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15화 : 낭왕비무 (1)
낭왕 비무 (1)
“사흘 전 밤, 풍연을 나선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면, 그때 다른 사형제들도 같이 있었느냐?”
“네.”
“상관이란 이름을 아느냐?”
“모릅니다.”
“네 대사형은 누가 죽였느냐?”
“상관추입니다.”
치군성의 얼굴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내심 염려했던 부분들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어떻게 한다? 이대로 심문이 끝나 버리면 내 입지만 좁아지게 될 터인 데.’
치군성은 고심했다. 이제까지 했던 질문 중에서 그가 원했던 답은 하나 도 없었다. 이를 방증하듯 그를 바 라보는 간부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 았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화제를 돌릴 필요성이 있었다. 해서, 치군성은 죽은 상관추를 이용하기로 했다.
“상관의 죽음을 목도했느냐?”
“네.”
“정말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냐?”
“아닙니다.”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강명국 의 입으로 모였다. 상관추의 시신에 는 분명 자해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 아 있었다. 한데 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니.
“그럼 상관추를 죽인 이가 따로 있 느냐?”
“네.”
“그것이 누구냐?”
“이름은 모릅니다. 단지 침을 사용 해상관추를 자진하게 했다는 것밖에는.”
회의장에 큰 소요가 일었다.
현 강호에서 침을 병기로 사용하는 이는 드물었다. 침 자체가 병기보다는 암기로서의 효용을 많이 갖기 때 문이다.
치군성의 의도대로 사람들의 관심 사는 의문의 인물에게 집중됐다. 치군성은 여기에 확실한 쐐기를 박 았다.
그가 이 모든 일의 배후일 것이라 고 지목을 한 것이다.
급하게 조사단이 꾸려졌다.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정사 양측에서 세 명의 간부가 선발됐다. 그리고 치군 성이 자진해 그들을 이끌기로 했다.
“후우, 이것도 여러 개를 한꺼번에 하려니까 꽤나 지치네.”
자신을 찾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설우진은 방 안 에 틀어박혀 뇌력침 제조에 열을 올 리고 있었다.
뇌력침은 반복적인 작업을 필요로 했다.
뇌기를 한 번 덧씌우는 정도로는 만족스러운 강도를 얻기 힘들어서이 다. 그래서 설우진은 뇌력침 하나당 스무 번의 덧씌우기를 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 이기에 육체적인 긴장과 더불어 정 신적인 피로감이 극심하게 몰려왔 다.
하지만 설우진은 완성된 뇌력침을 내려다보며 힘을 냈다.
“우진아!”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조인창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설우진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야?”
“무슨 일이냐니, 너 벌써 까먹은 거야? 오늘 네 시합 날이잖아.”
“그랬었나?”
설우진은 마치 남의 일인 양 시큰 둥하게 대꾸했다.
사실 그에게 쌍룡무회 신인전은 단 순한 여흥거리에 불과했다. 명인전 에 나서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신인 전에 나서는 후기지수들은 그의 상대가 되질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움직이면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꼭 가야 하냐?”
“안 가면 후회할걸. 넌 학관에서 뽑은 대표야. 실력에서 밀려서 패배 하는 거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시합 시간에 늦어서 실격패를 당한다? 과 연 학사님들이 가만히 계실까?”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실격패는 무인들에게 있어 가장 치 욕스러운 패배였다.
이를 황룡 학관에서 묵과할 리 없었다.
‘이게 다 적사호 그 인간 때문이 야. 그 인간이 날 추천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릴 일도 없었을 텐데.’
설우진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느 릿하게 엉덩이를 침상에서 뗐다.
설우진이 대회장에 모습을 비췄다. 앞선 경기가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아직 그의 차례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
설우진이 대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기실 안에는 그와 맞상대할 사내 가 앉아 있었다.
대호가 사람으로 환생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사내는 작은 산을 연상하게 하는 커다란 덩치에 팔과 다리가 유난히 두꺼웠다.
특히 힘의 상징인 허벅지의 경우 설우진의 허리와 그 크기가 비슷해 보일 정도로 폭발적인 근육 양을 자 랑했다.
한데 의외로 얼굴은 곱상했다. 얼굴과 몸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후후, 시합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얼굴을 비추지 않아 기권을 한 줄 알았더니 용케 제시간에 맞춰 왔 군. 후배는 이름이 뭐지?”
‘이 새끼가 날 언제 봤다고 후배 운운하는 거야? 무림 경력으로 따지 면 네놈보다 내가 수십 년은 더 선배라고.”
설우진은 사내의 말투가 거슬렸다.
하지만 대회장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터라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 물음에 답했다.
“설우진입니다.”
“설씨라….. 어디 출신이지?”
“호북 무한입니다.”
“무한이면 제갈세가?”
“짧은 인연이 닿아 있기는 하지만 그쪽의 무공을 사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가전무공?”
“저희 집은 상가지, 무가가 아닙니다.”
“이런! 내심 황룡 학관 출신이라고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거 아쉽게 됐군.”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설우진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내의 태도에 속이 울컥했다. 상가 출신이라고 무시를 당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더 기분이 나빴다.
한데 사내의 다음 말이 끓는 기름 에 불을 붙였다.
“후배를 위해 이번 시합에선 오른 손을 쓰지 않겠네. 쉽진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 이 선배를 꺾어 보게.”
“……”
“전혀 부담 가질 것 없네. 오른손 이 아니더라도 내 도는 충분히 강하니까.”
사내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에 구겨지는 건 설우진의 자존심 이었다.
“정말 끝까지 오른손을 쓰지 않으 실 겁니까?”
설우진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꾹꾹 찍어 누르며 힘겹게 입을 뗐다.
“물론이네. 설령 오른손을 쓰지 않 으면 지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약 속은 꼭 지킬 것이네.”
“그럼 좋습니다.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 보시죠.”
열의에 불타는 눈빛으로 설우진이 선전포고를 했다.
잠시 후, 앞선 경기가 종료되고 두 사람의 경기가 진행됐다.
설우진은 무대 왼편에, 사내는 무 대 오른편에 섰다.
“이번 시합은 황룡 학관에 재학 중 인 설우진 관도와 삼 년 전, 황룡 학관을 수석으로 졸업한 소패왕 사 준후가 맞붙습니다. 동문 선후배가 펼치는 시합인 만큼, 아낌없는 박수 를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객 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 왔다. 함성을 내지르는 사람들의 시 선은 하나같이 무대 오른편을 향하 고 있었다.
소패왕 사준후.
그는 미래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는 후기지수들 중 가장 튀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백팔비무행.
그는 학관 졸업 후 중원 전역을 떠돌며 소문난 강자들을 상대로 비 무를 청했다.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 지만 그는 끈질긴 승부 끝에 승리를 쟁취했다.
그 덕분에 소패왕이란 칭호와 함께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어째 첫 만남부터 유쾌하지 않더 라니. 박쥐, 넌 그때나 지금이나 한 결같구나.’
설우진은 사준후의 이름을 듣고 한 때 왕이라 불렸던 사내를 떠올렸다.
도왕 사준후.
그는 처세술의 달인으로 유명했다.
도왕이란 칭호를 얻은 것도 그 처 세술의 결과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 다.
물론 사준후 본인은 그 사실을 인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보인 일련의 행보는 이율배반적으로 그 처세술을 돋보이 게 했다.
그는 마천의 이차 발호 시기에 쌍룡맹의 깃발을 들고 선봉에 나섰 다. 당시만 해도 쌍룡맹이 어렵지 않게 마천을 막아 낼 것이란 여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첫 번째 전투에서 사준후는 대패를 했다. 오백이 넘는 무사 들을 이끌고 갔지만 살아 돌아온 건 그가 유일했다. 이후 그는 부상 핑 계를 대며 전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전쟁 막바지였다. 치열한 혈투 끝에 마천 이 어느 정도 승기를 가져간 상황이 었다.
‘설마, 패천성의 정통 후계자라는 놈이 마천에 붙어먹을 줄은 누가 알 았겠어.’
설우진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 는지 한심한 표정으로 사준후를 바라봤다.
패천성 후계자의 변절.
마지막 분전의 의지를 다지던 쌍룡맹의 무사들에겐 날벼락 같은 소식 이었다.
덕분에 쌍룡맹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했다.
“후배에게 한 수 배운다는 생각으 로 비무에 임하겠습니다.”
사준후가 관객들에게 일일이 포권 을 취하며 겸양을 떨었다.
‘아주 꼴값을 떨어라. 오늘 개망신 이 어떤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설우진이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투 지를 불태웠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동시에 발도세를 취했다.
검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칼을 쓸 때도 선공이 무척 중요했다.
“내가 휘두르는 칼은 무척이나 거 칠고 사납다네. 막기 힘들다 생각이 들면 나려타곤을 써서라도 꼭 피하 게.”
사준후가 웃는 낯으로 조언을 건네 며 왼쪽 발끝을 가볍게 튕겼다. 앞 으로 쇄도함과 동시에 칼을 뽑아 드 는 전형적인 발도술의 하나였다. 솨악.
거친 파공음과 함께 사준후의 왼손 이 벼락처럼 도갑에서 칼을 뽑아냈 다.
사나운 용의 울부짖음과 함께 사준 후의 칼이 설우진의 정면으로 쇄도했다. 눈을 어지럽히는 변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우직할 정도로 직선적인 움직임. 그 길이 빤히 보이기에 피하고자 맘만 먹는다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우진은 물러서지 않고 과 감하게 정면 대결을 택했다. 허리에 서 천뢰도가 날카로운 빛을 뿌리며 허공을 갈랐다.
캉!
두 자루의 칼이 무대 한가운데서 맞닥뜨렸다.
사나운 기파가 그 둘을 중심으로 사방에 퍼져 나갔다.
“보기보다 힘이 좋군. 내 혈룡마라도를 정면에서 받아 내다니.”
“평소에 팔 운동 좀 했습니다. 선 배님의 그것에 비하면 모양은 조금 볼품없지만 근력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호오, 그 자신감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까? 혈룡마라도는 횟수가 거듭될수 록 그 위력이 증폭되거든.”
사준후가 천뢰도를 살짝 앞으로 밀 어낸 뒤, 혈룡마라도의 후반삼절초 를 연달아 전개했다.
혈룡출해, 혈룡등천, 혈룡파붕. 설우진의 눈앞에서 도기를 머금은 혈룡이 사납게 공격을 해 왔다. 입 을 쩍 벌려 물기도 하고 꼬리로 매섭게 후려치기도 했다.
‘여전히 공격 하나만큼은 화려하 네. 나도 처음엔 저 기세에 많이 눌 렸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저 혈 룡이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 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