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92화
왕의 천막으로 불려갔을 때 예언자는 드래곤 레이디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을 거라 예상했어요. 하지만 야전의자에 앉은 왕이 예언자를 지그시 보다가 갑자기 꺼낸 질문은 의외의 것이었죠.
“나는 언제 죽는 거요?”
얼핏 듣기에 그것은 무류의 예언자를 만나면 누구나 꺼낼 법한 상투적인 질문 같았어요. 하지만 예언자는 왕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후 예언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날입니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이 죽을 때 느낄 법한 감정 같은데. 그런 예언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소.”
“하실 수는 있겠지만, 전하의 말은 예언이 아닙니다.”
“그렇소? 그럼 예언을 해보시오. 나는 누구에게 죽는 거요?”
“에이다르 바데타입니다.”
왕은 당황했어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거든요. 게다가 그건 드래곤의 이름처럼 들리진 않았어요. 아나그램일 경우까지 가정해 보더라도요. 그리고 코볼드나 다른 종족들의 이름 같지도 않았죠.
“인간이오?”
“인간입니다.”
왕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예언자는 그가 에이다르 바데타가 누구냐고 묻길 바랐어요. 하지만 왕은 이번에도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지 않았 죠.
“내가 드래곤이나 코볼드에게 죽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예언자는 왕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예. 전하. 그 어떤 코볼드나 드래곤도 전하를 해칠 순 없습니다.”
왕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자신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감싼 채 한참 동안 말문 을 열지 못했어요. 거의 2분이 흐른 후 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병적부를 조사하면……………”
“에이다르 바데타라는 이름은 찾지 못하실 겁니다. 솔베스 전체를 뒤져봐도 못 찾으실 테고요.”
왕은 다시 입을 닫았지요. 아군의 실수나 배신으로 죽는 것도 아니라면, 왕은 예언자의 말을 두 가지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어요. 그 중 하나는 정말 불쾌했지요.
“예언자여. 이 땅에서 도망치는 것은 한 번도 너무 많소. 두 번의 전쟁에서 소진한 힘을 회복할 여유는 앞으로 영영 없을 거요. 절망한 국민들의 탈 출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걸 알기에, 나는 결코 도망치지 않을 거요. 나의 참모들과 신료들도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말은 못할 거요.”
“저는 전하께서 솔베스에서 도망친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왕은 가슴이 벅찼습니다.
“내가 왜 죽는 날짜를 질문했는지 아시오?”
“저는 독심술사가 아니라 예언자입니다.”
“드래곤 레이디 아일페사스는 내일 이곳에 도착할 거요.”
“그렇군요.”
“많은 이들이 노력한 끝에 드래곤 레이디의 비행경로와 속도가 파악되었소. 지금 그녀가 지친 채 이곳에 도착하지 않기 위해 어디서 쉬고 있는지도 알고 있지. 나는 당신이 ‘내일’이라거나 ‘아일페사스’라는 대답을 할지 알고 싶었소. 그리고 그런 대답을 들으면 내가 바이서스의 왕답게 도망치지 않 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자고 결심하고 있었소. 그런데 당신이 들려준 대답은 더 놀라운 것이군. 당신은 드래곤이나 코볼드가 나를 죽일 순 없고 내가 여기서 도망치지도 않는다고 했소. 그렇다면 나는 드래곤 레이디의 방해를 물리치고 저 단단한 바위벽을 뚫고 들어가 시에프리너를 죽 일 수 있단 말이오? 정말 그런 뜻이라면 당신께 절이라도 하겠소. 내가 정확하게 이해한 거요?”
예언자는 죽음은 약속된 휴식이라 말했던 루트에리노의 후예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저것이 정말로 살인자의 이름을 알게 된 피살자의 반응일까요? 왕은 살인자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표하지 않은 채 기뻐하고 있었어요. 예언자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전하에겐 목숨을 버린 특별한 병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왕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 말은……”
“내일 전하는 제게 절을 하게 되실 겁니다.”
왕의 얼굴에 벅찬 희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예언자를 끌어안으려 했지요. 하지만 갑작스러운 의혹이 그의 손을 붙잡았지요. 그는 예언자의 무미건 조한 얼굴을 보았어요.
“그러면 바이서스는?”
예언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보이곤 그대로 몸을 돌렸지요. 예언자를 붙잡고 싶었지만 왕은 그 후 일어날 일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래서 왕은 예언자가 천막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