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31화 : 만시지탄(4)
만시지탄(4)
곡전해는 혈옥불을 빼앗기 위해 필 사의 공격을 감행했다. 보물에 눈이 뒤집히니 뵈는 게 없었다.
이에 청운학도 혈옥불을 지키기 위 해 전력을 쏟아 냈다.
그렇게 싸움은 두 시진을 넘어갔 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곡전해가 혈옥불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하나 상처뿐인 승리였다. 데려온 무사들 은 대부분 죽고 그 자신도 팔 하나 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혈옥불을 손 에 쥔 순간.
뒤편에서 다수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연보와 패력보가 양패구상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섬서무림의 또 다른 세력들이었다.
혼자서는 혈옥불을 지키기 힘들다 판단한 곡전해는 자신을 따라온 큰 아들 곡사풍에게 은밀히 혈옥불을 넘겼다. 그리고 스스로 미끼가 되어 적들을 유인했다.
한데 안타깝게도 그가 혈옥불을 건 네준 이는 아들인 곡사풍이 아니라 곡사풍으로 위장해 있던 설우진이었다.
설우진은 곡전해가 아들과 동행한 사실을 알아내고 역용술로 얼굴을 바꿨다. 물론 곡사풍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묻었다. 그리고 곡사 풍이 된 뒤에는 곡전해의 곁에 머물 며 은밀히 그가 청운학과의 다툼에 서 이길 수 있도록 손을 썼다.
혈옥불을 건네받은 뒤 설우진은 곡 사풍인 채로 도망쳤다. 곡전해를 따 라가고 남은 무사들이 그의 뒤를 쫓 았지만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불상처럼 보이는데.”
잘 정돈된 방 안.
설우진은 침상에 앉아 왼손에 든 불상을 찬찬히 살폈다. 어렵게 손에 넣은 혈옥불이었다. 혈옥불은 인자 한 부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 상 전체에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걸 빼면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상과 거의 비슷했다.
‘이게 내력을 주입하면 전혀 다른 불상이 된다는 거지.’
설우진이 조심스럽게 불상 안으로 뇌기를 흘려 보냈다.
뇌기를 머금은 혈옥불은 붉은빛이 전에 없이 강해졌다. 방금 전의 붉 은빛이 물을 섞어 놓은 듯 투명했다 면 지금은 핏물에 담갔다 뺀 듯 색 이 진하고 탁했다.
그렇게 색이 점점 짙어질 무렵.
부처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 던 부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양쪽으로 사납게 치켜 올라간 두 눈 에 입술 새로 피를 머금은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리고 얼굴이 바뀌기 무 섭게 혈옥불 안에서 미증유의 거력 이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격랑 치 는 파도처럼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었다.
“크윽.”
설우진의 입술 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벽뢰진천의 일단계인 축뢰를 활용 하면 어렵지 않게 그 기운을 녹여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저항이 거셌다.
‘이거 보물이 아니라 마물이잖아. 잘못하면 녀석의 기운에 내가 잡아 먹히겠는걸.’
설우진은 이를 악물고 최근에 겨우 발을 딛게 된 폭뢰를 꺼내 들었다. 폭뢰는 뇌기를 한데 응축시켜 순간 적인 폭발력을 내는 것으로 외부에 사용하는 경우 벽력탄과 유사한 위 력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부에 사용하는 경우에는 몸에 해로운 기 운을 분쇄할 수 있었다. 쉬운 예로 강한 독기가 침투하는 경우 폭뢰를 사용하면 단숨에 독을 태워 버릴 수 있었다.
혈옥불의 마기가 흘러드는 주요 길목에 뇌기가 빠르게 뭉쳐졌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라 그의 이마는 금세 굵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윽고 폭뢰의 발동 조건이 갖춰졌 다.
설우진은 동시다발적으로 뇌기를 터뜨렸다. 사납게 몰아치는 뇌기의 파도 그 앞에선 혈옥불의 마기도 좀 체 힘을 쓰지 못했다.
순식간에 마기가 타들어 갔다. 그 리고 마기가 자리하고 있던 곳에는 마기를 잡아먹은 뇌기가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냈다.
“이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건가.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혈옥불의 마기 덕분에 뇌기의 양이 배 이상으로 늘어났잖아.”
설우진은 몸 안에 팽배해 있는 뇌 기를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 가에 머금었다.
사실 그동안 벽뢰진천은 정체기에 놓여 있었다.
뇌정을 모두 녹여낸 뒤로 뇌기가 쌓이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 것 이다.
벽력신마가 남긴 글에는 몸으로 벼 락을 맞는 것이 뇌기를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적혀 있었지만 이를 시도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컸다.
한데 오늘 혈옥불 덕분에 뇌기를 늘리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됐다. 이 방법만 잘 활용한다면 벼락을 맞 지 않고도 막대한 양의 뇌기를 몸에 쌓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힘을 쌓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맘 같 아선 수호 가문이 복수에 눈이 멀어 마천과 손을 잡고 애꿎은 양민들을 희생시켰다고 떠들어 대고 싶지만 솔직히 그건 미친 짓이야. 그들은 나 따위는 가볍게 짓밟아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녔어. 그들과 맞설 수 있는 힘을 갖추기 전까지는 무슨 일 이 있어도 참아야 해.”
설우진은 뇌리에 마천과 수호 가문을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분기가 치밀어 올 랐지만 지금은 냉정히 판단해야 할
때였다.
“지금 뭐라 했느냐?”
검을 매만지던 손길이 멎었다.
“혈옥불을 가져갔다 알려진 곡사풍 이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시체에 남 겨진 사흔을 분석해 본 결과 나흘 전에 죽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나흘 전이라면 시간이 안 맞지 않느냐! 어떻게 시체가 혈옥불을 건네 받아?”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날 선 눈매와 두툼한 입술. 일전에 황하 강변에서 적안의 노인과 밀담 을 나누던 중년 사내 위가렴이었다.
“이제까지의 정황을 살펴봤을 때 혈옥불을 노린 자가 미리 곡사풍을 제거하고 그로 위장한 것 같습니 다.”
“하면 위장한 자의 신분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냐?”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만으로는 추 정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위장이 능 숙했던 걸 봤을 때 그쪽 분야의 전 문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체 청무 놈은 뭘 하고 있었던 게냐? 혈옥불의 움직임을 쫓으며 변 수를 차단하라 했거늘.”
위가렴이 청무의 행적을 추궁했다.
이에 보고를 하던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청무의 죽음을 알렸다.
“설마 화산이 움직인 것이냐?”
“화산에서 사람이 내려온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청 무는 저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진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적을 만났던 모양 이군.”
“네, 근처에 두 사람이 싸운 흔적 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무공의 흔적이 남았다면 추정도 가능할 텐데.”
위가렴이 고개를 들었다.
“싸움이 벌어진 장소를 중심으로 곳곳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 열양공을 쓰는 놈인가?”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지만 그 흔적이 일반적인 열양공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보통의 열양공은 균일 하게 가해진 열기에 일정한 형태로 녹아드는데 용아보의 청강석은 불규 칙하게 녹아 있었습니다.”
“열양공이 아니라면 뭐지?”
“음, 제 짐작으론 뇌기를 이용한 무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뇌기는 태 생적으로 그 성질이 불안정하기 때 문에 그 흔적이 좀 거친 편입니다.”
“현 강호에 뇌기를 사용하는 문파 가 있었나?”
“서너 곳 정도가 있기는 한데 다들 이름을 내세울 정도는 아닙니다.”
뇌기는 강한 위력만큼이나 다루기 가 어려워 제대로 이를 익혀 내는 무사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연히 이를 근간으로 하는 무림 세 력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의 정황을 놓고 볼 때 혈 옥불을 훔쳐 간 놈이 청무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너는 이 점에 착안해 놈의 소재를 찾아냄 과 동시에 혈옥불도 함께 회수토록 해라.”
“하면 개문지계는?”
“미끼가 사라진 마당에 뭘 더 미련 을 갖겠느냐!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들 모두 철수시키도록 해라. 괜히 무리하게 움직이다 놈들의 감시 망에 걸려들 수 있다.”
위가렴은 굳은 표정으로 철수를 명했다.
혈옥불을 손에 넣은 설우진은 자신 의 흔적을 지우며 은밀히 황룡학관 으로 돌아왔다.
본래의 일정보다 많이 지체된 탓에 적사호와 친구들에게 적잖게 잔소리 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적사호가 감싸 준 덕분에 수업에 빠 진 것에 대한 벌은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설우진은 학관과 집을 오가 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학관에선 뒤처진 진도를 따라가느라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매진했고, 집에 와서는 밀실에 들어가 혈옥불 을 끌어안고 뇌기를 늘렸다.
그런 와중에 뜻밖의 손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고간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설마 가족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 겠지?”
“아, 가족분들은 모두 잘 계십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라 일품점 서안 지점 때문입니다.”
“벌써 서안에까지 진출했어? 소문대로 장사가 잘되나 보지?”
“네. 속된 말로 대박이 터졌습니다. 일품이란 이름만 들어가도 날개 돋 친 듯 팔려 가니, 요즘은 정말 하루 하루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공방이 그 지경이면 단예랑 어머 니 고생이 말도 못 하겠는데?”
설우진은 장사가 잘된다는 말에 그 녀들 걱정부터 했다.
“두 분의 역할이 큰 건 변함없지만 전처럼 밤을 새워서 일을 하는 날은 드뭅니다. 지점을 늘리면서 공방의 규모도 키웠기 때문에 전과 달리 분 업화가 원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자님께서 알려 주셨던 이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역시 알려 주고 오길 잘했군.’
설우진은 서안으로 떠나는 날, 고 간을 불러 인명부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단예와 함께 그가 기억하 고 있던 자수 명인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풍야패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개똥도 쓸데가 있다더니.”
“후훗, 뭐든 사용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고간은 설우진에게 전권을 위임받 은 후, 풍야패를 음지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풍야패를 중심으로 상인번영 회를 조직했다.
상인번영회가 하는 일은 단순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무한 내의 상 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건 일품점이 었다. 덕분에 무한에서만큼은 일품 점을 대상으로 하는 불순한 작당질 이 사전에 차단됐다.
“안부를 묻는 건 이쯤에서 끝내고. 서안 지점에 생긴 문제가 뭐야? 총 관인 네가 직접 움직였을 정도면 꽤 심각한 사안 같은데.”
설우진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에 고간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대화를 이어 갔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서안 지점에서 옷을 구매했던 손님들이 잇달아 환불을 요구해 왔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게, 하나같이 제품 불량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주문 물량이 많아져서 불량이 대 거 그쪽으로 쏠린 거 아니야?”
“검수 단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흐음. 만들 땐 문제가 없었는데, 팔 때 문제가 생겼다? 그럼 답은 하나네. 누군가 의도적으로 중간에 서 장난질을 친 거지. 일품점의 명 성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대체 누가?”
“우릴 노릴 놈들이야 널리고 널렸 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생판 이름도 모르던 작은 포목점이 전국 규모로 성장해 가는데 어느 누가 달가워하겠어.”
“그럼 우린 어찌해야 합니까? 저들 이 조직적으로 환불 사태를 일으키 는 거라면 막을 도리가 없는데.”
고간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답을 청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여러 가지 해 결 방안을 떠올려 봤지만 딱 이거다 싶은 수가 없었다.
“상처가 곪았으면 그 안부터 천천 히 도려내야지. 일단 서안 지점으로 가 보자고. 대체 어떤 놈들이 그런 수작질을 부린 건지 알아봐야지.”
설우진은 그길로 고간과 함께 일품점 서안 지점을 찾았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