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6화
언제까지 묘책을 생각해 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공연히 급하고 어수선하게 나는 고민했다.
방 안에서 테이블과 창가를 왔다갔다하며 머리칼을 쥐어뜯거나 창가에 머리를 쿵쿵 찧고…
그렇게 진짜 미친놈 같은 행동을 하는 나를 대교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 나는 뭔가 고민이 있을 때 그렇게 해결하곤 했었다.
물론 보통 혼자 있을 때에만 그랬지만,
지금 대교는 그리 신경 쓰이는 대상이 아니니까…
과거를 가만히 회상해 보면 사실, 그렇게 왔다갔다 하거나 자학(?)하는 행동 끝에 뭔가 아이디어를 떠올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뭐, 그냥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라고나 할까…?
“대교야… 내가 오늘 좀 이상하지?”
“…심화가 있으시면 어떻게든 푸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만 옥체를 훼손치 않고 심화를 달래시는 방법을 찾으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지?”
“…항상 즐기시는 백화주로 대령할까요?”
“좋지!”
그 뭐랄까…
빈틈없고, 그러면서도 상대가 의식하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시중을 들어주는 것을 ‘입안의 혀’ 같다고 표현하던가?
대교 자매, 특히 맏언니 대교가 그랬다.
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차츰 익숙해지면서 이들 자매는 정말이지 빈틈없이 날 챙겨주고 말동무도 해준다.
근데, 입안의 혀라구…? 입안의 혀어…?
으으…! 쓸데없는 말을 떠올렸나 보다.
혀… 입술… 대교의 붉은… 으으…
대교는 술병을 받쳐 든 쟁반을 들고 들어오다가 ‘왕 변태로의 변신’을 막으려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는 나를 보고 놀라 황급히 다가왔다.
“..곡주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웬수야! 그렇게 향기를 풍기며 다가서면 내 증상이 더 심해지잖아!
더구나…
“괘, 괜찮아..! 근데… 그 손 좀 치워 줄래…?”
창백한 안색의 내 이마에 섬섬옥수를 얹었던 대교는 얼굴을 붉히며 황망하게 물러섰다.
호위무사로서의 가벼운 경장 차림이 그녀의 굴곡진 몸매를 여실히 드러나게 했고,
그로써 대교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점(?)인 발랄함이 더해진 모습이 굉장한 기세로 날 흥분시켰다.
젠장… 나는 이를 악물고 심호흡을 하며,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이렇게 되뇌었다.
사실 난 혈기남발의 나이인지라… 그 동안은 모두 내 자신이 느끼는 ‘성욕’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 육체는 문제가 있다.
가끔씩 원판의 영혼과 함께 할 때의 버릇(?)이 되살아 나는 모양이었다.
아침에 ‘처녀경’ 볼 때도 안 그랬는데, 느닷없이 입, 혀… 뭐 이런 특정 조건에 격렬히 반응하다니…
원판의 사생활이 어떤 식이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빌어먹을 놈…
“고, 곡주님…”
대교도 아주 눈치가 없는 소녀가 아니다.
내 뜨거운 시선에 볼을 붉힌 채 서 있더니 슬금슬금 내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희고 고운 손이 망설이며 내게 뻗어지고 있었다.
“대교야, 술을 그렇다 치고, 안주는…?”
갑자기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대교의 눈동자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오늘은 저녁 안 먹었으니까, 좀 든든한 안주로 부탁해…”
대교가 발그레한 볼을 아직 진정시키지 못한 채 황망히 방을 나가자,
나는 술을 한 잔 자작으로 마신 후, 연초대를 물고 불을 붙였다.
웃기지 마라, 극악서생의 육체야!
나, 대한민국 특공대 진유준 하사!
내가 너 따위의 충동질에 얼씨구나 하고 장단 맞출 줄 알았냐?
나는 육체의 반역(?)을 완벽하게 제압한 승리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후욱-! 연초(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내 성격을 형성하는 가장 큰 줄기 두 개 중 하나가 ‘남이 시키거나 남의 영향력에 의한 일은 본래 하고 싶었던 일도 안 한다’이다.
가끔 보기보다 성질 드럽네… 하는 평가를 받곤 하는 이유지만… 뭐, 타고난 걸 어쩌겠는가…
음…
‘원판’은 항상 먹는 것도 시원찮고 입이 짧아, 식사는 주로 온갖 종류의 재료로 이루어진 ‘죽’이 주였다고 한다.
오늘은 전복죽, 내일은 쇠고기죽…
나야 아직 군대식 식욕이 남아, 아무거나 줘도 다 줏어(?) 먹을 수 있지만…
그 까다로운 놈의 입맛에 맞추느라 특급 요리사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라 그런지,
정말이지 이곳의 음식은 하나하나가 맛있었다.
지금 대교가 내온 안주 ‘오리탕’도 육질이 혀에서 살살 녹는 것 같다.
“음, 음, 쩝! 쩝!… 대교… 너도, 좀 들지…?”
입에 음식이 들어가 괴상한 발음으로 말하자 대교가 풀썩 웃었다.
“…곡주님, 전 곡주님이 드시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맛있는 걸 보기만 하는 게 뭐가 좋아?
나는 손짓해서 대교를 앉힌 후 작은 접시에 고기를 덜어 주었다.
대교는 처음엔 난처해하다가 조심스럽게 음식을 집어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배부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억지로 먹이는 것도 고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교 자매가 끼니 외에 무슨 간식 같은 걸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하긴, 죙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 보면 그런 걸 먹을 틈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잊지 말고 챙겨줘야지..
아참!
안주가 너무 맛있다고 술도 안 먹고 안주만
먹어대는 만행을 저지르다니.. 그럼 안 돼지..!
꼴꼴꼴~!
음…. 술 따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헌데… 뭐야, 다 좋은 데 웬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곰곰히 생각해 본 후, 곧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술판을 벌일 시간이 있으면,
작게는(?) 야후 장로를 살리고, 크게는 외침으로부터
이 비화곡을 지킬 ‘묘책’을 생각해 내야 한다는 것!
삼천포로 빠졌다가 술 먹다가 다시 기억해 내다니,
나로서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
하지만 그런 게 억지로 생각한다고 되나?
일단 오늘은 좀 스트레스를 풀고, 그리고 내일 생각하는 것이…
음.. 그래도.. 이대로 술 마시며 잊는 건 좀 그런데…
그래… 이런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인데…
어쩌면 또 나 때문에 누가 죽을지도 모르는 데…
후, 또 원샷!
생각하면 할수록 술잔을 비우게 되는 것은…
그건 이 곳으로 들어와 ‘왕변태’ 역할을 하기 시작한 이래
내가 지금까지 총 26명을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뭐.. 내가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또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내 책임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내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여 극악서생이라는 신분을
거부했으면, 그러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기…
원판 왕변태, 그 자식은 또한 그야말로 왕극악이었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처음 내가 이곳에 온 후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발생했다.
처음 내가(원판) 돌아 왔다고 벌인 연회에서 한 남자 하인이
내가 자리한 술상에다 음식 접시를 엎는 실수를 범했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가 부들부들 떨고 서 있는 모습이 이상하고 우습기도 해서
나는 계속 그를 쳐다봤는데.. 실수한 사람을 계속 물끄러미 쳐다보면
‘죽이라’는 뜻인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게다가 접시 엎은 정도 가지고 뭘 그리 떨고 있나 싶어
그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친절하게 한번 씨익- 웃어 주었는데,
그 다음 순간 그의 머리가 옆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잘린 자리가 하도 말끔하고, 목 잘린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는데도
웬일인지 피도 별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 에
생물실의 인체 모형이 쓰러져 있는 걸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었다.
지금도 이 방 천장이나 하여간 어느 구석에 짱 박혀 있을
‘살수’의 솜씨였다.
그때 나는 웃는 표정 그대로 눈만 껌벅이고 얼마간을 움직이지 못했었다.
놀라기 이전에 너무 어이가 없어, 표정 변화조차 줄 정신이 없었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곡 내 사람들은 ‘역시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곡주’가 변하지 않고
돌아왔다고 수근댔던 모양이었다.
암튼..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딱히 누구한테 나 자신(원판)에 대해 물어 본다거나 할 수가 없어서
그 기간동안 나는 정말 본의 아니게 ‘극악서생’의 면모를 과시해야 했었다.
웃는 얼굴로 누구나 하는 손짓이나 동작 하나하나에 ‘살인’의 암호를 정해 놓은 원판 ‘극악서생’…
그 중 압권은 실수한 사람을 용서해 준 후, 그가 일어서기 전에
내가 먼저 등을 보이고 딴대로 가면.. 그건, 용서는커녕
일가족 몰살의 지시라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지시대로(?) 처리하고 난 후 특별한 보고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리둥절한 가운데,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골짜기에 사는 다섯 일가족과 또 몇 명…
도합 26명의 생명을 내 손으로(?)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평소, 원판이 같은 기간 동안 해치우는 숫자보다 훨씬 많아서
총관 혈마검호가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해 올 정도였다.
“저.. 이제 곡내 식구들 모두 곡주님의 귀환을 뼛속 깊이 새긴 모양입니다.
이제는 징벌에 사정을 두시는 것이 어떠신지…”
아마도 원판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풀렸을 ‘군기’를 잡는답시고
장시간 어디 갔다 오면 종종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도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되어서, 급히 모든 당주급 이상의 간부들을 모아 놓고
한참을 침 튀기며 설명을 했다.
나의 이런 동작은 이런 뜻이 아니고, 이런 표정도 죽이라는 거 아니고,
이런 말투도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여간 내가 노골적으로 ‘죽여라’ 그러기 전에는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거의 호소하다시피 해야 했다.
어쨌든, 그 무렵 깨닫게 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 정체(원판의 육체에 들어와 있는 내 영혼..)를 들킬까 봐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척 보기에도 비리비리한 이 원판의 육체는 또한 천형오음절맥(天刑五陰切脈)이라는 체질..
무협지 주인공 단골 메뉴인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어서..
그 동안 원판은 그걸 치료하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단다.
고금을 통틀어 온갖 신약(神藥), 신공(神功)을 다 동원하여 가능한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고,
나중에는 독(毒)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이런 저런 실험와중에 때때로 중독 되어
죽다 살아나는 일도 다반사였고, 그때마다 기억 상실증이라든가, 합병증에 시달리곤 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희노애락의 기복이 심한 인간이었는데, ‘맛이 간’ 시기에는
그야말로 ‘미친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때로 이상한 소리하고 엉뚱한 행동을 한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인간(원판)을 어떻게 계속 지도자로 모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하여간 그러고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또 정상적(?)으로
회복되곤 했다니, 어쩌면 그것도 나름대로 ‘카리스마’였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망가졌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죽어도 계속 부활하는 불사조 같은 개념으로….
“곡주님…”
잔 들고 기도(?) 드리는 날 대교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오늘 유난히 신색이 어두우십니다. 저는 천성이 밝지 못해 곡주님의 주흥을 돋우기 어려우니, 미령이를 불러 그 애에게…”
“아냐, 됐어. 그냥 오늘 머리가 좀 복잡해서 그래. 그보다, 제기… 대교야 넌 날 어떻게 생각해? 별 것 도 아닌 일로 불쌍한 하인들이나 그 일가족까지 죽게 한 이 극악무도한 놈을 말이야…”
“…곡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목숨은 모두 곡주의 것입니다. 곡주의 명에 죽고 사는 것은 선악의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봐,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솔직히 얘기해봐, 내가 미친 척 너희 자매를 범하고 죽이고 그러면 좋겠어?”
“그, 그건….”
“싫지? 그치? 이봐 대교.. 다 그런 거야. 누구에게나 나 자신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구.”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자매는 곡주님을 위해 언제고 모든 것을 바칠 것이며 목숨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제기… 알았다, 알았어. 괜한 거 물어서 미안타.”
이 애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날(?) 천하의 극악무도, 왕변태, 초 절정 살인마로 생각한다고 솔직히 말할 리가 없지…
제기, 왜 하필 이런 놈과 바뀐 거냔 말이야…
쓰불! 원샷!
“…그동안 곡주께서 몇 몇 생명을 해하셨다고 하지 만 대야(大爺, 원판 사부를 말하는 듯)께서 떠나신 후 이 비화곡을 이끌어 강호의 위선자들로부터 저희를 지켜 주신 것도 바로 곡주님이십니다. 만일.. 곡주님을 불경한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숲을 보지 못하고 수목만 본 것입니다.”
우오- 여기가 군대면 얜 국방부 홍보실에 특채로 스카웃 해야 할 인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것이 말도 잘 해…
“…곡주께선 이 비화곡의 희망이시며, 작게는 저희 자매의 신앙이십니다.”
윽! 군대는 군대인데, 북한군에 더 적합하겠다. 어버이 수령 어쩌고 하는…
“..하지마!”
“예..?”
“나 한테 무슨 신앙이니, 고금제일의 지략가라느니 하는 닭살 돋는 말.. 너라도 좀 하지 마라, 응?”
‘닭살 돋는다’란 말을 몽몽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소녀는 다만 저희 자매의 진심을…”
이 시대의 조명(?)이 시원찮아 확실치는 않지만, 대교의 볼에 노을이 진 것 같았다.
어쨌든 구여운 것…
원샷!
술이 술을 부른다고, 어느 사이 술맛이 살아나 몇 잔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대교야.. 너 며칠 전 불렀던 그 노래, 그거 한번 더 불러 줄래? 뭐, 니 목소리 하나면 충분하니까 다른 악기 가져오지 말고..”
며칠 전 아침 혼자 흥얼거리다가 잠에서 깨어난 나한테 걸려, 대교는 내무반 막내처럼 속절없이 내 앞에 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강호 생활의 허망함을 노래한, 그 무슨 영화더라…
아, 그래 ‘동방불패’의 ‘소호강호’라는 노래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노래였다.
대교가 배시시 웃으며 망설이더니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톡!톡!톡!
통역을 중단하자 즉시, 원음의 중국어 노래가 되었다. 대교가 우리 시대에 태어났다면 만능엔터테이너…(맞나?) 하여간, 최소한 영화배우와 가수 겸업은 우수했을 것이다.
애초로운 듯한 미성이 은근히 감겨오는 듯한 느낌이 참 좋은 대교의 노래를 들으며… 원샷!
역시, 난 안 돼…
낼부터 열심히 생각해 보자. 오늘만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