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5화
“…본 곡이 비록 사마외의 지존이기는 하나, 화천루와 자웅을 겨룬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난제가 있을 것입니다.
굳이 우리 편에서 먼저 시비를 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이보게, 지총관! 자네 한동안 검을 놓더니 마음이 여려졌구먼.
본 곡의 인물로서 어찌 그리 나약한 말을 하는가.
우리가 화천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올시다.
장로님도 과거 화천루의 인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험..!
그거야 계집들에게 손을 쓰기 싫어서 그런 거지.
누가 화천루 계집들이 두려워서 그랬겠소?”
“장로님!
이 혈마검호, 비록 장로님의 공력을 따를 수는 없겠지만…”
두 사람이 공연히 핏대를 내며 티격태격하는 사이, 나는…
톡! 톡! 톡!
(몽몽에게 나와 의사소통을 하자는 신호로, 녀석 몸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
[화천루는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문파이며, 평소에는 강호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큰 위험, 비화곡 같은 반질서 단체가 활발히 활동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외는 차기 루주 후계자가 수행 겸 강호를 주유하는 기간입니다.
현재까지의 데이터로는 장청란이라는 여자가 현재 18세이며, 해남파 장문인의 외동딸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는 자세로 몽몽의 말을 들었다.
이 왕변태의 신분으로 살면서 돌발 상황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의 ‘원판’의 비밀서고에 있는 책들을 몽몽에 입력시켜 놓았지만, 문제는 최신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기, 이 시대에 신문 같은 건 없나? 새로운 소식 좀 알게….
“음… 어쨌든, 문제는 그 냉화절소 장청란이란 여자애라기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의아한 소리를 내며 나에게 시선을 모았다.
아참!
톡! 톡! 톡!
(몽몽에게 다시 통역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큼! 크흠! 아… 그러니까, 결국은 장명이란 자나 장청란이란 계집애,
각각 개인보다 ‘화천루’라는 계집들 집단이 골치 아프다… 이거지?”
총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거 역대 화천루주들의 화후를 생각하면, 냉화절소 개인의 능력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걔가 그거, 화천루주인지도 확실한 게 아니라며?”
“본래 화천루의 전통이 후인의 ‘수행 시기’에는 신분을 감추는 것이 보통이라…
하지만, 지금까지 보고된 정황으로 보아 상당히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은, 그래서 월영당에 지시를 내려놓은 지 벌써 여러 날입니다.
곧 확실한 사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
근데 말이야… 장청란이란 계집애의 정체가 화천루주라고 해도, 화천루가 이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 아냐?”
“음… 곡주의 신묘한 수를 들려주실 수 없을까요?”
“신묘는 뭐… 그래, 일단 그 장청란이 이곳으로 혼자 오도록 유인한 다음,
최대한 공적인 문제로 안 보이게 개인적인 일로 유도하는 거지.
뭐, 적당히 창피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총관과 야후 노인이 동시에 ‘과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계집애 성격이 어때? 뭐, 도도… 오만방자… 그렇지는 않나?”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군. 무협지를 보면 보통 잘나가는 여자들 집단의 짱은 대체로 그렇다.
“그럼 간단하네. 소문 쫘악 퍼트려!
단신으로 여길 찾아올 배짱이 있으면 ‘장명’도 풀어주고, 우리 측 ‘장로’도 그쪽 처분에 맡긴다고…”
“….”
“….”
처분에 맡겨질 야후 장로나 총관 둘 다 말이 없었다.
설마 그게 얘기의 다는 아니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음… 그리고 그거, 흔한 얘기 있잖아.
대신 우리 중의 누군가와 ‘내기’를 해서 승리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붙이는 거지 뭐.
그리고… 분위기 봐서 우리가 이겼음에도 관용을 베푸는 듯이 장명을 풀어주면 앞으로도 암말 못하지 않을까?”
아직도 두 사람은 말없이 내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얘긴 그게 다야.
무슨 종목으로 내기를 할 건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구.
그 계집애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해서, 그 쪽에서 할만하다…라고 생각하게 하면서도, 사실은 우리에게 유리한 걸로 말이야.
그런 걸 생각해 보자구.”
그제야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야후 노친네는 뜻밖에도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껄껄껄-
곡주께서 계책을 내신다면야, 이 노물은 맘 편히 내기의 ‘상품’이 될 수도 있소이다.
오랜만에 하늘도 속인다는 곡주의 신묘한 수를 보겠구려…”
정말로 나에 대한 신뢰에 찬 얼굴로 야후 노친네가 웃으며 걸어 나갔을 때,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총관도 곧 장청란의 모든 정보를 낱낱이 수집하여 보고하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를 잡고 싶었다.
‘어이- 이봐!
무협지에서 배운 풍월에 그냥 한 번 해본 말이었어.
그보다는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라든가… 해야지!
왜 내 말대로 하겠다는 거야? 응? 이봐, 돌아와!’
나는 총관까지 나간 휑한 분위기의 대청각에서 멍하니 한동안 앉아 있었다.
내가 말한 계책, 아니 계책이랄 것도 없는 기본적인 잔머리의 산물을… 뭐, 신묘한 수…?
으…
아무래도 짱의 말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일단 따라주는 척하는 거 아닐까?
아냐…
그렇다면 정작 내기의 ‘선물’이 될 저 노인네가 얌전히 동의할 리가 없었겠지.
비록 내 원판보다 배분이 낮다고는 해도 이곳에서 ‘장로’급의 무게감은 나도 여러 번 느꼈었다.
뭐… 대부분 내 원판의 사부 외에는 누구에게도 져본 일이 없는, 저마다 사·마파 중에서는 서열 2위로 자부하는 거물들로 구성된 사람들이고…
어쨌든, 나에게 굽신대지 않으면서도 저 나이 먹도록 이곳에서 꿋꿋이 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정말 나, 아니 내 원판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내가 뭔가 추가로 ‘정말 신묘한 수’를 발휘할 거라 생각한 건가?
으…
그렇다면 큰일이다. 난 지금 암 생각 없는 데…
나는 의자 팔걸이에 팔을 세우고 턱을 괴고 앉아 다시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나 막막했다.
다시 이리저리… 그러다가…
…
…
“..곡주님!”
부드럽게 흔드는 손길과 달콤한 음성에 나는 깨어났다.
응…? 깨어나…?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옥체에 해롭습니다.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송구스런 표정으로 잠을 깨운 이는 대교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깜박 졸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졸음의 원인과 주제넘게 이번 사태의 해결안을 주절거린 이유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비취각에서 마신 ‘해장술’에 은근히 취해 있었던 것이다.
야후… 노인네…
이 비화곡의 장로이며, 과거 야황살후라는 명호로 강호를 주름잡았던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이 오늘 술 취한 놈의 말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