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28화 : 결자해지 (4)
결자해지 (4)
그사이 역천회의 무사들이 달려 나 왔다.
-지금이다!
차건웅을 필두로 한 비검대원들이 일제히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앞쪽 으로 투척했다.
“화, 화탄이다.”
역천회의 무사들은 기겁하며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콰콰쾅!
요란한 굉음이 사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화탄 특유의 불꽃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저 짙은 연기만 뿜 어낼 뿐이었다.
-다들 빠져나가!
적들이 혼란해하는 그 잠깐의 틈에 차건웅은 미리 봐 둔 탈출로로 비검 대를 움직였다. 마치 잘 짜인 경극 같았다.
잠시 후 연기가 걷혔다.
공통의 적이었던 비검대가 사라지 며 마천과 역천회가 정면으로 대치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두 진영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침묵.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쳐라.”
먼저 공세를 취해 온 쪽은 마천이었다.
역천회는 이를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공세에 맞섰다.
역천회의 합류로 전장은 더욱 확대됐다.
설우진이 원하는 진흙탕 싸움이 만 들어진 것이다.
세 세력이 뒤엉켜 싸우는 동안 설 우진은 적사호와 함께 황룡 학관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마천주 서진용과 담판을 짓기 위함 이었다.
이미 그가 관주실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두 사람은 최대한 마천의 무사들과의 충돌을 피하 면서 안쪽으로 진입했다.
워낙에 압도적인 무위를 지니고 있 었기에 그 누구도 두 사람의 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드디어 두 사람이 관주실에 이르렀 다.
관주실 앞에는 사류하가 검을 뽑아 든 채 진한 살기를 뿜어 대고 있었 다.
“네놈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 어나왔구나. 감히 천주님께 칼을 들 이대려 하다니.”
“후훗,네놈한텐 천주일지 몰라도 우리한텐 집을 빼앗은 불한당에 불과해.”
“뭣이라!”
“열 내지 말고 그냥 덤벼.”
설우진이 오른손을 까닥이며 사류 하를 도발했다. 사람을 열 받게 하 는 재주는 확실히 타고난 인물이다.
“죽인다.”
사류하가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검신을 타고 붉은빛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마천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기인 적랑아였다.
적랑아는 목표로 한 대상을 갈기갈 기 찢어 죽이는 패도적인 마검이다. 설우진의 면전으로 사류하의 검이 쇄도해 들어왔다. 살짝 스치기만 해 도 치명적인 공격이 될 터였다. 한데 바로 그때 옆에 조용히 도사리고 있던 적사호가 왼손에 쥐고 있던 철봉을 휘돌려 검로를 틀어막았다.
카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철봉이 뒤 로 밀렸다.
적랑아의 위력이 확인되는 순간이 었다.
“이곳은 내게 맡기고 안으로 들어 가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흥, 저런 미친 늑대쯤 손쉽게 때 려잡을 수 있다. 하니 너나 몸조심 해라. 마천주는 네 녀석이 전력으로 달려들어도 쉽지 않은 승부가 될 거 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적사호가 사류하를 막고 있는 동안 설우진은 관주실의 문을 박차고 안 으로 들어갔다.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사류하가 그걸 보고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지만 다시 한 번 적사호의 발 빠른 움직임에 막혔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저쪽은 신경 끄고 내 손에서 살아남을 궁리부터 해라.”
적사호가 철봉에 내력을 듬뿍 실었 다. 힘을 아껴서는 승부를 볼 수 없 는 상대이니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 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관주실 안에 들어선 설우진은 어렵지 않게 서진용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서진용은 손에 술병을 쥔 채로 설 우진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 인간, 상태가 왜 저 모양이야?’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설우진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그가 알고 있던 서진용이라면 자신 을 발견하자마자 마기를 폭출시키며 달려들어야 마땅한데 지금의 서진용 은 아무런 기세를 느낄 수가 없었 다.
“쌍룡맹이냐?”
서진용의 입이 열렸다.
“정식으로 그쪽에 소속된 건 아니 지만 어찌 됐든 함께 움직였으니 그 렇다고 해 두지.”
“크큭, 어린놈이 입담이 제법이군. 이름이 뭐냐?”
“설우진. 얼마 전까지 그쪽에서 애 타게 찾았던 사람이지.”
“설, 우, 진.”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폭풍을 머 금은 듯처럼 뒤틀렸다. 그 변화의 진원지는 서진용이 앉아 있는 옥좌 였다.
“네놈이 제 발로 내 앞에 기어들어 오다니, 듣던 대로 배짱이 대단하구 나.”
“후훗,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여기 가 쫄려, 누가 뭐래도 당신은 마천 의 천주니까. 한데 그런 대단한 양 반과 척지고 어떻게 맘 편히 살 수 있겠어? 지난번에 우리 집까지 쑥대 밭으로 만들었잖아.”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서진용이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세 웠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거악을 연상케 했다.
“당신이 귀신이 아닌 이상 이 칼로 심장을 찢어발기면 죽지 않겠어?”
설우진이 천뢰도를 힘차게 뽑아 들 며 답했다.
“그래, 누구의 칼이 더 강한지 어디 한번 부딪쳐 보자.”
서진용이 옥좌를 박차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허리에 서 자신의 애도인 마라혼을 뽑았다. 마라혼의 도신은 그의 덩치에 어울 리지 않게 폭이 좁고 두께가 얇다. 하지만 그만큼 움직임이 날래고 칼 끝에 서린 예기가 범상치 않았다. 서걱.
마라혼의 칼끝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비튼 설우진의 옆구리가 길게 찢겨 나갔다.
‘이거 상상 이상인데. 야수안으로 완벽하게 칼끝의 방향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을 비트는 바로 그 틈 에 방향을 틀어 버리다니. 게다가 칼이 날카롭기만 한 게 아니라 거칠 기까지 해.’
설우진은 구멍 난 상의를 보며 인 상을 굳혔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제 손으 로 완성한 내기무의를 여러 겹 입었 다. 마천주와의 싸움에서 조금이라 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마천주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내기무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마기를 잔뜩 머금은 마라혼의 칼날 이 내기무의를 그대로 찢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한번 주도권을 내주게 되자 설우진 은 좀체 반전의 기회를 얻지 못했 다.
서진용은 그야말로 파상공세를 펼 쳤다. 설우진이 어리다고 방심하는 것 따위의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 았다. 때문에 설우진은 바쁘게 움직 여 서진용의 공격을 받아 내야 했 다.
마라혼의 움직임은 변화막측하면서 도 빠르고 날카로웠다. 야수안으로 그 궤적을 읽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 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 는데 내기무의는 넝마처럼 변했다. 내기무의 덕분에 아직까지 부상의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이대 로 싸움이 이어진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그냥 놈들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서역이나 해 남으로 내빼 버려도 됐잖아.’
벽으로 몰리는 동안 설우진은 잠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 미 판은 벌어졌다. 죽든 살든 여기 서 결판을 내야만 한다.
“처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간 것이 냐! 나를 상대하러 왔으면 그렇게 쥐새끼처럼 도망치지만 말고 정면으 로 맞서라.”
기대에 못 미치는 설우진의 무위에 서진용은 노골적인 실망감을 내비쳤 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이런 싸움 은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설우진이 갑자기 내기무의를 벗어 서 바닥에 내던졌다.
목숨을 내걸고 전장을 누볐던 낭인 시절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 다.
마음 하나 바꿨을 뿐인데 그 기세 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제야 조금 싸울 맛이 나겠군.”
서진용이 마라혼을 세게 움켜쥐며 재차 공세를 취해 왔다. 얼마나 많 은 양의 마기를 끌어올렸는지 마라 혼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래,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해보자 고.’
기세 좋게 달려드는 마라혼을 보며 설우진은 단전의 모든 내력을 천뢰도에 쏟아 부었다. 뒤는 없다는 각 오로.
천뢰도는 쉼 없이 뇌기를 품었다. 보통의 칼이었다면 그 힘을 버텨내 지 못하고 부서졌을 텐데 천뢰도는 주인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굳건히 버텼다.
잠시 후, 둘은 방 한가운데서 맞닥 뜨렸다.
짧은 순간에 수십 합의 공방이 이 어지고 두 사람의 몸에서 동시다발 적으로 핏물이 튀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 다.
잠깐이라도 숨을 고르는 순간 승부 가 판가름 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빌어먹을, 도무지 지친 기색이 아 니잖아. 난 슬슬 어깨가 뻐근해져 오는데.”
설우진이 정면을 노려보며 이를 악 물었다.
그는 힘을 아끼지 않고 공격을 전 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내력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건 서 진용도 마찬가지일 터.
판을 뒤엎을 반전의 묘가 필요했 다.
설우진은 힘겹게 서진용의 마라혼 을 받아 내며 전생의 기억을 쥐어짜 냈다.
그리고 서진용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올렸다.
직접 그 싸움에 참여한 것은 아니 었지만 그와 관련된 소문들이 무성 했기에 어렵지 않게 그 내용을 떠올 릴 수 있었다.
‘그래, 서진용의 왼쪽 옆구리에는 천주 위에 오르기 전에 입었던 상처 가 있다고 했어. 그곳을 노린다면 승부를 낼 수 있을지도.
설우진의 시선이 서진용의 옆구리 에 꽂혔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공방이 이 어졌다. 이번엔 설우진 혼자 일방적 인 손해를 봤다.
“벌써 지친 모양이구나. 그래, 이쯤에서 끝내 주도록 하마.”
서진용은 설우진이 지쳤다고 판단 했는지 잠시 공세를 늦췄다. 그 순 간 설우진의 두 눈이 사납게 번뜩였 다, 먹잇감을 발견한 매의 그것처럼.
‘이 한 방에 끝낸다.’
설우진은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냈다.
그리고 온 신경을 집중해 신뢰를 전개했다. 벽뢰진천의 마지막 경지.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 있는 상황 이었기에 신뢰는 평소보다 원활하게 뇌기를 끌어냈다.
뒤늦게 설우진의 꼼수를 눈치채고 서진용이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지만 이미 천뢰도의 칼끝이 그의 옆구리 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 순간 서진용은 옆구리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틀었다.
과거의 기억이 이끌어 내는 본능적 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독수가 됐다.
애당초 설우진이 노린 건 그의 옆 구리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극단적 인 움직임이었다.
옆구리를 보호하기 위해 서진용이 한 행동은 스스로 빈틈을 드러내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리고 설우진은 그 빈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서걱.
천뢰도의 칼끝이 서진용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세차게 갈랐다. 신뢰로 정련된 뇌기는 강철보다 더한 예기 를 품고 있었고 그 일격에 서진용의 오른팔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크윽.”
서진용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저 괴물이라면 한쪽 팔이 없이도 충분히 위험해. 승기를 잡았을 때 끝장을 봐야 해.’
설우진은 다시금 공격을 전개했다. 팔을 잃은 상태에서도 서진용은 설 우진의 공격을 적절히 막아 냈다. 하지만 문제는 출혈이다.
팔 전체가 잘려 나갔기 때문에 지 혈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덕분에 움 직임이 점점 굼떠졌다.
설우진도 지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짜 냈다.
푹.
천뢰도가 서진용의 왼쪽 가슴에 파 고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단박에 꿰뚫었을 텐 데 힘에 부치는지 절반 정도밖에 들 어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설우진은 만 족했다.
아무리 괴물 같은 자라도 심장이 꿰뚫린 이상 더는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한데 서진용은 불사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장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왼쪽 손을 뻗어 설우진의 목을 사납 게 잡아챘다. 거리가 좁혀진 상태였 기에 그 손길을 피하기란 불가능했 다.
“커억.”
서진용의 손이 숨통을 조여 왔다. 양손으로 붙잡고 떼어 내려 애썼지 만 좀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질 않 았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극도로 지쳐 있는 상태에서 호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의식이 점 점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