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51화 : 위기의 서울.
1. 위기의 서울.
프리메이슨 최고의 암살단이라는 에레보스(Erebos, 어둠. 암흑.)…….! 그들이 프리메이슨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신념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 다. 문제는 그 신념이 하필 ‘진유준 타도’라는 건데………… 젠장! 어쨌거나 지금 당장 문제는 여기가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는 거야. 여기, 이 평화로운 서울에서… 헬 게이트 녀석이 만들어낸 괴수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날뛰고, 겨울의 여왕이 사람들을 얼려 버리는 한편, 자니 놈의 화염이 건물 을 불태우고………… 으~! 에레보스 멤버들 중 내가 아는 몇 명이 능력을 발동하는 것만 상상해도 끔찍할 지경이었다.
-대교! 당장 나와 줘야겠어!
……………예. 방금 요몽에게 상황을 보고 받았어요.
상황의 심각성 때문인지, 대교의 전음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당장 나와 대교가 튀기 시작해서 놈들을 인적 드문 곳으로 유인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은・・・・・・
“……우선은, 안심하셔도 될 거예요.”
응?
“뭐? 지금 뭐라고 했지, 산드라?”
“그들은 분명 진유준 님 때문에 12인의 사도님들까지 배신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서 함부로 행동 하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산드라가 이유를 설명해주려 했을 때, 한 발 먼저 내 머리 속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진유준 씨.’
이 상당히 색기 어린(?) 음성은…… 미국에서 만났던 재수 결핍 여자, 환영의 천사인가? 돌아보니, 골목 입구로 화사한 패션의 글래머 백인 아가씨 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명품으로 도배한 소 위 된장녀 분위기이기 했으나, 어쨌든 재벌 2세와 데이트하러 나온 분위기면 분위기였지, 결코 ‘전투 복장’은 아닌 듯했다.
“저도………… 그리 반가운 건 아니지만, 어쨌든 또 보네요.”
“어? 뭐?”
헬 게이트…………? 꽤 먼 거리의 건물 위에서 여기까지 빨리도 온…건, 그렇다 치고…………! 뭐야, 이 녀석. 환영의 천사 뒤에서 슬쩍 모습을 드러낸 헬 게이트 소년은 웬일인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성별 구분이 어려운 미모를 가진 놈이 앙증맞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있으니 미연시 게임에 나오는 미소녀 캐릭터가 현실로 걸어 나온 것 같을 정도였다.
‘치이~ 재수없는 환영 아줌마! 헬 게이트 오빠한테 또 여장을 시켰네.’
초롱이의 짜증 섞인 텔레파시로 보아, 헬 게이트의 상태는 저 재수때기 여자의 취향인 모양이군.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여자지만, 지금은 그녀 에게만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헬 게이트 소년에 이어 거대한 덩치 하나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치는 거의 BB형제급……………! 하지 만 날카로운 눈매와 날 노려보는 시선에서 감지되는 이건……… 왠지 은근 두 뇌파 느낌………? 적어도 우리 애들처럼 순박한 놈은 아닐 것 같군. ‘넘버 포・・・ ‘신의 전차’ 아저씨예요. 세상의 어떤 무기로도 상처 입힐 수 없고, 무엇이든 분쇄해버리는………………
초롱이가 텔레파시로 소개해준 ‘신의 전차’는 가공할 괴력의 괴수라는(아마도) 정체와 달리, 평범한 디자인의 회색 폴라 티에 같은 색 털실 모자로 짧은 머리를 가리고 있어서 덩치 큰 미군 병사, 혹은 레슬러가 외출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 워낙 큰 덩치 때문인지 그의 뒤로 얼쩡대며 구경하는 녀 석들이 보이고 있었다. 저 눈치 없는 녀석들이 얼른 알아서 도망 가줬으면 좋겠지만・・・・・・ 웃? 뭐야? 골목 바깥의 어디선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 려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등 뒤의 정글도로 손이 움직였다. 내가 어색하게 동작을 멈춘 것은 이번에도 초롱이가 텔레파시를 보내서 말렸기 때문 이었다.
‘괜찮아요, 유준 아저씨. 산드라 언니 말대로………… 아무도 여기서 큰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예요. 넘버원, 캡틴의 명령은 절대적이거든요.’
정체불명의 캡틴이 ‘아직은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는 건가? 그럼 오늘 이렇게 몰려 온 건 그냥 인사 차원……? 으으음. 나도 정말 그랬으 면 좋겠는데… 신의 전차를 구경하던 어린 녀석들은 뭔 호기심이 그리 많은지, 뭔가 소란이 벌어진 듯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그런 데 곧 반대로 그쪽 방향에서 이쪽으로 나타나는 여자가 있었다. 이, 이건 또 웬…… ‘입 찢어진 여자’ 분위기? 크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무난한 원 피스에 역시 별 특징 없는 코트를 걸친 복장이었다. 사실 입에 크고 흰 마스크를 쓰고 눈만 겨우 보일 정도인 것도 그리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겠지 만, 이 여자는 자신의 모든 걸 특별하게 보이게 할 정도의 기괴한 분위기가 있었다. 저 길고 검은 생머리 아래의 창백한 피부와 가늘게 찢어진 눈… 아니, 세세한 이목구비는 둘째치고. 그냥 왠지 죽은 시체 같은 섬뜩함이 풍긴다고 해야 하나…………? ·쳇. 뭔지 모르겠지만, 괜히 소름이 끼쳐.
‘넘버………… 일레븐…………! ‘부식의 인어’, 베팔. 저, 저 언니는 저도 무서워요.’
응? 초롱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기색이잖아? 같은 편인데도 말야.
‘저 언니의 손길에 닿는 모든 생명체는 썩어서 죽어요. 그리고 저 언니의 숨결이 닿은 사람은 온갖 무서운 질병에………… 흡!’
초롱이가 황급히 입을 다문 것은 부식의 인어인지 뭔지하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우리 귀여운 애기~ 내 정체를~ 불고 있는 거구나아~.”
작고 가냘픈 미성이지만 중간 중간 늘어지는, 기묘한 말투였다. 말투까지 무슨 전설의 고향 귀신같은………… 건, 그렇다 치고! 부식이란 썩거나 녹슨 다는 의미의 부식인 건가? 게다가 질병을 옮겨…………? 뭐 그런 지저분한(?) 초능력이 다 있어? ……아? 가만? 이 여자가 온 방향에서 났었던 비명 은・・・・・・ 설마?
“아니~ 아니~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어우. 저 귀신 음성과 말투, 진짜! 어쨌든 부식의 인어….. 아니, 부식의 귀신 아가씨는 내가 자신을 노려보는 이유를 눈치 까고 계속 천천히 고개 를 젓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지금 걱정하시는 쪽에서 뭔가 일이 일어나긴 했는데요, 저 여자 말고 다른 초능력자가 장난을 친 거 같아요. 그쪽 가로 등으로 엄청 강력한 전력이 일시에 흘러 들어가면서 부근의 전신주에서 불똥 튀고 난리였던 거로 봐서…………」
전기를 쓰는 능력자……? 그런 놈은 영화 같은데서 보통 엄청난 스피드의 이동이 가능한…… 아, 아닌가? 어슬렁어슬렁 혹은 건들건들…………? 하여 간 꽤 느긋한 걸음걸이로 나타나는 저 놈이 전기인간? 화려한 금발에 화려한 패션…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비죽비죽 세운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록 그룹 무대 의상이 연상되는 옷차림도 그렇고 용모만으로는 일단 ‘서양 양아치’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날 보고 히죽~ 웃는 모 습에서 ‘성격 좋은 녀석’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보통 저런 스타일의 녀석이 히죽거리면 능글맞은 느낌이 앞설 것 같은데, 저 놈은 어째 그렇지 가 않군.
“하이~ 유준 찐? 처음 뵙겠써요!”
“………나름 한국말 공부한 건 칭찬해 주고 싶지만, 그냥 영어로 해도 돼.”
“음~? 그럴까, 그럼.”
그래. 어차피 내겐 적당히 해석돼서 들리니까, 어색한 버터 발음의 한국말 듣느니……… 흠. 근데 이 녀석, 지금 날 시험하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쓴 웃음을 지은 건, 전기 인간이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넘버 에잇, 전격(電擊)의 악마…………! 별명은 거칠지만, 보기보다 다정한 오빠예요.’
내 느낌과 초롱이의 소개를 믿고 마주 손을 마주 잡았다. 녀석은 씨익~ 웃으며 손을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카핫핫~ 역시 겁이 없는 남자로군! 내 능력을 알고도 악수를 받은 남자는 처음이야!”
“……야. 근데, 조금 찌릿찌릿하긴 하다.”
“아~ 미안! 미안!”
전격의 악마는 이름과 달리 정말 미안해하며 손을 놓고는 여전히 사람 좋게 웃었다.
“조금 전에 살짝 방전이 되어서……… 하핫! 그런데 이 나라는 겉보기 보다 전기 관련은 좀 부실한가봐? 수도의 거리에 있는 시설물과 땅으로 전기가 막 통하던 걸?”
뭐야. 가로등 부실 시공으로 인한 사고였지, 이 녀석이 일부러 장난을 친 건 아니었다는 얘긴가? 그러고 보니……… 비오는 날 거리에서 감전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고 하는 것 같더니………… 쳇…………! 어떤 시러배 놈들이 공사를 했기에 이런 나라 망신을…………
“후후. 어쨌든 반가워, 진유준. 지난번에 자니 녀석이 당신을 만나고도 싸우지 못했다고 해서 결국 나에게 먼저 기회가 올 줄 알았지.”
흐음. 이제야 이 녀석에게서 투지랄지, 살기랄지…. 하여간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지기 시작하는군.
“그 바보 녀석은 이제…………”
응?
“토르!”
뭔가 무심결에 말하려던 전격의 악마 토르(아마도)의 입을 막은 건 환영의 천사였다. 그러고 보니 ‘크레이지 파이어(Crazy fire. 미친 불꽃?) 자 니’가 아직 보이지 않는군.
“요몽?”
「예, 주인님. 스캔되던 적들은 이제 다 온 것 같아요.」
다 왔다고……………? 넘버 원, 두목놈은 안 왔다는 건가? 아니 두목은 비싼 척할 수도 있으니 그렇다 치고………… 넘버 투이자 산드라의 마스터인 ‘공간의 지배자 시그마’도 안 온 건… 산드라의 배신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서 그녀의 주인인 시그마를 일부러 배제한 걸까………? 그밖에 겨울의 여왕과 침 묵의 유령, CR 출신인 ‘금빛의 요정, 프리제타’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나와 인사를 나눈 바 있어서 빠진 건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불꽃 능력 자 자니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그와 관련된 일로 오지 못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건, 아직 에레보스가 총 몇 명인지도 모르니 까………… 넘버 일레븐이라는 저 귀신 아가씨 다음으로 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윽?
‘앗!’
「주인님!」
얼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인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뭔가가 내 머리가 있던 공간을 꿰뚫었다. 퍽!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으나, 내 옆 몇 미터 바깥의 보도 블럭 하나가 찍어 눌린 과자처럼 부서져 있었다. 저….격? 근데…………… 이것………봐라?
「탄환은 국화과의 다년생풀……… 네, 국화네요, 붉은 국화.」
꽃이 날아와 꽂혔다기보다는, 깨진 블럭 사이로 붉은 국화 한 송이가 피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저런 꽃을……… 나와 요몽이 미리 감지하지 못할 거 리에서 날린 거라고……………? 이런 총탄 같은 위력으로?
‘미안해요, 유준 아저씨. 마지막 넘버………… 트웰브. ‘고요의 저격수’를 조심하란 얘기를 깜박했어요.’
쳇. 초롱이에게 뭐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난 탄환인지 꽃인지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 없이 말했다(?).
첫 인사 이 따위로 하지? 죽~는다, 너.
보이니까 쐈지 싶어서 입 모양만으로 한 소리 하긴 했지만, 아직도 놈이 어디쯤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고요의 저격수는 같은 멤버들에게도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대요. 전 아직 한 번도 못 봤어요. 듣기로는…………… 크기나 재질도 관계없이 모든 것이 그의 마탄(彈)이 될 수 있다고…………?
초롱이가 아직 견습(?) 에레보스라고는 해도, 어쨌든 동료인 초롱이도 아직 한 번도 못 본 녀석이라고……………? 방금의 꽃 저격도 장난이 아니었지만, 앞으로 맘 먹고 제대로 저격을 해오면 정말 골치 아픈 녀석이겠어. 여기 눈 앞의 괴물들과 싸우는 중에도 항시 저격까지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 니… 난 새삼 내 앞에 늘어서 있는 에레보스의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사실, 지금은 나 혼자만의 싸움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다들 나름 평범함을 가장한 차림새에 아직 적극적인 전투 모드를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맘 먹고 날뛰기 시작하면 이 사람 많은 대도시 서울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릴 거라는 건 너무나 뻔한 것이다. 쳇~! 나도 지금 이 골목 바깥의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처럼 암 것도 모르고 살 때가 차라리 편했어. 설마 이런 괴물들이 세상에 실존하고, 심지어 우리 서울에까지 출몰할 줄은…… 응……? 가, 가만? 이것들이 여기 온 건 나 때문이었지…………? 에구야, 서울이 위험해진 건 바로 나 때문이었구나.
‘아, 그리고…….?
음. 초롱이 녀석, 계속 정보를 알려 주는 건 좋은데…………
‘좀 전의 자니 얘기는요, 자니가 미국에서………… 아!’
초롱이가 다시 말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귀신 아가씨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가만있자, 지금 초롱이가 찡그린 표정으로 노려보는 대상 은… 환영의 천사. 저 짜증녀가 텔레파시로 초롱이를 압박하기 시작한 건가?
“훗. 참 맹랑한 아이죠? 동료들을 배신하고 적에게 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우리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도 계속 뭔가 당신에게 고해 바치고 있으니 말이에요.”
“……글쎄? 그런 초롱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건 누구였었더라?”
내가 미국에서의 일을 상기시키자, 환영의 천사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흥. 내가 그때 정말 당신에게 죽음을 당할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착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아?”
환영의 천사도 초롱이처럼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 뒤에 유령처럼 나타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기 때문이었다. 대교…………? 드디어 나 선 건 좋은데, 왜 새삼 저렇게 살벌한… 어…………? 진짜 장난이 아니잖아? 에구, 대교야! 지금 여기선 그런 분위기가 곤란하다구! 내가 더 난처해서 말리려고 했으나, 환영의 천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뭐… •죠? 지금 고작 그런 이유로……….”
음? 텔레파시 능력자라 대교의 마음을 읽은 건가? 그런데 ‘고작 그런 이유’라니………?
“우리 때문에…….다 불었… 못 먹게 되었다고. .? 떡・・・ “볶이……?”
나도 약간 어이없긴 했으나 환영의 천사는 그야말로 황당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우리 대교는 지극히 심각해서 눈물까지 그렁그렁해 있었다.
“고작…………이라고요? 눈 앞에서 떡이……… 라면이 퉁퉁 불어 흐느적거리는 걸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절절하게 안타까움과 분노가 전해져 올 정도였다.
“저기, 대교야. 그냥 먼저 먹지 그랬…
“제, 제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어………… 하긴. 대교는 뭐든 나보다 자기가 먼저 먹을 애가 아니지.
“더구나, 오라버니와의 시내 나들이는 이제 겨우 두 번째인 것을…..”
그…것도 또 그렇구나. 한강 데이트 이후로는, 대교가 우리 부모님께 점수 따느라고 두 분만 모시고 다녔었으니…………… 에고, 어쨌거나 큰일 났네. 평소 모든 일에 너무나 침착하고 사려 깊게 대처하는 대교지만, 지금은 보통 열 받아 있는 게 아니다. 자칫하다간 싸움이 시작되어 서울의 위기가 현실로 변할 순간인 것이다.
“쿠흐흣~!”
응? 토르? 전기 녀석이 갑자기 웃네? ・가만? 그러고 보니 다른 녀석들도 어째 눈치가… 긴장하여 반격 태세를 보이고 있는 건 환영의 천사와 그 옆의 헬 게이트뿐이었다. 산드라와 초롱이는 그렇다 치고, 신의 전차, 부식의 귀신 아가씨까지도 별다른 기미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게다가 저 토르 녀석은 기분 좋게 웃기까지…………? 뭐야, 이 녀석들. 설마 우릴 그렇게 가볍게 보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 공연히 나까지 살짝 열 받으려고 하는 참에, 토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크큭~ 이거 정말 재밌네. 우리 고고하고 잘난 환영의 천사께서 저런 표정이 된 걸 보게 될 줄이야………! 하핫! 초롱아! 지난 번에도 환영의 천사가 저렇게 잔득 겁을 먹었었단 말이지? 응?”
“헤헤~ 맞아요. 그때는 더……”
눈치 없이 맞장구를 치던 초롱이가 다시 입을 다문 건 환영의 천사가 본격적으로 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욕을 견디지 못해 이를 부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환영의 천사 주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 듯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공도 아니고 그밖의 어떤 공격적 에너지라는 느낌은 아닌데………… 그래도 뭔가 기분 나쁜…………
“그만, 그만 둬요!”
“닥쳐! 산드라!”
환영의 천사 목소리가 격해진 만큼 알 수 없는 기운도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산드라, 당신은 지금 함부로 나설 처지가 아니야. 평소라면 우리들 간의 서열은 없지만………… 오늘 우린 분명히 캡틴으로부터 당신과 초롱이의 ‘체 포’를 명령 받았으니 말이야. 물론 저항할 때의 처리는 우리들의 판단에 맡겨졌고………”
“흥! 그래서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고 하는 건가요? 그 잘난 환영이 나에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훗! 날 너무 얕보는 거 아냐, 산드라?”
산드라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환영의 천사도 만만치 않았다.
“넌 뱀파이어 서브……………! 이런 대낮에는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지. 안 그래?”
아, 맞다. 산드라는 뱀파이어였지? 그럼 힘 쓰는 건 고사하고 지금 상당한 고통을 견디고 있는 거 아냐?
“호홋~ 처음부터 싸울 생각도 없었겠지? 다만 이런 식으로 내 정신을 흐트러트릴 생각이었겠지만………… 어리석고 쓸데없는 짓일 뿐이었어. 일단 발 동한 ‘지옥의 환영’은 내 목숨을 끊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아.”
약점과 함께 시비를 건 목적까지 간파 당한 산드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뒤의 시건방진 여자는…. 내 환영 속에서 자신만의 지옥에 갇혀………… 곧 미쳐 버리던가, 스스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어. 그러기 전에…… 누 가 날 죽일 수 있을까? 나의 헬 게이트의 가드를 뚫고 말야.”
환영의 천사가 득의한 태도로 지껄이는 사이에 정말 대교의 상태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바로 눈 앞의 적이나 심지어 날 보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멍한 얼굴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젠장…..! 이젠 진짜 나도 나설 수밖에 없겠어. 내가 각오를 다지며 다시 상황을 가늠해 보는 사이, 환영의 천사도 내 게 시선을 돌렸다.
“호호호~ 당신의 치명적인 문제도 잘 알고 있어요. 아무리 그렇게 태연한 척을 해도, 결국 내 뒤의 이 여자가 아니면 제대로 본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죠?”
훗. 그래. 며칠 전까지는 그랬지.
“그・・・・・・ 당신 등 뒤의 무기에서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지만…
수상한 느낌..뿐이라 이거지? 내가 그 동안 자체적으로 텔레파시 방어력이 높아진 건지, 이 것도 정글이의 ‘염’ 때문인지 몰라도………… 어쨌든 최 강의 텔레파시 능력자도 별 수 없구먼.
“당신이 설사 본래의 전투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오늘 모인 우리 멤버들에게는 당해낼 수 없어요. 당신에게 조심해야 할 점은………… 사도 들마저 겁 먹게 했다는 ‘미지의 잠재력…………!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나 그 희박한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참고 있을 줄 알았다면……”
“저기, 나보다 댁 걱정부터 하는 건 어때?”
“무슨…… 아?”
잘난 체하며 떠드느라 바빴던 환영의 천사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등 뒤 대교가 다시 안정적인 살기 발산 모드로 바뀐 것을 깨닫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건, 대교가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대교는 또렷하게 돌아온 표정으로 차갑 게 입을 열었다.
“제법 신기한 구경……… 잘 했었어요. 하지만…………… 당신, 큰 실수했어요. 저에게………… 유준 오라버니가 배신하는 환상을 보게 하다니…
맙소사! 저 여자가 하필 그런 환상을? 진짜 일났다!
“뭐? 흑?! 무…… 끄으으으 환영의 천사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신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비명조차 대교의 내력에 억눌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중수 법(內家重手法)…………! 환영의 천사 어깨 위에 있던 저 손을 통해서 내부를 직접 아작 내는…………… 웃? 지금 그걸 분석할 때가 아냐!
“누, 누나!”
헬 게이트가 환영의 천사를 그렇게 부르며 사념체 괴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정글도를 쥠과 동시에 삼시전결을 날렸다. 퍼억! 퍽! 한 방은 괴수를 꿰뚫고, 또 한 방은 헬 게이트의 발 밑에 꽂히며 헬 게이트를 물러나게 했다.
“대교! 멈춰! 그만 하라고!”
내 고함 소리에 놀란 대교가 흠칫 힘을 푸는 것 같았고, 환영의 천사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누나! 괘, 괜찮아?”
헬 게이트가 팔을 잡고 안타깝게 물어도 환영의 천사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대교도 승자의 표정이 아닌 건 마찬가 지였다.
“아…………! 죄송……해요. 제가 잠시 이성을……”
-괜찮아. 그치만, 이제 좀 진정하라구. 이 은근 다혈질인 아가씨야.
대교는 새삼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고, 난 에레보스들을 돌아보며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물었다.
“나야 좋았지만………… 다들, 정말 전혀 나설 생각이 없었던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산처럼 묵직한 신의 전차는 이번에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전혀~ 없었어요~”
천천히 고개를 젖는 귀신 아가씨의 대답도 그랬고, 보이지 않는 고요의 저격수 역시 여전히 고요했다(?). 전기맨 토르가 대표 격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큭~ 함께 행동해 본 적도 거의 없고, 동료 의식도 없는 우리가 새삼 누굴 구해주고 말고 할 리가 있나.”
………뭐니, 얘들. 아무리 각자가 엄청난 능력자라고 해도 그렇지, 설마 이렇게 콩가루 암살단 일 줄은…………
“더구나 항상 캡틴에게만 여우 짓을 하며 2인자라도 되는 양 설치는 여자 따위, 알게 뭐야.”
흐으음. 저 여자, 동료들에게 어지간히 찍히기도 한 모양이군. 환영의 천사는 다른 자들에 비해 전투력이 약하기는 해도 회복력만큼은 남 못지않은 듯 했다. 대교의 내 가중수법에 당하고도 벌써 다시 혈색이 돌아오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 뿐, 더 일을 벌일 엄 두는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토르는 여전히 그녀는 안중에도 없이 나에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당신, 진유준. 언제부터 전투력이 돌아 온 거지?”
“그건……”
“아아~ 그것도 별로 중요하진 않아!”
이 녀석, 지가 묻고 지가 말을 막네.
“나로서는 완전한 상태의 당신을 이 내가, 쓰러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만이 중요할 뿐……!”
사람 좋은 표정에 숨겨져 있던 호전성이 슬며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살기’가 아닌 듯 했다.
“좋아! 좋다구, 오늘!”
토르는 두 팔을 활짝 벌렸고, 초롱이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결국 쪼르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크핫핫!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당신 전투력의 부활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다구! 너도 그렇지, 초롱아?”
“으, 응!”
“그러니까, 오늘은 이대로 물러갈게. 오케이?”
당연히 나야…………
“……오케이.”
다른 멤버들의 반응을 살피니, 신의 전차는 벌써 말없이 몸을 돌려 골목을 나서고 있었다. 귀신 아가씨가 뭔가 잠깐 망설이는 눈치더니 코트 주머 니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는 엄청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을 들어 골목 바깥을 가리켰다.
“당신 부하드을~ 내가 미안하다고~ 전해 줘요오~”
응?
「주인님…..! 저 여자한테서는 계속 미량이지만 각종 병원균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저 여자가 쓴 마스크에는 성능 좋은 항균 필터가 있는데도 호흡할 때마다…. 아, 그치만 주인님처럼 돌쇠 체질・・・・・・ 아, 죄송! 하여간 튼튼한 사람은 괜찮을 거예요. 요즘 좀 피곤해서 저항력이 떨어진 사람들 은 감기나 기타 가벼운 질병에 고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조금 전 에레보스들이 모두 모인 것이 확인된 이후, 이 골목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보천구룡대(保天九龍隊) 대원들이 동원되어 사람들의 접근을 교묘하게 막고 있는 중이었다. 공사 현장인 척한다거나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니, 그거야 어쨌든…………! 으으으음. 능력을 애써 억제하고 있어 도 체내의 병원균이 넘쳐 흘러나오는 여자라니.. 어쩌면 저 여자가 가장 위험한 존재일지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나, 그게 무색하게 도 귀신 아가씨는 꾸벅 상체까지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를 해서 나도 모르게 마주 인사를 해주어야 했다.
“자아~ 그럼 우리도 그만 가볼까, 초롱아?”
“응, 토르. 초롱인 자니보다 토르 오빠가 더 좋아.”
“흐흐~ 요 여우같은 것! 자니하고 있으면 반대로 얘기할 거면서…………
“헤헤~ 꼭 그렇지는 않을걸?”
토르와 초롱이 커플(?)이 너무나 다정해 보여서인지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환영의 천사와 헬 게이트 커플(?)이 더욱 초라해 보이고 있었다. …………어 쨌든, 저 여자만 빼고 다른 멤버들은 초롱이와 산드라의 가벼운(?) 배신 정도는 아예 개의치도 않은 것 같고………… 이대로 오늘의 위험한 상황은 마무 리되는……………
「앗! 주인님!」
에? 갑자기 또 무슨・・・・・・ 응? 조담놈? 내 수하들의 저지를 무조건 뚫고 들어온 듯, 조담 놈은 씩씩거리는 모습으로 골목 안까지 뛰어 들었다.
“이, 이 자식들이~ 하필! 하필 이럴 때에~!”
뜬금없이 나타나서, 분노로 미치기 직전…………..? 대체 왜………… 아, 아참! 지금 저 놈도 자룡대주와 데이트 중이었지?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는 연락 을 받고도 데이트를 계속할 자룡대주가 아닐 테고…………
“야! 야!”
다급하게 소리쳐 말렸으나, 이미 조담놈의 칼이 무섭게 휘둘러지며 생사금마도결을 펼치고 있었다.
“으아아~ 다 죽어버렷!”
서울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
“이익!”
이를 악물고 경공을 발동하여 간신히 조담놈과 에레보스들 사이로 뛰어들 수 있었다.
쿠과콱~!칵!
길바닥을 가르며 상어처럼 엄습하는 조담놈의 공격을 정글도로 받아내는 순간, 엄청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통째로 퉁겨 나갔다. 주르르~ 밀려가 던 내가 멈춘 건 누군가의 손이 등을 턱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적 토르의 도움이었다.
우쒸! 이게 무슨………… 그, 그래도 막았… 서울을 위기에서 구했… 빌어먹을! 조담놈, 저 노무 자쉭…………! 아무리 빡 돌았어도 그렇지, 이런 곳에 서 잘도 이렇게 엄청난 도기를 날리다니……… 그나마 다행인 건,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것 같은 기세로 칼을 휘둘렀던 조담놈도 이미 더 이상 깽판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도결을 펼친 직후에 녀석 역시 강력한 기습을(?) 받았던 것이다. 기습한 자와 함께 골목 바깥의 옆 길로 굴러가서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만 있자, 조금 전의 그건 아마도………… 골목 밖으로 나가자 옆길에 쓰러져 있는 조담놈과 놈의 위에 겹쳐 쓰러져 있는 여인네, 자룡대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으음. 조담놈이 올 때 못지않은 스피드로 달려와서 온몸으로 저지한 건, 역시 자룡대주였군. 헌데………… 아무리 기습을 당한 셈이었어도 그 렇지, 조담놈이 자룡대주의 몸통박치기(?) 정도에 이렇게 기절까지 할 놈은 아닐 텐데……………
“아, 그건 제가…..”
응? 대교? 아….. 자룡대주와의 충돌 직전에 대교가 먼저 뒤에서 공격했던 거구나.
“섬광분소지(閃光分小指)를 최대한 약하게 써서 공격을 멈추게만 할 생각이었는데, 다급하다 보니 생각보다 강하게… 더구나 그 순간 자룡대주 까지 뛰어들 줄은 몰랐어요.”
“흠. 조담놈은 대교의 섬광분소지에 등의 급소를 가격 당함과 동시에 자룡대주의 몸통 박치기 충격이 겹쳐서 졸도……………! 자룡대주는 놈의 호신 강기(護身强氣)에 부딪친 충격에 졸도…………! 결국 이렇게 사이좋게(?) 끌어안고 쌍졸도 모드가 된 거로군. 내가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사이, 초롱이를 안은 토르가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들이 이렇게 온몸을 던져 우릴 구해 줄줄은 몰랐는 걸? 고마워~! 수고!”
여전히 히죽거리는 얼굴로 던진 말이었고, 내용도 좀 거슬렸지만・・・・・・ 그래도 왠지 아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것도………….. 전에 나와 대교가 우 려했었던 ‘방심 유도 겸, 싸울 의욕 감퇴’ 전술일까…………? 하지만, 저 녀석도 그렇고, 질병 귀신녀까지도 그리 밉상이 아닌 건 사실이니………… 거참.
“진유준 님.”
“어, 산드라? 당신도 괜찮아?”
“예.”
돌아보니까 소란한 와중에 환영의 천사와 헬 게이트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산드라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당신, 정말 괜찮아? 뱀파이어는 이런 대낮에 돌아다니기 힘든 거 아냐? 그런데도…..”
‘애써 소식을 알려 주러 와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산드라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저희 가문의 특제 화장품을 사용하면, 태양 빛에 의한 고통은 거의 느끼지 않게 됩니다. 능력 발휘에 제한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 짙은 화장이 그래서……… 흠. 이거 우리 쪽 뱀파이어에게도 알려 주고 싶은 걸?”
“아! 진유준 님의 수하들 중에도 우리 동족이……?”
“어, 그건 아니야. 그는 내 수하가 아니고…………… 아, 수하들 중에도 한 명이 또 어찌 될지도 모르겠네.”
‘에스’에게 물린 ‘데릭 허버트’얘기다. 그 인간은 지금 ‘에스의 러브 하우스’에 구금 중인데, 에스가 그를 어찌할 건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정말이지 끝을 알 수 없는 분이로군요. 얼마 전에 마스터와 저를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 밤의 귀족에 대해서 낯설어하시는 것 같더 니……”
“훗. 내 팔자가 좀 버라이어티하긴 해. 뭐…………… 어쨌거나, 조만간 우리 쪽과 한번 미팅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아직 초보 뱀파이어들이니까, 선배 로서 조언도 좀 해주고…………… 태양을 피하는 화장법도 전수해 주면 더 좋고.”
“후후~ 생각해 보죠. 다만……”
산드라는 문득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진유준 님과 제가 살아남게 되었을 경우에 말입니다.”
………쯧. 그렇군. 이 여자가 어떤 이유에서 나에게 이리 호의적인지는 몰라도, 결국 자신의 조직을….. 아니, ‘공간의 지배자 시그마’, 자신의 마스 터 뱀파이어를 배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진유준 님. 당신께선 곧 우리들 모두와 일전을 벌여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장소나 시기는 모두 진유준 님께서 원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건………… 우리들의 캡틴이 그런 승부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으음. 일단 고맙기는 한 얘긴데, 과연 진짜 그 정체불명의 넘버 원이 그렇게 친절한 놈이라고 믿어도 될지는…………
“그리고………… 이건 사실 모두 진유준 님 자신이 확보해 놓은 성과이지요.”
음?
“우리가, 아니 캡틴이 분석한 당신・・・・・・ 진유준이란 남자는, 극히 드문 케이스의 강자입니다. 마치 승리하기 위해 태어난 듯………… 타고난 사고방식 자체가 전사로서, 군림자로서 완벽에 가까운…..”
“저기, 아니, 저기, 그건 아니지. 칭찬은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면 별로 기쁘지도 않다구.”
내가 어이없어 하며 고개와 손을 절래절래 흔들자, 산드라는 쿡하고 웃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신다 해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일만 해도………… 당신께선 무사히 이 도시의 시민들을 구해내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뭐. 니들이 알아서 물러가 준 거잖아.”
“물러가 주었다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당신은 자신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을 때, 오히려 더 차가워지는………… 누구라도 이성을 잃고 헛점을 보여야 하는 순간에 더 빈틈이 없어지고, 더 강해지는……… 인질을 잡고 위협해선 안 되는………… 그런 남자니까요.”
그건… 확실히 그러려고 많이 노력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긴 하지. 빡 돌았다고 개념 없이 날뛰다가 빡돌게 한 놈에게 당하면 그게 무슨 개 같 은 경우겠어? ……하지만, 나도 노력을 했다는 거지………… 항상 그렇게 되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야. 으음~ 결국 가장 극단적으로 빡 돌았을 때 썼 던 천지파멸식 덕분에 이런 흐뭇한 평가를 받게 된 것 같군, 그래.
“……어쨌건, 그럼 너희들 캡틴의 계획은………… 나름 신사답게 나오며 분위기 좋게 싸우다가, 내가 진짜 열 받기 전에 해치우자…쯤 되겠네?”
“예. 우린… 그럴 겁니다. 자니나 토르는 간혹 자신들이 전사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지만…… 우리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암살단’이니까요.” 산드라의 미소에서 처음으로 살짝 섬뜩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지금 이거…… 나에게 좀더 정신 차리라는 거 같은데 말이지. 하지만 난 이미 어느 정도 당해 버린 것 같군.”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공연히 뒷머리를 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나 초롱이는 물론이고, 다른 멤버들에게도 적개심이 잘 들지가 않게 되었어. 아, 물론 환영의 천사와…. 아직 정체도 모르는 넘버 원은 빼 고 말이야.”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번 싸움의 키포인트 역시 저 분, 당신이 사랑하는 분에게 달려 있….”
“그보다, 산드라.”
난 고개를 갸웃하고 새삼 산드라의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며 물었다.
“당신, 대체 왜 이렇게 나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려 애를 쓰는 거지?”
“그, 그건……”
“내가 먼저 흔한 설정을(?) 얘기해 볼까? 누군가 넘버 원을 쓰러트려 주어야만, 당신과 시그마가 그 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를 찾고…… 둘 이 알콩달콩 잘 살 수 있게 될 거니까……… 뭐, 그런 건가?”
“아, 알콩달콩……?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앞부분은 어느 정도 맞아요.”
“어느 정도?”
“……예. 자유를 원하는 것은 시그마 님이고, 저는 상관없어요”
“에이~ 왜 그래. 요즘은 여자들도 그렇게 순종적이기만 해서는 인기 없다구.”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대교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 그런 거 모릅니다. 저희 집안은 본래 대대로 시그마 님을 섬겨 왔기에…..”
음?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란 건가…………? 하지만 이 아가씨가 시그마를 보는 눈빛은…… 흐으음! 이거 어째 마구 참견하고 싶은 충동이…………… “어쨌든, 진유준 님!”
산드라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표정을 추스리며 진지하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우리 에레보스를 결코 얕보거나 방심하지 말아 주세요. 전에도 말했듯, 우린 아직 단 한 번도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진유준 님께 보인 적이 없어 요. 예를 들어, 지금까지 약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던 환영의 천사도……… 지난 날, 혼자 한 도시를 전멸시킨 적이 있을 정도로…”
“됐어.”
“예?”
“댁들의 넘버 원은 말이야. 아무래도 기분 나쁜 계열의(원판) 냄새가 나. 아마 지금 당신이 하는 말들도 내가 들어주길……… 그 자가 더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르지. 당신 행동쯤이야 얼마든지 예측하고 이용할 수 있는 자일 테니 말야.”
“아……! 그건……”
“거, 뭐. 꼭 그렇지 않더라도 더 듣고 싶지 않아. 사전 정보고, 심리전이고 나발이고…………… 애꿎은 사람들 없는 장소에서 한판 뜨는 거라면 무조건 환 영이라고 전해 주기나 해. 아니, 아예 지금 날 잡자!
그래. 적이 확정되었는데도 계속 뜸들이고 이리저리 재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지금까지 하도 거대한 조직을 상대하는 처지라 이리저리 맷돌 굴리며 스트레스 받아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이었어!
“내일 당장 장소 찾아서 끝장을 보……
“아, 그건 곤란해요!”
에? 우리 대교가 내 말에 반대를?
“내일은 ‘아빠도 뿔났다. 웬일이니?’ 마지막 회예요.”
“……그, 그래? 그럼 모레는?”
““베바’에서 삼각관계가 극을 이루는………… 중요한 국면인데…
쳇. 드라마 광인 울 엄니께서 그새 대교를 배려(?) 놨군.
“그럼・・・・・・ 글피는?”
“글피? 아, 삼일 후요? 그 땐 소교의 생일이잖아요.”
“아, 그랬지, 참!”
대교와 이런 저런 중요한(?) 일정을 따지고 맞춰보니, 우리가 온전히 한가한 날은 일주일 뒤였다. 우리 부모님들 귀가 예정 다음 날이기도 했다. “에… 지금 들었다시피, 일주일 후! 어때?”
“아, 예에.”
산드라는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 곧 캡틴의 답변을 전해 드릴게요.”
“그야, 그렇겠지. 부탁해. 수고~”
뱀파이어 산드라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사라진 후, 나는 다시 조담놈에게 시선을 돌려보았다. 둘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서도 엉킨 팔이 풀리지를 않는지, 수하들이 둘을 함께 들것에 싣고 있었다. 훗. 연말에 술 취해 쓰러진 불륜남녀도 아니고…………… 으음. 뭐, 여하간에 다행이었어. 비로 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결국 우리의 서울을 무사히 지켜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