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42화
고시리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 보니,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있었구먼.”
“고당주의 호색은 알아주어야 해!”
“장씨 계집이 고당주보다 무공이 높고 무서워서 못 했지. 진작부터 노리고 있었을 걸?”
“우하핫! 나도 곡주께 잘 보여서 장씨 계집 맛 좀 봐야겠구만!”
온갖 이야기(음담패설이 약 7,80% 되는 듯)가 웃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꼬시리.. 아니, 고시리라는 놈은 본래 그런 싸이코라고 쳐도, 지금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가 조금 뜻밖이었다.
그동안 누구나 왕변태, 초극악 주인인 내 앞에서는 항상 긴장되고 약간 주눅이 든 듯한 태도였기에 이토록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호호.. 오랜만에 곡주께서 나서시니 모두들 어린애처럼 들뜨는 모양이네요.”
“껄껄! 그러고 보니 취당주는 아직 기회가 없었겠군 그래. 곡주님의 신묘한 전술에 말려들어 버둥대는 정파의 위선자들을…”
“본녀는 항상 비취각에 갇혀 있으니 그런 통쾌함을 맛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답니다, 자당주님.”
그러고 보니 전에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평소에는 매우 불안정한 정신상태에 자주 미친 짓(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런 저런 핑계로 사람들을 해치는)을 일삼는 ‘극악서생’이지만, 일단 외부와의 충돌이 발생하면 그 싸움을 끝낼 때까지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거기다가 원판의 철저하게 계산된 전략전술은 대부분 최소한의 아군 손실로 적을 전멸시키곤 했다니, 적어도 전투 때만큼은 이상적인 지휘관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정파와 이곳 비화곡과의 충돌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꽤 많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안됐구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원판 ‘극악..’이 아니고 대한민국 육군 특공대 하사.. 그것도 이미 제대하여 군기가 빠질대로 빠진 진유준이란 인간이올시다.
쌈 나면… 댁들의 안전은 물 건너갔다오.
“곡주님…”
상념(?)에 젖어 있는 내게 총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하명하실 말씀은…?”
“응..? 아, 미안..!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고..”
나는 천천히 그리고 새삼스럽게 실내의 간부들을 하나하나 돌아본 다음 입을 열었다.
“저기… 이번 비무에 참관하기 위해 몇 달 후 나는 곡을 떠날 예정이야. 다들 알다시피, 강호에는 날 죽이고 싶어하는 자들이 꽤 많지. 뭐, 그런 자들을 죽여서 막는 건 여기 여러분들이라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하지만, 난 이번 강호행 만큼은 좀 조용히 갔다 오고 싶거든? 뭔가.. 묘책을 내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군.”
그동안 원판은 뭐든지 멋대로 하고 남의 의견을 듣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들 조금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내게 잘 보일 찬스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각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거나 옆 사람과 상의를 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모두에게 덧붙여 말했다.
“뭐, 당장 급한 건 아니고… 또 보안상의 문제도 있으니까, 지금 말한 것에 대한 묘책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내게 개인적으로 찾아오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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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 의욕에 불타는 눈초리들…..
대한민국 정치판을 보면 대통령과 단둘이 독대하는 사람들은 당장에 권력의 핵심으로 오르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저들도 지금 그런 식의 생각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혹시 ‘구출 작전’을 해 본 사람 있나?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을 무사히 구해내는 일에 자신 있는 사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내에 어색한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으으…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 많은 인원 중에 사람 구하는 일을 해 본 경험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이 인간들은 그저 모두 죽이고 박살내는 일밖에 모른단 말야? 뭐 이딴 인간들이…. 아..? 저기 한 명이 이제서야 일어서네..?
웬지 어색한 표정으로 웃는 음침한 얼굴의 남자인데, 혈무검대(血霧劍隊) 대주(隊主) ‘잔학검(殘虐劍) 사마오수’…라고 문자 영상이 뜨는군.
“본 대주..! 6년 전에 곡주님의 명령으로 하오문(下午門, 이건 나도 안다. 하류층 범죄자들의 ‘길드’라고나 할까?)의 감숙성(甘肅省) 분타를 치고 화산파의 계집들을 구해 낸 일이 있었습니다만, 기억하시는지..?”
흠… 그래도 그런 작전을 했던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군.
근데, 가만..? 내 명령으로… 화산파 계집들..?
“후후.. 하오문의 잡배들이 암행 중인 곡주님을 몰라 뵈어 무례한 짓을 한 것이 발단이 되긴 했지만, 결국 그 일로 곡주님이 화산파 장문인의 딸과 손녀를 얻게 되었고… 곡주께서는 그녀들을 확보하고 있던 하오문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용서해 주셨으니, 결과적으로 하오문은 전화위복으로 멸문(滅門)을 면하게 되었던 거지요.”
뭐야, 이거…
이제까지는 처음부터 원판 ‘극악..’이 작정하고 그녀들을 납치하여 노리개로 삼았다는 식의 얘기만 들었는데, 실제로는 좀 복잡한 사연이 있었는가 보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잘해야 ‘전국 3류 양아치 연합회’ 정도인 하오문이 ‘1류(?) 조폭’을 거느린 ‘재벌 기업’에 비유할 수 있는 명문 정파 화산파의 여자들을 납치할 수 있었던 것 자체를 자세히 듣고 싶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보다…
“결국 ‘구했다’…라고 하기는 좀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지만… 당시 그녀들을 하오문에게서 구해낸 과정을 말해 보겠나?”
“…우선 감숙성 일대에 저희 혈무검대와 마극파천대가 천라지망을 펼쳤고, 감숙성에 잠복하면서 그 지역 하오문을 잘 파악하고 있던 월영당 요원들과 곡주님 직속 호위 혈랑대(血狼隊)…”
사마대주는 잠깐 말을 끊고 허허..웃었다.
“..당시는 어린 소년들이었던 혈랑소대(血狼小隊)였지만… 하여간 당시의 그들로도 감숙성의 하오문이 씨가 마르는데는 반나절이면 족했지요. 그 후 3일 째 되는 날… 하오문주가 직접 곡주께 화산파 계집들을 바치며 용서를 빌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때 하오문이라는 명칭조차 강호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
이런 제기…
결국 그런 얘기였어? 작전에 투입된 병력 특성은 그렇다 치고, 기본적으로 그게 구출 작전이냐? 초토화 작전이지.
“있잖아, 저기… 그게 다야..?”
“예..? 아..! 화산파 계집들 처리는 곡주께서 알아서 하셨고, 하오문의 무리들은….”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구출 작전’을 한 경험이 그런 정도가 다냐구!”
나의 어이없어 하는 말에, 사마대주는 모처럼 나서 봤는데 잘 안되네..하는 표정으로 슬며시 자리에 앉아 버린다.
우이쒸-!
아무리 강호의 ‘조폭’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 많은 인간들이 누굴 구하는 일 자체를 해 본 일이 없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