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24화 : 개전, 피로 물드는 중원 (3)
개전, 피로 물드는 중원 (3)
“네. 몸이 좀 망가지기는 했지만 목숨에는 이상이 없을 듯합니다. 실 력 좋은 의원에게 맡겼으니 몇 년 푹 정양하면 본래의 무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앞으로 어 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얘길 듣고 싶은 것이냐?”
“제가 알고 싶은 건 통천문의 의지 입니다. 전 조만간 마천주를 찾아가 결판을 낼 겁니다. 내가 죽든, 그 인간이 죽든.”
“네, 네놈이 미쳤구나.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마천주와 싸우겠다 니!”
적사호는 어이가 없었다.
설우진의 실력은 그도 충분히 인정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마천주다.
이름값 면에서나 실력 면에서나 아 직은 역부족이었다.
이에 설우진은 백랑대와 있었던 일 을 언급했다.
“정말 너 혼자서 백랑대를 지웠단 말이냐?”
“이게 그 증겁니다.”
설우진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풀어 적사호에게 건넸다. 그 도는 요굉이 분신처럼 차고 다니던 애도, 지옥사였다.
‘짧은 시간에 무섭도록 성장했구 나. 이 녀석이 우리가 아닌 역천회 나 마천의 손을 잡았더라면………… 이 강호는 지금쯤 놈들의 손에 들어갔 을 테지.’
“각오가 섰다면 본문은 적극적으로 널 돕겠다.”
“통천문의 무사들이라고 해 봐야 기백이 겨우 넘는데 큰 도움이 되겠 습니까? 그냥 바람잡이 역할이나 해주십시오.”
“바람잡이?”
적사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설우진을 쳐다봤다.
그 뜻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단지 누구한테 바람을 넣으라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제가 운 좋게 마천주를 죽인다고 가정하면 누가 가장 기뻐할까요?”
“그야………… 역천회 놈들일 테지.”
“맞습니다. 해서 놈들을 끌어들일 바람잡이가 필요한 겁니다.”
“놈들이 내 말을 들으려 하겠느냐? 분명 그 진위부터 의심하려 들 텐 데.”
적사호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통천문은 완전히 역천회와 등을 진 상태였다. 특히 지난번 위가렴의 일 로 그 사이는 극단을 달리고 있었 다.
대놓고 전쟁만 치르지 않고 있다 뿐이지 어느 한쪽이 불을 붙이는 순 간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
한데 그 말을 듣고도 설우진의 목 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 역천회에 가장 필요한 게 뭘 까요?
“음,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확실한 성과겠지. 본문이 빠진 이후로 계속 헛발질만 해대고 있으니.”
적사호는 냉정하게 역천회의 상황 을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역천회는 최근 들어 삐걱대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회의 수장 역할을 해 오던 위성웅은 위가렴의 일로 신뢰를 크게 잃었다. 특 히 주작문주와 사이가 급격하게 틀 어졌다. 위가렴의 실책으로 엄궁대 가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그로서도 위성웅을 좋은 감정으로 대하기 힘 들었을 것이다.
신뢰가 깨진 후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건 필연적인 결과다. 지금의 역천회가 딱 그 모양새다. 눈에 확 연히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 금씩 회에 대한 결속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그 확실한 성과를 거둘 기회가 눈 앞에 있다면 놈들은 분명 움직이겠 죠?”
“네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역천회는 그리 호락 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어설픈 미끼 로 놈들을 끌어들이려 했다가는 역 으로 당할 수 있다.”
“후훗,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설픈 미끼가 아니라 확실한 미끼 를 쓸 생각이니.”
“대체 그 미끼가 뭐냐?”
적사호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 였다. 이에 설우진은 의미심장한 미 소를 지으며 오른손 검지로 정면을 가리켰다.
“지, 지금 그게 무슨 뜻이냐?”
황당하다는 얼굴로 적사호가 설우진의 손가락을 빤히 쳐다봤다.
“어렵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뒤에서 수작부리길 좋아하는 위성웅이라면 분명 통천문 안에도 세작을 심 어 뒀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본 문의 문도가 어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솔 직히 통천문의 문도라고 해서 성공 하고픈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 그건……”
적사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설우진의 말을 듣고 보니 통천문이 란 이름이 문도들에게는 족쇄처럼 작용했을 거란 생각이 불현듯 든 것 이다.
그리고 근자에 그와 관련해서 몇 가지 보고가 있기도 했다, 문도들 중 일부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외부 인과 접촉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별 의심 없이 넘겼다. 문 도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 리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별로 내키진 않겠지만 그 문도들 을 활용해서 놈들에게 정보를 흘리 십시오. 그간에 제자들을 철석같이 믿는 모습을 보여 왔으니 아마 놈들 은 별 의심 없이 그 정보를 믿을 것입니다.”
“대체 무슨 정보를 흘리라는 것이냐?”
“마천주 암살 시도!”
적사호의 눈이 한껏 커졌다.
“너무 그렇게 기겁하실 것 없습니 다. 암살을 시도하는 건 학사님이 아니라 저니까.”
“아까 한 말이 모두 진심이었던 거 냐?”
“제가 언제 맘에도 없는 말을 지껄 인 적이 있습니까? 이번 기회에 마 천이고 역천회고 제 삶에 방해가 되 는 것들은 모두 치워 버릴 겁니다.”
설우진이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더 이상 주변의 소란에 휘말 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 때문 에 가족들과 친우들이 고통받는 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 놀라운 얘기라 적사호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정보를 흘리마. 단,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게 뭡니까?”
“학사가 돼서 관도를 사지에 홀로 밀어 넣을 순 없다. 하니 네 옆을 “지키겠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 목숨을 바쳐 마천주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 다.”
“훗, 말린다고 들을 분도 아니니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죠.”
설우진은 함께하겠다는 적사호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솔직히 마천주를 죽이겠다고 나서기는 했지만 내심 마음속에는 지우지 못한 불안 감이 남아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마천주 서진용은 홀 로 천중오가의 수장들과 자웅을 겨 룬 맹수다.
자신의 실력이 전생에 비해 몇 단 계 위로 올라섰다곤 하나 그와의 싸 움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황룡 학관에는 마천의 고수 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이다. 역천회 와 쌍룡맹이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적진 한복판에 고립돼 말 라 죽을 수 있었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적사호가 옆자리를 지켜 준다?
이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그날 밤, 적사호는 얼마 되지 않는 문 내의 간부들을 문주실로 불러들 였다.
앞서 전해들은 내용이 없기에 다들 긴장한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회의실 안에는 적사호가 한발 앞서 와 있었다.
그리고 길게 뻗어 있는 탁자에는 간단한 안주와 술이 놓여 있었다.
“문주님, 이게 다 뭡니까?”
신추명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적사호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에게도 이 자리에 대한 한마디 언질이 없었던 것이 섭섭하기도 하 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보다시 피 이 자리는 가볍게 회포를 푸는 술자리다. 중대사를 논할 자리는 아 니니 긴장하지 말고 다들 자리에 앉 아라.”
적사호가 간부들에게 자리를 권했 다.
간부들은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하나둘씩 자기 자리 로 가 앉았다.
“일단 한 잔씩 마시지.”
적사호가 잔을 들었다.
간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추명에 게 쏠렸다. 신추명은 따가운 시선에 재차 적사호를 흘겨보며 눈앞에 놓 인 술잔을 들었다.
“통천문의 변함없는 의기를 위해!”
적사호의 건배사와 함께 순배가 돌 았다.
어색하던 분위기는 일단 술이 한잔 들어가자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다.
“다들 힘든 싸움에 많이 지쳤을 걸 로 안다. 하나, 이제 그 끝이 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형?”
취기가 돌았는지 신명의 입에서 사석에서 사용하는 호칭이 튀어나왔 다.
“난 조만간 황룡 학관으로 가서 마 천주와 결판을 지을 생각이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은 자명하나 이대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낫다 고 판단했다.”
순간 좌중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사형! 그, 그건 너무 무모합니다. 사형이 황룡 학관의 지리에 밝다곤 하나 상대는 마천입니다. 아마 마천 주와 대면하기도 전에 마졸들에게 발이 묶이고 말 것입니다.”
“후훗, 네가 뭘 우려하는지 잘 안 다. 해서 이번 거사에는 쌍룡맹주가 함께할 것이다.”
적사호는 회심의 패로 황유하를 언 급했다.
그제야 다들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나, 신추명만은 달랐다. 그 는 함께하는 쌍룡맹의 인력과 그들 의 협의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신추명이 그리 나올 줄 예상 하고 있었던 적사호는 그 물음에 술 술 답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적사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판 단한 신추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친형처럼 여기며 자라 온 사형이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간다는데 그 마 음이 오죽하겠는가.
“추명아, 너무 걱정 마라. 마천주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본 문의 의기를 당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사, 사형……”
“믿어라. 이 사형이 언제 널 실망 시킨 적이 있었더냐?”
적사호가 신추명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둘 사이에 얽히는 뜨거운 시선.
‘그래. 사형이라면 반드시 해낼 거 야.’
“믿겠습니다, 사형!”
신추명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술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이어진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하나둘씩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소문난 주당인 적사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데 일찍이 뻗었던 간부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렸 다.
통천문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천 금당주 걸요삼이었다.
그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이내 발소리를 죽여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네 녀석이었군.”
걸요삼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 탁자에 고개를 쳐 박고 있던 적 사호가 바로 앉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두 눈에 취 기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너무도 멀 쩡했다.
“그래. 오늘 이곳에서 들은 내용을 역천회에 소상히 알려라. 네 덕분에 일이 성공을 거둔다면 내 특별히 네 놈을 큰 고통 없이 보내 줄 것이 다.”
적사호가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걸요삼이 빠져나간 방문을 바라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