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98화
‘운차이가 지금까지 살아서 내 꼴을 봤다면………… 왜 제대로 피하지 못해서 멍청이들을 영웅으로 만들어줬냐고 말했겠지.’
무너져내린 돌무더기에 묻힌 아일페사스가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정말 그럴 듯했기에 아일페사스는 진짜로 약이 올랐어요. 분노는 대부분의 동물 들과 마찬가지로 드래곤에게도 잘 듣는 흥분제죠. 흐릿하던 그녀의 시야가 밝아졌고 때마침 먼지도 거의 다 가라앉았습니다. 아일페사스는 멀리서 바이서스 병사들이 돌격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를 향한 포격 준비도 갖춰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드래곤 레이디의 눈이 확 불타올랐죠. ‘함정에 빠진 멧돼지처럼 버둥거리며 찔려죽을 줄 알아? 나는 아일페사스다!’
아일페사스는 거칠게 몸을 흔들었습니다. 거대한 바윗덩이들이 흔들리고 밀리고 거칠게 무너져내렸어요. 날개 여기저기가 찢어지는 소리도 났지만 아일페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아일페사스는 바위를 난폭하게 밀어내며 동물적인 감각으로 변신했습니다.
그야말로 절묘한 순간이었지요. 조금만 늦거나 빨랐다면 드래곤의 거체가 사라진 공간으로 바위가 무너져 변신하는 그녀를 덮쳤을 것입니다. 하지 만 아일페사스가 금발의 엘프로 변해 똑바로 섰을 땐 사방에서 무너진 바위들 중 어떤 것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일페사스의 예상대 로 피어오른 흙먼지는 그녀의 작아진 모습을 감춰주었지요. 돌격하던 병사들은 갑자기 드래곤 레이디가 사라져서 바위가 무너져내린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짧은 여유를 얻은 아일페사스는 침착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옷의 먼지도 털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누굴 죽여야 한다면 최고위층만 선택하겠 다던 어제까지의 결심도 폐기했어요. 비행사들의 자폭 공격이 그녀에게 준 것은 경외감이 아닌 경멸감뿐이었습니다.
“국가는 애국자의 시체 위에 서 있다는 거냐? 그렇다면 국가는 시체 먹는 벌레들을 위한 훌륭한 식량 공급 체계로구나. 너희들의 주인을 배알하라.” 아일페사스는 손을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땅 아래에서, 바람의 골에서 곤충과 벌레들이 시커먼 안개처럼 튀어나왔습니다.
기는 놈, 무는 놈, 뛰는 놈, 쏘는 놈, 나는 놈, 찢는 놈, 달리는 놈들이 폭풍처럼 병사들을 덮쳤습니다. 그것들은 병사들의 머리카락 속을 기어다니고 옷깃과 소맷자락 아래로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러곤 살갗을 깨물고 혈관에 독액을 주입했지요.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뜰 수도 없었어요. 털이 수북한 벌레들이 입 안으로 기어들어오거나 눈을 찔러댔으니까요. 소총탄이나 기관총탄은 처음부터 무의미했고 수류탄도 벌레떼에겐 별 효과가 없었어요. 병사들은 총을 팽개치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구 달리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하지만 피부 전체가 끊임없이 전달하는 가려움과 미세한 통증 을 무시한 채 계속 달리는 건 군대 훈련에도 없었죠. 병사들은 자기 몸을 마구 때리다가 바닥에 쓰러졌고 어떤 이들은 온몸을 웅크렸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웅크리든 벌레들에겐 기어들어갈 틈이 잔뜩 있었지요. 병사들은 벌레 섞인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습니다.
아일페사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법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도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알지 못했던 오래된 마법이 그녀에 의해 일깨워졌어요. 그 순간 죽음과 삶의 경계가 조금 미묘해졌습니다. 그 경계가 허물어지진 않았지요. 그러한 마법은 드래곤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를, 때에 따라선 지불할 수도 없는 대가를 강요하니까요. 하지만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무는 대신 죽음의 여운을 부여잡아 실체화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했지요. 아일페사스가 포효하듯 주문을 끝낸 순간 불타는 시체를 실은 불타는 비행기들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날개가 부러지거나 동체가 대파되어 있었지만 그 비행기들은 정체를 알고 싶지도 않은 어두컴컴한 기운에 휘감긴 채 안정적으로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안정적이라는 건 그러니까 추락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그 비행기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물인 양 전후좌 우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고 기수를 위나 아래로, 심지어 뒤로 향한 채 앞으로 날아가는 식의 기괴한 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수 방향과 비행 방향 이 일치하는 경우를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웠죠.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불쾌해지고 구역질이 나는 그 비행기 안에서 비행사들은 화형의 고통에 몸부 림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불덩어리로 바꾸어 아래로 흩뿌렸습니다.
꼬리를 길게 끌며 떨어지는 불덩어리들은 마치 빗줄기 같았어요. 그것이 벌레의 바다에 익사당하고 있던 병사들을 강타했지요.
왕은 격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