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9-2화 :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公主).(2)
4-5.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公主).(2)
내 손을 잡고 따라오던 금동이가 으르렁거리며 경계했지만 나는 녀석을 안아 들며 진정시켰다.
“흐흐흐~ 웬 손님이 둘이나 더 찾아 오셨군.”
그들은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신속하게 천우신과 내 무기를 빼앗았다. 이어 거칠게 등을 밀어 중앙에 유일하게 남은 탁자 앞으로 몰아세웠다. 거만한 표정으로 탁자에 걸터앉은 화려한 복장의 사내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곧 흥미를 잃은 듯 명령을 내렸다.
“마차를 뒤져 쓸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라.”
그의 명령에 따라 세 명이 바깥으로 나갔고, 실내에 남은 열 명가량의 무리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그 외에도 다섯 명의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화려한 복장의 사내 발밑에 엎드려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다섯 명의 남녀는 상황이 달랐다. 남자들은 얼굴에 멍이 들고 상처투성이였고, 유일한 여자 한 명은 찢겨진 옷으로 몸을 가리려 애쓰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이 다섯 명이 이십여 명의 강도로 보이는 무리들에게 재물과 기타를 강탈당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등장해버린 것 같았다.
“마차에 쓸만한 게 있으면 네 놈들은 고통 없이 죽여 주고, 아니면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어떤 경우든 죽이겠다는 선언이었다. 살기가 넘치는 그 표정은 빈말이 아니었다. 화려한 얼룩무늬 옷을 입은 사내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피해자들 중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아까 하던 걸 마저 해 볼까?”
거의 알몸이 된 여자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고, 그 옆에 있던 노인은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사정했다.
“제발, 제 딸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흥, 촌장, 넌 우리 위대한 마인 진유준님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나 본데, 오늘 그분을 대신해 내가, 혈랑마가 너희에게 지옥을 보여 주마.”
젠장… 이래서 문밖에서 천우신에게 전음을 보내 상황을 살펴보자 했던 것이다. 내 이름을 들은 것 같아서였다. 고룡포에서 개판을 벌인 후 내 악명이 꽤 높아져서 가짜 진유준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들었지만, 막상 현장과 맞닥뜨리니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거기, 재수 없는 놈들! 살고 싶다면 바닥에 엎드려 나한테 절하고 발바닥이나 핥아!”
“머리를… 뭐 어쩌라고?”
나는 중얼거리며 금동이를 내 머리 위로 던졌다. 순간 놈들의 시선이 금동이에게 향했고, 그 틈을 타 경공을 발동해 단숨에 혈랑마에게 달려가 안면에 박치기를 날렸다.
“이렇게?”
내 일격에 놈의 얼굴이 함몰되며 눈이 풀렸다. 당황한 다른 놈들이 칼을 휘둘렀지만, 나는 피하면서 여전히 혈랑마를 붙들고 주위 놈들에게 휘둘러 쓰러뜨렸다. 그 사이 천우신과 금동이가 날아다니며 나머지 놈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이봐, 마인 진유준의 부하 혈랑마, 계속하자!”
“아… 아으으…”
이미 코가 주저앉고 앞니가 빠져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놈에게 내 분노의 박치기가 계속 되었다. 써먹은 지 오래된 벽 대신 사람 받아보는 느낌이란…
“혈랑마님! 놈들의 짐에서 이상한 게 나왔… 헉!”
그제야 마차를 뒤지던 놈들이 안으로 들어오다, 나를 발견하고 놀라 멈춰 섰다. 객잔 안에는 내 빠샷~ 하는 기합 소리와 퍽퍽 소리가 가득 찼다. 애써 익힌 무공도 좋겠지만, 열받았을 땐 단순한 방식이 최고였다.
십여 분쯤 지나자,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혈랑마와 부하들을 묶어 놓고 피해자들의 진술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놈들이 이 지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비적들이란 말이요?”
“그,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몇 군데 산의 악적들이 행인들을 괴롭히긴 했지만…”
두어 달 전, 한 산채에 그 유명한 극악서생과 의형제를 맺고 있다는 마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놈은 무공이 강한데다 괴이한 무기와 높은 악명으로 순식간에 산채를 접수하고 주변 산채들도 하나씩 손아귀에 넣어 ‘혈랑회’라는 이름의 비적 연합을 만든 것이다.
“그 후로는 마을에까지 내려와 약탈을 일삼으며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회주는 무시무시한 악마 같은 자라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말하다 보니 새삼 감정이 복받쳤는지, 아래 마을 촌장이라는 노인과 다른 남녀들도 치를 떨었고, 덩달아 내 치도 약간 떨렸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기로는 이 시대 중원에서는 비적들이 꽤 일반화되어 있었다. 보통 근처 마을 사람들과 공존하며, 보호비 명목으로 조금씩 빼앗아 가는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도 다들 사는 게 그렇지, 하며 익숙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보통인데… 이 짝퉁 진유준이라는 놈은 시장 질서를 무시하는 아주 악랄한 놈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을의 촌장인 당신과 식구들이 견디다 못해 마을에서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이거군.”
솔직히 이 촌장이라는 노인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시골 마을 촌장 치고는 부유한 편인지, 우리가 되찾아 준 재물의 양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닙니다, 은공. 제 자식은 이 아이 하나뿐입니다. 저 청년들은 다른 마을에서 그 마을 대표로 제게 재물을 전달하러 온 것입니다. 실은 이 재물들로 명성 높은 고수들을 고용할 생각이었는데… 저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길목인 이 객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 미안하게도… 그동안 부패한 정치인과 공무원 뉴스만 듣고 살아서인지 이 시대의 마을 촌장까지 선입견으로 봤나 보다.
“에… 그런 생각이라면 오히려 액수가 좀 작지 않을까 싶은데……”
“예. 하지만 저희 같은 촌부들에게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남해오신룡 대협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기에 나섰던 것입니다.”
으잉?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봐, 우신. 어떻게 된 거야?>
<글쎄… 난 아직 보고받지 못했는데… 그래도 오늘 안으로 다시 확인해 보겠네. 실은 사람들 입소문이 우리 천이단조차 앞서는 경우가 있기도 하니 말이야.>
하긴… 소문이라는 게 무섭지. 어떤 일에 대해 아무리 철통같은 보안을 해도, ‘너만 알고 있어.’라는 초강력 바이러스를 타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는 게 입소문 아니겠나. 어쨌든 그냥 지나치기엔 찝찝한 상황인데… 음… 북해빙궁과의 일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오가는 시간만 봐도 며칠 여유가 있었다.
<소문뿐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군.>
<이런, 난 곤란하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지. 우신, 자네는 먼저 가게. 난 남해오신룡 녀석들을 찾아보고 나서 곧 따라가는 걸로 하지.>
<흠… 그럼 7일 후 복대성(復代城)에서 만나기로 하세.>
<좋아.>
7일 후라… 본래 거기까지 4일 정도가 남았으니, 3일의 여유가 생긴 셈이다.
얼마 후, 천우신은 마차를 몰아 객잔을 떠났고 금동이는 내 곁에 남았다. 나는 포로로 잡은 비적 놈들을 새삼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저 혈랑마인지 하는 놈의 복장 말고는 별다른 사항은 없어 보였다. 혈랑마의 복장은 매우 고급스러운 옷감에 화사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그 무늬가 내 전투복을 흉내 낸 것임이 분명했다.
“명칭에 혈랑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도 그렇고… 좀 어설프긴 하지만 이건 확실히 진유준 하사에 대한 상식은 있단 얘긴데……”
나는 내 박치기에 당하지 않은 정신이 말짱한 놈들을 추궁해 보았지만,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했다. 가짜가 가지고 있다는 독각포라는 것도 궁금하긴 했지만… 직접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어- 은공. 설마 혼자서 저 무서운 악마 진유준을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봐요, 촌장. 실은……”
“흐흑~!”
어이, 촌장 딸. 너는 또 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그러나?
“이 아이의 언니도 그 사악한 진유준에게 끌려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답니다.”
“아니, 그게 실은……”
“우리 아버지도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크흑~ 그 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 여동생도 끌려갔습니다!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을 평생 저주할 겁니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그 놈은 반드시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입니다!”
젠장,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이 몰아치는구나.
“이봐들… 고마워.”
내가 갑자기 자신들을 돌아보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비적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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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내가 아주 오래 살 것 같아.”
나는 녀석들에게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빠샤~ 빠샤~ 표했다. 차례로 감사의 뜻을 전하다 보니, 아까의 혈랑마라는 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 같아서 그 놈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으아~ 요, 요서해 주시쇼, 지짜 지유준님!”
응? 아직 말 안 했는데 이놈이 어떻게 알았지? 에… 그보다 어째 등 뒤의 분위기가 무지 썰렁한걸?
“으, 은공이 설마… 설마……”
촌장이 간신히 대표로 입을 열었지만, 마을 주민 일동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고, 특히 아까 못된 짓을 당할 뻔했던 딸은 이미 졸도해 있었다. 쳇! 발음도 잘 안 되는 놈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젠장… 촌장 일행에게 사정을 설명해 납득시키고, 졸도 끝에 경기까지 일으켰던 촌장 딸의 안정을 되찾게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야, 혈랑마. 그게 진짜 이름은 아닐 테고, 네 본명이 뭐냐?”
“보래는… 치두(칠두?)라고 합니다.”
“그래? 그럼 널 앞으로 ‘칠득이’라고 부르겠다.”
“에?”
“하여간 그렇게 부를 거니까, 알아서 대답해라, 응?”
“제 이르은 치드기이미다!”
“좋아, 칠득아! 우선… 대가리 박어!”
“에?”
쯧! 앞으로 부려먹으려면 기본 소양(?) 교육부터 해둬야겠군.
얼마 후, 나는 칠득이를 제외한 모든 비적들의 혈도를 잡아 이삼일은 깨어나지 못하게 한 후, 객잔의 지하실에 가두었다. 그런 후 오해를 푼 촌장 일행, 특히 예쁘장한 촌장 딸의 애잔한 눈빛 응원을 받으며 출동…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썅~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 응?”
“주, 주을 죄를 지엇스니다!”
“이봐, 칠득아! 나도 그리 좋은 놈은 아니고, 악명이 퍼지는 건 나름대로 좋다 이거야. 하지만 죄목이 문제라고 죄목이-! 불쌍한 시골 마을 약탈에 부녀자 유괴 겁탈이라니… 너라면 기분 좋겠냐? 응?”
“아, 아닙이다. 아닙이다.”
칠득이는 처음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굴함의 극치를 달렸다.
[ 주인님의 ‘석두신공’은 정말 무섭군요. ]
<이게… 까불래?>
요정 몽에게는 인상을 긁어 보였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신경질을 낼 때마다 칠득이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와 얼굴을 가리는 걸 보니 말이다. 마차에서 나온 내 짐에서 오리지널 전투복과 전투화를 발견하고는 바로 내 정체를 눈치챈 것을 보면 머리는 좋은 편인 것 같지만, 역시 두뇌파는 무식한 폭력에 약한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칠득이를 앞잡이로 삼아 놈들의 산채를 찾아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전투 경험도 쌓을 겸해서 산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갈까 했지만, 그러다가 가짜가 나를 놓칠 위험도 있을 것 같아 우선은 칠득이를 최대한 이용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기로 했다. 뭐, 솔직히… 지금의 나에게 상대가 안 되는 놈들이라 해도 수가 백 명이 넘고 산악 전투에 익숙한 놈들이라 어떤 돌발 사태가 생길지 모르는 게 우려되기도 했다.
“혈랑마님이 맞구려! 헌데, 어째서 같이 나간 이들은 어쩌고 혼자 돌아온 게요!”
과연… 산길을 오르는 동안 보였던 몇몇 감시병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산채 입구를 지키는 놈들은 조금 더 주의 깊은 듯했다.
“녀석들은 남해오신룡이란 놈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냈어. 어서 문을 열라구! 여기 이 녀석은 부잣집 아들놈이라 납치해 왔으니, 곧 엄청난 몸값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호오~ 손가락을 빠진 앞니 자리에 대고 말하니까 얼추 발음이 되네?
어쨌거나… 보자, 보자~ 이 입구… 양쪽으로 가파른 절벽이 있는 협곡을 막아 제법 요새처럼 보이는데,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통나무로 세운 벽이라 맘먹고 생사금마도결을 펼치면 단번에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겠는걸?
“헌데, 혈랑마님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소? 누구에게 심하게 맞기라도 한 것 같소!”
“그, 그냥 술에 취해 넘어진 거야. 어서 문을 여지 모태-?” (흥분해서 손을 떼었다.)
아무래도… 비적들을 너무 얕봤나 보다. 조용히 두목 놈 앞까지 가기는 틀린 것 같은데 그냥 살벌하게 벽을 부수고 돌진… 음, 아니다. 무공 좀 익혔다고 오버할 필요는 없지.
“칠득아, 비켜!”
나는 정글도를 들고 정문 앞에 서서 단숨에 문 중앙을 일직선으로 그었다. 생각해 보니… 문의 걸쇠 역할을 하는 나무 하나만 자르면 되는 문제였다. 어쨌든, 그렇게 간단히 풀린 문을 발로 걷어차며 나름대로 터프하게 놈들의 산채로 진입해 들어갔다.
근데… 생각보다 훈련이 잘된 놈들이었던 모양이다. 입구에서 시간을 끌면서 재빨리 준비했는지 이미 엄청 많은 떼거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백 명 안팎…? 에구… 경험치를 높이기 위해 몽몽의 기능은 쓰지 않기로 했는데…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
“뭐야? 저 놈 하나인 건가?”
“그래도 아까 나간 녀석들이 모두 당했다면 보통은 아닐 거야. 방심하지 마라!”
과연 전에 금동이에게 전멸했던 놈들보다는 수준이 높아 보인다.
“혈랑마! 네놈이 감히 진유준님을 배신하다니! 제정신인가?”
슬쩍 보니 칠득이는 바로 대꾸를 못하고 어물어물거리고 있었다.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정말 진짜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뭐…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길 안내를 해 준 공이 있으니 보호해 주기는 해야겠지?
“금동아, 저 놈은 친구! 지켜 줘!”
내 명령이 떨어지자 금동이는 척척 걸어가더니 칠득이 앞에 버티고 섰고, 칠득이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나는 정글도를 어깨에 척 걸치고 떼거지 비적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대 백이라… 어쩐지 술자리에서 오가는 군대식 농담 같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