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 회귀(1)
“형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넓은 대청 안.
땀내 나는 사내들이 일제히 한곳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그들의 고개가 향한 자리에는 짧게 자른 머리 가 인상적인 중년 사내가 산악처럼 거대한 존
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설우진.
낭인들의 정점에 선 사내였다.
“자식들, 적당히 하고 그만 앉아. 이제 겨우 간판 하나 올렸을 뿐인데 왜 이리 호들갑이야.”
“호들갑이라뇨. 형님이 하신 일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형님은 우리에게 편안히 기대어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건 무신이 라 불렸던 초대 낭왕도 해내지 못한 일입니다.”
이틀 전. 설우진은 강호에 대대적으로 낭천 개파를 알렸다.
낭천은 부평초처럼 세상을 떠도는 낭인들을 식구라는 테두리 안에 뭉치게 한 조직이었다. 처음엔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 얘기했다. 낭인들의 숫자가 워낙에 많고 저마다의 개성 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우진은 미련스러우리만치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복잡하게 머리를 쓰기보다는 힘으 로 찍어 누르고, 분란이 생겼을 때는 미녀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통해 화합을 도모했다. 그렇게 보낸 십 년의 세월.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했던 낭천은 하나의 세력으로 당당히 강호에 자리 잡았다.
‘그래, 내가 대단한 일을 하기는 했지. 솔직히 동생 놈들에게 속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저 늑대 같은 놈들을 어떻게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겠어.’
설우진은 길게 늘어서 있는 낭천의 간부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낭천이 만들어진 데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하나 있었다.
설우진은 애당초 낭천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르는 놈들이 많아질수록 우두머리인 자신 만 피곤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낭천을 개파하는 문제가 다시 한 번 거론됐다. 설우진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 운데 낭천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는 쪽과 불가 능하다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한데,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설우진 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가 성정이 급하고 말보 다는 주먹이 앞서 낭천과 같은 큰 세력을 만들 기는 힘들 거란 의견을 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설우진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능력이 안 된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 손으로 낭천을 만들어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한데, 바로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낭왕 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십 년 동안 개고생을 했으니 이제는 좀 푹 쉬 어야지. 늦었지만 예쁜 마누라 얻어서 토끼 같 은 자식도 한번 안아 보고, 누가 좋을까, 내 옆 자리에 설 정도면 적어도 십봉황 정도는 돼야 할 텐데.’
설우진은 황금빛 미래를 꿈꾸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대낮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차례로 축하주를 내미는 동생들 덕에 설우진의 입은 쉴 새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순배가 돌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취기 탓인지 팔다리에 힘이 풀리고 절로 고개가 아래로 넘어갔다.
쿵!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누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얼굴을 보려 하는데 자꾸만 눈꺼풀이 감겼다.
“뭐지, 꿈인가?”
타는 목마름에 눈을 뜬 설우진은 눈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자신의 방은 아니었다.
일단 방 크기부터 엄청나게 차이가 났고, 결 정적으로 벽에 천랑도가 걸려 있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어.’
불안한 마음에 설우진이 다급히 침대에서 내 려왔다. 동경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탓인지 헛발을 내디디며 침대에서 떨어졌다.
쿵!
무릎에서 진한 아픔이 전해졌다.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본 설우진은 그제야 달라진 자신의 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에 띄게 얇아지고 짧아진 팔과 다리.
칼 한 자루도 쥐기 힘들어 보이는 조막만 한 손.
그리고 분을 바른 듯 희고 고운 피부까지.
어느 것 하나 자신이 기억하는 낭왕의 모습과 는 거리가 멀었다.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그때 술 에 취해 쓰러졌었는데…………. 왜 갑자기 어릴 때 로 돌아온 거냐고. 이건, 분명 꿈이야. 꿈이 아 니면 어떻게 이런 개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설우진은 사나운 눈빛으로 바닥에 몇 번이고 이마를 찧었다.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 도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고 싶다는 열의의 몸 부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마에 전해지는 충격이 커질수록 꿈에서 깨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더 욱 또렷해졌다.
“한번 꼬인 인생은 뭘 해도 꼬인다더니…………. 빌어먹을 천지신명이여, 이게 무슨 운명의 장 난질입니까!”
설우진이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했다.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열세 살이 되던 해 여름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가게 별관에서 홀로 자수를 놓고 있었다. 사내아이답지 않은 취미였지만 집이 포목점을 하고 있었기에 이를 이상하게 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악몽처럼 불행이 찾아왔다.
어디서 대판 싸웠는지 상의가 너덜너덜해진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 리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용이 수놓인 적 포를 골라왔다.
꽤나 값이 나가는 옷이었지만 남자는 거침없 이 셈을 치렀다. 그런데 사달은 그 이후에 벌어 졌다.
남자가 잔돈을 건네는 설우진의 손을 보더니 갑자기 손금을 봐 주겠다며 다짜고짜 오른손을 잡아챈 것이다. 완강하게 싫다고 거부의 의사 를 밝혔지만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귀수혈을 찾게 될 줄이야. 하늘이 이 팽천호를 버리지 않았음이야. 자, 나 를 따라가자. 널 천하제일의 도성으로 만들어 주마.
남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그길로 설우진을 납치했다.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몇 번이고 남자에게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낭인이 되었다.
낭인의 길은 소문으로 들었던 것 이상으로 거 칠고 험난했다.
유복한 포목점 아들로 평탄하게 살아온 그에 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도 낭인 생활 십 년째에 접어들자 사부보다 더한 낭인으로 변해 갔다.
돈이 되는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볐고 그 대가로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훈장처 럼 새겨졌다. 그리고 그 훈장이 늘어날수록 그 의 명성 또한 가파르게 올라갔다.
‘낭인으로 다시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살라고? 차라리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는 게 나아.’
그간에 고생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렸을 때로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그것도 하 나의 추억이라며 위안을 삼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게 안됐다.
“니미, 될 대로 되라지.”
설우진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우진아, 밥맛이 없니?”
“아, 아니에요. 그냥 목이 좀 메어서.”
설가장의 식구들이 모두 모인 식사 자리.
설우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 보는 어머니를 보며 옆에 놓인 물 잔을 거칠게 들이켰다.
무려 삼십 년 만에 보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사부에게 납치를 당하고 십 년 동안 설우진은 꼼짝없이 산속에 갇혀 있었다.
사부의 비전절기인 감각도를 익히기 위해서 였다.
매일같이 사부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지쳐서 잠이 들었다.
고통과 인내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 나로 끈질기게 십 년을 버텼다.
그런데 십 년 만에 돌아간 집은 전에 없던 어 두운 분위기가 풍겼다.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단 하나, 어머니가 보 이지 않았다.
미친 듯이 집 안을 뒤졌지만 들려오는 건 아 버지의 탄식과 동생의 울부짖음뿐이었다. 사정을 물으니 자신이 납치된 이후에 마음의 병을 얻으셨단다. 용하다는 의원을 부르고 몸 에 좋은 약까지 모두 써 봤지만 일 년을 버티지 못하셨다고 했다.
“다시는 못 뵐 줄 알았는데…………. 어머니,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설우진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애써 눈물을 참아 내려 해도 한번 터진 감정의 물결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조된 감정에 찬물을 끼얹는 존재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