혼자 달랑 먹으란 말이오?”
사내는 동중산이 무어라고 입을 열 시간도 주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렸다.
“조그만 기다리시오.”
그는 토끼를 들고 동굴 입구 쪽으로 가더니 단도 하나를 꺼내 능숙한 솜씨로 껍질을 벗기고 배를 갈랐다. 이어 나뭇가지 하나를 구해 토끼를 꿴 다음 모닥불로 가지고 와서 굽기 시작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토끼를 굽는 솜씨가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님을 알게 했다. 동중산은 그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 같지는 않자 곽우초를 돌아보며 물었다.
“부상은 어떻소?”
곽우초는 씁쓸하게 웃었다.
“다행히 신경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소. 상처가 깊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오. 그보다 대사님이 걱정이구려.”
동중산은 자신이 안고 있는 혜공을 내려보았다.
“조금 전에 내가 대충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전문적인 의원에게 가지 않으면 대사님을 살리기 힘들 것 같소. 혹시 쓸 만한 영약(靈藥)이라도 있소?”
“기다려 보시오.”
곽우초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은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예전에 아는 사람에게서 선물 받았던 설연실(雪蓮實)이오. 한 오십 년쯤 된 것 같은데, 이걸로 도움이 되겠소?”
동중산이 은갑을 열어보니 앙상하고 조그만 나뭇가지가 들어 있었다. 가지의 끝에는 깨알같이 작은 열매가 두 개 달려 있었다. 열매는 빨갛고 동그란데, 그것에서 청량한 향기가 풍겨져 나왔다. 동중산은 붉은 열매를 두 개 모두 땄다.
“이거라면 우선 급한 대로 대사님의 명줄을 잇게 할 수 있을 거요.”
그는 열매들을 혜공의 입에 넣은 후 목덜미를 살짝 잡았다. 그러자 혜공의 입이 열리며 설연실이 그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동중산은 다시 혜공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고 전신의 혈맥을 주물렀다. 그러자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던 혜공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혈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임시 방편으로 체내의 혈맥을 자극해서 위급한 상황은 넘겼는데, 이렇게 격발된 잠력(潛力)이 다시 가라앉기 전에 치료를 하지 않으면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을 거요.”
곽우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데 어디 가서 의원을 구한단 말이오? 더구나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사냥꾼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십여 리쯤 가면 서십왕촌(西十王寸)이라는 마을이 있소. 그곳에 가면 의원을 구할 수 있을 거요.”
동중산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정말이오?”
사내는 털북숭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매달았다.
“속고만 살았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조금 있다가 눈보라가 잠잠해지면 같이 갑시다. 나도 마침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말이오.”
이어 그는 자신이 굽고 있는 토끼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두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 오시오. 다 구워진 같소.”
그때는 이미 동굴 전체에 고기가 익어 가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일단 냄새를 맡지 않았으면 모르되, 그 냄새를 맡게 되자 동중산과 곽우초는 갑자기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 모닥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를 지겠소.”
동중산의 말에 사내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기껏 토끼 한 마리 나눠 먹는 걸 가지고 신세는 무슨. 정 신세라고 생각되거든 서십왕촌에 가서 나한테 술이나 사시오.”
“그러겠소.”
사내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내 뱃속은 술항아리 열 개는 들어가야 그럭저럭 채워진다오.”
동중산은 이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사내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예로부터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심성(心性)이 나쁜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내는 토끼고기를 정확히 삼 등분하여 두 사람 앞에 하나씩 내밀었다.
“아쉽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때웁시다.”
동중산과 곽우초야 불평을 할 리 없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폭설이 내리는 밤에 깊은 산의 동굴에 앉아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토끼구이를 먹는 것은 나름대로 각별한 맛이 있었다. 술이라도 한 병 있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으리라. 토끼고기는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사내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다시 히죽 웃었다.
“여럿이 먹으니까 더 맛있군. 평소에는 혼자 먹었는데, 지금과 같은 맛은 느끼지 못했소.”
동중산은 마지막 남은 토끼 뼈의 고기를 발라먹으며 물었다.
“이 근처에 사시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아니라 화산 북쪽에 살고 있소.”
“그런데 여기까지 웬일로 온 거요?”
“서십왕촌 근처에 백학사(白鶴寺)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에 있는 사람을 찾아 가는 중이었소. 원래 오늘 저녁이면 충분히 도착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서 여기에 머무르게 된 거요.”
이어 사내는 동중산과 곽우초, 그리고 바닥에 누워 있는 혜공을 차례로 살펴보더니 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 신색을 보니 유람을 나온 사람들 같지는 않구려.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동중산은 사내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나도 당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겠소.”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소. 나는 그냥 평생 사냥만 하고 살아온 놈이니까 남에게 말못할 비밀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럴듯한 비밀이라도 하나 만들어 둘걸 그랬나?”
종남파가 초가보에 침입을 당한 후 좀처럼 웃어 본 적이 없는 동중산이었으나,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싯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그를 미소짓게 한 것이다. 사내는 동굴 밖을 잠시 내다보더니 다시 모닥불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소. 눈발이 약해질 기미가 안 보이는구려.”
이어 그는 자신이 먼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내 그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곽우초는 그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하고는 동중산을 쳐다보았다.
“이자를 믿어도 되겠소?”
“다른 선택이 없지 않소? 무엇보다 우리는 서십왕촌으로 가는 길도 모르니 말이오.”
“그렇긴 하지만……”
동중산은 자신도 팔베개를 하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어쨌든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지금은 눈이라도 붙여 두는 게 좋을 것 같소. 어쩌면 내일은 아주 긴 하루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오.”
동중산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 위를 걷는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척 상쾌한 일이었다. 하나 걸어야 하는 곳이 눈이 무릎까지 빠지고 언제 미끄러질지도 모르는 비탈진 산등성이라면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이다. 밤사이에 내린 폭설로 사방은 그야말로 백색천지(白色天地)가 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눈을 피했던 동굴은 가파른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어서 평탄한 곳으로 내려오기까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동중산과 곽우초는 무공을 익힌 고수들인데도 산등성이를 내려왔을 때는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사내는 별로 지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뒤집어쓰다시피 한 두 사람보다 옷도 깨끗했고, 얼굴도 훨씬 멀쩡했다. 그렇다고 특이한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았다. 무공을 익힌 고수라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동작에서 은연중에 그러한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동중산은 신기한 생각이 들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당신은 참 몸이 날래구려. 눈길을 걷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거요?”
사내는 털북숭이 얼굴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특별한 비법이랄 게 있겠소? 어려서부터 눈 덮인 산을 누비고 다녔더니 요령이 생긴 거지. 게다가 난 날 때부터 몸이 남들보다 빠른 편이었소.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비표(飛豹)라고 부르기도 했소. 비표 장승표, 그게 내 이름이오.”
“그러고 보니 아직 당신의 이름도 묻지 않았구려. 나는 동중산이라 하오.”
“참 빨리도 말하는구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당신처럼 자기소개를 무척 늦게 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는데……”
장승표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갑자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상당히 오래되었군. 아무튼 무척 재미있는 친구였소. 언젠가 꼭 나를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동중산은 그 재미있는 친구가 누구인지 물으려다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것 같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군. 서십왕촌은 어느 쪽에 있소?”
장승표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넘으면 바로 서십왕촌으로 갈 수 있소. 부지런히 걷는다면 점심은 그곳에서 먹을 수 있을 거요.”
“어서 갑시다.”
동중산은 혜공을 업은 채로 발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곽우초와 장승표가 따랐다. 하나 잠시 후에는 장승표가 가장 앞섰고, 그 뒤를 동중산과 곽우초가 따르는 형국이 되었다. 커다란 봉우리 하나를 넘었을 때는 천하의 동중산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말았다. 장승표는 지친 기색도 없이 산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비탈을 지나 옆으로 휘어진 길이 보이지요? 그 길을 따라 조그만 걸어가면 서십왕촌이 나오게 되오.”
“서십왕촌은 어떤 곳이오?”
“별로 큰 마을은 아니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백학사가 굉장히 유명한 절이라, 그 절을 중심으로 제법 쓸 만한 주루들이 몇 개 있소.”
동중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백학사에서 만나려는 사람은 누구요?”
“친구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놈인데, 오래 전에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며 마을을 뛰쳐나왔소. 그동안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고생을 꽤나 한 모양인데, 얼마 전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연락이 왔소.”
“그럼 친구분이 중이 된 거요?”
장승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나도 그게 좀 이상하긴 하오. 그놈은 불문(佛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라서 말이오. 사실 백학사는 몇 년 전에 사냥을 다니다가 우연히 들른 곳인데, 그때 주변에 아주 음식을 맛있게 하는 주루를 발견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그때는 스님보다 공부하러 온 유생(儒生)들이 더 많았는데 그놈이 유생이 되었나? 그것도 별로 믿어지지 않는데……”
장승표는 이내 히죽 웃었다.
“어찌되었건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장승표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는지 걸음걸이가 훨씬 빨라졌다. 덕분에 동중산과 곽우초는 그를 따라가느라 몇 배나 고생을 해야 했다. 비탈을 돌자 과연 장승표의 말대로 제법 커다란 마을이 나왔다. 마을은 움푹 들어간 분지(盆地)의 안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인가(人家)는 수백 채밖에 되지 않았으나 중앙으로 제법 커다란 도로가 나 있었다. 도로의 끝에는 한 채의 커다란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
“저곳이 백학사요.”
장승표가 손가락으로 절을 가리켰다.
“저 절의 후원에는 아주 커다란 철종(鐵鐘)이 있는데, 그 모양이 실로 볼 만하오. 이따가 잊지 말고 꼭 구경하시오.”
“알겠소. 그보다 가까운 곳에 의원이 있으면 알려주시오.”
장승표의 시선이 동중산의 등에 업혀 있는 혜공에게로 향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저분 노승의 상태가 급하지. 따라오시오.”
장승표는 마을을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마을로 들어선 장승표가 동중산과 곽우초를 안내한 곳은 중심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모옥(茅屋)이었다. 동중산은 모옥이 워낙 초라하고 겉에는 현판 같은 것도 안 붙어 있자 의아한 얼굴로 장승표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의원이 있다는 말이오?”
장승표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솜씨 좋은 의원이 있소.”
이어 그는 모옥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소리쳤다.
“갈 노인(葛老人)! 계십니까?”
모옥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장승표는 좀더 목소리를 높였다.
“갈 노인! 안 계세요?”
그러자 모옥 안에서 벼락 같은 폭갈이 터져 나왔다.
“어떤 놈인데 대낮부터 남의 집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거냐?”
장승표는 놀라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신세졌던 장승표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모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모옥 안에서 비쩍 마르고 차갑게 생긴 노인이 슬쩍 얼굴을 내비쳤다. 노인은 장승표를 쳐다보더니 이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네놈은 또 어디가 아파서 찾아온 거냐?”
“제가 아니라 이분 노승 때문에 온 겁니다.”
장승표가 동중산이 업고 있는 혜공을 가리켰다. 하나 노인은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제 앞가림도 못하는 놈이 남에게 신경 쓰기는…… 일없으니 다른 데나 가 봐라.”
다른 사람 같으면 이렇게 매몰찬 말을 들었으면 얼굴을 붉힐 법도 한데 장승표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갈 노인은 여전하시군요. 헤헤…… 보기 좋습니다. 제가 일전에 갖다 드린 쌍두사(雙頭蛇)의 쓸개가 효과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싶은 게냐?”
“제가 얼마 전에 눈 속을 헤매다 백사(白蛇) 한 마리를 잡았지 뭡니까?”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게 정말이냐?”
“제가 언제 노인에게 거짓말하는 거 봤습니까?”
노인은 장승표를 쏘아보았다.
“하긴 네놈은 너무 멍청해서 그런 건 하지도 못하지.”
구박을 받으면서도 장승표는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멍청한 게 아니라 제 인간성이 워낙 좋은 겁니다. 헤헤…… 아무튼 이번에 그 귀한 백사를 잡게 되어서 갈 노인께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장승표는 품속에서 작은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노인이 모옥 밖으로 걸어나왔다. 키가 난쟁이를 간신히 면할 정도로 작고 왜소해서 더욱 볼품이 없었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가죽주머니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노인은 가죽주머니를 슬쩍 열어보더니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멍청한 놈이 재주 하나는 좋구나.”
“그런 재주도 없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기어들어와라.”
장승표는 동중산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모곡 안으로 들어갔다. 동중산과 곽우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모옥 안으로 들어가자 매캐한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의원이 맞기는 맞나 보군. 그런데 저 신경질적으로 생긴 노인이 혜공대사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을까?’
동중산은 노인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내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장승표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백사라면 상당히 귀한 영물(靈物)인데, 이제 겨우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을 위해서 그것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옥 안은 의외로 넓었다. 몇 개의 방이 줄지어 늘어져 있는데, 장승표는 그중 가장 끝 쪽의 방 앞에 선 채로 동중산을 손짓해 불렀다.
“동 형, 여기요.”
동중산이 그 방으로 들어가니 방 한가운데에는 제법 커다란 침상이 놓여 있었다. 노인은 침상 한쪽에 쭈그리고 앉은 채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빨리 여기다 뉘어라.”
그 말버르장머리가 하도 고약해서 동중산은 이대로 몸을 돌려 나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나 장승표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업고 있는 혜공을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노인은 진맥할 생각도 하지 않고 혜공의 피가 묻은 상의를 쭉쭉 찢었다. 오른쪽 가슴에 아직 아물지 않은 검흔(劍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노인은 검흔을 슬쩍 살펴보더니 혜공의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도저히 의원의 동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투박한 손길이었다. 동중산이 어이가 없어 무어라고 한마디하려 할 때 노인이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이 땡중에게 뭘 먹인 거냐?”
동중산은 움찔하여 대답했다.
“설연실 두 알이오.”
노인이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멍청한 짓을 했군.”
“그게 무슨 말이오?”
“설연실은 한기(寒氣)를 몰아내고 양기(陽氣)를 보(補) 할 때 쓰는 거다. 겨울에 먹으면 좋기야 하겠지.”
“그러면 됐지 않소?”
노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앞뒤가 꽉 막힌 놈, 이 땡중이 당한 상처는 양기(陽氣)를 띤 검기(劍氣)에 당한 거다. 그런데 거기에 양기를 일으키는 영물을 먹였으니 불 난데 부채질한 꼴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동중산은 평소에는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이오?”
“보고도 모르냐? 지금처럼 상처가 벌어져서 오래도록 다물어지지 않는 건 양강지기(陽剛之氣)에 당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음한지기(陰寒之氣)에 당하면 상처가 보통 때보다 빨리 닫혀지.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는 놈이 무림인이라고 설치고 다니니 정말 한심한 일이로군.”
노인의 가혹한 말에도 동중산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미처 그 점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늦었단 말이오?”
“늦기는, 좀더 귀찮게 되었을 뿐이지. 아무튼 이제 모두 꺼져라. 눈앞에서 얼쩡거리며 방해하지 말고.”
동중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뒤따라 나오던 장승표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너무 언짢아하지 마시오. 성질은 저래도 솜씨 하나는 확실하니까.”
“저런 노괴(老怪)를 어떻게 알게 되었소?”
“몇 년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했지 않소?”
“그랬소.”
“사실 그때 사냥을 하다가 곰의 앞발에 부상을 당해 상처가 몹시 심했었소. 간신히 곰을 죽이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그 노인의 집이었소.”
동중산은 그 괴팍한 노인이 장승표를 구해 주었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노인도 의외로 좋은 구석이 있나 보구려.”
장승표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쓴웃음으로 변했다.
“그게 아니라 그때 내가 잡은 곰이 희귀한 흑웅(黑熊)이었소. 그런 곰의 쓸개는 돈으로 환산하기도 힘들 정도로 귀하지.”
그제서야 동중산은 사정을 짐작했다.
“그럼 그 곰의 쓸개 때문에 당신을 구했단 말이오?”
“그런 셈이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쓸개는 약값 대신에 자신이 챙겼다고 말했으니까.”
동중산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군.”
“그래도 그냥 곰 쓸개만 가지고 가 버렸을 수도 있는데 나를 구해 주었으니 나쁘게 볼 것만도 아니오. 아무튼 그 뒤로 나는 가끔 귀한 영물을 잡으면 그에게 갖다 주었고, 대신 그에게서 약재(藥材)를 얻었지.”
장승표는 자신의 왼쪽 목덜미를 내밀었다.
“보시오, 흔적이 있소?”
동중산이 보니 장승표의 목은 아주 깨끗했다.
“무슨 흔적 말이오?”
장승표는 다시 옷을 추스르며 웃었다.
“곰의 앞발에 맞은 부분이 바로 여기였소. 당시에는 피부가 거의 너덜너덜해져서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알아 차릴 수 없을 정도이니 그 노인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지 않겠소?”
동중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구려. 그 노인의 이름은 뭐요?”
“나도 잘 모르오. 단지 예전에 물었을 때 이름 따위는 알아서 뭐 하려느냐며 정 부르고 싶으면 갈가(葛哥)라고 부르라고 해서 나는 그 뒤로 갈 노인이라고 부르고 있소.”
동중산은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당금 강호에서 그런 성을 가진 의원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원래 곰의 앞발에는 세균이 많이 있어서 그것에 맞은 상처는 쉽게 아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냥꾼 중에서 곰에게 당한 사람은 얼굴이나 몸에 참혹한 상처를 남긴 채 평생을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고쳤다는 것은 노인의 의술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음을 뜻했다.
그런데도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세상은 넓고 기인(奇人)은 장강(長江)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중산이 황급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찌 되었소?”
노인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되긴, 다 제 타고난 복(福)대로 사는 거지.”
동중산과 곽우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사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오?”
노인이 꽥 소리를 질렀다.
“누가 죽었다고 했냐? 저 땡중은 명줄이 워낙 길어서 앞으로도 수십 년은 팔팔하게 살아 있을 거란 말이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노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더니 장승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어디서 저런 떨거지들을 데리고 온 거냐?”
장승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요?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 같은데요.”
“괜찮긴, 얼굴에 흑살기(黑煞氣)가 가득해서 조만간 참변을 면치 못할 상인데 괜찮냐?”
장승표의 안색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네놈은 이제 귀까지 막혔느냐? 저 땡중이야 천수(天壽)를 누릴지 몰라도 나머지 두 놈은 횡액을 당할 거란 말이지.”
장승표는 울상을 했다.
“아이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하늘의 뜻이니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동안의 인연이란 게 있는데 어찌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갈 노인께서 제발 방도를 알려주십시오.”
노인은 혀를 찼다.
“참 답답한 놈일세. 그놈들이 네 형제라도 된단 말이냐?”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네놈이 이렇게 안달복달하느냐?”
“하지만 사람이 죽는다는데 가만히 있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왜 말이 안 돼? 네놈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어서 꺼져라.”
장승표는 노인의 바지저고리라도 붙잡으려는 듯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갈 노인, 그동안의 쌓아온 정(情)을 생각해서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사이에 무슨 정이 있다고 이 난리냐?”
“갈 노인……”
노인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이구, 이 밥통 같은 놈. 그래, 백사 값을 조금 더 쳐준다고 생각하자.”
장승표는 반색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둘 다는 안 돼. 둘 중 하나만 된다.”
“누구를 말씀입니까?”
“회색 옷을 입은 놈은 얼굴 전체에 흑살기가 퍼져 있어 노부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놈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검은 옷을 입은 애꾸녀석은 흑살기가 아직 미간에만 머물러 있으니 잘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승표는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곽우초이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동중산임을 알아차리고 굳었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사실 별로 말이 없는 곽우초보다는 그동안 말상대가 되어 주었던 동중산에게 더 애착이 갔던 것이다.
노인은 표정만으로도 장승표의 마음을 알아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네놈도 참 병(病)이다. 그런 애꾸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실실거리는 거냐?”
“동 형은 남자다운 매력이 있어서 저하고 말이 통합니다.”
“그건 그놈이 너와 똑 같은 멍청이라서 그렇겠지.”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하면 동 형을 살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노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툴툴거리고 있더니 품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옛다.”
“이게 뭡니까?”
“그 애꾸녀석의 미간에 있는 흑살기가 퍼져 있지 않고 뭉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음독(陰毒)에 의한 화(禍)를 입게 될 것 같다. 그때 그 약병에 든 걸 사용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네놈의 인사 따위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다. 아무튼 이걸로 백사의 값은 두둑이 쳐주었으니 두 번 다시 그걸로 내게 공치사할 생각 마라.”
노인은 장승표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모옥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승표는 멀어지는 노인의 뒷등을 향해 몇 번이고 계속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