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77화
뒷머리를 긁적이는 내게 구양공 촌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승에겐 몇 명의 동행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해남파의 일선녀 고화옥이라고 합니다.”
어- 그럼..?
그러고 보니 지난 번 만났을 때 난 고화옥에게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강호에 나갔을 때, 나(원판)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면 싸움이 벌어지지 않게 중간에서 ‘중재’를 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소개(?)해 달라고 했었다.
그 땐 고화옥도 난색을 표했고, 소식도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그런 인물로써 ‘성승’을 데려온 모양이다.
흠! 이거, 저쪽도 만만치 않은 데? 화천루에 이어 소림사까지 움직인다는 건가?
“성승이라~ 소림 성승이라…”
문득 들려온 음성은 사영 무영(명호와 본명을 따로 들으면 괜찮은데 합쳐서 부르니까 웬지..)이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음, 혹시 전에 성승을 만난 일이 있소?”
웬지 옛일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이라 그렇게 물어봤더니만 사영은 먼저 피식 웃어 보인다.
“현역 시절, 유일하게 실패한 임무가 그 것이었소. ‘성승 암살’.”
“흠- 역시 대단하긴 한 모양이군. 죽음의 그림자도 어쩔 수 없었단 말이지..?”
“만약, 그 때 그가 조금이라도,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였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의 생명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오. 허나 당시에도 100세가 넘었다는 그 노 괴물은 좌선한 채 움직이지 않았소. 내가 등뒤를 노리고 있는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정리하면, 저 사영조차 열흘 동안 노리다가 결국 빈틈을 못 찾고 포기했다는 얘기다.
고화옥 이 여자, 예상보다 부담스런 거물 손님을 데려왔군. 하긴 뭐, 성승의 명성으로 봐서는 내 요청에 가장 맞는 사람을 구해오긴 한 거니 뭐라 그럴 순 없겠지만…
구양공 촌장의 말에 의하면 곧 본단에서 날 데리러 온다니 그걸 기다리기로 하고 그 동안 사영과 조금 남은 술을 마저 비웠다.
한참 술맛 나는 참에 방해를 받은 것은 다소 짜증이 났지만 당대 최고의 고승이라는 성승과의 만남을 생각하니 긴장과 호기심이 교차한다.
난 특정 종교 신자는 아니지만(아참, 코리아 교가 있었나..?) 불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와 스님이란 신분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 군대에서 ‘종교 행사’를 할 때 주로 ‘교회’에 갔던 것은 순전히 ‘잠자기 좋은 장소’를 찾느라 그런 거고….
“과거에 성승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다면 그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겠군.”
이미 그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고 있었는지, 사영의 입에서는 비교적 쉽게 성승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20세의 늦은 나이에 소림사에 입문. 그러나 보통 12년이 걸리는 소림사의 무승(武僧) 수련을 불과 4년 만에 마치고 목인항(木人巷)을 포함한 모든 관문을 통과한 천재 무승. 하산한 후 20여 년에 걸쳐 펼친 협행과 중생 제도로 명성을 얻었음. 50세가 되는 해 소림사에 돌아와 장문인 자리를 한 항열 위인 이몽(梨夢) 선사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자운당(紫雲堂)을 맡음. 역대 주지들의 은거소인 자운당을 30년 동안 관리하는 시기에 최근 200년 간 해석이 불가능했다고 알려진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을 연구한 것으로 추정. 본래 법명은 지공(指空), 천인군도(賤人群島)의 혈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였던 경이로운 무공 수위와 100여세를 넘긴 이후 다시 시작한 중생 제도의 길에 감명 받은 강호인들은 그를 성승이라 칭하며 추앙하기 시작….”
여기까지는 뭐 들어 줄만했는데, 이어지는 말들은 다소 썰렁했다. 성승이 화장실을 언제 몇 번이나 갔던가, 식사 습관, 심지어 사람 만나고 있을 때 누가 부르면 어느 방향의 몇십도 각도로 고개를 돌린다는 것까지 해서 전반에 걸친 세세한 사항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승의 과거 전력 소개하는 것보다 엄청 길었다. 지루할 정도로….
“저기, 그게 대체 언제 알아 놓은 거요?”
“…음, 22년 전 이로군요.”
이 양반도 참 대단하다.
킬러로서, 자기 임무 수행을 위해 죽일 상대에 대해 많이 알아 놓은 건 이해하겠는데 그 22년 전 정보를 아직도 달달 외우고 있다니…
“대교나 다른 자매들이 똘똘한 건 역시 유전이었나 보군.”
“무슨..?”
“아니, 그냥 혼잣말했소. 어- 이만 가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네?”
내가 본단에 처음 갈 때 한 번 타고 갔던, 네 군데의 손잡이를 네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잡아 들고 있는 ‘가마’. 그게 싸리문 바깥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 언제 다시 술이나 한잔합시다.”
“말씀대로 찾아가도 박대나 하지 마시길..”
사영과 정겨운(?) 인사를 나누고, 굳이 따라나서겠다는 소교 이하 자매들을 그 곳에 남겨 놓고 나는 비화곡주 전용 ‘초호화 고급 모범 벤츠 가마’에 올랐다.
다른 이유도 이유지만, 다른 사람이 직접 손으로 들고 다니는 가마에 내가 타는 것이 부담스러워 이제껏 사용 안 했었는데, 이번엔 손님이 기다린다니 그냥 타고 빨리 가야겠다.
무협 영화 보면 가마꾼들이 초고수여서 가마가 아예 하늘로 날라 다니는 장면도 종종 나온다.
이건 그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땅 위를 달리지만 그래도 진짜 벤츠도 이보다 못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승차감이 엄청 좋다.
좌석은 침대 비스무리 한 푹신한 쿠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판은 평소 이거 타고 다니면서 항상 아름다운 여자들을 동승시켰다고 하고.. 안에서 뭔 이상한 짓을 했는지 사향과 그리고 또 각종 괴이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긴다.
음.. 가마꾼들이 하도 능숙하여 이렇게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보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바깥 풍경이 뒤로 달리는 속도감으로 보아 시속 3-40 KM 정도는 되는 듯 싶은데…?
가마 양옆에서 따라 달리는 혈랑들과 그 사이 보강된 무수한 호위 인원들을 보고 있자니 영화 ‘보디가드’의 장면들과 우리 나라 드라마 ‘모래 시계’에서 쓰였던 우우우우~우~~하는 배경음악이 떠오른다.
음.. 분위기 맞추려고 그러나..? 주변의 허공에 가랑잎이 흩날리고 있다.
길가로 물러 선 비화곡 시민(?)들은 곡주 전용 가마를 알아보고는 이편을 향해 엎드려 절하고 있고…
이런 분에 넘치는 신분이 된 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역시 웬지 어색하고 부담스럽군. 아무래도 난 확실히 ‘서민’ 체질인가 보다.
“곡주님. 현재 속도면 본단까지 한 다경(15분) 후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속도를 유지할까요?”
오른쪽 가마창(?) 밖에서 달리고 있는 혈랑대 백인장 황성의 충실한 중간 보고였다. 제기, 속도 유지나 마나 무지 빠르군.
“…되도록 천천히 가.”
“존명!”
솔직하게 말해, 혈랑들을 포함한 내 보디가드들과 직접 가마를 들고 뛰는 자들이 빨리 뛰려면 힘들까봐 배려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길을 아까 내 발로 몇 시간을 걸쳐 뺑이 치며 온 것이 괜히 허무해서 그랬다.
쳇-! 아무래도 내가 서민 체질이란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군. 에이… 기왕 이렇게 된 거 망가진 김에 그냥 즐길 꺼나..?
처음 이 가마에 탔을 때는 원판의 육체에 들어 온 직후여서 주변 상황에 적당히(?) 따라가는 것 만 해도 바빴었다.
이 가마 안에서도 여기저기 뒤적이긴 했는데, 그건 순전히 상황 파악을 위한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이 있군, 그렇군, 하고 알아두는 정도였지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여유 있는 지금은… 어, 맞다. 내 기억으론 아마 제일 처음에 발견한 것이 정면의 천 주머니에 있는 몇 권의 춘화(春畵, 중국 에로 or 포르노 소설.)였다.
당근, 그런 류의 서적은 비취각에도 무지하게 많은.. 엇-? 오호~ 이건 못 본 내용이네? 이 가마 담당자는 겹치기 안 하고 특별히 새로운 책을 비치했나 보다.
에.. 현재 장소에 어울리는 좁은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위라, 남자는 자세를 이렇게 하고 여자는 이러해서 요런 자세를 취하는 것이….
흐음-! 흐.. 후후, 흐흐~~ 좋군!
달리는 가마 안에 편안히 누워 재밌는 책(흥미 위주의 중국 액션 포르노..)을 보면서 간간이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대하는 것도 남다른 흥취가 있구만.
훗-! 속도를 더 줄이라고 할까..?
“곡주님. 도착했습니다.”
우이쒸-! 벌써 다 왔어?
아쉬운 마음으로 가마에서 내려보니 이미 대청각 앞 마당(?)이다. 내리면서 대청각 앞마당 구석(?)에 서 있는 여자 해남파의 고화옥과 그 옆의 늙은 스님을 보니 그제 서야 아차차~ 하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했어야 했는데 암 생각도 없이 오다니, 천하의 성승.. 현 시대 최고의 고승을 만났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설마 저 노 스님, 나와 심오한 불교의 교리를 논하자고 하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