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화 : 신위 발현 (2)
신위 발현 (2)
잠시 후, 수풀 너머에서 사위진이 걸어 나왔다. 그는 흘깃 호병 쪽을 쳐다본 뒤 등에 걸려 있던 검을 풀 어 왼손에 쥐었다.
‘역시 소문대로 빈틈이 전혀 없군. 힘든 싸움이 되겠어.’
사위진은 발검세를 취하며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지만 좀체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완고하게 구축되어 있던 비월의 자세에 작은 빈틈 이 생겨났다.
원인은 뒤쪽에 서 있던 강무호였다.
강무호는 비월의 말을 무시하고 호 병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평범한 노인이라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움직임 은 상당히 빨랐다.
‘기회다.’
사위진은 비월의 신경이 분산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검을 뻗었 다.
사납게 이는 파공성.
사위진의 검극이 한 줄기 빛처럼 비월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사위진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검 끝이 너무 가벼워. 피한 건가?’
사진은 재빨리 검을 회수했다. 예상대로 검극에는 피가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실패한 공격은 바로 상대에게 역공 의 빌미를 안겨 줬다.
정면에서 비월이 사납게 짓쳐 들었 다. 단숨에 사위진을 없애고 강무호 에게 달려갈 작정인 듯 처음부터 절 초를 아끼지 않고 마음껏 뿌려 댔 다.
이에 사위진은 다급히 보법을 역으 로 밟았다. 일단 거리를 벌리며 시 간을 벌겠다는 심산이었다. 애당초 그가 맡은 역할은 비월을 제압하는게 아니라 그 발을 묶는 것이었다. 이기는 건 힘들어도 시간을 질질 끄 는 건 그의 실력으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비월이 사위진에게 발이 묶여 있을 때 강무호는 호병들 사이로 파고들 어 양손을 빠르게 놀렸다. 그의 손 끝은 태극을 그리며 위협적으로 떨 어지는 화살 비를 모두 튕겨 냈다.
“다들 괜찮으냐?”
강무호가 호병들의 안위를 살폈다. 다행히 죽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악화 일로였다. 스무 명의 호병들 중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 강무호가 예상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부상자들까지 보호하며 싸우는 건 무리였다.
바로 그때.
수풀 저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룡가의 가주 관해철이 었다.
“영감, 이쯤에서 선택을 하시지. 여 기서 화살에 맞아 뒈지든지 아니면 짐수레를 포기하든지.”
“관가야,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강무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크큭, 산적이 제집 앞마당에서 산 적질을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거야!”
“네, 네놈이..”
“빨리 결정하라고, 나란 놈은 참을 성이 없거든. 당신 돈 많잖아. 그냥 오늘은 가난한 녹림도에게 적선한 셈 쳐. 괜히 아까운 생명들 버릴 필 요 없잖아.”
관해철이 최후통첩을 해 왔다.
강무호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짙어졌다.
“다, 단주님,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놈의 말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그동안 저희를 거둬 준 은혜만 해도 하해와 같은데 이렇게 짐이 될 순 없습니다. 목숨이 끊어 지는 한이 있더라도 짐수레를 지킬 테니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등 뒤에서 신음하고 있던 호병들이 선임 호병들의 부축을 받아 강무호 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끝까지 맞 서 싸울 의지를 보인 것이다.
수풀 너머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 던 관해철이 흉터로 얼룩진 왼쪽 볼 을 씰룩거리며 등에 차고 있던 활을 왼손에 쥐었다. 그가 사용하는 활은 보통의 활보다 그 크기가 두 배정 도 더 컸다. 타고난 신력을 십분 활 용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대궁이 었다.
“하여간 애새끼들이 말로 하면 들 어 먹질 않는다니까. 어디 그 골통 이 부서지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보자.”
관해철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오른쪽 팔근육이 사납게 끓어오르 며 화살에 힘을 실었다.
팡.
숫제 화살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화살이 정면으로 날아갔다. 그가 노린 건 강무호의 옆에서 결 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부상당한 호병이었다.
“피해!”
호병들에 앞서 화살의 존재를 알아 챈 강무호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손끝으로 예의 그 태극을 그 렸다. 한데 태극이 완성되기도 전에 화살이 일 장 안으로 들어왔다. 제때 막아 내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 다.
‘아직 내 죄를 다 씻지도 못했거
강무호는 눈앞에서 들이치는 화살 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가 죽음을 떠올리고 있을 때.
익숙한 물건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그건 점심때 밥을 덜어 먹었던 그릇 이었다.
와장창.
그릇이 산산이 부서졌다.
화살촉을 튕겨 내는 과정에서 그 힘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강무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설마 그 녀석이………….’
강무호가 놀란 얼굴로 그릇이 날아 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선 설우진이 설거지 바구니를 들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들 뭘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거 예요. 당장 짐수레 아래로 몸을 숨 겨요. 놈들이 노리는 건 그 위에 실 려 있는 물건이니 그쪽으로는 함부로 화살을 날리지 못해요.”
설우진이 호병들에게 소리쳤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호병들은 가까운 짐수레 밑으로 황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 움직임은 수풀 속에 매복하고 있던 광룡가의 무사들에게 당혹스러 움을 안겨 줬다. 짐수레에 실려 있 는 건 고가의 옷가지들이었다. 작은 흠집도 용납 못하는 게 명품 세계인 데 화살촉이 옷가지를 꿰뚫는다면 그 값어치는 형편없이 떨어질 게 자 명했다.
“가주님, 어찌합니까?”
광룡가의 무사들이 한목소리로 물었다.
“니미럴, 네놈들은 머리통을 장식 으로 달고 다니냐? 화살을 못 쏘게 됐으면 당연히 칼을 들고 달려 나가 야지. 어차피 숫자는 우리가 앞서니 쫄지 말고 공격해!”
관해철이 신경질적으로 귀두도를 뽑아 들며 수하들에게 백병전을 지 시했다. 백 명에 달하는 광룡가의 무사들이 기세 좋게 앞으로 달려 나 갔다. 수적으로는 곱절이나 많은 상 황이라 다들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 다.
“어떻게 된 거냐?”
“방금 전에 보신 그대로예요. 설거 지를 끝마치고 돌아오는데 단주님이 위험해 보이기에 냅다 그릇을 던진 거예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관가 가 쏘는 화살은 바위도 꿰뚫을 만큼 그 위력이 대단하다. 한데 저길 봐라. 네가 던진 그릇에 화살대가 끊 어졌다.”
강무호는 방금 전에 보여 준 설우 진의 한 수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단주님, 지금 그런 걸 궁금해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저쪽을 보 세요. 험악하게 생긴 놈들이 잔뜩 몰려오고 있잖아요.”
설우진이 답을 회피하며 수풀 너머 에서 달려 나오고 있는 광룡가의 무 사들을 가리켰다.
“그 얘긴 나중에 다시 하자.”
강무호가 적진으로 신경을 돌렸다. 설우진의 말마따나 지금 상황은 그 런 사소한 걸 물을 때가 아니었다.
현재 싸울 수 있는 호병의 숫자는 열 명에 불과했다. 그 말은 곧 호병 한 명당 녹림도 다섯을 상대해야 한 다는 건데 호병과 녹림도의 무력은 거의 비등하거나 오히려 녹림도 쪽 이 더 높았다.
“호병들은 앞으로 나서지 말고, 방 진으로 놈들의 공격을 막아라. 비월 이 오면 놈들을 처리하는 건 한순간 이다.”
강무호는 비월의 합류를 기다리며 수비에 전념하는 전술을 펼쳤다. 평 소에도 적지 않게 연습을 하는지 호 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구축했 다.
‘저 영감 대체 정체가 뭐지? 지독한 수전노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무당 태극권에 호병들을 부리는 솜씨 까지 보통이 아니잖아.’
설우진은 흥미로운 눈초리로 강무 호를 바라봤다.
그사이 광룡가의 무사들이 들이닥 쳤다. 그 가주에 그 수하라고 다들 무식하게 크고 무거운 중병기 위주 로 공격을 해 왔다.
방진의 선두에 서 있던 강무호는 태극의 부드러움을 활용해 정면에서 들이치는 칼과 몽둥이 들을 옆으로 흘려 보내며 자세가 무너진 무사들 만 골라 무릎을 툭툭 쳤다.
“악!”
기세 좋게 선공을 펼쳤던 무사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부여잡고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세가 한풀 꺾이자 광룡가의 무사 들은 공격을 주저하기 시작했다. 강 무호의 실력이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저게 바로 녹림의 한계지. 근성도 투지도 없다는 거.’
설우진은 싸움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 질 치는 광룡가의 무사들을 보면서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녹림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낭인들 과 비교 대상이 됐다.
일단 첫 번째로 두 부류 모두 무공의 뿌리가 빈약했다. 제대로 된 문파나 사부를 사사한 것이 아니라 세간에 떠도는 삼류 무공을 독학하 거나 돈을 주고 무공을 사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돈을 지독하게 밝혔다. 그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돈이 었다. 돈만 있으면 정파든 사파든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는 게 그들이 었다.
마지막으로, 근성과 투지가 부족했 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쪽수의 힘을 믿고 싸웠다. 그래서 쪽수가 유리할 때는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만 숫자가 줄어들면 뒤도 돌아보지 않 고 도망친다.
간혹 회귀 전의 설우진처럼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별종도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는 그야말로 극소수 였다.
‘그래도 관해철이 있으니 싸움이 이대로 끝나지는 않겠지. 나 못지않 게 녹림에서는 미친놈으로 통했으니까’
설우진이 수풀 너머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짐작대로 관해철이 성난 황소처럼 달려 나왔다.
그리고 요란한 기합을 내지르며 귀 두도를 휘둘렀다.
칼끝에 섬뜩한 피 보라가 일었다. 잠시 후 바닥에 머리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대열의 뒤쪽에 밀려나 있던 광룡가의 무사였다.
“지금부터 뒤로 물러서는 놈은 내 칼에 뒈진다. 목 위의 물건들 지키 고 싶으면 당장 움직여!”
관해철이 사납게 윽박질렀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광룡가의 무사들은 전과 달리 필사적으로 공 격에 임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그 들의 공격에 강무호의 움직임은 점 점 무뎌졌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듯, 그가 그려 내는 태극도 점점 그 한 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희생자가 나왔다. 방진의 왼 쪽 축을 맡고 있던 호병이 위기에 몰린 강무호를 구하려다 옆구리에 칼을 맞은 것이다. 길게 찢겨 나간 옷깃 사이로 내장이 내비쳤다. 당장 에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호병의 등 뒤로 검 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설우진이었다.
그는 호병을 뒤로 밀어내며 방진의 빈자리를 채웠다. 방금 전 기습에 실패했던 광룡가의 무사가 눈을 부 라리며 설우진 쪽으로 칼을 휘둘러 왔다.
피를 뿌리며 달려드는 칼날의 움직임은 제법 사나웠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설우진은 정면에서 날아드는 칼날을 그대로 양 손바닥을 이용해 붙잡 았다.
야수안이 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틈이 보인 것이다.
칼날을 붙잡은 설우진은 그대로 벽 뢰진천을 발동시켰다. 손끝에서 뻗 어 나온 뇌기가 칼날 전체를 휘감으 며 그대로 광룡가 무사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