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3화 : 불운 회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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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1권 – 3화 : 불운 회귀(3)


불운 회귀(3)

한편, 매월을 보내고 홀로 방 안에 남은 설우 진은 적색 장포를 넓게 펼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를 놓기 전, 그 대상을 떠올리는 작업이었 다.

‘꽃이나 사군자는 너무 흔해 빠졌어. 이왕 수를 놓으려면 설산 대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 어?”

설우진이 마음속으로 떠올린 대상은 드넓은 산천을 호령하는 대호였다.

그는 낭인으로 강호를 떠돌던 시절에 실제 대호를 목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호위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는데, 산적을 피하려다 되레 대호와 맞닥뜨렸다.

대호의 생김새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위 압적이었다. 덩치는 거의 황소의 세 배만 했고, 날카롭게 삐져나온 발톱은 잘 갈린 칼날을 연 상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이 매서웠다. 그냥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릴 정 도로.

“슬슬 시작해 볼까.”

설우진이 오른손에 목탄을 들었다.

목탄은 밑그림을 그리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였다.

슥슥슥슥.

목탄이 장포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 나갔다. 삼십 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음에도 그의 손 놀림은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익힌 감각도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 묘리가 비슷했다. 상대의 움직 임을 눈으로 읽고 다음 동작을 예측해 대응하 는 것이 기본 골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적들과 싸울 때 머릿속으로 심상을 떠올리고 칼을 쥔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 장포 위에 선 대호 한 마리가 사납게 정면을 노려봤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흐 뭇한 표정의 설우진이 있었다.

“잘 될까 걱정했었는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바로 수를 놔도 되겠어.”

설우진은 밑그림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투박하게 그려지기는 했어도 회귀 전에 봤던 대호의 모습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밑그림이 완성되자 설우진은 곧바로 바늘 코에 수실을 끼워 넣었다.

본격적인 자수의 시작이었다.


“우진아.”

늦은 아침.

어머니가 직접 방을 찾아왔다. 아침까지 거르고 늦잠을 자는 아들이 걱정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부름에도 방 안에선 아무런 인 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 녀석이 정말 어디가 많이 아픈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설우진은 침상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져 있었 다. 다행히 숨소리가 고르게 새어 나오는 게 건 강상에 특별한 문제는 없어보였다.

“이게 뭐지?”

잠자리를 살펴 주고 밖으로 나가려던 어머니 의 시선이 의자에 반쪽으로 접혀 있는 장포로 향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장포를 조심스럽게 들어 탁자에 활짝 펼쳤다.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대호의 기세에 압도당한 것이다.

‘설마, 이걸 우진이가…………’

그녀는 대호 자수와 아들의 모습을 번갈아 쳐 다봤다. 대호 자수의 완성도는 삼십 년 자수 경 력의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한 땀 한 땀 꼼꼼히 새겨 넣은 털은 금 방이라도 바람에 날릴 듯 하늘거리고 노란빛이 감도는 두 눈은 호랑이 특유의 살기마저 머금 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대호가 수놓인 장포를 들고 집 근처 포목점으로 향했다. 설가에서 운영하는 포목점에는 그녀의 작업실이 별도로 딸려 있었다.


“자네, 아버님 생신 선물은 무엇으로 할지 결 정했나?”

“으음, 아직 고민 중이네. 어지간한 귀보들은 모두 갖고 계시니 무엇을 드려야 기뻐하실지…”

“그럼, 내가 추천하는 가게에 한번 가 볼 텐가 ?”

“좋은 물건이 있는가?”

제갈윤이 반색하며 유성룡을 쳐다봤다. 유성 룡은 학식으로 이름 높은 유가장의 장자로 남 다른 식견을 자랑했다.

“저 길목을 돌아가면 설가 포목점이라는 가게 가 하나 나오네. 이 일대에선 제법 유명한 곳이지.”

“비단은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일단 눈으로 직접 보고 얘기하지. 아마 자네 도 가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걸세.”

유성룡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한 발짝 앞장섰다. 제갈윤은 마땅찮은 표정이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지라 조용히 그 뒤를 따라나섰다. 잠시 후, 설가 포목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목점답게 입구에는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비단 천들이 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인상 좋아 뵈는 점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혹시, 안주인 계시는가?”

유성룡이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뜻밖의 사람을 찾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가 찾는 안주인은 아직 가 게에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흠, 그럼 물건들만이라도 볼 수 있겠는가?”

“그건 가능합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점원이 두 사람을 별관 쪽으로 안내했다. 별관에는 다양한 복색의 의복들이 걸려 있었다. 사내들이 자주 걸치는 장포부터 여인네들의 치 마저고리까지.

“마음껏 둘러보시고 원하는 물건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점원이 자연스럽게 뒤로 빠졌다.

“자수 솜씨가 꽤 훌륭하군. 한 땀 한 땀 정성이 느껴져.”

제갈윤의 눈에서 전에 없던 열기가 전해졌다. 제갈가의 촉망받는 후인답게 한눈에 그 값어치 를 알아본 것이다.

“모두 이곳 안주인의 작품이라네. 아버님께서 도 분명 이곳의 물건을 받아 보시면 맘에 들어 하실 걸세.”

유성룡이 적극적으로 구입을 추천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제갈윤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왜, 맘에 드는 옷이 없는가?”

“솔직히 확 끌리는 물건을 못 찾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아버님은 호방한 것을 좋아하시지 않 나. 한데 여기 있는 옷들은 너무 화려하네.” 

제갈윤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유성룡은 이를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뜻을 존중했다.

“오늘은 그만 가 보겠네. 다음에 또 들르지.”

두 사람은 점원에게 인사를 건네며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찰나에 설가의 안주인인 여소 교가 별관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팔목에는 설 우진이 밤새 완성한 대호 자수 장포가 들려 있 었다.

“부인, 그 손에 들고 있는 장포 잠시만 보여 주실 수 있겠소?”

돌아 나가던 제갈윤이 급하게 여소교를 붙잡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장포를 건넸다.

잠시 후, 대호의 웅장한 자태가 다시 한 번 세 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어, 일개 자수일 뿐인데 실제 대호의 기세 가 고스란히 전해지는군. 아까 봤던 옷들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야.’

제갈윤은 한눈에 대호 자수의 진가를 알아봤다.

어릴 때부터 제갈세가의 차남으로 자라 세상 의 기진이보를 접해 왔으니, 그 눈썰미가 남다 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대호 자수 장포 내게 팔지 않겠소?”

제갈윤이 정중히 청했다.

하지만 여소교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이 장포는 팔지 않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내겠소.”

“돈 때문이 아닙니다. 이 대호 자수 장포는 이미주 인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럼 그 주인이라도 알려 줄 수 없겠소?”

제갈윤은 쉽사리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만큼 대호 자수가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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