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1-2화 : 두 명의 공주.(2)
4-7. 두 명의 공주.(2)
< 몽몽 너… 내가 원판일 때는 태도가 애매하더니 이번엔 잘도 치유책을 내놓는구나. >
[ 그 동안 이 시대 인체와 가용한 에너지의 실질적 운용에 대한 정보가 더 축적되었기 때문입니다. ]
< 알아. >
말 그대로 아는 거 괜히 물어 본 거라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한 다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공연히 심술 부려봤자 몽몽이 눈 하나 깜박할 리가 없고… 근데 몽몽은 본래 눈이 없나…? 아니면 무지 많다고 해야 하나…?
에구, 나 또 현실도피하기 시작한다. 이럼 안되지……!
< 몽몽! 첫 번째 방법 말인데, 그 방법을 쓰면서 재발 확률을 더 줄일 수는 없을까? >
[ 환자의 대처 능력과 추가 영약의 수급 가능성까지 감안한 결론이었습니다. ]
쳇…! 괜히 아는 척, 능력 있는 척 했다. 처음부터 얌전히 신수성녀 본인의 뜻에 따랐으면 지금처럼 공연한 기대를 모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사실 당장의 일만으로도 생색은 충분히 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막말로 5년 후 재발이고 나발이고 그건 내 탓도 아니고…
으… 아니지, 아니지… 싸나이 진유준, 일부 얍쌉한 공무원들처럼 살면 안되지, 암.
< 그려… 아무리 내 임기가 곧 끝난다해도… 뻔히 사고 날 거 알면서 결제 도장 찍어 줄 수는 없지. >
[ 무슨 말씀이십니까? ]
< 아무 것도 아냐. 그보다… 두 번째 방법을 쓸 경우 어째서 나까지 위험해 진다는 거지? >
[ 해당 환자의 선천적인 혈도 손상은 기본적인 대사작용이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 것을 보완하기 위해 장기간 상용된 의료 행위는 혈도의 손상을 고착화시켰으므로 일시적인 대량 에너지 유입에 의한 치유법은 부작용을 초래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시간의 시술이 필요하지만 환자는 신체의 에너지 저장과 운용의 기본이 되는 단전(丹田) 또한 비정상적이므로, 시술자는 최소한 단전의 복구 전까지 끊임없이 에너지를 보급해야 합니다.
예상되는 시간과 필요 에너지의 양으로 보아 주인님의 기존 에너지보다 최소 2.7배가 더 필요합니다.
이상과 같은 시술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시술을 몇 단계로 나누고 빈도와 시간을 조절하는 편법이 가능합니다만… 그럴 경우에도 시술자의 지나친 에너지 소실로 인한 위험성은 상시 존재합니다. ]
< 요점은…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라는 얘기네? >
[ …그렇습니다. ]
< 그렇다면 격체전공(隔體傳功)의 수법으로 시술 도중에라도 다른 고수들이 내 에너지를 계속 보충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천우신이나 자옥령, 내공 짱짱한 고수들이 대기 중이니 말야. >
[ 환자의 체질과 준비중인 영약, 주인님 체내의 양기… 모두 잘 계산 된 조합입니다.
때문에 시술 도중에 유입된 에너지는 그 조화의 주체인 주인님의 부담을 증가시킵니다.
시술의 일시 중단 후 운기조식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시술 중단 시간과 주인님이 타인의 에너지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는 시간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환자 쪽이 위험해 집니다.
이런 경우의 조절에는 저도 추가 계산이 필요합니다. ]
젠장! 거 사사건건 문제가 있네 그려.
[ …두 번째 방법을 택하실 경우, 보다 자세한 시술 과정과 유의 사항을 도표화 해 드리겠습니다.
단, 환자의 병세 변화에 따라 다양한 변동 사항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
나는 계속해서 몽몽이 간만에 제공하는 정통(?) 데이터들을 끈질기게 검토하고 연구해 보았다.
연옥도에서의 무공 특훈 때 만큼이나 빡센 시간을 보낸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 쓰바, X도! 대X리 빠게 지거따! >
아, 아니… 이게 결론은 아니고……
< 크흠! 결국 이 두 번째 방법을 쓰려면… 실제 시술 시간은 최소 삼일이라는 거고, 그 기간동안 사소한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준비와 연습을 해야 한다는 거군.
여기서 사·소·한· 실·수·라는 건… 나 자신이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를 실수이고 말야. >
[ 그렇습니다. ]
< 제기! 내가 위험한 그렇다 쳐도 이미 벌여 놓은 일이 있는데…… >
나와… 내가 끌어들일 예정인 세력들을 기대하고 있을 반(反)대천마 조직원들을 생각하면, 확실히 나 혼자 위험을 무릅쓰고 ‘영웅놀이’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 몽몽… 역시 부실공사라도 그냥 결제할까? 아니면 바람을 피던가…… >
[ 어느 쪽도 적절한 비유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만…… ]
[ 저는 찬성! ]
뭐야? 요정몽, 너 이제야 출동이냐?
[ 부실공사라니욧! 애초에 환자가 스스로 택한 방식이잖아요.
열 받아서 악화 된 것도, 그래서 시기를 놓친 것도 전부 환자 개인 사정이고 말예요. ]
< 그렇기는… 해. >
[ 그리고 죄송하지만, 대교님은 지금 주인님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는데 바람은 무슨 바람이에요?
음… 이제야 말이지만, 대교님도 너무했다고요. 그깟 몸이 좀 바뀌었다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예요! ]
< 그, 그건 그래! 언제는 무조건 내 영혼을 알아 볼 것처럼 분위기 잡더니… 제기, 뻥이었어. >
[ 그렇죠? 그쵸? 그러니까 주인님도 막 나가는 거예요. ]
< 막나간…다? >
[ 사실 막 나가는 것도 아니죠, 뭐. 공주님이 지금 환자라 그렇지, 바탕은 좀 예뻐요? 게다가 공주나 주인님이나 법적으로 하자 없는 처녀 총각! 뭐가 문제예요? 그리고 이 시대는 삼처사첩이든 뭐든 능력대로라구요. 여자들도 별 불만 없고 말이죠. ]
< 그, 그래도 난 대한민국 모범청년인데…… >
[ 주인님도 참…! 그냥 저질러 버리시라니까요. 또 알아요? 주인님이 공주님과 맺어지면 대교님도 질투심으로 주인님을 돌아볼지? ]
< 너… 오늘 무지 설득력 있다. 좋아…! 가자! 막가는 거야, 까짓 거! >
요정몽의 응원에 힘입은 나는 바로 방을 나와서 응접실로 향했다. 천우신은 어디로 갔는지, 자옥령 혼자 앉아 있어서 나는 대뜸 그녀에게 선언했다.
“방법이 있소! 신수성녀를 완치할 수 있는 방법이 말이오!”
나는 공연히 열띤 어조로 시술의 방법과 그 의미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얘기를 듣고 있는 자옥령의 얼굴에서 냉정함이란 가면이 살짝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 주시오!”
“하, 하지만… 그 방법은……”
“어쩔 수 없소. 하나밖에 없는 빙룡의 내단을 쓰고서도 나중에 병세가 재발된다면… 그때는 정말 대책이 없을 거요.”
자옥령은 더 이상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잠시 후.
동굴 밖으로 나온 나는 대충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아 연초를 하나 빼들었다. 술은 그렇다 쳐도 담배는 차츰 끊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땡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맞은 편 산의 정상에는 붉은 황혼이 망토처럼 걸쳐져 마치 바람에 펄럭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황혼의 햇살 속에 담배 연기를 섞어 넣었고, 그 연기를 안개처럼 헤치며 요정몽이 떠올랐다.
[ 주인님…! 절 속이셨군요오~! ]
심통이 난 표정의 요정몽은 팔짱을 낀 자세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 뭐예욧! 결국 두 번째의 위험한 방법을 택하실 거면서… 저를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흥! 정말 미워욧! ]
“…야. 그게 아니고… 사실… 조금 전 자옥령에게는 정말로 세 번째 방법을 말할 생각이었어. 근데… 근데 막상 말을 하려고 입을 여니까… 갑자기, 결심했던 것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오더라구. 제기……”
[ 흐응~ 정말 열부 나셨네요. ]
“너무 그러지마, 임마. 쳇…! 내 여기와 여기는……”
난 내 머리와 심장께의 가슴을 번갈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같은 편이 아닌가봐.”
나는 씁쓸하게 웃었고, 요정몽은 질렸다는 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 하여가안~ 어쩔 수 없는 분이네요. 그 어떤 도덕적 가치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분인 것은 틀림없는데… 그러면서도 어떨 땐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곤 하시니… 제가 보필하기가 너무 힘들다고요. ]
“훗~! 보필? 원판 몽몽은 몰라도 네가 날 보필……?”
내가 언제부터인가 ‘원판 몽몽’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녀석들이 ‘모드 변환’이라기보다는 아예 독립되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개념으로 좀 오버다 싶을 정도로 쿡쿡대고 웃어 보이자, 요정몽은 더욱 심술이 나는 모양이었다.
[ 어머머? 그럼 메인 운영체 몽몽 오빠만 주인님께 도움이 된다구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
“모, 몽몽 오빠…? 큭! 니들 완전히 따로 놀게 된 건 그렇다 치고, 너 정말 녀석을 그렇게 부를 생각이야?”
[ 뭐… 아빠라고 하긴 좀 그렇잖아요. 몽몽 오빠도 실제 작동 기간은 10년도 안 되는데 말예요. 그리고…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제 이름이 요정몽이 뭐예요? 좀 더 세련된 이름으로 바꿔주면 안돼요? ]
“하하핫! 맘대로 해라. 니들 맘대로……”
나는 요정몽의 재롱(?)에 웃다가 담배 연기가 목에 걸리는 바람에 콜록대다가 또 웃다가… 뭐 그런 엄한 짓을 한동안 계속했다. 웬지 우울해 지려던 기분이 담배 연기와 함께 스러지고 요정몽의 웃음소리에 묻혀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천우신과 함께 동굴에서 나와 다시 복대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대성 바깥의 객잔으로 가서 날 기다리고 있는 대오와 종소, 금동이를 데려오려는 생각이다. 조예린의 치유에 쓰일 빙룡의 내단은 앞으로도 이틀 후에나 도착한다고 하니 종소를 미리 조예린과 자옥령에게 소개시켜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천우신은 가는 내내 웬지 표정이 어둡더니만 어제 나와 합류했던 장소쯤 왔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공주님들도 놀란 것 같았지만… 나도 정말 뜻밖이었네. 설마 자네 스스로 그런 위험한 시술을 강구해서 자처할 줄은 몰랐어.”
“뭐… 한 번에 두 명의 공주를 차지하는 일인데 너무 쉬워도 예의가 아니지. 빡세게 해보고 안되면 말…면 안되니까, 음… 하여간 뭐 어떻게 되겠지.”
“자넨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야. 평소에는 모든 일에 얼렁뚱땅 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다른 사람들 일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집중을……”
“이봐, 이봐! 안 그래도 비슷한 잔소리를 실컷… 음, 들을 예정이란 말야. 하여간 자네까지 자꾸 그러지 말라구.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음……”
내게 잔소리를 할(실은 이미 한) 존재에 대해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천우신은 결국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기 시작했다.
“…헌데 지금 데리러 가는 소녀, 종소는 누구에게 맡길 생각인가?”
그러고 보니 두 명 다 확보되었을 경우에는 어느 쪽에 보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 신수성녀 같은 경우 천수성자의 수제자이니 세월이 얼마나 걸리든 종소의 몸에 누적된 독을 몰아내 줄 수 있을 것 같고… 자옥령의 북해빙궁도 종소가 요양 겸해서 지내기에 좋을 것 같긴 한데… 음… 신수성녀가 아무래도 차분한 성격이니 애 교육상 좋으려나? 아니… 공연히 복잡한 황실에 관계되는 것보다는 북해빙궁처럼 조용한 왕국의 손님으로 지내는 편이 더……”
“자네, 마치 이웃에게 딸아이를 부탁하려는 아버지 같군 그래.”
“윽, 이봐! 누구 혼사 길 막을 일 있어?”
짐짓 인상을 써 보였지만, 난 결국 객잔에 도착할 때까지 두 군데의 탁아소(?)를 놓고 갈등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웬지… 정말로 애 맡기고 출장가야 하는 아빠의 기분 같기도 했다.
“쯧…! 결국 종소 본인의 선택이 가장 중요… 응? 뭐야!”
난 객잔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고, 그런 내 시선을 따라 천우신도 객잔 앞에 세워진 마차 한대와 말 몇 마리를 보았다.
“음… 무림맹의 깃발이로군. 헌데 왜 그러나. 자네 얼굴을 아는 정파인은 없지 않은가.”
“나 말고 우리 애들을 아는… ‘재수 없는 인물’이 생각나서 그래.”
이 지역 무림맹에 문제의 장명 아들만 있는 건 아닌데도 웬지 예감이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객잔에 채 들어서기도 전에 2층 객실로부터 대오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우리 애들 방으로부터 당황한 기색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흥! 제 아무리 남해오신룡이라도 본 공자에게 독을 쓰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아주 쬐~금 낯익은 놈이 이를 부득 가는 표정으로 방에 대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러나 놈과 그 일행들의 발은 이미 급하게 아래로 내려오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곧 방 안쪽에서 대오가 뒤따라 나와서 마주 고함을 쳤다.
“상해공자(像海公子) 장두균! 용기가 있으면 도망치지 말고 나와 한 번 겨뤄보자!”
“그거 좋지! 독을 품은 꼬마를 내세우지 말고 당장 이리 내려오너라!”
대오의 살기 띤 눈동자는 재수 없는 사내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다가 계단 아래의 내 시선과 딱 마주쳤다.
“아… 진.”
“닥쳐라! 대오!”
나는 얼른 대오의 말을 끊은 다음 장두균 쪽으로 몸을 향했다. 지 애비 장명과 붕어빵으로 비대한 몸집의 장두균은 교활한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진……?”
“아, 본인은 김·진·이라는 사람이오. 명호는 조촐하게… 천하제일도객막강철각무적금강신비공자(天下第一刀客莫强鐵脚無敵金强神秘公子)를 쓰지요.”
나는 질린 듯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장두균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