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55화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보던 왕지네는 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곤 책에서 눈을 뗐어요. 그러곤 약간의 감상을 담아 바이서스 방향을 바라보았습니 다.
드래곤 레이디의 스산한 경고는 이미 전 세계에 알려졌지요. 그 때문에 바이서스의 변방 지대에선 외국 군인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어요. 물론 약화된 바이서스를 침략하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누가 그런 나라를 원하겠습니까. 역설적이지만 드래곤 레이디의 경고는 왕과 왕비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군사력이 거의 와해된 바이서스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었지요. 외국 군인들이 바이서스의 변방을 오가는 것은 밀입국자를 감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불을 꺼줄 수 없다면 불똥이 튀는 것은 막아야 했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사태는 최악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을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의 나라였던 바이서스엔 특별한 잠재 능력 같은 것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바이서스 인들은 자기 것을 지키고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싸움에 나섰습니다. 곳곳에서 신화 시대, 검과 마법의 시대에서나 일어났을 법한 영웅적인 투쟁의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그 중에는 놀랍게도 마법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최근 온갖 초자연적 인 일을 몸소 경험했던 왕지네는 그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일단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요.
마법사와 칼잡이가 등장하는 고전적인 모험담에 총잡이와 마력 높은 자동차, 그리고 최신 발명품인 비행기 등이 덧붙여진 현대적 모험담이 바이서 스를 휩쓸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기에 열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왕지네는 결국 목숨 걸고 싸울 일이 많아진 것 아니냐고 생각했지요. 영웅담이 나 모험담은 피에 젖은 무대에서만 공연되는 작품이지요. 명백히 세상은 작년보다 훨씬 살기 어려운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대해 희망 을 피력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짜증나는군.”
자신이 무의식중에 말한 줄 알고 놀랐던 왕지네는 곧 눈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보았습니다.
왕지네는 꽤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그곳까지 오면서 외국 군인들과 거의 맞닥뜨리지 않았어요. 그건 그녀의 동행자 때문이지요. 그녀의 동행은 알몸 의 남자였어요. 등에 맨 장검을 제외하면 몸에 걸치고 있는 건 허리에 두른 거친 천 한 장뿐이었지요. (왕지네는 그 천을 남자에게 강요하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 꼬락서니이니 상식을 신뢰하는 이라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겠지요. 하지만 군인들이 다가서지 않는 데는 보다 신비한 이유 도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멀찌감치에서 그들을 볼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옷까지 잃어버린 불쌍한 유민을 쏠 수 는 없다. 나는 그렇게 무도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더 무도한 다른 녀석이 쏘겠지.’ 같은 간단한 합리화로 그들을 외면하곤 황급히 도망쳤지요. 그 알몸의 남자가 앞쪽의 탑을 보며 짜증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왕지네가 책을 흘깃거리며 말했어요.
“그렇게 불편하면 드래곤 모습으로 돌아가. 프로타이스.”
말을 끝낸 왕지네는 아차 했어요. 책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프로타이스에겐 그런 식으로 제안해선 안 되는 거죠.
“안 불편해. 이젠 이 모습이 꽤 익숙해.”
왕지네는 입술을 삐죽였어요. ‘간지럽다고 옷도 못 입으면서.’ “그리고 드래곤 모습이면 시선을 끌 거라고 걱정한 건 너였잖아.” 왕지네는 지금 모습이 더 시선을 끈다고 말하려다가 포기했어요. “그렇게 불편해할 줄은 몰랐지.”
“안 불편하다니까. 아 짜증난다고 한 것? 이 탑 때문에 짜증이 나서 그래.”
“응? 아, 그래. 마법을 억제한다고 했지. 그게 기분이 나쁠 정도야?”
“기분이 나빠. 에잇. 빨리 끝내자.”
“관찰한다는 건?”
“끝났어.”
“조금만 기다려. 읽던 건 마저 읽고…………”
“범인은 영주의 아들이야.”
왕지네는 악담을 퍼부어준 다음 책을 덮었어요. 그러고는 배낭에서 갈고리들을 꺼냈어요.
그것이 그녀가 프로타이스와 한 계약이었지요. 마법이 억제되기 때문에 프로타이스가 접근할 수 없는 구층탑에 대신 침입하여 그 안에서 보물을 꺼 내는 것. 그 대가로 프로타이스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전설에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게 된 바이서스에서 그녀와 동행하며 보호해 주기로 약속했지 요.
왕지네는 그 계약이 잘 한 짓인지 의심스러웠어요. 세상이 험해졌으니 드래곤과 함께 다니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한 계약이었지만 그게 이런 꼴일 줄은 몰랐지요. ‘괴수들이 횡행하는 땅에서 등에 장검을 매고 허리에 천 한 조각 두른 근육질 남자와 동행이라니. 우와. 정말 옛날이야기 같 아…………… 창피해서 돌겠어.’
하지만 그 시점에서 그녀를 정말 짜증나게 하는 건 ‘우와, 저것 봐. 창피스럽게 몸에 저런 걸 붙이다니.’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나체의 드래곤이었 어요. 왕지네는 당신 한때 보석과 보물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지 않았냐고 쏘아주려다가 그만뒀어요. 프로타이스가 아무리 특이한 드래곤이라 해도 드래곤에게 잃어버린 보물에 대해 떠드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 같았거든요. 그래서 왕지네는 갈고리를 붙인 후 아무 말 없이 구층탑을 기어오르기 시 작했습니다.
얼마 후 왕지네는 프로타이스가 가르쳐준 보물을 가지고 도로 내려왔습니다. 구층탑의 유명한 불침전설이 무색하게 왕지네는 전에도 몇 번 해 본 적 이 있다는 듯 간단히 그 일을 해치웠어요. 프로타이스는 감탄했고,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바닥에 서서 바지를 툭툭 턴 왕지네 가 그것을 프로타이스에게 건넸습니다.
“그런 낡은 각등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 거야?”
프로타이스는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각등을 들어보였습니다. 거기엔 덮개가 달려 있었어요. 프로타이스가 말했습니다.
“이런 것에.”
각등의 덮개가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