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9화
대교는 비스듬히 옆모습을 보인 채 몸을 굽혀 새 옷을 집어들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손에 든 옷으로 앞을 가린다.
그로써 대충(?)은 가려졌지만… 이미 내 망막에는 눈부시게 흰 대교의 나신이 새겨져 있었고, 살짝 가린 현재의 모습은 오히려 더 매혹적이었다.
꿀꺽-!
말을 잇기는커녕 나도 모르게 목으로 침이 쉴새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대교가 맛난 음식도 아닌데 이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으흑!
옷으로 가린 것도 무심결에 나온 동작인 듯, 빨갛게 볼을 물들인 대교는 가리는 데 이용했던 옷을 살짝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만화 식으로 하면 내 코에서 푸악! 하고 코피가 터져 나올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과 고개를 돌렸다.
“…언능 옷 입어. 감기 들것다…”
오오… 이 얼마나 대단한 자제력이란 말인가.
나는 스스로의 인내력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비직, 웃었다.
“소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몸이… 보시기에 너무 미흡한 것입니까?”
매우 섭섭해하는(?) 음성이었다.
“…옷, 다 입었니?”
그제서야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예.”
나는 몸을 돌린 다음 천천히 대교에게 다가갔다.
내가 준 남자 옷을 걸치고, 젖은 긴 머리채를 모두 뒤로 넘겨 늘어트리고 선 대교…
살짝 숙이고 있는 얼굴에 뽀로퉁한 느낌의 표정이 미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인가? 참 많이 컸다(?).
이젠 ‘극악서생’ 앞에서 삐지기까지 하다니…
나는 쩝! 쓴 입맛을 다신 후 입을 열었다.
“대교야. 넌 말야… 정말이지 예뻐. 몸도 마음도… 솔직히 넌, 내가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아름다워.
…내가 널 손대지 않으려 하고 그리고 조금 전처럼 너에게서 눈을 돌리거나 하는 건 그게 옳지 않기 때문이야.
넌 아직 어리고… 더구나 우리는 공식적으로 정혼한 사이도, 뭣도 아니고…”
내 칭찬에 잠시 황홀한 표정을 지었던 대교의 얼굴이, 내가 ‘정혼한 사이’ 운운하자 곧바로 세상에 다시 없는 희한한 얘기를 듣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길 가다 조폭에게 끌려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죄악이라고 조폭이 심각하게 주장하는 걸 듣게 된… 그런 표정이랄까?
“후… 예전의 내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난 이제 앞으로 ‘바른 생활 청년’으로 살고 싶거든?”
말하다 보니 멀쩡한 애 하나 세워놓고 개그하는 기분이 든다.
“넌 믿기 어렵겠지만… 난 앞으로 사람도 죽이지 않고 그리고 여자도 겁탈하지 않고… 그렇게 살고 싶어.
그리고 또… 난 널 존중해 주고 싶어.
내 시비나 호위 무사이기 이전에, 아름답고 총명한 소녀로서… 아니, 같은 인간으로서 넌 내게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
흠, 마지막 표현은 좀 통속적이긴 해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인간적으로 존중하겠다는, 그 괜찮은 말이 대교에게 어떻게 들린 것인지 대교는 입도 열지 못하고 멍하니 날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가 지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얼어붙었던 몸이 풀린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곡주님이 어떤 분인지… 소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굳이 날 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느껴봐…”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다.
아아- 나 미쳤나 봐. 저런 왕유치, 존나 느글거리는 대사를 입에 담다니…
난 내가 한 말에 스스로 질려서 슬며시 몸을 돌려 대교를 외면했다. 팔뚝에 닭살이 돋는 것 같다.
사실… 난 아직도 현실에 적응이 안 된 상태여서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해도 내가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끝나고 나면 밖에선 아무도 날 못 알아볼 ‘가면극’ 무대에 선 기분이랄까?
과거로 날아온 전체적인 상황도 비현실적이지만 본래 몸, 본래 내 음성도 아닌데다, 몽몽을 통해 한 단계 통역을 거쳐 다른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더 그렇다.
그래서인지… 유치하다는 의식을 하기도 전에 불쑥 영화나 만화책에서 본 대사를 지껄이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갈수록 그 빈도가 많아지는 것 같고… 음, ‘왕자암’으로 치닫기 전에 자제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소녀가 곡주님을 모신 기간이 너무 짧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곡주님을… 곡주님을… 느껴…본 것 같아, 대교는 너무나 기쁩니다.”
“흠… 흐흠-!!”
대교의 감격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공연히 헛기침 소리만 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한다지…?
음… 그래, 빨리 무거운 주제로 넘어가자.
난 손짓으로 대교를 좀 전의 연못 옆 석재 의자에 앉게 한 후,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난 의식적으로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너도 ‘냉화절소 장청란’이란 이름은 들어 봤겠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좀 말해줄래?”
대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해남파 장문인의 무남독녀로 알고 있습니다. 나이 6세가 되던 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 여인이 해남파에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사라졌다고 전해지고…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다시 해남파에 돌아왔는데, 그때는 강호 말단의 일천한 해남파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절정의 신공을 몸에 지닌 채였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매우 아름답게 성장한 그녀는 그 차가운 성품 때문에 ‘냉화절소’라는 별호로 불리면서도 천하 미녀 다섯 명 중 하나로 꼽히고… 또한 무예 외에도 시, 서, 예(詩, 書, 藝)… 다방면에 뛰어난 재녀(才女)라 알고 있습니다.”
“흠… 다재다능이라… 근데 차가운 성품이라고?”
“예… 누구에게도 다정하게 대하는 법이 없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에게조차 웃음을 보이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썰렁한 계집애네…”
“예…?”
“신경 쓰지 마, 그냥 해본 말이야. 그보다 내가 널 여기 데려온 건, 실은 너로 하여금 그 장청란을 상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어.”
“….소, 소녀가 어떻게… 소,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화천루의 전인일지도 모를… 절정의 고수… 하, 하지만 소녀는 아, 아직… 총관의 검술도 채 이루지 못한…”
대교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는다.
군대에서 우리 중대 막내 이등병한테 우리와 라이벌인 1중대 상병과 태권도 대련하라고 시켰을 때 저 비슷한 반응을 본 것 같다.
“넌 그녀를 이겨야 해. 그것도 반드시 ‘무공 대결’로…”
막내 이등병에게, 그 대련은 실전과 마찬가지였다.
지기라도 했다가는 내 손으로 묻어 버리겠다고 했을 때의 표정…
“원래는 정식 무공 대결 말고 딴 걸로 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어. 니가 여기 나가서도 살아남으려면…”
어쨌든 이기면 특박을 내보내 주겠다고 했을 때의 표정…
…될까? 할 수 있을까, 대교도…?
그때, 태권도 단증도 없는 우리 막내가 악으로 깡으로 1중대 태권도 3단 상병과 맞붙어 끝내 이기진 못했어도, ‘무승부’라는 뜻밖의 결과와 ‘악바리’라는 별명을 획득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