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0-1화 : 각자의 입장.(1)
4-6. 각자의 입장.(1)
[ 주인님! ]
몽몽의 금속성 외침과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의 파공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대체 어떻게 피했는지 스스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나 자신의 반사신경에 감탄할 틈 같은 건 없었다.
“그만 둬! 흑주!”
이름이 불린 순간 그녀의 손이 멈추어졌다. 두 번째로 메겨진 화살의 방향을 약간 내려트린 채 그녀는 잠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짙은 눈동자로만 ‘당신, 누구야?’라고 묻고 있었다.
“흑주…! 흑주 맞지. 그렇지?”
격한 음성으로 다시 외치며 다가서자 녀석은 움찔 긴장하며 다시 활을 들어 올렸다.
“너… 살아있었구나. 정말… 정말, 살아, 있었구나.”
제기…! 쪽팔리게 왜 목이 메이고 난리야.
“설마, 당신이 진짜 진유준 하사님?”
흑주의 뒤에서 정권이 다시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래. 이 곳에 있던 가짜는… 어제 내가 처리했다. 흑주… 그리고 너희들 모두… 반갑다. 정말 반갑다. 핫!”
나는 불쑥 솟아오르는 웃음 때문에 한 손을 이마에 짚고 선 채 얼마간을 하핫핫! 핫핫! 큭큭! 소리를 냈다.
[ 주인님…… ]
알아, 안다구 몽몽. 하지만 참을 수가 없잖아.
“아아~ 그래. 와룡전에서… 입구쯤에서 말야……”
나는 왼 손의 바닥을 펼쳐 내 입과 코를 가리고 오른 손바닥으로는 이마를 가려 흑주에게 보이며 말했다.
“너 왔을 때마다… 여기만 봤었거든?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두 눈만을 드러낸 채 웃고 있는 내 앞에서 흑주는 조용히 활을 내리더니 이어 정중한 태도로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전(前), 비화곡주, 호위무사, 흑주…! 곡주님의 의형께 인사드립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듣게 된 흑주의 음성에는 다행히도 예전과 같은 힘겨움이 없었다.
“남해오신룡 또한 진유준님께 인사드립니다! 좀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달래기 위해 다시 길게 하아아~ 숨을 내쉰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 다들 들었던 대로…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구나.”
흑주는 물론이고 남해오신룡들도 내가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감격에 겨운 모습으로 반가워할지는 몰랐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이 날 실없는 놈쯤으로 생각하거나 말거나 표정을 단속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속으로 흑주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흑주, 흑주, 흑주… 아아~ 이 승질나게 반가운 이름이여.
깊은 산 속의 우울한 새벽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산채 마당의 화사한 달빛 아래 우리 일곱 사람은 모여 앉았다. 동네북처럼 나한테 터지고 흑주 일행에게 터지기 바빴던 비적들이 이번에는 난데없는 동창회(?) 준비하느라 바빴다. 난 겉으로야 벌써부터 냉정을 가질 수 있었지만 속마음은 결코 하루 이틀로 진정될 것 같지가 않았다.
[ 재회의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하는 편도 괜찮을 것 같아 미리 알려드리지 않았습니다만…… ]
< 잘 했다, 몽몽. 그래… 너무 극적이라 감격해서 디지는 줄 알았다. >
[ …죄송합니다.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될 정도로 방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
< 비꼰 거 아냐, 임마. 후후- 어쨌든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
모두와 함께 건배를 나누면서 나는 새삼 지금의 흑주를 주시했다. 비록 첫 잔 뿐이었지만 술 마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녀석의 순수한 맨 얼굴이 발갛게 물드는 광경도 최초였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반쯤 드러난 얼굴에서 예전의 화상 흉터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사실도 기뻤다. 전에 몽몽에게 그려보게 했던 얼굴과는 미묘하게 달랐지만 그 이상으로… 음… 웬지 흑주에게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쓰려니까 꽤나 어색한 기분이 드는군.
[ 신체의 급격한 변화와 고정 상처의 치유 상황으로 보아 전에 제가 제시했던… 방대한 외부 생체 에너지 유입을 바탕으로 한 의료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낙룡파에서… 훌륭한 기연을 만났던 모양이구나, 흑주.”
내가 묻자 흑주는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연, 아니었습니다.”
음… 기연이 아니라면 보통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 있었다는 얘긴가? 그렇다면……
“널 구한 것은 역시 고려무사 신정안 이었던 건가…? 그렇다고 해도 그 혼자 너를 지금처럼 회복시킬 수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라, 나는 조금 사이를 두고 흑주의 다음 말을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젠장~! 이 녀석, 뭐 하나 물어 본다고 달랑 그거만 대답하냐?
“후후- 이해해 주십시오. 흑주 누님이 본래 말수가 적은 건 아시잖습니까.”
“그, 그야 알지. 하지만 정권. 흑주는 이제 본래 목소리도 찾은 것 같은데 어째……”
“저희들도 아직 흑주 누님과는 긴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습니다. 과묵한 것도 누님의 매력이긴 합니다만… 하핫~!”
정권 녀석, 꽤나 어색하게 웃는다.
“실은… 저희들도 누님과 세 분 어르신을 만난 지 겨우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곳에서 이 백여 리 정도 떨어진 산의 비적들을 소탕하는 중에 누님과 만나게 되어서……”
으음… 결국엔 대변인(?) 정권을 통해 사연을 듣게 되었다. 녀석 역시 우리의 과묵녀 흑주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소위 세 분의 어르신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인 모양이지만 말이다. 남해오신룡과 흑주는 처음 만났을 때, 흑주는 어딘가의 ‘유료’ 의뢰를 받아서 먼저 비적들을 처치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남해오신룡은 당근 흑주를 못 알아봤지만 흑주는 함께 혈의승과 싸울 때의 녀석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주는 반가운 마음에 자신의 거처에까지 초대했었던 모양인데, 남해오신룡은 거기서 세 분의 어르신… 고려무사 ‘신정안’, 흑주의 두 사부 거두마군(巨頭魔君)과 소살파파(笑殺婆婆) 부부까지 만나게 되었단다.
당시… 흑주는 낙룡파(落龍坡)의 절벽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자를 지키지 못하게 된 절망감과…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마음을 품은 채 스스로 투신해 버렸다. 그런 흑주를 찾아 고려무사 신정안은 절벽 아래 계곡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무협지 세계에서 잘도 주인공을 살려대는 기적은 다행히도 흑주의 한 가닥 생명도 보존해 주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정안에게 발견된 흑주는 이미 생 보다는 사에 더 가까운 상태… 여기서 흑주의 두 사부까지 등장하지 않았다면 기적조차 더 그녀를 돕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흑주를 자신들의 대리인… 선혈로 뒤덮인 길을 이어서 걸어가 줄 존재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살인 기계와 같은 두 사람에게도 그들의 유일한 분신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것이다.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흑주를 위해 두 가지를 포기했다. 비화곡 송현촌(訟玄村)의 괴인들에게는 본래 비화곡 바깥으로 외출할 수 있는 자유가 어느 정도 있지만, 영원히 떠날 수는 없다. 거두마군 부부는 비화곡에 안주할 수 있었던 나머지 생과 자신들이 평생 쌓아온 내공을 흑주에게 주었던 것이다.
“…거두마군과 소살파파 그리고 고려인 신정안의 내공까지 모두 흑주를 살리는데 쓰여졌다 이거지?”
내가 묻자 정권은 숙연한 표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것도 한 점 남김없이… 그래서 지금 세 분의 어르신은 모두 무공을 잃은 상태입니다.”
치명적인 부상의 치유와 함께 오래된 상처까지 회복되다니… 그야말로 환골탈태(換骨脫胎)인 셈이다. 지금의 흑주를 보면 세 사람의 내공이 모두 치유에 쓰여져서 흑주의 본래 내공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그 당시 흑주에게 주어진 건 내공보다 훨씬 더 소중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세 분은 현재……”
정권은 말하다 말고 슬쩍 흑주의 눈치를 살폈다. 흑주는 별다른 기색 없이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내가 먼저 손을 저었다.
“내게 말할 필요는 없어. 그들은 현재 비화곡의 배신자 인 셈이니 누구에게도 소재가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흑주는 보일 듯 말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다는 그런 의미 같은데… 훗…! 본래 목소리를 찾았음에도 여전히 비싼 녀석이로군.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녀석이 또 하나 있었지? 전처럼 오늘도 지 언니 뒤에 숨어서 가끔 내 눈치만 살피는 저 꼬맹이 종소. 음… 흑주 때문에 우선 순위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사실 와용촌(渦溶村) 출신의 이 다섯 보이+걸 스카웃들도 적잖이 반가운 얼굴들이다. 전형적인 미남 영웅 스타일의 맏형 정권. 어린 시절, 원판이 마음에 들어 할 정도의 증오심을 불태우던 그는 그걸 더 깊이 감추었는지 아니면 더 나은 무언가로 승화시켰는지 몰라도 지금은 웃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정해 보인다. 둘째인 중국판 바비인형 미룡 일지. 여전히 금발인 머리도 그렇고 화장으로 강조한 게 아닌데도 너무나 또렷한 이목구비가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미소녀이다. 무표정일 때는 어딘가 차가워 보이지 만 웃을 때는 정반대로 엄청 자애로운 얼굴이 된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셋째와 넷째 교룡 대오, 철룡 사성… 동갑이라는 이 두 녀석은 정말이지 대조적이다. 대오 녀석은 앞으로 나이를 얼마나 먹든 ‘미소년’이란 칭호가 따라붙을 것 같은 용모로써 우리 시대의 장국영이나 이 시대의 사영과 같은 과다. 단점은 그들보다 조금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이랄까? 그 반면 사성은 얼굴이나 등빨이 천하장사 이봉걸 선수여서 얼핏 보기에는 얘가 총 두목이다. 문제의(?) 막내, 꼬맹이 종소…! 독각소아룡이라는 명호가 말해 주듯 저 어리고 쬐깐한 녀석이 독공(毒功)으로 얼마나 명성이 높은지, 항간에는 저 녀석이 몇 백년 묵은 노파 괴물이 반노환동(反老還童)한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라고 한다. 물론 나야 저 녀석이 순수하게 어린 꼬마라는 걸 알지만… 음… 그건 그런데… 에… 그러고 보니 종소는 지난번에 봤을 때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잖아?
“…이봐 정권. 그러고 보니 막내 종소가 어째 좀……”
내 의문에 정권과 다른 녀석들의 표정도 조금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실은… 종소의 나이가 이미 열 셋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어린아이의 체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毒)을 너무 가까이하여 그런 것이라 생각되어 그만두게 하고 싶은데… 종소가 말을 듣지 않아 큰일입니다.”
유해물질이 체내에 쌓여 성장이 느려져 버렸다…? 몽몽에게 정밀 검사를 시켜봐야 더 확실해 지겠지만, 달리 원인이 없다면 우선 그렇게 판단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종소를 이번 전쟁에서 빼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은 셈이다. 아니… 실은 막상 만나고 보니 이 녀석들 모두 이번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가 않아졌다는 사실이다. 사실 녀석들에게 은혜를 배푼 건 나도 아니었고 말이다.
“음… 우선 너희들이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비적들을 모두 물러가게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진하운이 사갈이란 놈과 일인 용병들에게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그러나 실은 그를 해친 원흉이 따로 있다.”
흑주와 남해오신룡의 기운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재회의 기쁨만을 누릴 수는 없지.
“현 비화곡주 대천마 사문학…! 바로 그가 모든 음모의 주인이지.”
내 폭탄 선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흑주였다. 앉아있던 의자의 손잡이가 그녀의 손안에서 빠직, 비명을 질렀다. 정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증인과 증거가 없어서 공표하기는 힘들겠지만… 오래 전부터 나와 하운 아우는 대천마를 경계하고 있었지. 그가 움직이는 시기를 잘 못 판단한 것이 우리의 결정적인 실수였어.”
“그렇다면… 진유준님께서 강호에 돌아오신 뜻은 은공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군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 먼저 밝히기는 했지만… 너희들, 잘 들어라. 하운 아우는 너희들이 이런 일에 끼어 드는 걸 결코 원치 않았어.”
“말도 안됩니다!”
정권과 대오, 사성 세 명이 주먹을 불끈 쥔 채 벌떡 일어서자 탁자 위의 술잔이며 그릇들이 요동을 쳤다.
“저희 다섯 명의 목숨은 그 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 분을 해친 흉수가 숨을 쉬고 있는 한 저희들도 뻔뻔하게 하늘을 이고 살수는 없습니다!”
난 녀석들의 불타는 시선을 마주보며 진정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네게는 너희들의 모든 의지와 행동을 제한할 권한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에 한해서만큼은 있어. 왜냐하면… 하운 아우는 유언으로써 복수에 관한 모든 것을 내게 일임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말씀만은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희들 모두 이 자리에서 죽으라고 하십시오!”
이런 제기…! 설마 원판의 유언도 씹을 줄은 몰랐다. 에구구~ 지금의 기세라면 녀석들끼리 나설 테고 그건 더 안 될 말이다.
“난… 아직 너희들을 막겠다고 하지 않았어. 다만 하운 아우가 전에 너희들에게 한 말들을 다시 생각해 보길 원한 거다. 만약… 그래도 너희들이 진하운이란 남자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렇다면 앞으로는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오신룡 중 네 명의 시선이 맏형인 정권에게 모이고 있었다. 정권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뒤로 한 발 물러서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신 앞의 땅바닥에 찔러 넣었다. 녀석은 자신의 칼 뒤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외쳤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제 칼과 모든 것은 진유준님의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나는 정권과 같은 행동을 하려고 움직이는 나머지 네 명을 손짓으로 막은 후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뜻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 허나… 종소 만은 안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소에게 다가섰고 종소는 평소 같지 않게 혼자 선 채 날 올려다보았다. 난 섬뜩할 정도의 독기 어린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종소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운은… 늘 널 걱정했다. 네게 독을 가르치면 안되는 거였다고 말이야.”
물론 뻥이다.
“종소는… 이대로 어른이 되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나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 높이를 맞춘 다음 한 손을 종소의 머리에 얹었다.
“그게 문제라는 거야.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진하운은 어린아이를 무척 아끼는 성품이거든. 너희들에 무공을 준 것도 실은… 너희들을 지켜주고 싶었던 거야.”
뭐, 원판이 잘도 그랬을까마는……
“그, 그럼… 어른이 되겠어요.”
“어떻게?”
종소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어물어물거리더니 끝내는 주르륵 눈물을 떨구었다. 난 종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상대는 천하마인들의 본산 비화곡이야. 결코 단기간에 끝날 싸움이 아니지. 넌 당분간 네 몸의 독소를 제거하고 정상적인 몸이 되는 것만 생각해. 그런 다음에는 네가 무얼 하든 막지 않으마.”
사실 싸움은 어떻게 든 최대한 후딱 끝낼 생각이고 종소의 보모(?)에게는 치료를 징하니 길~게 하라고 말해 둘 작정이다. 보모 후보들이 과연 종소를 맡아 줄까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중 한 명은 맡아 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비화곡으로부터 종소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마침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는 중이었으니 종소를 함께 데려가야겠다.”
그래도 되겠지?라는 투로 묻자 정권과 나머지 세 명도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도 어린 막내가 걱정이긴 했던 모양이다. 자아… 과정은 좀 애매한 구석이 있었지만 결국 일은 예정대로 진행하게 된 셈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뜻하지 않던 와일드카드 흑주였다. 내가 남해오신룡들을 설득하는 동안에도 흑주는 이 편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었다. 처음 원판의 원수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격정적인 반응 후에는 오히려 그대로 굳어져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그린 듯 앉아 있는 흑주의 뒤로 다가섰고, 그 순간 흑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집애, 깜딱이야! 흑주는 계속 내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탁자 옆의 커다란 술 단지를 집어들었고 그 것을 거꾸로 들어 자신의 입과 얼굴에 쏟아 붇기 시작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 단지는 와장창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팽개쳐 졌고 흑주는 비틀, 몸을 돌려 내 앞에 섰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의 두 눈이 무서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살짝 흐려졌다.
“곡주님의 흑주… 낙룡파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흑주는 천천히 내 옆을 스치고 걸어 나갔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잠겨 가는 흑주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저… 흑주 누님은 사실… 돌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예전의 저희들이나 누님처럼 부모를 잃은……”
정권은 내가 흑주의 행동에 화를 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슬금슬금 번지는 웃음을 참기 어려울 뿐이었다.
“다행이다. 늘…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녀석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인생을 시작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