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83화
사영이 돌아가고 난 후 난 아홉 장로들을 전부 대청 각으로 호출해 놓았다.
근데 다음 날 온 것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나머지 세 명 중 한 명은 장백산(長白山, 현재의 백두산.)에 친구가 있어 만나러 갔는데 한 반년쯤 더 지나야 올 것 같다고 하고, 한 명은 중간에 움직일 수 없는 폐관 수련 중이어서 역시 두 달 정도 후에나 나오단다.
마지막 한 명은 노환과 중병이 겹쳐 오늘 낼 오늘 낼 하는 중이라 호출에 응하기는커녕 곧 아홉 장로가 여덟 장로가 되거나 한 명 보충해야 할 판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과반수가 모여 거기서 또 과반수가 찬성하면 되는 거라 여섯 명만으로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현재 내 오른 쪽 앞에 있는 시커먼 흑의(黑衣) 장삼에 검고 긴 머리, 역시 검고 윤기 있는 관운장 수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장로인 천마 사문학 노인이었다.
나이는 칠십이 넘었는데 동자공(童子功)인가를 익혀 저렇게 잘해야 중년의 나이처럼 보인다고 하고, 그 용모 때문에 야후 장로를 백관우(白關羽), 천마 대장로를 흑관우(黑關羽)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데 본인들은… 음, 지금 그거 따질 때가 아니지?
천마 대장로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소개가 따로 필요 없는 야후 장로 소진광.
또 그 뒤는 북두살성(北斗殺星) 마오천 장로, 수염까지는 관운장 일파(?)라고 할 수 있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 노인이라는 점이 다르다. 복장은 항상 저렇게 피처럼 붉은 장삼을 걸치고…….
왼쪽 맨 앞의 이 기괴한 얼굴의 – 독수라와 맞먹는 – 노인이 혈신(血神) 명관약 장로인데 천마 대장로와는 젊었을 때부터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다른 장로들끼리는 본래 지위 격차가 없지만 명칭대로 대장로가 한 급 위의 수장이고,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인 듯했다.
혈신 장로 뒤의 두 명은 그야말로 똑같은 복장과 용모를 하고 있는데, 용모만으로 보면 옛날 그림에 나오는 신선(神仙) 그 자체이다.
항상 소매며 옷깃 모두가 바닥에 닿을 듯 길게 늘어진 새하얀 장삼을 걸치고 길고 흰 눈썹과 수염을 날리며 한 손에 오래되어 비틀린 모양의 커다란 나무 지팡이를 쥐고 다니는 노인들이다.
실제로도 쌍둥이 노인들인데 현재는 자신들을 비화쌍선(秘花雙仙)이라 자칭하지만, 이 곳 식구들이 다 그렇듯… 진짜 명호는 흉악쌍살(凶惡雙殺)이다.
그리고 이 비화곡 성지의 첫 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흑쌍살들의 사부이기도 하다.
나는 대충 이러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 장로들과 잠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난 후 오늘의 안건(?)을 밝혔다.
“아시려는지 모르지만, 곡 내의 1급 거민 중에 과거 혈의문 소속으로 활동했던 사영 무영이란 자가 있소.”
그 인간이 나가고 싶데…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려다 가 참고 사영이 요구한 대로 말을 꺼냈다.
“역시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번에 제가 적어도 두 달 정도는 바깥에 나갔다 와야 하는데… 그 자를 데려갔으면 하오.”
부탁 받은 대로 말하긴 했지만 나는 매우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무대포 야후 장로만 빼면 다들 눈치가 빤한 노인네들이므로 그들이 내가 ‘장로들이 반대하면 얼른 안 한다고 할 꺼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 채기 바라면서……
“과연 혈의문의 사영이라, 그 자가 예전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확실히 곡주께서 어떤 일을 도모하더라도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오른쪽의 천마 대장로가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아냐, 아냐 나 그 사람 하나도 쓸데없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것을 듣기라도 한 듯 왼쪽의 혈신 장로가 나선다.
“허나, 그 사영은 본 곡의 1급 거민. 그 만한 고수가 본 곡에 없다고 할 수 없는 터, 굳이 어렵게 그런 자를 쓰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뭐… 댁이 천마 대장로 말에는 무조건 토달고 나올 줄은 알았소만. 하여간 고맙소, 혈신 장로!
“명 장로의 뜻은 알지만, 곡주께서 선택하신 인물이니 반드시 깊은 속내가 있을 것 아니겠소.”
야후 장로. 내 편 들어주는 건 좋지만, 내 속마음을 좀 알아 줘. 이번엔 내 편 들지 마, 응?
“흠, 곡주께선 어째서 이번에 새삼 1급 거민을 동원할 생각을 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천마 대장로의 질문에 나는 우선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중에 사영에게 떳떳(?)하려면 노골적으로 ‘실은 나 할 전혀 마음 없다.’라고 할 순 없었다.
“아, 그냥 좀. 사람을 보니까 탐이 나서… 하지만 나도 망설이고 있소. 공연히 아까운 인재 하나 버리는 거 아닌가 하고… 뭐, 이번엔 전적으로 장로님들 판단에 맡길까 합니다.”
회심의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힐끗 천마 대장로를 살피는 혈신 장로…
그에 반해 특유의 냉냉한 무표정의 천마 대장로.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인원도 반반인 것이 혈신 파와 천마 파가 팽팽히 대립하여 50대 50일 것 같지……?
내가 무슨 핑계를 대서 혈신 파 쪽 손을 들어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천마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사안이 미묘하오이다. 비슷한 전례를 찾기도 어려우니 노부들에게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어- 그러시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장로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장로들이 모두 나갔을 때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항상 그렇듯 내 뒤에 대기하고 있는 자매들 중 소교가 특히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동생들도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소교는 어젯밤 아예 한숨도 못 잤는지 얼굴이 여간 초췌한 것이 아니었다.
“소교야, 너 그거 알아봤구나.”
“예, 예……?”
“1급 거민의 신분인 자가 비화곡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말이야.”
“아, 그건… 곡주님과 아홉 장로님들 중 반 수 이상 장로님들의 동의를 얻어… 저, 절혼무저갱(絶魂無底坑)을 통과하는 것 입…니다.”
자식,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는군.
“절혼무저갱이 어떤 곳인지도 알았나 보구나.”
“예, 소녀가 듣기로… 그 곳은 인세의 지옥……”
“그런 소문이란!”
난 목소리를 높여 단호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본시 세월이 흐를수록 과장이 심해지는 법. 만약의 경우 너희들의 아버지 사영이 거길 들어가게 된다해도, 그 곳도 사람의 손으로 만든 곳이다. 사람이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 장담은 못한다.
“안심해, 장로들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거야. 다시 들어오면 내가 안 하는 방향으로 유도해 볼께.”
“소녀는… 그리 되어도 걱정입니다.”
또 뭐냐, 이 걱정을 달고 다니는 소교야.
“아버진 예전부터 한 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말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교 언니 정도… 아, 장로님들이 오십니다.”
나갔던 장로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우르르 들어오는 군. 군대에서 회의 중 십 분간 휴식으로 담배 한 대씩 빨고 들어오는 모습이 연상된다. 음, 근데 왜 다들 자리에 앉지를 않지……?
내 앞에 횡대로 주욱 늘어서는 장로들, 그리고 그 중앙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내게 포권하는 천마 대장로. 뭐야 이건, 최종 보고하는 분위기잖아? 벌써 결론을 내렸단 말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비화곡 장로 6인의 뜻을 유일지주(唯一之主)께 고합니다.”
이건 이 곳의 정식 보고형식이다. 하사 진유준, 대대 장님께 보고 드립니다…식으로 말이다.
“본 대장로 사문학 이하 6인의 장로들은 만장일치로 곡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뭐야……?
“마, 만장일치?”
“그러합니다, 곡주님. 1급 거민 사영 무영의 절혼무저갱 입갱 일과 기타 일정 등 모든 것도 곡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뜻밖에 사태에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혈신 장로에게 물었다.
“혈신 장로도, 그냥 동의하신 것이오? 반대 입장 아니었소……?”
혈신 장로는 내 말에 그 기괴한 얼굴을 더 흉측하게 일그러트렸다. 그게 그는 웃은 거다.
“곡주의 뜻이 그러한데 제가 어찌 토를 달겠소이까. 뜻대로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뜻대로…? 내 뜻은 그게 아닌데…? 어이, 이봐들! 평소 그렇게 뜻이 안 맞던 사람들이 도대체 내 뜻을 어떻게 해석했기에 ‘만장일치’로 찬성이라는 결론이 나온 거야?
“다른 하명이 없으시면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 다.”
이게 아닌데…? 이봐들 다시 생각해 줄 수 없어? 라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하나 둘 대청각을 떠나는 장로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낀 일이 또 있었다. 야후 장로가 해남파의 장명 일행을 아작 내는 바람에 화천루와의 전쟁까지 염려되던 – 결국 현실이 됐지만 – 시기에 해결책이랍시고 술기운으로 지껄였던 내 의견들이 채택되었던 그 때의 기분… 다들 돌아와! 취소, 물러 줘, 라고 외쳐도 낙장불입(落張不入)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기분 말이다.
“저, 절혼…무…저갱… 사람이 만든 것이니… 반드시 불가능한 것은……”
뒤에서 들려온 것은 소교의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렇죠…? 그렇죠, 곡주님…?”
암, 절혼무저갱 같은 껄렁한 동굴쯤이야 내 손바닥 안이지. 내가 세밀 지도 좌악 그려서 니 아버지 줄게, 걱정하지마!….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서 나는 허탈하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절혼무저갱인지, 뭔지 하는 곳에 대한 정보는 몽몽의 데이터 안에 없다. 통과에 필요한 함정 위치, 기관 구분과 파괴법 등의 데이터는커녕 제공 가능한 자료라고는 이 몇 줄뿐이란다.
[ 구전 된 기록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해당 지역에는 최대 3440종의 기관이 설치 되어있으며 이 중 최대 84%가 현시대까지 동작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며 기관의 기동 목적은 인명 살상 임. ]
이걸 진유준 식으로 간단히 줄이면 이렇다.
- 유서 써놓고 들어가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