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22화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예언자는 떠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세상과 격리될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재산을 동결해 두고 개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 것 등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전부 예언자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어요. 애초에 도망자 신분이었으니까요. 떠나는 이유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죠. 사고의 충격 때문에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으로 하면 되니까요. 편지 몇 통을 쓰는 것으로 주변 정리를 끝낸 예언자는 전날의 만찬에서 남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뭔가 더 할 일이 있지 않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3년 후의 미래로 보내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죠. 예언자는 대충 몸단장을 한 후 집을 나섰습니다.
화가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짜증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솔베스 총독부는 화가에게 본국에서 온 현상 수배서 견본을 주며 여러 장 모사하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견본이라는 것이 운반 도중 강물에라도 빠졌는지 심하게 운데다 여기 저기 접힌 자국과 삭은 자국이 있어 현상범이 여자라는 것 만 간신히 알 수 있는 꼴이었어요. 총독부쪽에서는 동봉된 용모 설명을 참조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그런 용모 설명은 중키에 보통 체격 하는 식으로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요. 하지만 화가를 정작 화나게 하는 것은 작업의 난이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백지 상태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리다 보면 내 얼굴을 그리게 돼. 그건 환쟁이 버릇이야. 그래서 관리한테 열심히 설명해 줬거든? 그런데 그 멍청한 관리가 못 알아먹는 거야. 거울을 보고 그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기 얼굴이 되냐고 묻는 거야.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수배서에 내 얼굴이라 니, 끔찍해.”
“한장 그려봐. 정말 닮게 되는지.”
“싫어. 가서 관두겠다고 말해야겠어. 어차피 남자는 여자가 머리 모양만 좀 바꿔도 못 알아본다고. 이 따위 수배서로 퍽도 잡겠다.”
“닮은 그림이면 내가 가지고 싶어서 그래.”
야유하듯 입술을 내밀던 화가는 갑자기 정색했습니다.
“무슨 일 있어?”
“좀 갑작스럽지만 나 여행을 떠나게 됐어. 좀 멀리. 3년쯤 걸릴 것 같아.”
화가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어요. 예언자는 그녀의 의혹과 공포를 보며 몸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 여행에 당신 그림을 가져가고 싶어.”
“왜 갑자기? 그 여자 때문이야?”
예언자는 눈을 크게 떴죠. 화가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곳엔 솔베스의 야만스러운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여러 점 놓여 있었죠. 예언자가 안내하고 화가가 그린 그림들이었습니다.
“어젯밤에 당신한테 갔었어. 사고 소식 들었거든. 그런데 당신 집에서 어떤 여자가 뛰어나오던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고, 괜히 무섭기도 해서 그 냥 돌아왔어. 그 여자 때문에 여행할 일이 생긴 거야?”
“아냐, 그 여자는…………”
“알아. 당신이 죽다 살아났을 때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여자겠지.”
광산에서 왕지네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하려던 예언자는 그 말이 성의조차 느낄 수 없는 거짓말처럼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언자는 초조 해졌어요.
“그림은 됐어. 나와 같이 가.”
화가는 뭐라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습니다. 그녀는 예언자에게 옆얼굴만을 보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죠. 참다못한 예언자가 그녀의 어깨 로 손을 뻗었습니다. 하지만 화가는 그의 팔을 쳐냈죠.
“내가 여행용품이야?”
“그렇게 말한 적 없어. 그런 뜻이 아니잖아.”
“가.”
예언자는 몇 번 더 애원했지만 화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예언자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몸을 돌렸습니다. 그가 작업실을 나서자마자 등 뒤에 서 빗장을 지르는 소리가 덜컥덜컥 들려왔죠. 예언자는 비통한 심정으로 문을 쳐다보았습니다.
잠시 후 작업실 안쪽에선 폭발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고름을 짜내는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