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0화


“…겁나니? 장청란과 싸울 일이?”

내가 묻자, 대교는 문득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이미 죽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다만, 제 일천한 재주로 곡주께서 행하시는 일에 누가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지, 이런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말도 자꾸 들으면 짜증이 난다.
그래도 대교니까, 얘한테서 나온 말이라 그런 느낌이 좀 덜하다.

“좋아, 지금부터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야. 알았지?”

“신명으로 받들겠습니다.”

나는 이번에는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너, 앞으로 이런 일은 미리 미리 말해. 내가 예전 기억들이 오락가락하는 거 알지? 또 등신같이 죽을 거 알면서도 따라 나서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대교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메, 이쁜 거….

퍼벅!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대교를 뒤로하고 다시 아까 누웠던 돌 바닥으로 걸어갔다.

“…우선, 나 생각 좀 할 테니까 넌 적당한 데서 무공 수련이나 좀 하던가 그러고 있어.”

“존명!”

이런, 저 말 쓰지 말라고 해야 했는데 또 깜빡했다.
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톡! 톡! 톡!

“몽몽, 너 그… 그래, ‘버츄얼 스크린’ 기능인가 뭔가 하는 거, 지금부터 몇 시간이나 쓸 수 있지?”

[ 연속적으로 24시간 17분 22초 가능합니다. ]

“좋았어! 널널하구먼!”

나는 다시 돌 바닥 위에 길게 누웠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우선, 화천루에 대한 걸 한 번 보여줘 봐. 음… 강호에서 활동한 기록부터…”

[ 제게 입력된 이곳의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임마.”

누구라도 눈을 감고 딴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본다.
그러나 눈을 감았음에도 뭔가 보려고 신경을 쓰면,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영상들이 눈앞을 스치고, 기묘한 빛 덩어리들이 춤추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 각막의 잔상 효과에 의한 착시 현상일 것이다.

지금 내 느낌도 그런 일반적인(?) 영상이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에 낡은 필름의 앞부분이 도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내 눈앞으로 촤악! 하고 가상의 공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 전에도 잠깐 봤지만, 이건 정말이지 63빌딩의 거대한 스크린 따위는 비교가 안 된다.
말 그대로, 내 자신이 실제로 그 거대한 영상 속의 일부가 된 기분이다.

알면서도 당황한 순간, 누워있는 내 주위에 무수한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사방에서 피가 튀었다.
패싸움(?)이 벌어진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꼴이 된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자, 잠깐, 잠깐- 야 임마, 이거 말고 다른 방식은 안 되냐?”

순간적으로 영상의 흐름이 멈추고, 내 눈앞에 흩뿌려지던 사람들의 피와 살점도 허공에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 죄송합니다. 주인님의 신경 적응력 측정에 오차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리얼 스크린’을 ‘망막 스크린’으로 대처할까요? ]

“니… 맘대로 하세요.”

솔직히, 좀 전과 같은 실감 영상은 영화의 한 장면에 뛰어들어 구경하는 것 같은 재미가 있긴 한데,
지난 번에 한 번 해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아프고 심지어 한동안 속이 울렁거렸다.
예전에 ‘DOOM’이라는 오락을 밤새 했을 때도 그랬었는데….

[ 망막 스크린 모드에서도 리얼 모드와 동일한 작동 법이 적용됩니다. ]

‘그래… 그것도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조금 진정된 기분으로 왼손을 들었다.
이제 내 눈앞에는 적당한(?) 크기의 사각형 스크린이 떠올라 있었다.
그 스크린 아래에는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PLAY, STOP 같은 단추들도 있었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누운 자세인 채로 뻗은 나의 왼손도 내 눈에 보인다.

내가 살던 시대에서도 이런 장면을 묘사한 영화가 있었다.
‘코드명…’ 어쩌구 하는 제목의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그러나 지금 내가 느끼는 실감은 차원이 다르다.
그 영화에서의 가상 현실이 10메가 짜리 동영상 수준이라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4기가가 넘는 용량의 DVD 화질이라고나 할까?

삐-! PLAY–!

음…..
비디오를 보듯 사각형 테두리가 있는 영상을 보니, 역시 찬찬히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건… 흠, 고대 중국의 패싸움사, 아니.. 전쟁사인가?
전체 배경은 고대 중국의 마을들이다.
군복은 아닌 것 같은데, 나름대로 일정한 복장을 하고,
머리에는 피빛 적색의 띠를 한 놈들이 닥치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장면이 계속되었다.

…맙소사,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포르노 영화를 합쳐도 게임이 안 되겠다.
왠만하면 무조건 야한 장면 위주로 즐기겠는데, 이건 정말이지 참혹의 극치였다.
적색 머리띠를 한 놈들은 서슴없이 마을 남자들을 난도질한다.
여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범하고 잔인하게 죽인다.
소녀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끔찍하고 역겨운 장면들….
나도 모르게, 뭐 저런 개새끼들이 다 있나 싶어 불끈 주먹을 쥐는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백색의… 아주 하얗고 신비스러운 느낌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자… 여자들이다.
백의 여인들이 일제히 사방에서 솟구쳐 오르는가 싶더니,
이제까지 잔혹한 행태를 일삼던 적색 머리띠 무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뭐랄까.. 죽이는 장면의 잔혹함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적색 머리띠 무리들의 더러운 살상 행위에 대한 ‘응징’의 의미를 생각하면
나도 박수를 보내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통쾌한 장면들이었다.

………………..

조금 있으니 장면은 반복되었다.
추악한 살인, 방화, 난행을 저지르는 다른 무리들…
그리고 그를 응징하는 신비로운 백의 여인들의 활약…
나는 비로소 STOP 버튼을 눌렀다.

“..야, 뭔 얘긴지는 알겠는데… 내가 보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야.
흰 옷 입은 여자들이 정의의 사도다… 그런 뻔한 내용 말고,
음.. 화천루의 세력이나 주로 쓰는 전법이나 이런 걸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는 거야?”

[ 먼저, 현재 모드에서의 검색 기능을 익히시겠습니까? ]

“….그건 나중에 하고, 니가 대충 찾아 주면 안 될까?”

[ 화천루에 관해 인증된 데이터는 없습니다.
보여드린 화면은 이 시대에서도 구전된 이야기를 모은 데이터를 재구성한 장면들이었습니다.
현 주인님 소속 단체의 자체 조사 기록을 검색할 수 있는 창을 뜨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데이터들은 세월의 흐름과 당시 조사자의 능력에 따른 오차 때문에,
원문에도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주석이 붙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

“제기… 그럼 화천루주가 쓰는… 그녀만의 독문절기는?
그것도 없어?”

[ 명칭은 ‘월형신공(月炯神功)’, 저희 시대 분류 기준 pme83 계열의
마이너스 에너지 운용을 기반으로 여신 신체에 적합하게 구성된… ]

“야, 야- 그만해. 어쨌든 화천루주가 쓰는 무공 자료는 있다 이거 아냐?”

[ 예. 하지만 최후의 두 절기는 명칭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흠…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좀 보여줄래? 아, 맞아.
우리 쪽 자료는 다 있을 테니까… 우리 쪽 무공을 쓰는 상대를 설정해서
‘대결’하는 장면을 구성할 수 있을까?”

[ 가능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화면 좌측 상단에 초 단위로 보이는 숫자가 31에서 시작되더니
30, 29, 28… 이렇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
1999년의 한국어와 지금(913년..?)의 중국어를 거의 동시(0.2초 이내) 통역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 이 작은 미래 로봇 ‘몽몽’이다.
등록되지 않은 은어나 속어 등을 적당한 단어로 대체하는 작업 시간을 포함한 것이 그렇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이 시대의 절정 무공을 분석해 시뮬레이션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다.
몽몽이 자그마치 31초씩이나(?)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니…

…3, 2, 1…

오, 시작되었다.
낯선 얼굴의 백의 여인이 화면 한쪽에 나타났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몽몽 짜식- 센스 있는데?
우리 측 가상 인물을 대교로 설정하다니…

나는 재미있는 대전 게임의 화려한 데모 화면을 보는 기분으로
가상의 화천루주와 대교의 대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