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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71화


덜 중요한 충격에서 빠져나온 이루릴은 프로타이스의 발상에 감탄했습니다. 예상했던 보답은 아니지만 그녀의 기대에 대한 보답이 있었어요. 구층 탑이 정말로 그림자 지우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는 것은 프로타이스 같은 성격이 아니고선 불가능했겠지요.

하지만 세상엔 착상 자체는 참 좋지만 현실화가 어려운 것들이 있지요. 이루릴이 보기엔 프로타이스의 발상도 그런 부류였어요. 그림자 지우개에 압 박을 가하려면 프로타이스는 그것에 가까이 접근해야 합니다. 하지만 온몸에 번쩍거리는 보석을 붙인 거대한 드래곤을 보기 위해서 엘프의 눈이 필 요한 건 아닙니다. 낮에 나온 올빼미라도 저 먼 하늘의 프로타이스를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요. 왕비는 틀림없이 프로타이스가 그녀 를 보기도 전에 그를 지울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별호를 생각하면 야음을 이용할 수도 없었지요.

이루릴은 아무래도 프로타이스의 현명함을 칭찬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어떻게든 그를 말려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프로타이스가 말했어요. “그러니 나 좀 도와줘.”

다시 찾아온 충격 때문에 이루릴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편이 나았죠. 입을 열었다간 ‘그럴게요.’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와서 모든 것을 망쳐버렸을 테니까.

“옛날에 갈색 산맥에서 당신이 엄청난 일을 했다고 들었어. 정령들을 거울삼아 허공에 화염의 창을 비추었다던데? 그것도 열 번이나 반복해서.” “그랬던 적이 있죠. 그런데요?”

“뻔하잖아? 인간들이 그림자 지우개를 가져오면 가짜 나를 열 개 만들어줘. 내가 그 사이에 섞여들어가서 그림자 지우개에 다가갈게. 그러곤 그걸 단숨에 부수는 거야. 어때?”

이루릴은 자신의 상상력이 그려낸 열 마리의 프로타이스라는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프로타이스의 언급처럼 그녀 자신이 과거 그런 광경 을 직접 이루어내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광경인지도 잘 알고 있었거든요. 이루릴은 프로타이스의 요구를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루릴의 결론은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로타이스가 말한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는 중도를 사랑하는 드래곤이었습니다. 인간이라면 중도 를 좋아한다는 것은 가장 많은 이웃을 둔다는 말이지만 드래곤에겐 의미가 정반대지요. 드래곤이 중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양쪽 극단 모두와 원한을 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크라드메서에겐 그만한 힘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루릴은 그 크라드메서의 가짜를 열 개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가짜 프로타이스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이루릴은 프로타이스의 존재 자체가 걸려 있는 상황에선 1/11이라는 확률이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루릴은 야유하는 태도 로 투명 마법도 쓸 줄 모르냐고 말해보았어요. ‘열 마리의 가짜와 한 마리의 보이지 않는 진짜’가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프로타이스는 더없이 즐거운 태도로 반박했습니다.

“바이서스 인간들은 마법 방어 도구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고. 그 때문에 나 자신한테 거는 방어 마법은 가능해도 상대를 속이는 투명 마법은 쓸 수 없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지. 계획은 오래 전에 완성했어. 나도 환영은 만들 수 있거든. 그런데 내가 만드는 환영은 마법에 의한 것이니까 인간들 근처에서 사라질지도 몰라. 설령 그러지 않는다 해도 내가 마법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면 그건 반드시 사라지겠지. 하지만 당 신이 만드는 환영은……”

“정령들이 만들어내는 거죠.”

“맞아. 그러니 그건 인간들 근처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테고 내가 그림자 지우개에 마법적 압박을 가하는 동안에도 계속 존재할 수 있겠지. 생각해 봐. 그런 모습을 보면 인간들은 놀라고 당황하겠지? 그 놈들이 주위를 날아다니는 프로타이스 열하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우왕좌왕하는 동안 내가 그 림자 지우개에 압박을 가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 순간 팍! 하고 그게 부서지는 거지.”

이루릴은 자신이 아일페사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드래곤은 못되게 굴 수도 있고 치사하게 굴 수도 있지만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프로타이 스는 여러 면에서 상황을 파악한 다음 실현 가능한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이루릴은 그보다 더 놀랍고 복잡한 해결책은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 현실적인 해결책은 떠올릴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현실적인 계획에는 현실적인 위험성도 있었지요. 왕비가 비교적 적은 시도만에 진짜 프로타이스를 찾아내서 그를 지우는 경우만을 말하 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타이스의 전제 자체가 틀렸을 위험성도 있지요. 만약 아프나이델의 생각대로 천 년의 유폐만이 그림자 지우개를 파괴할 유일 한 수단이라면, 그림자 지우개가 충분히 약해지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프로타이스에겐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프로타이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가 그림자 지우개를 어떻게 해보려고 애쓰는 동안 왕비는 열 개의 가짜를 빠르게 지운 후 열한 번째에 팍! 하고 진짜 프로타이스까지 지울 수도 있 지요.

이루릴은 자해에 가까운 수준으로 고민했습니다. 왕비는 이미 솔베스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대단히 먼 거리에서 광범위한 자연재해를 일으켜 주위 의 모든 이들과 함께 왕비까지 해치우는 아일페사스류 해결책을 제외하면, 프로타이스의 계획은 유일하게 합리적인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타이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역사의 오솔길을 걸으며 이루릴은 많은 나무들을 지나쳐왔지요. 아름다운 나무, 장대한 나무들이 언제나 그녀의 좌우에 서 있었지만 그 나무들은 그 녀를 따라올 수는 없었어요. 수명이 짧은 이들. 그녀의 기나긴 걸음걸이에 비하면 한 자리에 뿌리내린 것처럼 보이는 이들. 이루릴은 그들과의 이별 에 비통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그녀의 속에 남을 테니까요. 이루릴이 일 년 내내 추도를 계속하는 한, 함께 나눈 시간들을 기억하 는 한 그 나무들은 이루릴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프로타이스는 뿌리째 뽑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루릴은 조용히 눈을 들어 춤추는 성좌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사실 결정은 오래 전에 내려졌습니다. 고민이 결정의 뒤에 오는 건 흔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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