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86화 : 대천사장 미카엘의 경고

황제의 검 – 186화 : 대천사장 미카엘의 경고


대천사장 미카엘의 경고

메덴 중심으로 가던 수호자와 선발대의 눈에 제왕의 군대가 보였다. 그들 중에 마계의 아수라와 나찰들이 섞여 있는 것이 동맹군임이 틀림없었다.
수호자를 뒤따르고 있던 라미레스가 그들이 눈앞에 보이자 다짜고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선발대 전원이 제왕의 군대와 마계군의 잔당들을 향해 가차 없이 무지 막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수호자는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르시온이나 쿠사누스들도 놀라 한편으로는 선발대의공격을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퇴각 명령을 내리기 바빴다.
사태는 명령이 필요 없는 지경이었다. 명령이 있기도 전에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앞과 위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기에 뒤에서 소리 없이 접근하는 것도 몰랐고, 그래서 기습공격을 허용한 제왕의 군대는 혼비백산해 이리 저리 쓸려 다니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옛용의 큰 음성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손을 멈추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살생을 자제하라는 것과 주동은 모르데 나머지는 살려보내라는 당부였다.
쿠사누스와 쿠사누스의 대결. 하지만 수호자가 예견했듯이 같은 쿠사누스들이라도 차이가 많이 났다. 선발대가 일방적인 우세를 잡았다. 마르시온이 먼저 달아났다. 수하들은 어찌되든 자신만은 살아야겠다는 필생의 의지로 달아나니 잡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설마하니 그가 도주를 택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지 라미레스는 멀거니 달아나는 마르시온을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다른 쿠사누스들도 사력을 다해 메덴을 벗어났다. 그들 중 몇은 벌써 싸늘한 시체가 되었고, 또 몇은 형체조차 보전하지 못했다.
선발대도 설마하니 그 많은 수가 자신들의 공격에 제대로 맞상대도 못하고 도망을 칠 줄은 몰랐다. 옛용과 수호자, 판드아의 제왕이 주는 부담감과 천사들의 등장, 생각지 못했던 선발대의 기습 등이 교묘하게 맞물려 심리적 공황상태가 돼버린 결과였다.

케플러는 준비시켜놓은 전사들에게로 갔다. 플로렌서의 오랜 야심이 만들어낸 걸작품은 케플러에게 강탈당했었다. 그 힘이 카오스를 위해 봉사하게 되리라는 것을 플로렌서가 어찌 알았으랴.
케플러는 카오스의 명령에 따라 플로렌서를 찾아갔다. 완전자가 돼 이 세계를 떠난 초대 제왕들에게서 전해졌다는 제왕의 구슬은 케플러에게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카오스가 그것을 보고 탐내기도 했으나 그다지 큰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케플러가 품고 간 제왕의 구슬이 그에게 구원이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카르마는 메타트론에게 보내졌다. 그는 원래 메타트론의 권속이었으이 그에게 가는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허나 그의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카르마 자신도, 케플러도 아닌 카오스였다.
그는 헤르파와 헤렘, 라아그를 대동했다. 그들을 하룬에서 맞게 된 메타트론이 헤르파에게서 지금까지의 정황을 상세하게 들었다. 헤르파는 카르마가 자신들을 떠나 마령의 본주와 힘을 합했다고 사실대로 전했다. 또한 마르시온의 배신까지 하나 빼놓지 않고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메타트론은 카르마를 징계하지 않았다. 루시퍼와 아사셀이 그를 쏘아보는 눈길이 좀 심상치 않았을 뿐이었다.
메타트론은 심사숙고했다. 이제부턴 한 발이라도 삐끗하면 안된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의 최고 대적은 파천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수호자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뜻이 어긋난다 해도 방해는 할 수 있을지언정 전력을 다해 대적할 순 없었다.
‘이런 땐 차라리 수하가 없다는 것이 홀가분하군.’
파천의 주변엔 아직도 지킬 것이 많다. 그것은 그의 또 다른 약점이다 일이 잘 되려고 그러는 건지 파천의 자식들도 품안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메타트론의 행보는 의외로 간단하게 결정되었다.
‘가지를 먼저 친다. 마령의 본주와 마르시온을 우선적으로 제거한다. 그 뒤 파천을 따르는 자들을 압박해 가면 파천은 더 이상 날 대적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영계는 내 손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카오스, 카오스가 문제로구나. 하지만 카오스도 천궁이 어느 정도는 견제할 수 있겠지. 그는 차후에 상대할 방법을 찾자.’
골치 아픈 존재, 카오스. 메타트론도 그만은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파천은 알지도 모른다. 그래, 그는 카오스에 가장 정통해 있다. 그만이 상대할 방책을 알 것이다. 어쨌든 상황을 봐가면서 조금씩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면 된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 많던 군대는 흩어지고 이제 자신이 부릴 수하들이 이것뿐인가 싶어 착잡한 마음도 들었지만 애초부터 그런 것엔 미련이 없었다. 하나씩 훑어 가던 메타트론이 카르마에게서 새로운 점을 발견했다.
‘이놈 봐라. 이제 보니…….’
메타트론은 카르마에게 향했던 시선을 금방 거둬들였다. 루시퍼에게 말했다.
“마르시온과 마령의 본주부터 찾아라. 메덴에 있다 하니 그곳으로 먼저 가서 상황을 살펴보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변화가 있거든 내게 먼저 알려라. 나도 곧 뒤따르겠다.”
“네.”
루시퍼와 아사셀이 그곳을 떠났다. 메타트론은 카르마에겐 별 명령을 내리진 않았다.
“너는 내게 따로 할 말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래? 넌 평소에도 내게 불만이 많았었는데 진정…… 내게 할 말이 없더냐?”
“네.”
“헤르파, 앞장서라.”
“네.”
헤르파를 앞세워 메타트론은 천천히 걸어갔다.
“헤르파!”
“네.”
“네 어미를 만나봤느냐?”
“보긴…… 했습니다.”
“별 감흥이 없었나 보군.”
“……네.”
“너는 내가 무엇을 네게 줄 수 있다고 믿느냐?”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이 혼란에 참여한 이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나름의 원하는 것이 있다. 너도 바라는 것이 있을 텐데?”
“없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메타트론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장막 위의 천사들을 보았다.
“만약 내가…… 진다면…… 넌 어쩔 테냐?”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쯤은 소망을 가져보는 게 좋을 거다. 그래야 자신한테 떳떳해지거든. 또한 그것이 자신을 강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넌…… 루시퍼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알고 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내게까지 숨길 건 없다. 네 아버지는 루시퍼가 아니라 파천이다. 그 점을 잊지마라.”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니다. 네 아버지는 파천이다. 파천은 나조차 경외하게 만드는 위대한 존재다.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강자지. 넌 그런 아버지를 두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아…… 닙니다. 전 그를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 습니다. 전…… 제 아버지는…….”
헤르파는 말을 더듬고 헤렘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버지란 자의 비참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라고 믿고 있던 루시퍼조차 어려워 쩔쩔매는 메타트론이 존경한다는 자, 파천. 메타트론은 그가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한사코 강조했다. 그것이 둘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저런 말을 하는가?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그것도 하필이면 루시퍼가 없는 자리에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천사들을 만났다. 별 놀람 없이 긴장감도 없이 메타트론은 대천사들을 차갑게 대했다.
“나와 전쟁이라도 할 참이냐?”
대천사장인 미카엘을 선두로 역시 일곱의 대천사 중 나타나엘과 라파엘이 함께 메타트론을 찾아온 것이다.
메타트론의 싸늘한 어조에 미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직 결정되지 않아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깍듯했다. 예전 메타트론이 천사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미카엘의 성품이 원래 겸허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리에서나 가리지 않고 잘난 척하는 메타트론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았다.
“결정되지 않았다고? 결정되면…… 나와 또 싸울 것인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저희는 명령에 충실할 뿐입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신이 아니면 안 된다. 너희들이 아무리 수가 많아도 날 막을 순 없다.”
“그 자신감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군요.”
“천궁이 개입하면 일이 더 커진다. 명심해라.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일도 너희들이 개입하면 판이 커진다. 이후의 일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속히 군대를 철수시켜라. 너희가 위세를 부린다 해서 내가 겁먹을 줄 알았다면 착각이라고 말해주고 싶군.”
“그런 목적일 리가 있겠습니까? 메타트론님의 성품을 저희가 모르는 바도 아니고 말입니다.”
“날 찾은 이유는?”
“충고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충고?”
“네. 카오스가 이 세계에 들어왔음을 알고 계시죠?”
“물론이다.”
“그가 적입니까?”
“물론, 싸워야 할 적이지.”
“그를 조심하십시오.”
“호, 별일이군. 지금 날 염려하느냐?”
“그의 목적은 메타트론님보다 더 극단적입니다. 그가 타협을 제안해 오더라도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타협이라…… 그가 내게 타협을 해올 것이라 확신하나 보군.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인데…… 그것이 너희들을 내 앞에까지 나서게 할 정도로 걱정거리였나?”
“그를 경시하시면 큰일 납니다. 카오스의 무서운 점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겐 소중한 것이 없고 제한해둔 것이 없습니다.
경계가 없으니 못할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에겐 제 존재보다도 지향점이 더 중요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가리지 않습니다.“
“나와 비슷하군. 그래 그놈의 최종 목적이 뭐지?”
“이 세계를 파괴하는 ㄱ서이지요. 자기 안에서 질서를 혼란시켜 영원히 잠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고 있지요.”
“재미있군. 나와 여러모로 비슷하군. 신의 무료함이 만들어낸 놈이었군. 그런 골치 아픈 녀석을 만들어놓고 후회하고 고민하고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 이번의 출정은 제 권한에 의한 것입니다.”
“신의 뜻을 미리 살펴 재앙을 막아보시겠다? 훌륭해, 아주 훌륭한 수족이야. 네가 있으니 신은 얼마나 흡족하겠는가. 내게로 오지 않겠는가? 지금보다는 더 많은 권한을 줄 수 있는데 말야. 하하하하.”
미카엘은 희미한 웃음을 얼굴에 그려 넣었을 뿐이다. 그는 한번 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명심하십시오. 아직은 메타트론님에게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집착을 버리면 됩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카오스를 선택하시는 일만은 없기를 .”
미카엘과 대천사들이 메타트론을 떠났다. 메타트론은 고민에 빠졌다.
‘저들이 괜히 내게 온 것은 아니다. 카오스가 나와 타협을 하려고 한다고? 대체 뭘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이지? 그놈이 가진 게 뭐가 있다고.’
메타트론은 고개를 저었다.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뇌리 속에 담아둘 이유도 없는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그가 카오스를 좀더 신중하게 대할 계기가 된 건 사실이었다.

카오스의 장악력은 대단했다. 커진 힘은 마령의 본주인 케플러의 정신마저 제 의지 아래 편입시켰다. 그는 여전히 독립된 의지를 지닌 케플러였으나 카오스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케플러가 다른 사람들을 마령으로 조종했던 것보다도 더 강력하고 원활하게 제어되고 있었다.
케플러를 다시 대면하게 된 플로센서는 숨죽이고 명령을 기다렸다.
케플러는 별 지시 없이 플로센서를 물렸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아마도 무언가를 놓고 갈등 중인 게 틀림없었다.
기나긴 세월이었다. 억척스럽게 자신을 몰아붙여 여기까지 겨우 왔다. 한바탕 꿈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도 험난했던 길이었다. 모든 걸 부정하고 그 위에다 처음부터 새롭게 하나씩 놓아 가야만 했다.
아끼고 애정을 주었던, 제 운명이라 여겼던 루딘족마저 버렸다. 차라리 그것은 쉬운 결정이었다. 마령은 일체화되기 전까지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던가. 시간을 거꾸로 마음속에 심어 놓아도 이런 혼란은 없을 것이다.
처음엔 가면을 썼다. 비밀차원의 신과도 같은 존재들 앞에서 한 마리 벌레보다도 못한 처우를 견디며 힘을 얻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들이 적선하듯 던져준 것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 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살아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령을 얻고 비밀차원의 지도자들까지 무시하지 못할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아바돈의 전력을 수중에 두었을 때, 그는 이미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측량하지 못할 이 넓고 큰 세계에 강자들은 너무 많았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었고 그 영역응 항상 욕망의 부피보다도 작았다.
한 단계씩 밟고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끝에 서게 될 때가 오리라 위안했다. 힘들면 잠시 멈췄다 가고 잘못된 길은 되짚어 나오면 된다. 이길 수 없으면 도망가고 형편과 처지가 좋지 않을 땐 숨죽이고 기다린다.
그가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유연한 원칙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없기에 야심을 이루기 위해 버렸던 것들이, 그 희생이 너무도 컸기에 그것을 생각하면 결코 중단할 수 없다. 지금 케플러는 최대의 위기 앞에 직면해 있음을 자각했다.
‘마령을 사용하는 내게 카오스는 넘을 수 없는 존재다. 내게로 온 마령조차도 그의 의지를 따르고 있으니 어찌 그를 극복하고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기회가 올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린다.’
놀라운 일이었다. 케플러는 카오스에게 제압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척했을 뿐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알아챘다. 카오스가 마령을 다스리는 걸 보고 그가 바로 자신에게 마령을 주었던 당사자임을.
코모라마저 장악할 수 있었던 카오스의 그 대단한 힘을 케플러는 어찌 모면할 수 있었을까. 핵심은 의지의 지향이었다. 코모라가 카오스와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그런 빌미를 주진 않았을 것이다. 대등한 계약에 그쳤다면, 코모라 정도의 능력자가 카오스에게 마음을 뺏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케플러는 마령과 일치시킨 것 때문에 카오스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런데 행운은 케플러를 외면하지 않았다. 제왕의 구슬, 그것이 지닌 효능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플로센서조차 다 밝혀내지 못했었다.
제왕의 구슬을 품안에 두고 잇던 케플러는 카오스에게 지배당한 순간 새로운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집중하는 순간 카오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신 안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두 힘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교묘하게 뒤섞였다. 케플러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저항하면 카오스가 주시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카오스가 자신을 장악하다록 내버려두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의지가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완벽하게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다. 하나는 카오스가 남겨준 의지였고, 또 하나는 본래의 제 의지였다.
케플러는 품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제왕의 구슬을 빼서 손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한 손으로 복부를 찢었다.
“아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내 유일한 구원의 밧줄이다. 내 생존이 있고 나서야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있다.”
케플러는 구슬을 배 안에 넣었다. 잠시 뒤, 피는 멈췄고 찢어진 뱃가죽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말끔해졌다. 그는 깊숙하게 의자 속으로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나와의 싸움이다. 지금은 숙인다. 그리고 기다린다. 버거운 상대들이 정리될 때가지…… 그때까지는 카오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다.
차라리 잘 되었다. 적어도 전면에 나서서 적들의 표적이 되는 것보다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케플러는 웃었다. 눈앞에 그려지고 있는 전경은 그의 영광된 미래였다. 반드시 이뤄질 것이란 확신이 더 커져 갔다.

누구는 세상을 한 손에 쥐어 보려고 전쟁에 목숨을 건다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싸움터를 누볐다.
누구는 신을 말하며 그 위에 서보겠다고 큰 소리를 내보지만 그들은 서러운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생명을 걸었다. 누구한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짓밟힌 자존심은 마음에 담아둘 여유가 없다. 작은 한쪽 세상에 틀어박혀 핍박받고 설움 받은 것이 억울해서, 더 이상은 숨죽인 울음을 토하지 않겠노라며 대열에 참여해봤다.
맺힌 울분을 너그러운 웃음으로 맞아주기에 그것이 거짓 몸짓임도 모른 채 그냥 저냥 묻혀 다녔다. 천대받는 것도 잠시면 되겠구나. 이제 더 이상 은 틈바구니에 끼어 눈치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귀계는 마계의 무리 중에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잠시만 참으면 살 만한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귀계는 패잔병의 초라한 모습을 한 채 한곳에 모여 있었다. 누구도 추적해 오지 않는다.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것일까? 살아남은 칠성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보는데 제대로 된 의견이 나오지 않는다.
이대로 돌아가기도, 그렇다고 다시 메덴으로 갈 용기도 나지 않는다. 하나가 말했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다.”
다른 하나가 또 말했다.
“여길 떠나면 우리는 영원토록……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다시 천대와 멸시를 견딜 것이 아니라면…… 메덴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여기서 마지막을 고한다 해도.”
다른 하나가 말을 받았다.
“결과를 봐야 한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귀계의 정예들이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기다리는 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바에는 차라리…… 돌아가지 않음이 낫다.”
모두 입을 닫았다. 귀계의 지도자들인 칠성들은 용기를 잃었다.
사실 이제는 그들 정도가 참여한다고 해서 어떤 영향을 미칠 수준은 넘어서버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메덴으로 다시 간다. 싸우든 지켜보든 그곳이 우리가 있을 곳이다. 우리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명예나마 지키는 일이다.”
명예롭게 죽기로 결정한 귀계. 그들은 메덴으로 다시 돌아갔다.

마계의 잔당들이 흩어지고, 귀계가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면, 여기 똑같은 처지에 놓이 또 하나의 무리들이 있었다. 마르시온과 쿠사누스 그리고 제왕의 군대.
영계를 다시 지배해보겠다며 나선 길이 하필이면 메타트론의 그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첫출발부터가 어긋나버렸다. 당당하게 승부를 결하기보다는 형세가 유리한 곳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병졸들은 지휘관을 따른다. 제사장이자 각 대륙의 사령관들이었던 쿠사누스들의 위엄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고 그들은 그저 살길을 모색하는 연약한 무리들에 불과했다. 그들 중에서 마르시온은 여전히 위엄을 부리고 있었다.
“아직은 끝난 게 아니다. 우리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내는……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러니 용기들을 잃지 말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자.”
긍지를 잃은 지도자는 더 이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법이다. 말에 생명력이 없었다.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 아니라 되려 절망하게 하는 말이었다.
쿠사누스들은 이런 중에도 단 하나 비난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마르시온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였다. 그들의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젠 그들 앞에 놓인 길이 많지 않다. 갈래길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고 그것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게 될것이다. 쿠사누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몸을 숨길 때 같습니다. 어느 쪽도 우리를 반기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그들 싸움이 결말을 낼 때까지는 물러서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마르시온도 그 의견이 옳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이 찾아내고자 하면 숨을 곳이 없는 게 또한 무한계다. 마르시온은 힘 빠진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일단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지금은 물러서서 관망해야 할 때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루시퍼와 아사셀이 제왕의 군대 지척까지 다다라 있음을.
그들은 마르시온의 종적을 쫓아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메타트론의 당부처럼 그는 먼저 알렸다. 메타트론이 마르시온과 제와의 군대를 어찌할지는 아직까지 결정된 건 없었다.
“뭔가가 이쪽으로…….”
쿠사누스의 말이 끝나기 전에 루시퍼가 당도했다. 그의 등장에 쿠사누스들이 먼저 동요했다. 마르시온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럽고 초라해보였다.
“여, 이거 마황께서 무사히 귀환하셨으니…… 축하드려야겠군요. 그래 가셨던 일은 모두 잘 정리가 되었습니까?”
루시퍼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아사셀이 대신 답햇따.
“너희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동맹을 깨트렸을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는 해뒀겠지?”
마르시온은 필사적이었다.
“아사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마계를 배신한 적은 없소. 마계군도 우리와 함께 했소. 비록 패퇴하긴 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싸웠더랬소. 그런데 어찌 동맹을 깨트렸다고 하시오?”
루시퍼의 반응은 냉담했다.
“내 아버지께서 결정하신다. 나라면…… 너희에게 다시 기회를 주진 않는다. 신의를 저버린 자를 곁에 둘 순 없지.”
“거참 오해라니까 그러시네. 나, 제왕 마르시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난 단 한 번도 마계를 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소. 마황께서 함께 하셨더라면 우리가 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오.”
“마르시온, 내 충고하나 하지 아버지께서는 당당한 자를 좋아하신다.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당당함. 그것이 설사 배신이었다 해도 쓸모가 있는 자를 함부로 버리는 일은 없다.
허나…… 비굴한 자는 아무리 용도가 중하다 해도 기대를 가지시는 법이 없다. 네가 살길은 오직 하나! 칼을 뽑았으면 끝까지 싸우는 길뿐이다.”
마르시온은 루시퍼가 자신을 죽이려고 거짓을 말한다고 여겼다.
‘루시퍼와 아사셀이라면 어찌 살길이 생길지 모르지만 메타트론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용서를 구해야 해. 그것만이 살길이다.’
메타트론이 왔다. 팔 하나씩을 잃은 헤르파와 헤렘이 먼저 보였다. 마르시온은 그들의 얼굴에 서린 증오를 대하자 절망했다.
그 뒤에 선 카르마를 보자 다시 희망을 품었다. 그도 역시 케플러에게 힘을 합했던 자였다. 그런 자가 무사했다면 자신에게도 가능성이 있었다. 틀에 박힌 사고로 메타트론을 이해하려면 안 된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누구도 속단할 수 없다.
마르시온은 체면 불구하고 메타트론 앞에 가 납죽 엎드려 절했다.
“메타트론, 모든 이들 중에 높으신 이여. 무사귀환 하심을 앙축 드리나이다.”
메타트론은 군대의 규모가 상당히 줄어 있는 걸 먼저 보았다. 그들 중에 마계의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많이도 잃었군.”
“제가 불민하여 군대를 잘 통솔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듯싶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목숨을 걸고 명예를 회복하겠습니다.”
“어떻게?”
“적들은 메덴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선발대까지 그곳으로 모였으니 이제 그들에게 항복을 받아내면 영계는 메타트론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네가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물론입니다. 죽을 각오로 한다면 못 이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진작에 그렇게 하지 않았지?”
“네? 그, 그것은 제가 잠시 어리석어 적의 술책에 휘말려서 그만…….”
“마령의 본주는 어디 가고 너 홀로 있는 것이지?”
“그, 그걸…… 제게 물으시면…… 뭐라 대답하여야 하올지…….”
“그에게서도 등을 돌렸나?”
“……!”
“마르시온.”
“네, 하명하십시오.”
“너와 네 군대가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진정 크신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뭐 별거 없어. 죽음으로 갚으면 돼.”
“네?”
“나는 널 제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
“네.”
“나는 그다지 쓸모도 없는 널 내 역사에 동참시켜 주었다, 맞지?”
“영광일 뿐입니다.”
“나는 네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줬다.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네가 거느린 군대와 마계와 귀계. 그 정도 힘이면 영계연합군을 상대하기엔 부족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데 넌 내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리고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드릴 말씀이…….”
“아, 물론 얼마든지 패할 수도 있어. 그건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마계를 적으로 돌리는 것쯤 눈감아줄 수도 있어. 그걸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
마르시온은 한시름 놨다. 그것을 용서한다면 달리 질책 받을 일이 없었다.
‘역시 메타트론은!’
그는 정말로 기뻐했다. 메타트론의 얘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넌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네?그,그,그것…… 이 무엇…… 입니까?”
“네 뒤를 봐라.”
마르시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뒤에 늠름한 쿠사누스들과 군대가 마르시온과 같은 자세를 하고선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저들, 바로 저들이 문제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무 많이 남겼어.”
“……!”
“너는 저들을 모두 잃어야 했어. 저렇게 많은 수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네가 내 명령을 우습게 여겼다는 것을 뜻해.”
“아닙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네게 승리를 기대하진 않았어. 내가 네게 기대했던 역할은 날 위해, 내 명령을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전장에서 죽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적에게 내 권위를, 내 의지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네가 날 위해 할 바였다. 그런데 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기회를 달라?”
“네. 반드시…… 메타트론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만…….”
내려다보는 메타트론의 눈길이 매섭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루시퍼를 돌아본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리라 생각하느냐?”
루시퍼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들을 죽여 얻는 이득도 없겠지만 저들이 메덴을 공격한다해서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저들을 죽여 아버지의 위엄을 세우시는 게 지당하리라 봅니다. 하지만…… 저들이 죽을 자리는 이곳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됐다, 그만하라. 마르시온.”
“네.”
“루시퍼의 말이 맞다. 네 죽을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날 따라가겠는가?”
“하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좋다. 앞장서라, 메덴으로 가자.”
메타트론은 마르시온을 제일 앞에 세우고 쿠사누스들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늘어난 행렬은 메덴으로, 메덴으로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