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5화 : 철사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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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3권 – 5화 : 철사자회 (2)


철사자회 (2)

설우진은 나불진의 얘길 듣고 아련 한 향수에 젖었다. 낭인으로 한창 명성을 날릴 무렵 그는 중원 쟁패라 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당시는 감각도가 야수감각도로 진 화하면서 자신감이 팽배하던 시기였 다. 하지만 그 꿈이 얼마나 부질없 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천과 쌍룡맹이 사라진 강호에는 새로운 질서가 확립됐다. 그 중심에는 수호 가문의 후신을 자처하는 삼 군천이 있었다. 삼군천은 강호를 삼 분해 각각 그 지역의 패주로 군림했 다. 그들이 지닌 힘이 워낙에 막강 했기에 신흥 세력은 좀처럼 기를 펴 지 못했다.

그 가운데는 설우진이 만들었던 낭 천의 전신인 낭아문도 포함돼 있었 다.

설우진은 자신을 따르는 낭인들을 모아 하남 정주에 낭아문을 열었다. 문도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다들 일당백의 전사들이라 어떤 세력과 맞붙어도 뒤지지 않는다 자신했다. 한데 어느 날 삼군천의 하나인 흑 익천이 낭아문을 찾아왔다. 그들은 낭아문이 정주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문을 해체할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설우진과 문도들은 크게 반 발했고, 결국 싸움이 일었다.

흑익천의 주력이 온 것이 아니었기 에 설우진은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 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문도들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다.

설우진과 그의 의형제들이 분전했 지만 개인적인 역량 차이를 극복하 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이라면 그 꿈,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설우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생의 그는 한계가 뚜렷했다.

낭인치고는 제법 뛰어난 무공과 수 많은 실전 경험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차근차근 강자의 길을 밟 아 온 정통의 무인들에 비하면 손색 이 있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천하를 오시할 만한 내공심법에 세를 일으킬 충분 한 자금력이 있고 무엇보다 앞으로 전개될 강호 정세를 미리 읽어 낼 수 있었다.

“설마 그걸로 정할 건 아니지?” 

조인창은 걱정이 되는지 불안한 표 정으로 설우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설우진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까짓것 한번 해 보지, 뭐. 중원쟁패!”

“우, 우진아, 신중하게 생각해야 돼.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어.”

“네 녀석이 뭘 걱정하는지는 아는 데 어차피 학관 내에 존재하는 작은 동심계일 뿐이야. 누가 그 목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어?”

맞는 말이었다.

황룡삼천을 제외한 나머지 동심계 들은 친목의 성향이 강했다. 그들처 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곳은 서너 곳에 불과했다.

결국 조인창의 반대는 조용히 묵살됐다.

철사자회를 만들기로 결심한 설우 진은 곧바로 조직도를 짰다. 회주 자리에는 당연히 그의 이름이 올라 갔고 부회주 자리에는 남궁벽이 나 머지 회원 자리에는 조인창과 척무 강, 나불진의 이름이 들어갔다.

“광대놀음에 왜 날 멋대로 끼워 넣어?”

남궁벽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이에 설우진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철사자회에 들지 않으면 더 이상 의 대련은 없어.”

“그, 그 얘긴 황룡승무연 때 다 끝났잖아! 분명 그때 마음껏 대련을 해 주겠다고 약조를…………….”

“그래. 약조를 했지. 한데 정확히 언제까지라고 정한 것도 아니었잖 아.”

“그,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남궁벽의 얼굴에 핏대가 올랐다. 하지만 설우진은 어디서 개가 짖느 냐는 표정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 다.

이런 싸움은 결국 아쉬운 쪽이 지는 법.

한참의 실랑이 끝에 남궁벽이 백기 를 들었다. 대신 이번과 같은 과오 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계약서를 요구했다.

“다음에 또 네놈이 무슨 헛소리를 해 댈지 모르니까 아예 계약서를 쓰 자.”

“친구 사이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겠냐?”

“그게 지금 네놈 입에서 나올 소리 냐! 어쩌다가 저런 놈하고 얽혀서 는.”

남궁벽은 친구 운운하는 설우진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벽이가 언제부터 저렇게 말이 많 아졌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조 인창은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특히 남궁벽의 변화가 이색적이었다.

처음 남궁벽과 인연을 맺었을 때만 해도 말 한마디 건네기가 힘들었다. 워낙에 말이 없다 보니 대화가 이어 지질 않았던 것이다.

한데 지금의 남궁벽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해 내고 있 었다.

‘역시 우진이의 영향이 크겠지. 녀 석만큼 격의 없이 다가와 준 친구가 없었을 테니.’


앞서 황하 변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졌던 두 사내, 해천인과 위가렴이 서안에서 가장 화려하다 알려진 백 홍루에서 다시 조우했다.

백홍루의 최상층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여유롭게 술잔을 나눌 새도없이 심각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아직도 혈옥불의 행방은 찾지 못한 겐가?”

“면목이 없습니다.”

“흠, 큰일이군. 문을 열지 못한 건 둘째치고 마천에 제대로 책잡히게 생겼어.”

해천인이 난처하다는 듯 술상을 반 복적으로 두들겼다.

풀리지 않는 난제가 생겼을 때 무 의식적으로 나오는 버릇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흑영 묘들이 놈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 하니 곧 좋은 소식을 보내올 것입니다.”

“부질없는 짓을 했군. 이제와 혈옥 불을 찾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 는가? 오히려 사라졌던 혈옥불이 다 시 나타난다면 쌍룡맹에서 되레 수 상쩍게 여길 걸세.”

“하면…….”

“최소한의 인원만 그 뒤를 쫓게 하 고 나머지는 다시 이쪽으로 불러들 이게. 첫 단추는 잘못 꿰었으나 다 음 구멍에라도 제대로 꿰어 넣어야 지. 이번엔 흑성이 자네를 도울 것 이네.”

새로운 이름이 언급됐다.

위가렴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니 서로 편한 사이는 아닌 듯 보였다.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허허, 그럴 리가 있겠나. 흑성을 이리로 부른 것은 그가 이번 일에 적임자이기 때문일세.”

“대체 무슨 일을 꾸미시기에 그 이 리 같은 놈이 필요한 겁니까?”

위가렴이 재차 물었다.

“난 이번 쌍룡무회를 진창으로 만 들고자 하네. 화합의 장이 개싸움으 로 돌변하는 게지. 이를 위해선 서 로를 의심하는 상황이 필요하네.” 

“흑성의 절무를 이용하실 계획이군 요?”

“정확히 짚었네. 흑성은 어떤 무공 이든 한 번 눈으로 읽어 내면 모두 똑같이 흉내 낼 수 있지. 그 절무를 활용해서 평소 사이가 좋지 못한 세력들을 이간질시킨다면 쌍룡무회는 자연스럽게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걸 세.”

해천인의 적안이 요요하게 빛났다.


“이게 뭐냐?”

적사호가 책상에 놓인 종이를 흘깃 쳐다보고는 정면에 마주 선 설우진 을 빤히 쳐다봤다.

설우진은 동심계 개설 신청서라는 사실을 밝히며 추천인에 수결을 해 달라 청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냐? 내 가 내준 장 자리도 부담스럽다고 한 사코 거절하던 녀석이.”

적사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이에 설우진은 가감 없이 사실대로 동심계를 개설코자 하는 목적을 밝 혔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동심계 의 회주에게는 가산점을 준다고 하더군요.”

“크큭, 겨우 그런 이유로 동심계를 만들겠다고?”

“그럼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설우진은 당당하게 반문했다. 그 의도가 조금 불순하긴 해도 학 칙에 위배되는 부분은 없었다.

‘자식, 보면 볼수록 걸물이란 말이 야. 천에도 이런 녀석이 한둘쯤은 있어야 하는데.’

적사호의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말 려 올라갔다.

잠시 후, 적사호가 시원하게 신청 서 말미에 수결을 했다. 이를 받아 든 설우진은 곧장 방을 나서려 했 다.

한데 바로 그때.

적사호의 방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황룡 학관의 부관주를 맡고 있는 당 규철이었다.

당규철은 전체적으로 왜소한 체구 에 녹색 빛이 감도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당가가 배출해 낸 오 독령 중 하나로 마음만 먹으면 반경 삼장 이내를 독기로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독성을 몸속에 품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내 방엔 무슨 일이지?”

적사호가 냉담한 태도로 당규철을 대했다.

으레 받아 왔던 푸대접인지 당규철 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엿 보이지 않았다.

“쌍룡무회에 참관하는 건으로 한 가지 의논을 할 것이 있어 찾아왔 네. 실은 오늘 쌍룡맹에서 사람이 다녀갔네. 축제의 흥을 돋우기 위해 미래의 동량들이 쌍룡무회에서 실력 을 좀 뽐냈으면 하더군.”

“그러니까, 우리 애들을 쌍룡무회 의 무대에 올리자?”

“단순한 여흥 수준이니 부담 갖지 말고 선발 명단을 짜 보게. 참가하 는 관도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테 니.”

‘좋은 경험은 무슨. 제 식구 얼굴 알리기에 우리들을 이용하는 거잖 아.’

옆에서 당규철의 얘길 듣고 있던 설우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쌍룡무회는 강호의 모든 이목이 집 중되는 큰 대회다.

당규철은 단순한 여흥거리라고 했 지만 쌍룡무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 두면 당사자인 관도뿐만 아니라 그 관도를 배출해 낸 가문까지도 크게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설우진이 코웃음을 친 것도 바로 이 대목 때 문이었다.

“몇 명이나 올릴 생각이지?”

설우진이 당규철의 뒤통수를 사납 게 노려보고 있을 때 적사호가 대화 를 이어 갔다.

“너무 많아도 관리가 힘들 테니 열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네.”

“명단은 언제까지 올리면 되지?”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되도 록 오늘 중으로 받아 볼 수 있었으 면 좋겠군.”

“그럼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할 것 없이 이 자리에서 바로 작성해 주지.”

적사호가 붓을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종이에 이름을 휘 갈기기 시작했다. 당규철은 작은 눈 을 슬쩍 치켜떠 그 이름들을 하나하 나 머릿속에 새겼다.

“음, 이 이름은 처음 보는군. 본관 에 이런 관도도 있었나?”

당규철이 명단의 말미에 적혀 있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이에 적사호는 눈짓으로 당규철의 뒤에 서 있는 설우진을 가리켰다. 당규철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설우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몇 년 차지?”

“일 년 찹니다.”

“올해 들어온 신입 관도 중에 적학사가 총애하는 아이가 하나 있다 고 하더니 그게 너인가 보구나?”

“총애까지는 모르겠는데… 적학 사님 밑에서 혹독하게 배우고 있습 니다.”

“소문에 듣기론 문과생이라고 하던 데 무공도 제법 하는 모양이지?”

“그저 호신의 용도로 익힌 것이라 남들 앞에 내보일 정도는 아닙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전 출전 명단 에서 빼 주십시오. 괜히 주제넘게 나섰다가 학관 망신만 시킬 겁니 다.”

설우진은 적사호의 장난질에 어울 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의도로 자신을 그 안에 넣었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지만 얻 는 것도 없이 몸을 고생시키고 싶지 는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시선을 마주친 적사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 렸다.

‘뭐지, 저 웃음의 의미는?’

그 의미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순히 자신의 청을 받아 줄 것이 라 예상했던 당규철이 적사호의 추 천을 무시할 수 없다며 거절을 해 버린 것이다.

“성적에는 너무 연연할 것 없다. 어차피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이 니.”

당규철이 설우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의 같잖은 격려에 설우 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크큭,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렇지 않아도 당세기 그놈, 제대로 밟아 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잘됐네. 천 하가 보는 앞에서 당문의 이름에 똥 칠을 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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