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55화
갈등은 꽤 오래 지속되었지만.. 결국 나는 힘없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됐다, 관두자 몽몽..!”
대책 없이 ‘모험심’이 강한 나이기는 하지만 본래 ‘기계류’를 무척이나 아끼는 성격인데다, 몽몽.. 이 초소형 만능(?) 로봇의 역할은 지금의 나에게 너무나 절대적이다. 이곳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부터 시작해 내가 이곳에서 버티고 사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몽몽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다.
“저기.. 대교야 너 혹시 이 정도 크기의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겠니?”
내가 손으로 대충 가늠해 보이는 크기에 대교는 곤란한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 정도라면 어깨 관절을 뽑는다 하더라도 힘들 것 같습니다. 축골신공(縮骨神功) 같은 것을 따로 연마한다면 몰라도..”
대교 정도의 날씬한 체형과 무공이라면 혹시 가능할까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역시 무리였나 보다. 근데 축골신공이라면 울트라 과장 무협지 같은 데서 온몸이 두둑 거리며 커다란 어른이 조그만 어린아이로 변신해 버리는 그런 무공을 말하는 건가..?
“축, 골, 신, 공이라…”
그동안 몽몽과의 의사소통도 상당히 매끄러워져서 따로 말하지 않아도 내가 강조하는 단어는 알아서 문자 메시지를 띄워준다.
<축골신공(縮骨神功): 신체의 근육과 골격을 변화시키는 이 시대 특수 기법의 총칭. 체적을 50% 이상 축소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음. 계산상 불가능한 수치는 아님.>
“흠- 가만있자. 이 안에 축골신공이 어디 있었더라..?”
<관련 서적 위치: 좌측 첫 번째 책장, 2단 17번부터 26번.>
10권씩이나? 그런 류 무공이 예상보다 꽤 많다는 생각을 하며 대교에게 책들을 가져오게 했다. 가져온 중에서 적당한 거 고르려고 몇 권 뒤적여 보는데, 그중 한 권이 날 뒤집어지게 했다.
축골묘용신체발부신비기묘변형천축신공(縮骨妙用身體髮膚神秘奇妙變形天竺神功).
나참-! 무슨 무공 이름이… 폐활량 작은 사람은 읽다가 숨넘어가겠다. 근데 몽몽은 이게 바로 그 50% 이상 몸을 줄일 수 있다는 그 무공이란다. 그래서 나는 축골묘용신체.. 하여간 그 책을 대교에게 건네주었다.
“축골묘용신체발부신비기묘변형천축신공.. 훗-! 대단한 제목이네요.”
대단하긴 너도 대단하다. 그렇다고 그걸 다 읽냐?
“그거.. 한 번 보고, 어느 정도 기간이면 익힐 수 있을지 가늠해 봐. 그리고 너 이젠 구식대법(龜息大法, 호흡을 멈춘 채 버티는 비법. 나도 용어 사용이 꽤 늘었다.) 같은 것은 가능하지? 물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의 저라면 구식대법으로 사나흘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속을 헤엄친다던가 신체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럼 한 식경 정도나 가능할지…”
대교는 매우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지만, 한 식경이면 30분 정도를 말하는 거다. 20세기 잠수 세계신기록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대교 앞에선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다. 후… 몽몽이 손상되는 위험에 못지않게 대교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는 일은 결코 택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차피 비밀 통로를 이용해야 할 당사자가 대교이고, 정문으로 나가다 저 ‘아수라 백작’, ‘흑쌍살’ 등과 싸우는 것보다는 수중 탐색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첫 번째 관문의 흑쌍살들은 어떨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이 비화곡 최강의 고수는 두 번째 관문의 ‘아수라 백작’이다. 두 사람이 합쳐져서 그런지 스캔하여 확인된 내공 수치만 해도 지금 대교의 세 배 가까이 된다. 비화곡.. 아니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괴물인 것이다.
“대교야, 실은 이곳의 비밀통로 위치는 실전된 지 오래거든? 그래서 나도 이 연못으로 물이 드는 수로가 비밀 통로인지 어쩐지 확신할 수가 없어.”
성지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전설’이 있고, 그 위치를 역대 곡주들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로들 몇 명 만났을 때 들었는데, 한 삼백 년 전인가에 당시 곡주가 후계자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방심하고 강호에 나갔다가 비명횡사를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던가? 세월이 지나다 보니 ‘비밀 통로’가 있다는 사실 자체도 불투명해진 모양이고…
“그러니 대교 니가.. 그게- 어쩌면 위험할지도 몰라서 시키긴 싫지만…”
“…근래 곡주께서 성지 안을 새삼 살피셨던 건 역시 저를 탈출시키기 위해서였군요. 후후.. 곡주께서 판단하신 일인데 어찌 틀림이 있겠습니까. 빠른 시일 내에 축골묘용신체발부신비기묘변형천축신공을 익혀 수로 안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정말 대단한 대교다. 그 긴 걸 또 다 읽었다. 엉뚱한 감탄을 하고 난 후, 나는 대교에게 맡겼던 내 정글도를 찾아 들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배수구와 입수구의 구멍을 넓히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이다. 대교도 말렸고, 사실 이제는 한 무공이 아니라 두 세 무공하는 대교에게 시키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이런 정도는 내 손으로 하고 싶었다. 힘쓰는 일을 계집아이에게 맡기기 싫다는 자존심 문제도 있고, 앞으로 위험한 탐색을 시켜야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음, 어쨌거나 연못물은 언제 들어와 봐도 엄청 차갑군. 허리까지 오는 물속이라 꽤 힘들겠지만 간만에 군대에서처럼 ‘작업’이란 걸 한 번 해 볼까나? 후후- 이 박도.. 생기긴 이렇게 생겼어도, 비화곡의 성지 깊숙이 간직되어 온 거로 보아 분명 과거엔 어느 고수의 손에 들려 강호를 주름잡던 무서운 병기였겠지? 안됐지만, 이제 대한민국 예비역의 손에 들어온 이상 넌 ‘정글도’로 강등되어 전천후 다용도 도구가 되어 주어야겠다. 일단 정글도의 강도 테스트도 할 겸…
툭-! 툭-!
음- 손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보아 몽몽이 스캔한 대로 배수구 양쪽 두 개의 돌판은 그리 두껍지 않은 것 같군. 다른 돌과의 틈새가 거의 없으니 일단 몇 번 두드려 볼까? 틈이 생기면 정글도를 지렛대 삼아 들어내기로 하고..
탕-! 쩍~!
에..? 뭐야 이거! 충격으로 틈이 생기는 게 아니라 한 방에 아예 돌이 반쪽이 나버렸잖아? ‘극악..’의 ‘극약’한 팔 힘에다 물 속에 휘두른 거라 더 약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깨져버리다니..?
나는 다소 멍한 기분이 되어 수면 위로 정글도를 들어보았다. 역시 이 것도 특별한 도였구나 싶어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도를 불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다 보니 도의 손잡이에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몇 글자를 발견했다.
광협객(狂俠客).
그전 사용자 이름인가 본데, 좀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미친 협객..? 대체 출신이 어느 쪽이라는 거야?
“곡주님? 무슨 문제라도…”
“아, 난 괜찮으니까 걱정마. 그보다 너 혹시 광협객이란 명호 알아?”
“광협객… 글쎄요. ‘패도광협’이라는 명호는 알고 있습니다만..”
띠리리~!(문자 메시지 뜨는 효과음..?)
< 패도광협(刀狂俠) 유운일. 추정 활동시기 340년 전에서 380년 전 사이. 출신 사문 불명의 고수. 활동 당시 강호 무공 서열 5위 이내로 추정. 독문절기 ‘생사금마도결(生死金魔刀訣). >
몽몽에게도 광협객이라는 데이터는 없는 것 같고.. 이 ‘광협’이 그 ‘광협’ 인지는 알 길이 없군 그래.
만약 이 광협이 그 광협일 경우, 내가 들고 선 이 도는 천하제일인 이었을지도 모를 인물이 쓰던 병기라는 얘긴데, 후후~ 넌 참 운도 없다. 하필 두 번째 주인이 나 같은 ‘극악서생’+’20세기 예비역’이라니.
니 본래 이름이 뭐였는지 몰라도 넌 이제 짤 없이 그냥 ‘정글도’다. 용도는 이렇게 돌 깨기를 포함하여 제한이 없고 말이야.
내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위력의 ‘정글도’ 덕분에 입구 넓히기는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워낙에 힘이 없는 육체인지라, 쪼개진 돌 조각을 들어내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어서 나중엔 정글도로 아예 잘게 썰어서(?) 자갈 줍듯이 건져냈다.
한 30분 일했나? 10분 간 휴식할 것도 없이 끝냈군.
톡!톡!톡!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우~ 다리 쭈욱 펴면, 고오~향의 안방~!!
얼싸 좋다..”
몽몽의 ‘번역’ 끄고 간만에 군가를 흥얼거리며 연못 바깥으로 기어 나오니 대교가 수건용 천과 새 옷을 준비하고 있다가 건네준다.
이런 경우 전에는 대교가 물기도 직접 닦아주고 옷도 갈아입혀주려고 했을 텐데 그 동안 계속 내가 거부해서 그런지 이제는 옷만 주고 멀찍이 물러나 있는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묘해서, 막상 이렇게 되니까 왠지 아쉬운 생각도 조금…
하여간 작업이 생각보다 쉬웠고 차가운 물 속 작업이었는데도 운동량 때문에 열이 나 별로 춥지도 않다.
군대에선 지겨웠던 ‘작업’이 이렇게 여흥 삼아 하니 즐겁기까지 하군 그래.
새 옷 갈아입고, 돌 탁자에 앉아 연초 한 대 꺼내 불붙이는 나에게 대교가 말했다.
“저어- 곡주님!”
“왜..?”
“좀 전의 그 노래.. 말씀하셨던 ‘코리아 교’의 노래 입니까?”
“어- 그래, 맞아. 그게.. 본래 코리아 교가 동이(東夷, 우리 나라의 옛날 중국식 명칭. 깔보는 뜻이 내장되어 다소 불쾌함.)에서 파생된 거거든? 그러니까 그 쪽 말로 된 노래지 뭐.”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흥겨운 가락이었습니다. 저도 배울 수 없을까요?”
계집애가 군가는 알아서 뭐하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아이 부탁은 왠지 거절하기가 어렵다.
“그래 좋아. 하지만 그 노래보다는 말이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가르쳐 줄게.”
“곡주께서 좋아하시는 노래라면…”
부대에서 자주 특히 아침에 구보할 때 우리의 애창곡이었으므로 군가는 군가인 것 같은데, 출처가 불분명하고 아무래도 사제 노래 냄새가 좀 나는.. 하여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군가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대교는 ‘코리아’라는 단어의 발음도 정확히 해내는 아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는 원어(한국말)로 가르쳐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새~ 날~아 가는- 저곳으로 떠~나간, 내 사랑~!”
“뮬새~ 나~라 가는- 저고스로 떠~나강, 내 샤라앙~!”
몽몽에게, 노래 부를 때만은 통역을 중지하라고 하니 나는 한 소절 씩 한국말로 ‘물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발음이 좀 이상하더니만, 몇 번 반복하니까 아주 제대로 된 한국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물새~ 날~아, 가는- 저곳으로, 떠~나간, 내 사랑~!
너와~ 둘이, 거~닐었던, 바~닷가, 모래 위~!
짝 잃은, 소~라 껍질, 뒹~굴고, 이~있네~!”
“좋아, 좋아! 하지만 너무 예쁘게 부르려고 하는 것 같아. 좀 더 강하게 부르는 게 그 노래의 맛을 살리는 거니까 그 점을 주의하고…”
“영원토록, 바다 같이 푸르게–!!
사~랑 한다고, 맹~세한 내 님은, 파도 따라 가버려!!
해-변은 외로이! 나 홀로 앉아서!
밀려갔다 밀려오는 저 파도 소리에 꿈이라도 실어 보내리!
외로운 바닷가! 외로운 바닷가! 외~로운, 바,닷, 가!!”
짝!짝!짝! 나도 모르게 박수가 쳐진다.
전에 내 처소에서 노래 시켜 봤을 때 알아봤지만, 이 아인 정말이지 20세기에서 가수 시켜야 한다.
내가 불러 준 대책 없이 거칠기만 한 군가를 듣고 어떻게 저렇게 멋지게 소화해 부를 수가 있는 거지?
본래 이 노래는 가사 중에서 바다같이 푸르게, 해변은 외로이, 나 홀로 앉아서, 외로운 바닷가 다음에 같은 가사를 다른 이가 복창해야 맛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외로운 바닷가’를 반복할 때, ‘외로운’ 다음에 박수 두 박자 ‘착!착!’이 들어가는 것도 포인트이다. 그래서 대교가 노래를 마스터하고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때는 옆에서 내가 복창해 주었다.
그 와중에 나는 그만 군대 회식 때처럼 흥이 나서 대교와 듀엣으로 ‘물새’를 몇 번이고 불렀다.
나는 어느 사이 오른 손을 치켜들어 ‘반동(군가 부를 때 박자 맞추는 군바리 동작.)’을 해가며 부르기 시작했고 대교도 어설프게 그걸 따라했다.
차츰 광분한(?) 나는 몇 곡의 군가를 더 한국말로 가르쳤고… 비화곡의 성지
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 군바리들의 애창곡들이 메아리쳤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