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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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두꺼비.. 들어간다고 했냐..?”
내가 어이없어하자 소령이는 미령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낸다.
미령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두꺼비를 언급하긴 하셨습니다. 그걸로 술을 담근다고는 하지 않으셨지만…”
역시 말귀 알아듣는 건 니가 좀 낫구나.
“..두꺼비라는 건 그 술 별명이야. 에.. 술병에 두꺼비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거지, 진짜 두꺼비로 만든 술이 아니라구.”
소령이는 그제야 발갛게 볼을 물들이고 고개를 숙인다.
진짜 바보도 아닌 것이 가끔 이러니까 오히려 귀엽군.
중성적인 매력에 백치미까지… 구여운 것!
“음..? 왜?”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뭐야..? 방금 미령이가 왜 날 물끄러미 바라본 거지? …설마, 방금 소령이를 보는 내 시선에 ‘변태끼’가 드러났었나? 어린 미령이가 알아볼 만큼..? 에구, 팔려라.
“..저기,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는데..”
말 돌려서 얼버무려야겠다.
“너희들 무예 실력 말이야. 자매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지?”
내 질문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미령이가 대답했다.
“대교 언니가 가장 출중하고 소교, 소령 언니와 저 세 명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보통 저희 세 명끼리 대련을 하게 되면 승부가 좀처럼 나지 않습니다.
총관… 사부님 말씀으론 저희들의 검법이 각기 특성이 강해 단순 비교를 하기 어렵겠지만, 생사를 건 싸움이라면 소령 언니와 제가 조금 우세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소령이와 니가 소교보다 실전에 강할 것 같다고?”
“예. 소교 언니는 성품이 섬세하고 여려 상대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순간이 왔을 때 반드시 망설임이 있을 것이라고..”
“흠.. 그래? 그럼 미령이 넌 적을 만났을 때 거침없이 벨 수 있다는 건가?
“…아직 인간을 베어 본 일은 없지만, 상대가 곡주님을 해하려는 자라면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구체적이고 살벌한 답변이로군.
이럴 때의 미령이는 표독스런 들고양이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옆의 소령이는.. 에..? 얘도 지금은 눈빛이 장난이 아니네?
“곡주님의 명령이라면 소령이는 누구라도 망설임 없이 칠 수 있습니다.”
“………”
그래, 그렇군.
미령이는 어느 정도 스스로의 의지로 그런 결단력(?)을 보일 수 있는 암팡진 소녀고..
소령이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고지식한 소녀이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것 같다.
소교는 자매들 중 가장 청초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인데,
사부인 총관 혈마검호가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확실히 외모처럼 마음도 모질지 못한 구석이 있나보다.
나는 지난번에 자매들이 당주급 고수들을 상대로 대련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음.. 소교는 다루기 어려운 연검을 잘 쓰고 상당히 동작이 좋아서 오히려 대교보다도 조금 낫지 않나 생각했는데…”
내가 이 시대 무예에 대해 뭘 알겠는가 마는.. 뭐,
스포츠 해설자가 꼭 해당 운동을 잘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난 어떤 종목(?)이든 보고 분석하는 능력은 좀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그리고 전에 장난 삼아 소교가 쓰는 것 같은 연검을 한 번 만지작(?)거려 본 일이 있었는데, 가볍게 휘두르기만 해도 검신이 난창 난창 휘어지고 움직임을 감잡기 어려워 하마터면 내가 내 손을 벨 뻔하기도 했었다.
아니.. 실은 팔리게 옷자락이 조금 베어졌었다.
그런 걸 저 애리애리한 몸매의 소교가 예사롭게 다루는 것이다.
내 말에 미령이는 잠시 또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소교 언니가 비록 재주는 뛰어나나 체력이 약한 편이고 더구나 무공에 대한 애착이 적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무공 수련보다는 서책을 가까이하는 걸 즐겨, 검법은 동생인 저희들과 평수를 이룰 정도지만 대신 기관(機關)에 관한 지식이나 천문(天文)에 밝고 진식(陳式)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 오히려 잘됐군. 네 명 다 칼만 쓰는 것보다는 두뇌파 한 명이 있는 것도 괜찮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보았다.
맏언니인 대교는 무예 재능도 뛰어난데다 동생들에 대한 영향력도 강한 전형적인 리더 스타일이고 둘째 소교는 섬세하고 치밀한 두뇌파,
셋째 소령은 고지식한 충성파, 막내 미령은 거리낌없는 행동파…
운이 좋은 건지, 어쩐지 내 주위에는 구색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까..?
얘들도 본래 암 생각 없이 얼결에 주변에 둔 건데, 잘 따져보니 RPG 게임에서 게임자에게 딸려오는(?) 각각 특색을 가진 동료들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소설이나 영화 같은 거라면 나는 필시 작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주인공일 것이다.
음.. 하지만 주인공이면 주인공답게 하늘이 내린 무공천재… 뭐 이런 몸에 안 들어가고 이런 비리비리하고 허접 쓰레기 같은 몸에 들어 온 거람?
에구.. 쓰잘 대기 없는 생각은 관두자.
내가 무슨 소설 속의 주인공이겠냐.
그리고 현재 상황이라면 장르는 무협지일 텐데, 무협지에 소형 로봇을 팔에 차고 있는 20세기 제대병이 나타나는 게 말이 되냐?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내 눈치를 살피며 미령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곡주님, 제가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될까요?”
“음..? 뭔데? 말해봐.”
“이번일 때문에 곡주께서 외유를 하시게 될 텐데, 그리되면 곡주님을 가까이 호위할 저희들의 능력이 너무 미천하여 걱정이 됩니다.”
후..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사실, 심하게 말하면 애초에 얘들은 예쁘장한 장식용이었다.
총관에게 들은 대로라면, 정말 보디가드로는 곡주 직속 호위 부대인 ‘혈랑대’ 일 천명만 해도 널널하다.
지금도 이 건물 곳곳에 일부 병력이 포진해 있는데, 왼쪽 가슴에 붉은 늑대 대가리 문장이 새겨진 인상 더러운 젊은 놈들이 바로 그들이다.
내가 대교 자매들에게 호위무사라는 타이틀을 붙이긴 했지만 얘들은 실상 이쁜 여비서들.. 정도의 개념이랄까?
“저희들은 실전 경험도 없고, 기본 내력도 본 곡의 당주급 수준의 고수들을 상대할 자신도 없습니다. 이 대로 라면 저희들은 그저 예쁘장한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에구, 찔려라. 표현까지 방금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이 해버리다니.
“곡주님 호위에 있어 혈랑대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송구스런 표현이지만 미령은 어쩐지 너무 분합니다.”
으.. 미령이 얘, 사람 마음을 읽는 무슨 독심술(讀心術) 같은 거 할 줄 아나? 무서운 계집애 같으니…
“그..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저희에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든 저희들의…”
미령이가 잠시 말을 멈춘 것은 소교가 방안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회 안주를 준비했다는 신나는(?) 보고를 들은 후 소교도 자리에 앉혔다.
“하던 말 계속해 봐.”
미령이는 슬쩍 소교 눈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짧은 기간 동안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곡주께서 배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교 언니 같은 경우 비룡전(飛龍殿) 출입을 허가해 주신다면, 강호에 나갔을 때 곡주님을 귀찮게 하지 않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비룡전이라면, 당주급 간부들만 출입할 수 있다는 도서관을 말하는 거다.
내 전용의 비밀창고만은 못해도 상당한 수준의 책들이 쌓여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후… 지금 미령이의 요청은 자신들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는 뜻. 이거 갈수록 상황이 RPG 게임화(?) 되는 기분인 걸?
“흠.. 미령이 니 뜻은 잘 알겠다. 좋아, 너희들 업그레이드.. 아니, 하여간 그 문제는 너희들 사부인 총관과 상의해 보도록 할게. 그래.. 명색이 곡주의 호위 무사들인데 실력이 모자라서야 말이 안되지.”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미령이가 먼저 발딱 일어섰고, 막내 동생의 당돌한 요청을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소교, 소령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느라 난리였다.
거참.. 결국 나 좋으라고 하는 일들인데, 내가 감사받으니 기분 묘하군 그래.
어찌 어찌 시간이 가서, 드디어 해도 지고.. 그리고 내 눈앞에는 그리웠던 안주 생선회가 맛깔스럽게 놓여져 있다.
근데.. 문제는 술이었다.
백화주는 백화주대로 가져왔는데, 또 한 병의 술이 추가되어 있었다.
소교가 나름대로 충성하느라고 기어이 쐬주를 준비하려 했던 모양인데, 당근 대한민국 쐬주가 여기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얼추 비슷한 거 찾는다고 찾은 것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소주(笑酒)인 모양이었다.
“곡주님 식단을 책임지고 있는 조씨 남매가 어쩌면 말씀하신 소주가 이 것일지 모른다고 했습니다만..”
“안됐지만 그럴 가능성은 절대로 없어. 소교야, 내가 그랬잖아. 그 소주는 이 세상에 없어. 장담할 수 있는데, 이 시대에 그 술을 알고 있는 자는 나 하나야.”
내가 한숨을 몰아내자 소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한다.
“아아.. 괜찮아. 니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그렇게 대단한 죄를 지은 표정하지 말라구.”
제기.. 애 달래려고 억지로 웃어 보이며 한잔 따라 보긴 한다만, 정말 이걸 마셔야 되는지 모르겠다.
한자는 틀려도 어쨌건 ‘소주’. 웃을 ‘소(笑)’자라..
하지만 도무지 진심으로 웃으며 마실 기분이 들지도 않았고 마시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우선 맛이나 좀 볼까..?”
으..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향과 빛깔의 술…
참내, 중국음식과 술이 다양하다는 건 알았지만 진짜 ‘두꺼비’로 담근 술이 있을 줄이야…
소교에게 들은 대로라면, 수십 년 혹은 백년 넘게 묵은 영물(靈物) 수준의 두꺼비를 특수한 방법으로 독기를 제거한 후 그걸 동주(董酒)라는 귀주(貴州) 특산주에 담그는 것이 제조 과정이다.
찝찝하지만.. 애써 준비해 준 소교를 봐서라도 먹긴 해야겠지?
에라이~~! 홀짝~!
우쒸.. 뭔 술맛이 이래? 독하긴 엄청 독한데다 이 묘한 뒷맛은.. 어쩐지 전에도 이런 맛을 느낀 적이.. 음.. 있다.
“..뱀술하고 비슷하군.”
그렇다. 이 두꺼비 술은 내가 제대를 며칠 앞두었을 때, 두 달 밑의 쫄다구가 선물이라며 한 잔 주었던.. 그 놈이 직접 잡은 뱀으로 만들어 탄약고 뒤 산 속에 짱 박아 놓았다는 그 뱀술과 비슷한 맛이 난다.
“그 술 명칭의 유래는 한 잔만 마셔도 관절염 등의 지병에 특효를 보이며 남성의 정력을 비약적으로 증진시켜 집안에 웃음이 끊이지 않게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
그런.. 심오한 뜻이..? 아.. 이런, 결국 나도 진심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흐… 나도 결국 ‘정력’이라면 환장하는 대한민국 남자, 특히 군바리들의 생태(?)가 남아 있나보다.
그런 의미에서 안주 한 점 먹고.. 한 잔 더.
“크허-! 좋다.”
내가 기뻐하자 소교도 이제야 얼굴을 펴고 곱게 웃는다. 이 두꺼비 술.. 의미는 좀 그래도 어쨌든 웃음을 부르긴 했군.
“소교 너도 거기 앉아. 내가 안주 많이 가져오라고 한 건 너도 같이 먹자는 뜻이었으니까.”
소교는 생긴 것처럼 조신한 태도로 앉아 조그만 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나는 두꺼비 술 몇 잔 더 먹고 싶었지만, 너무 밝히는 것 같아 참고 백화주로 바꾸었다. 예상대로 백화주와 회는 꽤 잘 어울린다. 좋군…!
음.. 근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현재의 나도 그렇지만 군대 안에 있을 때는 더더욱 소위 정력을 쓸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다들 난리를 치며 뱀 잡아먹고, 계곡 물 속에서 도마뱀 알 건져 먹고, 벌 애벌레..등등 온갖 혐오 식품을 밝혔던 거지? 항상 무기(?)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군바리 정신이었던 걸까? 후-?! 나도 참. 별걸 다 따져 생각하고 있군. 간만에(그래봐야 5일..) 한 잔 하는데 술과 안주 맛이나 계속 즐겨야겠다.
홀짝~! 스윽~! 우물우물~!!
“음음.. ..어, 소교 넌 회 별로 안 좋아하니? 왜 벌써 젓가락을 놓았지?”
“아,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 이 곳까지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릴지.. 그 기간 동안 물고기를 생존케 하는 방법을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왜 이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뻔하지만, 일단 물어보자.
“그거.. 나 먹을 생선회 때문에 그래?”
“예. 민물고기보다는 바다에서 얻어지는 물고기가 횟감으로 더 좋고 종류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야.. 그렇게까지 해서 먹을 생각은 없어. 지금 먹는 회.. 이거 향어(香魚) 맞지? 난 이 회 정도면 만족해.”
“다행히 곡 내 월정호(月晶湖)에 향어가 있어서.. 수귀당(水鬼堂) 무사들 도움을 받았습니다.”
수귀당이라면 기본적으로 수영을 겁나게 잘하고 물 속에서 싸우는 수전(水戰) 전문가들을 말하는 건데… 그럼 이거 낚시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물 속에 들어가서 잡아왔다는 얘기로군.
“..소교야, 나 맛난 거 좀 먹으려고 수하들을 낚시꾼 만들고 싶은 생각 없어. 더구나 바다 생선을 여기 날라 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고.. 앞으로는 향어도 누구 낚시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가끔 나가서 잡아오는 것으로 해. 매일 회만 먹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말야. 알겠어?”
“..예, 곡주님.”
“내가 생각해도.. 나 참 착해진 거 같애. 그치?”
“예.. 쿠쿡..!”
소교는 흰 꽃잎 날리는 화면을 배경으로 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소녀인데.. 의외로(?) 웃는 모습도 보기 좋군. 앞으로는 열심히 농담을 개발 활용해서 얘도 좀 웃겨야겠다.
근데… 문제는 항상 이 원판의 육체이다. 난 분명히 눈앞의 소교를 사랑스런 여동생 정도로 여기는 건데, 지금 또 눈치 없이 불끈 대포를 장전하고 있는 이 육체의 상태를 안다면 누구라도 날 순결한 소녀를 앞에 두고 침 겔겔 흘리고 있는 늑대로 볼 것이 아닌가.
정작 할 것도 아닌데(뭘..?) 오해를 사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그러니까.. 죽어라, 이 놈! 죽어!
에..?
정력에 좋은 두꺼비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오늘은 좀 버티네 이것이.. 죽어, 죽어라, 죽을래..? 하여간 죽어..!
….됐군.
제기.. 변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지만, 현재 거주하는(?) 내 몸에 내가 뭔 짓 하는 건지 모르겠다. 로리타 변태는 안되었지만 사이코 경지는 갈수록 높아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나나 내 육체나 20대의 성기발랄한 나이인데.. 너무 욕구를 참아도 해로운 거 아닌가..? 음.. 대교 자매들 손대는 건 말도 안되지만 고시리 당주처럼 외부 여자들 꼬셔서.. 까짓 거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