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38화
자신이 만든 잿더미를 보던 시에프리너의 입 주위에서 다시 벼락이 엉겼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날아올랐습니다. 추락하지 않는 드래곤은 빙글빙글 돌며 높이, 더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나선 계단을 밟아 천공으로 솟아오르는 그녀 주위로 새카만 구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허 공에는 거꾸로 매달린 화산 같은 것이 나타났어요. 대지를 향해 분화구를 벌리고 있는 화산이었지요.
그녀가 날아오르고 얼마 후 이루릴과 아일페사스, 왕지네, 그리고 왕자가 나타났습니다. 시에프리너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일페사스는 전 장의 참혹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그때 이루릴이 소스라치는 기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바람이!”
이루릴은 바람의 정령들이 일으키고 있는 광기를 느꼈어요. 오랜 친구의 심상찮은 표정을 본 아일페사스는 재빨리 하늘 위를 향해 마법으로 의사를 보냈어요.
‘시에프리너, 진정해! 어서 내려와!’
되돌아온 시에프리너의 대답은 차라리 벼락에 가까웠습니다. 아일페사스는 머릿속에 낙인이 찍힌 듯한 충격에 나동그라질 뻔했지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 아일페사스는 왕자를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릎에 힘을 주었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긴 했지만 드래곤 레이디는 쓰러지지 않았어 요. 아일페사스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아직도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는 것 같은 시에프리너의 대답을 떠올렸습니다.
‘내 알!’
허공에 매달린 분화구에서 새하얀 번개들이 단속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지를 불사르는 그 번개들은 충분히 파괴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거기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거대한 힘의 미미한 분출로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점멸하는 구름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힘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분화구에서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이루릴에게도 그런 번개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순간적으로 이어버린 새하얀 나무는 어지간한 도시의 한 구역만 한 굵기였습니다. 그것도 거의 일 초 동안 계속되는 어처구니없는 번개 였지요. 그 번개가 뿜어낸 가공할 열이 주변의 공기를 불살랐습니다. 진공 상태에 이를 정도는 아니지만 뜨거워진 공기가 미친 듯이 상승할 정도는 되었지요. 그리하여, 자연 상태에선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고대의 마법사들 중 일부에게나 알려져 있는 대단히 독특한 자연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 습니다. 화염 폭풍이지요.
원리는 간단합니다. 주전자 속의 물이 끓을 때 부글거리는 것을 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갑자기 뜨거워진 공기가 급히 상승하며 주변의 공기가 미친 듯이 중심부로 몰아쳤습니다. 달아오른 공기는 마찰열로 불탔지요. 화염의 질풍이 땅을 휩쓸었습니다. 그런 것이 일어 나면 바람이 불지 않는 건물 안이나 지하에 있더라도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열기가 건물 안쪽이나 지하에도 파고드니까요. 삽시간에 머리카락에 불 이 붙고 눈이 타들어가지요. 기도를 타고 들어간 열기에 폐가 익어버리기 때문에 비명도 지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던, 아니,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이루릴은 황급히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을 불러 자신들의 주위를 둘러싸게 했습니 다. 그리고 아일페사스는 주위에 얼음의 벽을 쌓아올렸습니다. 그러자마자 화염 폭풍이 그들에게 들이닥쳤습니다.
불타는 공기가 그들의 주위에서 소용돌이쳤습니다. 왕지네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은 그녀에게도 잘 들리지 않았어요. 얼음의 벽은 물이 될 겨를 도 없이 그대로 수증기로 변해서 치솟았고 정령들은 고통과 분노에 몸부림쳤습니다. 드래곤 레이디는 왕자를, 이루릴은 왕지네를 꼭 끌어안았습니 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화염 폭풍이 마침내 사그라들었습니다. 아일페사스는 얼음의 벽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이루릴은 반쯤 기절한 왕지네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하늘을 살펴보았습니다.
구름도, 시에프리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하늘이었어요. 이루릴은 힘들게 시선을 끌어내렸어요. 새카맣게 변한 벌판이 보 였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검은색뿐이었지요. 예, 유골이나 치아도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는 말이지요. 들판 여기저기에 누워 있는 인간과 코볼드의 유해는 숯을 깎아 만든 인형처럼 보였습니다.
이루릴은 전장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슬픔을 느껴도 좋을 때가 아니었어요. 드래곤 레이디가 차갑게 말했습니다.
“멋지군.”
“예?”
“시에프리너가 동쪽으로 날아갔어.”
이루릴이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동쪽에는 바이서스가 있었어요. 왕과 왕비가 모두 죽었으니 그 순간엔 고아나 다름없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