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9-3화 :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公主).(3)

극악서생 2부 – 29-3화 :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公主).(3)


4-5.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公主).(3)

“저 미친… 쳐랏!”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울리자 놈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저글링 개떼 분위기… 역시 기선제압이 중요할 것 같다.

“생사금마도결, 폭호결(暴虎訣) 1장 시후식(始吼式)!”

크게 내려찍은 정글도 아래의 땅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고, 그와 함께 파생된 흙과 돌 파편들이 부채살 모양으로 폭사되면서 정면의 저그(?)들을 휩쓸어 버렸다. 물론 한 명 한 명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법은 아니지만, 이 한 방으로 놈들 전체가 크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사금마도결… 에이 씨! 그냥 간다!”

그러고 보니 쌈박질하면서 뭐 하러 초식명을 외치는가 싶어서 나는 그대로 저그 개떼들의 정면으로 마주 달려들었다. 내 기세에 놀라 엉거주춤 방어자세를 취하는 녀석의 칼 위로 정글도를 내려치는 척하다가는 그 아래 가슴팍을 발로 강타했다. 이어 오른쪽 놈의 칼을 옆으로 쳐내고는 역시 복부에 발차기 한 방을 먹였다. 두 놈 다 상당히 오버해서 뒤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언뜻 확인하며 다시 정면과 왼쪽에서 달려드는 녀석들의 칼을 정글도로 반 토막 내버렸다. 망나니 칼에서 식칼로 변해버린 걸 들고있게 된 녀석들은 어색한 태도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슬쩍 보니 다시 세 명의 비적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협공이라고는 해도 달려드는 순서가 들쑥날쑥해서 삼시전결 같은 절기를 쓸 필요도 없이 차례차례로 처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한 명…… 몇 분 정도나 지났을까. 문득 한가해져서(?) 천천히 돌아보니 어느 사이 이십여 명의 비적들이 내 주위에 쓰러진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쯤에서 먹혔는가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런 양호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자들이 모두 멀찍이 물러나 있긴 한데… 아직 완전히 기가 죽은 표정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날 싸고 있는 포위망이 풀린 것도 아니고… 아니, 그 사이 인원이 더 보충되었는지 포위망의 두께는 오히려 두꺼워진 것도 같았다. 그만큼 자신들의 빽(?) 극악 마인 진유준을 믿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자신들을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눈치까고 대담해진 건지… 혹은 그 둘 다 인지… 여하간에 기선제압 작전은 실패한 모양이다. 대충 분위기 잡은 다음에 ‘두목 나와!’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쳇! 역시 본보기로 몇 놈 화끈하게 없애버렸어야 했나……? 아니,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연옥도에서의 지옥훈련과 마인드 컨트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상대가 소위 칼밥을 먹는 전문가들이라면 진짜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내 앞의 적들은 너무 약해서 좀처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라는 긴장감이 생기지를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시대 비적들은 먹고살기가 힘든 농민이 전향(?)한 경우가 많다고도 하고……

“그래서 애써 힘 조절 해줬더니만… 이렇게 나오면 섭하지.”

나는 중얼거리며 새삼 비적들을 살폈다. 처음의 개념 없는 저글링은 안되겠다 싶었던지, 놈들은 어느덧 꽤 조직적인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 막 앞으로 나서고 있는 자들의 손에 들린 건 5, 6미터쯤 되는 길이의 창이었는데, 앞으로 날카로운 날이 나있고 그 양 옆으로 반대 방향의 쇠갈고리가 달린 복합 형태였다. 찌르는 기본 기능에 찍거나 걸어서 잡아당기겠다고…? 흠… 게다가 뒤쪽에서는 화살 부대까지 속속 준비되고 있군. 잘해야 F레벨 수준이었던 공격이 단숨에 C레벨과 B레벨쯤으로 변화하는 셈이었다. 약간 원거리 공격과 무지 원거리 공격의 병행이라… 내 머릿속에는 몇 가지 시나리오가 후다닥 떠올랐다.

하나 – 무대포 전법. 좀 무리해서라도 호신강기(護身强氣)를 극도로 끌어올려 마치 차력사처럼 창이고 화살이고 나발이고 온몸으로 받아넘긴 다음, 적들이 로봇 정글도V(?)의 출현에 놀라 튀기 시작하면 그쪽에는 신경 끄고 여유 있게 두목을 찾기 시작. (단점 : 두목도 일찌감치 같이 튈 수가 있을 듯함.)

둘 – 일반형 전법. 적들의 다양한 공격을 친절하게 막거나 피해주는 등 첫 번째 전법보다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틈을 봐… 역시 두목의 위치를 파악. (단점 : 나도 정신없어서 두목을 못 찾을 가능성 있음.)

셋 – 게릴라 전법.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응…? 뭐시여? 형님이 작전 짜시는데 언놈이 소란이야?

나의 작전 계획은 별안간 적들의 포위망 뒤쪽에서 들려온 비명 섞인 소란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다.

“으아아~ 자못햇서요~!”

칠득이의 음성이었다. 시선을 가리는 비적들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칠득이는 갈등 끝에 결국 우릴 배신하고 본래의 소속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자길 지켜주던 금동이를 오히려 뒤에서 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금동이는 연옥도 앞 바다의 식인상어들도 알아주는 괴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반인들의 칼질 정도로는 녀석의 피부에 작은 상처조차 낼 수가 없다.

나와 비적 일동(?)은 잠시 전투 상황도 잊은 채 금동이와 칠득이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보았다. 칠득이는 도망을 치며 연신 ‘금동님 잘 못했습니다.’를 외치고 있었지만 일껏 지켜주던 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금동이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칠득이는 금동이의 손에 잡혀 무자비하게 맞고 할큄을 당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불쌍했다. 얼마간의 처절한 응징 끝에 금동이는 한 손으로 칠득이의 멱살을 잡고는(이건 언제 배웠지?) 다른 손을 들어 주먹을 쥔 채 씩씩댔다. ‘어휴, 이걸 그냥~ 그냥 콱~ 어휴~ 나 정말 성질 많이 죽었다.’ 이런 분위기였다. 뭐… 그동안 나와 몽몽이 금동이에게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라는 걸 강력하게 세뇌해 놓았으니 더 이상 막 나가지는 않을 것 같고… 어쨌든 찬스로군.

금동이 칠득이 쇼의 영향… 비적들은 자신들의 중간 보스였던 혈랑마가 원숭이에게(그것도 매우 쬐깐한) 잡혀 망가지는 광경에 어이가 없는지 잠시 생각과 행동이 멈춘 상태였다. 그들보다 조금 빨리 정신을 차린 나는 포위망 중 메인 건물 방향으로 달려나갔고, 내밀어진 창들 중 하나의 끝을 밟고 뛰었다. 중간쯤에 비적들 중 한 명의 머리를 발판으로 삼아 밟고 한 번 더 뛰고 나니 간단하게 포위망을 벗어나 있었다. 자~ 이제 세 번째였던 게릴라 전법으로 나가며 두목을 잡기만 하면… 응…? 뭐야? 저 녀석, 벌써 나와 있었어?

포위망을 구축한 인의 장막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 알고 보니 문제의 짜가 진유준은 불과 3, 4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산채 분위기와는 언밸런스 하게 고급스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녀석은… 나이는 나와 대충 비슷한 또래인 듯했지만 나보다 최소한 세 배쯤은 사악한(?) 인상을 가진 놈이었다. 사실 사악한 인상이란 게 딱히 정해진 기준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웬지 섬뜩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런 제기… 설마 짜가 진유준 수준이 아니라 진짜 악마가 심심해서 내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쳇! 그래봤자, 짜가는 진짜를 능가할 수 없는 법!”

나는 애써 전의를 불태우며 적 두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비적들이 다시 개떼 분위기로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이미 내 신경은 저 악마 진유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엄습하는 칼과 창의 살벌한 공세를 매우 간단한 동작만으로 쳐내며 계속 전진했다. 짜가의 진짜를 능가하는 분위기에 긴장한 탓인지 적들의 움직임이며 무기가 일으키는 파공성이 지금까지보다 민감하게 느껴졌다. 이 때, 비로소 짜가 진유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놈의 눈동자는 뱀처럼 차갑고 너무나 비인간적이어서 나는 이를 악물며 간신히 마주 노려보았다. 놈은 서서히 두 팔을 하늘로 향해 내뻗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뭐냐, 대체.”

내가 묻자 짜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지, 진짜 어르신께서 납실 줄은 몰랐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쯧…!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놈의 인상이 하도 더러워서 깜박했다. 어쨌든… 주변에서 ‘진유준님이 직접 나서시면 저 자도 이제 끝이다.’라는 둥 지껄이던 자들의 목소리가 잘리듯 멈추어졌다. 비적 일동이 절망 상태로 돌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놈들은 하나둘씩 무기를 땅바닥에 떨어트리는가 싶더니 주춤거리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금동아, 거기 막아!”

산채의 출구를 막아선 채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낸 금동이…! 비적들은 저 작지만 무시무시한 괴물을 통과할 자신이 없는지 엉거주춤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마무리 샷을 위해 비적들이 떨어트린 창 하나를 주워서 힘차게 출구의 벽에 던졌다. 이번엔 마음껏 내공을 실었더니 창이 통나무를 뚫고 박히는 기세와 소리가 장난이 아니… 아… 미안, 미안! 금동이 너도 놀랐구나? 짜쉭이 그렇다고 짜증은… 음… 하여간 사태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이 나고 말았다.

얼마 후. 나는 짜가가 있던 의자에 앉은 채 내 앞에 줄지어 엎드려 있는 짜가와 비적 일동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본래는 짜가를 만나자마자 당장에 칠득이처럼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지만 웬지 짜가에게도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그 동안 잡혀 있었던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을 풀어주며 보니 별로 고생한 흔적이 없고 안색도 좋아 보였다. 여자들 말에 의하면 짜가는 부하들이 멋대로 잡아 온 여자들을 자기가 몽땅 차지해 버리는 것처럼 꾸민 다음 실제로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잘 대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적들은 일단 모두 대가리 박아 시켜 놓고 천천히 짜가의 사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짜가의 본명은 ‘기단노’…! 어쨌거나 다시 찬찬히 봐도 정말 인상하나는 진국(?)이다.

기단노는 본래 고룡포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던 청년 어부였던 모양이었다. 내 얼룩무늬 전투복 디자인을 상당히 근접하게 흉내를 낼 수 있었고, 조금 전 날 바로 알아본 것 역시 날 직접 목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어부라는 전직을 보면 알 수 있듯 기단노는 본래 무공은 고사하고 검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단지… 아니 단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심각한 저런 인상을 타고 난 탓에 그는 무지 불행한 인생을 살아 온 모양이었다. 처음 그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은 우선 겁을 먹고 피하기 때문에 대인관계는 제로에 가까웠고, 그의 여린 속내를 아는 동네 사람들도 그를 왕따시키기 일쑤였다 고 한다. 그래도 반년 정도 전까지 고향에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던 기단노는 모시고 살던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어차피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려 살지 못하는 신세이니 아예 깊은 산 속에 숨어살자는 생각이었다는데, 불행히도 산 속에서 비적들에게 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섬뜩한 인상을 가진 기단노에게 지래 겁을 먹은 비적들이 물러나다가 한 놈이 돌에 자빠졌는데 하필 뒤통수를 돌에 찍혀서 사망…! 그걸 보고 도와주려고 다가서는 기단노의 행동을 오해하고 더 급하게 도망을 치던 비적들 중 두 명이 서로 얽혀서 쓰러지다가 각자의 칼에 치명상을 입고 역시 사망…! 나머지 몇 명은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추락사! 솔직히 이 자식이 뭔 헛소리를 하는가 싶을 정도로 개그 만화적인 상황이었지만 몽몽의 거짓말 탐지기에는 ‘참말’로 나타나고 있었다. 나참……!

“흐흑~! 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다들… 흑! 흑!”

끄음…! 하긴… 현재 내 앞에서 찔찔짜면서 사연을 털어놓고 있는 모습도 소리만 들으면 불쌍한데 고개를 들기라도 하면 섬뜩한 느낌이 앞선다. 기단노의 얼굴을 굳이 표현해 보자면… 험악한 극악서생…이라고 할까? 핏기 없는 낯빛과 어딘가 귀기가 흐르는 듯한 분위기는 진하운과 같은데 나쁜 면은 몇 배 더 심해서 눈 같은 경우 그 주변만 시체처럼 푸르딩한 색깔이고 눈알은 아예 새빨개서 그야말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여자 귀신 눈이었다. 몽몽의 기본적인 진단으로는 몇 가지 가벼운 질병이 겹쳐서 그런 것 같다는데… 음, 하여간 얼굴 하나로 비적들을 전멸시킨 기단노는 곧 다른 비적들이 몰려오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행세를 해 보았다는 것이 다. 그가 살아오면서 본 사람들 중 가장 무서운 인간(웬지 기분이 좀…)의 흉내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먹혀서 그는 졸지에 희대의 마인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는데… 문제는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 짜가를 그만 둘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기단노는 그 후로도 별로 한 일이 없었지만 든든한 빽을 얻은 비적들이 알아서 세력 확장에 힘써 지금의 혈랑회를 형성했다는 것이었다.

“참 별… 음…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믿어 주지. 그리고 안심해. 난 소문처럼 아무나 막 죽이는 인간이 아니야.”

내가 웃으며 말하자 기단노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연신 절을 해댔다. 좀 더 미래에 태어났더라면 성형수술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참 안됐… 음, 그래도 잡혀 있던 여자들… 특히 촌장의 딸로 추정되는 여자가 이 녀석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니 앞으로는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번 사건의 교훈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자… 정도 되려나?

결말이 다소 썰렁하긴 했지만, 비교적 간단하게 산채를 접수한 나는 일단 하루를 묵어 가기로 했다. 어찌어찌 하는 동안 해가 져 버려서 일단 남긴 했는데… 내일은 남해오신룡을 직접 찾아 나서던가 아니면 여기서 계속 기다리던가 결정을 해야했다.

그나저나… 싸우는 동안에는 잠시 잊고 있었지만 다시 대교와의 일을 떠올린 나는 산채의 침상에서도 뒤척뒤척,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빌어먹을~! 천하의 진유준이 이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나쁜 일을 겪었다고 해도 그걸로 삼일 이상 끙끙댄 역사가 없던 나였는데…

“우쒸. 역시 또 술 한잔 걸쳐야 잠이 오려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 생각을 바꿔 산채 마당으로 산책을 나갔다. 달빛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며 공연히 뒷머리를 극적이다가 발에 걸리는 돌맹이를 툭툭 차면서 얼마나 시간 땜질을 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산채 입구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며 비명소리…! 뭐야. 다른 산채에서 기습이라도 해온 건가? 아니면 설마… 벌써 남해오신룡이 뜬 건 아니겠지?

내가 산채를 치는 사이 촌장 일행은 예정대로 남해오신룡을 찾아가기로 했었다. 가까운 마을에서 운 좋게 녀석들을 바로 만나고 녀석들이 사건 접수 후 즉시 출발하여 밤새 달려 왔다면야 가능한 시간이긴 하지 만… 에… 정말 인 것 같네? 허… 녀석들 행동 한 번 빨라서 좋다.

어제 내가 뚫고 들어왔던 산채의 출입구를 나보다 더 터프하게 부수며 들어 온 저 덩치는… ‘철룡 사성’ 이로군. 그 사이 이미 출입구 위쪽의 경비병들을 정리해 버린 꽃미남은 ‘교룡 대오’… 흠, 맏형인 ‘협룡 정권’ 은 역시 짱다운 분위기로 철룡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군 그래. 그 옆의 이쁜이는 ‘미룡(美龍) 일지’이고, 훗~! ‘종소’ 저 꼬맹이는 여전히 지 언니 일지의 치마폭을 잡고 있다. 헌데… 그 사이 남해오신룡이 육신룡으로 바뀌기라도 한 건가? 웬 여자 한 명이 더 있네? 위아래 모두 완벽한 흑의(黑衣) 차림이고 긴 흑발의 머리가 얼굴의 반 정도를 가린… 묘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지, 진유준님! 살려 주십시오!”

남해오신룡에게 쫓겨 본채 쪽으로 도망치던 비적 몇 명이 날 발견하여 달려왔고,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녀석들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정글도로 막아 주었다. 딱히 살려주고 싶은 놈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청하는 놈들이 죽어 가는 걸 보기는 좀……

“네 놈이 마인 진유준이란 자인가?”

협룡 정권 녀석이 소리치는 바람에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아, 내가 진유준이 맞아. 하지만 난 사실……”

에이 씨! 또 말을 못하게 하네. 꽃미남에 날쌘돌이(?)인 교룡 대오가 어느 틈에 달려와 칼을 휘둘러 대는 바람에 나는 일단 방어에 나서 는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접전 끝에 힘주어 대오를 밀어낸 나는 다시 외쳤다.

“야! 난 너희들이 알고 있는 자가 아니란 말야!”

“그럼, 네 놈이 진유준이 아니란 말이냐?”

“아니, 맞긴 맞는데… 뭐야. 촌장에게 얘기 못 들었어?”

“무슨 소리냐. 촌장이라니?”

이런 제기. 촌장 일행을 만난 것이 아니라 따로 소문을 듣고 쳐들어 온 모양이다. 얼른 설명을… 아니 가만. 이 상황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걸? 흠… 녀석들 실력도 한 번 볼 겸 이대로 한 판 떠봐…? 에… 그렇지만 그러다가 내가 깨지면 개망신인데… 어쩐다? 음… 망설이는 사이 다섯 마리용이 전부 내 앞에 집결했다. 거기다 흑의의 여자, 가까이에서 보니 몸매가 상당히 빼어난… 크흠, 하여간 저 여자도 보통 고수가 아닌 것 같다. 그냥… 얼른 정체를 밝히는 편이 나으려나?

“흥! 이제보니 제정신도 아닌 놈이 감히 그 분의 행세를 하고 있었구나.”

차갑게 내뱉은 정권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흑의 여자가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아, 누님께서 처리하시겠습니까?”

정권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나자 흑의 누님께서는 천천히 내 앞으로 두 걸음을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아까 자기가 날린 화살을 내가 막아낸 일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검을 차고 있기는 한데 주무기는 저 낯익은 활인가? 응…? 낯익은 활? 나, 낯익은… 낯익은… 저 눈빛… 설…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기쁨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강렬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며 나는 전율했다. 그런 내게 쉬익-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