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24화 : 녹림 혈사 (3)
녹림 혈사 (3)
백대호가 다급히 제 수하를 추천했 다. 물론 그 속내에는 광룡가와 척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깔려 있었 다. 일반 녹림도들에게 녹림십팔가 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마치 구파의 속가문들이 구파의 본산을 우러러보 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게다가 광룡가는 녹림십팔가 내에 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다. 녹림 십 대 고수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광룡가주는 둘째로 치더라도 전원이 일류 급 무사로 이루어진 광룡대는 여느 세력의 무력대와 견주어도 뒤 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광룡가와 직접 적으로 부딪치는 것만은 피해야 돼. 저 애송이 놈만 믿고 있다간 괜히 우리만 피 볼 수 있어.’
백대호는 필사적으로 설우진을 설 득했다.
하지만 산적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설우진이 그 말에 쉽게 넘어갈 리 만무했다.
“길잡이는 이미 정해졌어. 입 아프 게 나불대지 말고 빨리 앞장서.”
“대, 대협!”
“이 새끼야, 닥치고 앞장서라고! 네놈 때문에 도착하는 게 늦어져서 예아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그 혓바닥이 온전하지 못할 거야.”
설우진이 백대호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며 일갈했다.
숨이 조여 오는 고통에 백대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대기와 관해철이 산채 입구까지 나와 두 사람을 극진히 반겼다. 벽 라점의 수석 장인인 오백춘과 성도 진이었다. 물론 두 사람만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는 서른 남짓 한 호위 무사들이 거친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거금을 들여 고용한 상급 낭인들이었다.
“그 아이는 어디 있소?”
오백춘은 단예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이에 고대기는 관해철에게 눈짓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도록 했다. 잠시 후 산적들의 손에 이끌려 단예가 밖 으로 걸어 나왔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그녀의 안색은 파 리했다.
“상태가 좋지 못하구려?”
오백춘이 질책하듯 고대기를 쳐다 봤다.
“눈앞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소. 멀 쩡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오?”
하고 있었다. 거금을 들여 고용한 상급 낭인들이었다.
“그 아이는 어디 있소?”
오백춘은 단예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이에 고대기는 관해철에게 눈짓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도록 했다. 잠시 후 산적들의 손에 이끌려 단예가 밖 으로 걸어 나왔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그녀의 안색은 파 리했다.
“상태가 좋지 못하구려?”
오백춘이 질책하듯 고대기를 쳐다 봤다.
“눈앞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소. 멀 쩡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오?”
던 성도진이 앞으로 나섰다. 이에 광룡가 쪽에선 관해철이 나섰다.
“약속했던 잔금이오.”
성도진이 두툼한 전낭을 건넸다. 관해철은 전낭을 받아 들고는 곧장 바닥으로 쏟아 냈다. 그 모습에 성 도진이 울컥해서 한마디하려 했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고 참아 냈다. 다 툼을 벌여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가주님, 잔금 확인됐습니다.”
관해철이 돈을 센 후, 고대기에게 보고를 했다. 이에 고대기는 단예를 부축하고 있던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내 그녀를 벽라점 쪽에 인도하도 록 했다.
“아이야, 우린 벽라점의 수석 장인 들이란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돼서 유감이다만 맹세컨대 일품점에서 일 을 할 때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 제 공될 것이다.”
오백춘은 단예를 살살 달랬다. 지금 상태로는 벽라점에 데려다 놓 는다고 해도 일을 할 수 없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지, 집에 돌려보내 주세요. 지, 집 에 가고 싶어요.”
단예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녀는 이미 한차례 가족을 잃었 다. 눈앞에서 가족이 죽어 가던 모 습은 그녀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흔을 남겼다.
한데 그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어렵게 얻은 새 가족을 또다시 잃게 생겼다.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 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미안하지만 네 청은 들어줄 수 없 다. 널 얻기 위해 우린 네가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을 투자했다. 그 돈을 몇 배로 회수하기 전까지 넌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난 무 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돌아가고 말 거예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났는지 단예 가 오백춘을 거칠게 밀어내고 숲으 로 내달렸다.
그 힘은 바로 일회심공에서 비롯된 내공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일격에 볼썽 사납게 바닥으로 넘어진 오백춘이 불같이 성을 내며 낭인들에게 소리 쳤다.
“저년을 당장 잡아 와!”
다섯 낭인이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대열에서 이탈했다.
단예는 전력을 다해 도망쳤지만 그 들을 떨쳐 내기엔 일회심공으로 낼 수 있는 내공의 양이 너무 적었다. 결국 얼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녀 가 잡혀 왔다. 오백춘은 그녀의 머 리칼을 잡아채 자신의 얼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머리칼이 뽑히는 고통에 그녀의 얼굴이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이년아, 얌전히 있어. 넌 우리 허 락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 아까처 럼 또 허튼짓하면 그때는 네년의 옷 을 갈기갈기 찢어 저놈들에게 던져 버릴 거야.”
오백춘이 서슬 퍼런 협박을 하면서 광룡가의 산적들을 손가락으로 가리 켰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의 검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잘렸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발 늦게 오백춘이 찢어지는 비명 을 질렀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자신의 손가락이 잘린 걸 뒤 늦게 머릿속으로 인지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유혈 사태에 낭인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들은 의뢰인들을 중심으로 이중 의 방벽을 쌓고 기습에 대비했다. 잠시 후, 수풀 너머에서 설우진이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일각여 남짓 동안 쉼 없이 뇌기를 운용한 것이다. 무한을 떠나 온 이후 이번처럼 많은 양의 뇌기를 한꺼번에 써 본 적은 처음이었다.
“크큭,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네놈 들이었네. 이래서 머리 검은 놈들은 봐주면 안 된다니까.”
설우진의 전신에 뇌기가 휘몰아쳤다.
그는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를 깨끗이 지워 버릴 심산이었다. 그동 안은 무공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 려해 손 속에 사정을 뒀었는데 오늘 만큼은 마음껏 쏟아 내고자 했다.
“히익, 저놈입니다. 지난번에 저흴 관청으로 넘겼던 애송이가.”
“으음, 확실히 네 말대로 보통 놈 이 아니구나. 어쩌면 이 싸움, 우리 광룡가의 사활을 걸어야 할지도 모 르겠다.”
고대기가 굳은 표정으로 설우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의 눈에 비친 설우진은 단순히 나이 어린 애송이가 아니었다.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가공할 뇌기를 보고 있자니 쉬이 맞상대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명색이 녹림십팔가의 가주 가 싸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상대 가 무서워 싸움을 피했다는 얘길 듣 느니 차라리 칼을 맞고 죽는 게 나 았다.
“애들 모두 불러 모아.”
고대기가 은밀히 명령을 전했다. 이에 관해철은 망루에 대고 수신호 를 보냈다.
잠시 후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청명 한 하늘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소리에 놀라 밖을 내다보던 광룡가 의 산적들은 부리나케 병장기를 챙 겨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광룡가가 설우진을 맞을 만반의 준 비를 하는 동안 벽라점의 두 수석 장인은 사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 었다. 설우진이 낭인들의 두꺼운 벽 을 뚫고 그들 앞에 당도한 것이다. 낭인들은 설우진의 상대가 되지 못 했다.
특별한 기술을 쓴 것 같지도 않은 데 손을 휘휘 저을 때마다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하나같이 입에 게거품을 물 었다.
“대협,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전 그저 이 친구가 하자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성도진이 모든 책임을 검지를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는 오백춘에게 돌 렸다.
“성가야,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 는 게냐? 이 일을 먼저 제안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다. 어찌 이제 와 서 내게 죄를 뒤집어씌운단 말이 냐!”
오백춘이 사납게 악을 내질렀다. 그의 입장에선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성도진의 꾐에 넘어 가 피를 본 건 자신이었다. 돈을 잃 은 건 둘째 치고 자수 장인에게 생 명과도 같은 오른손 검지까지 잃었 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을 이번 일의 주동자로 내몰다니.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
“너 죽고 나 죽자!”
오백춘이 성도진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공격을 해 올 것이라 미처 예 상치 못했던 성도진은 속절없이 뒤 를 잡혔다. 오백춘의 두꺼운 팔이 그의 목을 감쌌다.
그 한심한 모습에 설우진은 자신이 손댈 가치도 없다 느꼈는지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단예에게 다가갔다.
“저, 정말 우진 오라버니예요?”
단예가 눈물 젖은 눈으로 설우진을 빤히 쳐다봤다. 이에 설우진은 환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엄지로 그녀 의 눈물을 닦아 냈다.
“이 오라빌 찾아올 거였으면 미리 연락을 주지 그랬어. 그럼 미리 마 중을 나갔을 텐데.”
“학업으로 바쁜 오라버닐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으이그, 착한 것도 정말 병이다. 그래, 몸은 좀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어?”
“괜찮아요, 여기가 살짝 쓰라린 것만 빼면.”
단예가 머리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오백춘에게 머리칼을 붙잡혔던 바 로 그 자리였다.
이를 본 설우진은 언제 웃었냐는 듯 얼음장이 내리깔린 얼굴로 뒤돌 아섰다.
한데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설우진이 단예에게 관심을 쏟는 사 이 반대편 숲으로 줄행랑을 친 것이 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 이 태연한 얼굴로 그들이 사라진 방 향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두 놈 잡아서 이쪽으로 끌고 와.”
잠시 후 오백춘과 성도진이 질질 끌려왔다. 그들을 데려온 이는 역마 삼귀였다.
“이 자식들 어떻게 할까요?”
맹기담이 날이 잔뜩 선 소도를 손 끝에서 빙빙 돌려 가며 물었다. 이 에 설우진은 단예를 슬쩍 쳐다봤다. 단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 아까 일이 생각났는지 설우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저 사람들은 손에 바늘을 쥘 자격이 없어요.”
“죽이지 않아도 되겠어?”
“오라버니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됐다.
설우진은 곧바로 맹기담에게 눈짓 을 보내 처리하도록 했다. 이에 맹 기담은 두 사람을 잡아끌고 수풀 안 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찢어지는 비명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예아 곁을 지켜. 저 자 식들하고도 담판을 지어야 할 것 같 으니까.”
두 사람의 비명이 잦아들 무렵 설우진은 단예를 철운성에게 맡기고 광룡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광룡가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담벼락 너머에는 궁수들이 팽팽하 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고 입구 쪽 에는 광룡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일대 기백의 대치 구도.
숫자만 놓고 본다면 광룡가 쪽의 기세가 압도적이어야 맞는데 희한하 게도 기가 눌려 있는 쪽은 설우진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가주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 숫자 에는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관해철이 선공을 주장했다.
고대기는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손을 들어 일제 공격을 지시했다.
피슈슝.
담벼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살이 쏘였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목시가 아닌 철시였다.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설 우진의 정면으로 철시들이 빠르게 쇄도했다. 워낙에 숫자가 많아 피하 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에 설우진은 등에 차고 있던 천 뢰도를 뽑아 정면에 뇌망을 펼쳤다. 뇌망은 뇌기로 만든 그물이었다. 바늘이 아닌 칼로 자수를 놓으면 어떨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탄생된 비기였다.
허공에 복잡하게 수놓인 뇌기가 넓 은 그물을 형성했다.
기세 좋게 날아들던 철시들은 뇌망 에 틀어 막혔다. 내기가 실려 있지 않은 화살로는 촘촘하게 형성된 뇌 망을 뚫어 낼 수 없었다.
이에 고대기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 의 애병인 패천궁을 꺼내 들었다. 잠시 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새로운 화살을 정면으로 쏘아 보냈 다. 한데 이번엔 화살촉에 검붉은 빛깔의 강기가 선명하게 맺혀 있었 다.
고대기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해 준 묵강시였다.
그 명성대로 묵강시는 좀체 뚫리지 않았던 뇌망을 단번에 꿰뚫었다. 한데 그게 다였다.
뇌망을 뚫고 들어온 묵강시를 설우 진은 고개를 젖히는 간단한 동작으 로 피해 냈다.
연달아 다시 묵강시가 날아들었지 만 야수안을 발동시킨 설우진의 발 걸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단 안면이 있는 놈부터 조져 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