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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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걸어나온 드래곤 라자는 쑥스럽다는 투의 웃음을 지었고 병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임무를 깨달았다. 간신히 풀려난 샌슨이 말했다.
“할슈타일 공. 따라오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드래곤 라자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저, 노랫소리도 들리고 웃음소리도 들려서……. 별로 위험할 것 같지는 않더군요.”
나는 그 꼬마를 바라보았다. 낮에는 거대한 백마 위에서 마치 떨어질까 무섭다는 듯이 앉아 있던 아이였지만 지금은 단출한 평상복을 입고 있어 대단 할 것 없는 보통 꼬마처럼 보였다. 아니, 보통 그 정도의 꼬마에게 보이는 도발적인 눈빛도 보이지 않는 소심해 보이는 꼬마였다. 나라면 절대로 낮의 그 아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제미니는 귀신같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랬겠군요. 자자! 후치와 제미니는 어서 돌아가거라!”
나는 엉거주춤하며 몸을 돌렸고 나의 장대한 폭로를 듣지 못하게 된 몇몇 병사들은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때 제미니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 다.
“그런데 이 밤중에 여기서 뭐하세요?”
샌슨은 제미니를 보자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아참! 그렇지. 제미니, 네가 도와주면 되겠구나.”
“예?”
“우린 민트를 찾고 있어. 밤중에 갑자기 찾으려니 너무 힘들구나.”
“아니, 민트를 뭐하러…… 아! 이 냄새는 민트 향이었구나!”
제미니가 말한 순간 나도 깨달았다. 드래곤 라자에게서 나던 냄새는 민트 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 몸에서 저런 냄새가 나지? 매일같이 민트를 접하는 우리 영주님이라면 모르지만. 아, 우리 마을의 영주님은 맛없는 고기를 먹기 위해 주로 민트를 향신료로 쓴다. 우리 영주님은 돈도 별로 없고 성격도 까다롭지 않아서 계피나 정향 등의 고급 향신료 대신 흔한 민트를 쓰는 것이 다. 어쨌든 냄새를 없애야 먹을 수 있는 게 고기 요리니까.
드래곤 라자는 제미니의 말에 반가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누나. 누나는 민트가 어디 있는지 잘 아세요?”
병사들은 순간 당황했고 드래곤 라자도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물론 놀랐다. 드래곤 라자께서 저렇게 평범하고 친근한 말투를 건네다니. 하지만 취해 버린 제미니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그럼, 잘 알지. 우리 아빠가 숲지기니까……요.”
다행히 제미니도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드래곤 라자는 실수를 감추려는 듯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 병사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실 수 있겠군요.”
샌슨이 재빨리 나섰다.
“드래곤 캇셀프라임의 식사 때문이다. 성내에 있는 민트를 모조리 동원했지만 그래도 모자라더구나. 그래서 급히 찾으러 나온 것이다.”
아이고 맙소사!
그 드래곤은 주제에 민트 향을 넣어야 밥을 먹는 모양이구나. 하긴 사람이 싫어하는 냄새를 드래곤은 꼭 좋아하라는 법은 없겠지. 하지만 드래곤이 먹어치우는 양이라면 정말 엄청난 민트가 필요할 텐데. 성의 병사들은 이 밤중에 드래곤의 식사 때문에 향신료를 찾으려고 숲 속에 들어온 모양이다. 퍽이나 웃기는 일이다.
제미니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저, 민트라면 사바인 계곡에 흐드러지게 나 있어요.”
“이야! 그래? 잘됐구나. 좀 안내해 주렴.”
제미니는 안절부절했다. 이 계집애는 아무리 병사들과 함께라도 절대로 이 밤중에 사바인 계곡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반도 못가서 아무거나 밟고 는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되돌아서 버리겠지. 할 수 없다.
“내가 안내할게. 나도 그 위치를 아니까.”
내가 나서자 샌슨도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오냐, 그럴래? 다행이구나. 그럼 제미니는 돌아가렴.”
제미니는 울상이 되었다. 지금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집에 들어가면 제미니 엄마는 제미니를 꽤나 귀여워해 주실 것이다. 엉덩이에 불이 나겠지.
어두운 숲 속을 걸어가는 데 보름달빛은 꽤 도움이 되었다.
차가운 숲 속의 밤공기를 계속 쐬자 술기운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내 옆에는 샌슨이 함께 걷고 있었고 드래곤 라자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우리 조 금 뒤쪽에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샌슨에게 방향을 지시하며 나지막하게 말을 걸었다.
“웃기는 드래곤이군. 냄새가 나서 고기를 못 먹겠다고 그래?”
“항상 민트를 사용해서 먹는다고 그러던데. 수도에 있을 때는 항상 민트를 가득 준비해 놓는다더군.”
샌슨도 이 밤중에 고작 민트나 찾으러 출동해서 별로 기분은 좋지 않은 듯했다.
“쳇. 그래서 저 드래곤 라자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난 거군. 그런데 저 드래곤 라자는 왜 따라왔지?”
“드래곤이 식사를 하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나 봐. 못 기다리겠다고 부득불 따라나오더군.”
“흐음.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의 우정이라. .발 조심해. 여긴 자갈밭이라 미끄러져.”
“알았어.”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병사들에 가려서 드래곤 라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꼬마는 고생이 심할 것이다. 밤중에 산을 타는 것은 쉬운 일이 아 니니까.
“저 드래곤 라자의 이름은 뭐래?”
“할슈타일 공이잖아?”
“그건 가문명이고, 이름은?”
“너 미쳤니? 귀족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할슈타일 공이지.”
괜히 기분이 지저분한걸. 하긴, 우리 같은 평민이 귀족의 이름을 알 필요야 없지. 언제 이름을 부를 기회가 있겠나?
하지만 칼의 말에 의하면 저 꼬마는 할슈타일 가문에 입양된 아이일 테고, 따라서 원래는 귀족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나처럼 다 쓰러져가는 오두 막에서 뒹굴다 어떻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분수에 없는 귀족이 되었겠지. 도대체 유피넬은 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자질을 내리지 않으신 거지? 아냐, 유피넬이 제대로 알아서 한 거야. 내가 귀족이 되면 그건 정말 웃길 거야.
“우하하하하!”
나는 계곡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갔다. 샌슨은 질겁했다.
“임마! 후치, 위험해!”
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바위, 펄쩍 뛴다, 바위를 차고, 그 앞에 풀밭.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춘다. 약간 미끄러지다가, 쓰러지기 전 팔을 위로 휘두르며, 다시 뛰어오른다. 에라, 앉아버린다. 미끄러진다. 주루루룩. 앞으로 미끄러지는 힘을 이용해, 허리를 튕겨세운다. 그리고 다시 뛴다. 바위를 차면, 계곡의 바닥이다.
아직 남아 있던 취기와 속도감이 섞여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난 계곡의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흔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모 양이다.
“후치! 어디 있냐? 괜찮아?”
위에서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고함을 질렀다.
“정말 느리네. 빨리 내려오지 않을 거야?”
“야! 뭐가 보여야 내려가지!”
할 수 없이 나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위에서 일렁거리는 횃불과의 거리가 꽤 멀었다. 횃불이 내려오는 속도는 짜증스럽게 느렸다. 이 렇게 달이 밝은데 왜 안 보인다는 거야.
땀이 식으며 계곡의 밤바람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몸이 떨릴 정도인데. 하지만 상쾌했다. 달빛 정말 좋군. 이런 밤엔 나처럼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어울리지.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앗소리 요란한데…….
“후치이이이! 으악!”
샌슨의 비명소리가 나더니 곧 횃불들 중 하나가 이상한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뭔가 주루룩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어두운 산비탈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샌슨의 숨막히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으으윽. 장가 다 갔군…….’
“처녀는 눈물로 침대보를 적시겠지. 내 님의 거시기가 완전히 끝장이래.”
샌슨이 날 잡아먹으려 드는 소동이 있었지만 어쨌든 병사들과 드래곤 라자는 계곡 바닥까지 내려왔다. 병사들은 모두 땀을 닦으며 씩씩거리고 있었 다. 그들은 나처럼 간단한 옷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사바인 계곡을 타고 내려와서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벼운 가죽 갑옷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 것은 다른 갑옷에 비해 가볍다는 말일 뿐 보통의 옷보다야 훨씬 무겁다. 결코 입고 뛰어다닐 만한 물건이 아니다.
특히 할슈타일 공께서는 기절할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한마디 건네보았다.
“힘드시죠. 드래곤 라자.”
“헉헉. 아, 예. 헉.”
“이제 다 온 겁니다. 앉아서 쉬십시오. 바로 저 둔덕이거든요.”
할슈타일 공은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붙임성 있게 웃어주고는 병사들을 재촉했다.
“아, 뭐해요! 어서 일어나 민트를 향해 돌격!”
병사들은 숨을 푸푸 몰아쉬면서 일어났다. 병사들은 각자 준비해 온 자루를 꺼내들었고 나는 휘파람을 불며 그들을 둔덕으로 데려갔다. 둔덕에는 민 트가 가득 나 있었다. 샌슨은 세 명으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 서게 했고, 나머지 병사들은 민트를 채집했다. 난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감상했다.
“임마, 후치! 너도 좀 도와라.”
“내 역할은 여기까지의 안내.”
“관두자, 관둬.”
“달빛 좋은 밤, 우리의 용사들. 가슴에 품은 정열, 민트에 내뿜는다.”
병사들은 킬킬거렸다. 난 기세가 올라 더욱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밤하늘 동편에서 이제 서서히 하늘 중앙으로 떠오르고 있 는 셀레나의 보름달이 기가 막히도록 시원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늘엔 셀레나, 용사들의 롱소드를 서슬 푸르게 비추니.”
“그 어떤 민트라도 용사들의 손길을 피할쏘냐.”
“보름달 아래 채집한 것들, 최상의 향취가 함께 하리니.”
“라이칸스롭을 축복하는 보름달이여. 용사들을 축복하소서.”
샌슨이 고함을 꽥 질렀다.
“임마! 우리보고 늑대로 변하라는 거야?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아우우…….
우우우…… 아우우우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너무도 시간을 잘 맞춰서 늑대가 울어젖힌 것이다. 놀란 나머지 주저앉아 버리는 병사도 있었다.
“우와, 하, 놀라라. 샌슨, 친구들이 부르네?”
샌슨도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가 내 말에 간신히 웃음을 띠었다.
“깜짝이야. 원 참 녀석들. 정말 타이밍 잘 맞추네.”
그때였다.
우워어어…… 크르르… 우워워워워!
아까보다 더 소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병사들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이윽고 돌멩이를 걷어차는 ‘좌르륵!’ 하는 소리까지 들 려왔다. 다가오고 있었다. 늑대가 횃불로 달려들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데 달려오다니. 보통 늑대가 아니다.
샌슨은 급히 롱소드를 뽑았다.
“네 녀석의 그 노래대로라면 곤란한데.”
병사들도 제각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난 파랗게 질려버렸고, 어떻게 달아나야 할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래곤 라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꼬마도 역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샌슨은 급히 지시했다.
“모두 할슈타일 공과 후치를 둘러싸라. 그리고 자렌, 해리…… 또 누가 코팅된 검을 가졌지?”
“나야.”
양조장 장남 터너가 앞으로 나섰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샌슨과 세 명의 병사가 앞에 서고 나머지 병사들은 나와 드래곤 라자를 둘러쌌다. 나 는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발소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한 놈인 것 같다. 하지만 엄청난 발소리였다.
“저, 저기!”
우리 앞쪽 약 70큐빗 위쪽의 언덕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달빛을 등 뒤에 받고 있어 실루엣으로 보이는 그 몸은 5큐빗은 되어 보였다. 늑대 가 아니다. 두 발로 서 있었고 구부정한 허리 위로 머리를 한 두서너 개 더 올려도 충분히 여유가 남을 만한 어깨가 보였다. 어깨 양쪽으로 늘어진 팔에
는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대거 같은 발톱들이 보였다.
“위어울프다!”
샌슨은 롱소드를 앞으로 쭉 뻗어들었다. 보름달 아래 롱소드의 반사광은 엄청났다. 다가오면 죽이겠다는 뜻이 롱소드의 날을 타고 그대로 언덕 위의 위어울프에게 쏘아져 가는 듯했다. 위어울프는 움직이지 않고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씨 좋고 순진하긴 해도, 역시 성의 경비대 대장인 샌슨은 전혀 눈싸움에서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눈싸움 말고 몸싸움은 어떨까. 위어울 프가 손을 휘두르면 황소의 머리가 박살난다. 4년 전 어느 여름밤 위어울프가 마을까지 내려와 난동을 부렸을 때 똑똑히 보았다.
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기랄. 우리의 민트 채집단께서는 아무도 활을 가져오지 않았다. 저렇게 바보처럼 서 있을 때 한방 날려야 되는데. 아니지. 위어울프가 화살에 맞아 죽을까? 왠지 맞으면 그대로 튕겨낼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샌슨은 낮게 지시했다.
“자렌, 왼쪽으로. 터너, 오른쪽으로. 해리는 내 뒤를. 놈이 움직이면 자렌과 터너는 양쪽에서 벤다. 해리는 머리를 찌르고.”
지시를 마치고 샌슨은 그대로 T자를 이룬 대형으로 서서히 앞으로 걸어갔다. 샌슨의 대단한 배짱 때문에 나머지 세 명도 두려움을 잊는 듯했다. 샌 슨은 아마 자기가 방패가 되어주는 동안 해리가 자신의 등 뒤에서 안전하게 머리를 노리도록 하려는 모양이다. 해리는 키가 껑충하고 완력이 좋으므 로 충분히 샌슨의 등 뒤에서 위어울프의 머리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피하면 자렌과 터너가 양쪽에서 베어들어간다.
위어울프는 그런 샌슨의 작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아마 놈도 노랫소리에 달려왔다가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 고는 당황한 모양이다. 드래곤 식사용 민트 채집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작전으로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 위어울프는 과 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위어울프는 뛰었다.
“크아아악!”
위어울프는 곧장 샌슨에게 달려들었다. 5큐빗짜리 공격력이 돌진해 오는데도, 샌슨은 작전이 맞아들어가자 씩 웃으며 기다렸다. 어떻게 웃을 수 있 을까?
위어울프가 눈앞까지 다가와 팔을 휘두를 때, 샌슨은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그 다리를 베어들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 샌슨의 등 위로 해리가 롱 소드를 찔렀다. 둘은 정말 타이밍이 좋았다. 위어울프는 샌슨이 다리를 베려 하자 움찔하며 아래를 보았다. 그래서 샌슨의 등 뒤에서 갑자기 뻗어나온 해리의 롱소드를 보지 못했다.
롱소드는 정확하게 위어울프의 목을 찔렀다.
“끄억!”
“받아랏!”
동시에 세 개의 검광이 보름달 빛에 번뜩였다. 위어울프의 양쪽과 그 다리 쪽. 샌슨은 도끼질하듯이 풀스윙으로 낮게 베느라 그대로 앞으로 굴러버렸 다. 위어울프는 목이 뚫리고 다리를 맞아서 무릎을 꿇으면서도 양쪽에서 날아드는 자렌과 터너의 롱소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퍽! 칼로 고기를 치는 지독한 소리, 뼈가 금속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위어울프는 목의 롱소드와 양손으로 쥔 롱소드, 그리고 무릎을 꿇어버리느라 행동이 봉쇄 되었다. 그래서 발 옆으로 굴러지나간 샌슨이 일어나 등 뒤를 찌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푸욱!
샌슨이 찌른 롱소드는 위어울프를 꿰뚫어 배쪽으로 피가 터져나왔다. 정면에 서 있던 해리는 그 피를 뒤집어썼지만 물러나지 않고 목을 찌른 롱소드 를 비틀면서 비스듬히 당겼다. 당장 위어울프의 목이 건들건들했다. 이윽고 위어울프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 등으로 다시 네 개의 롱소드가 날아들었 다.
위어울프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등에 롱소드가 박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샌슨은 롱소드를 뽑아들며 한숨을 쉬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롱소드를 뽑아들고는 품에서 수건을 꺼내어 그 피를 닦았다. 특히 피를 완전히 뒤집어쓴 해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샌슨은 이윽고 나에게 눈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건 퍽 불안했다.
“너 이 자식! 말이 씨가 된다고…….”
“으악!”
나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빙긋 웃으며 내 어깨를 꽉 잡았다. 그래서 샌슨은 아무런 부담 없이 내 정수리를 난타할 수 있었다.
난 샌슨에게 목이 졸리면서 외쳤다.
“끄억…… 자, 잡았으니…… 됐잖아? .케엑!”
샌슨은 껄껄 웃으며 날 놓아주었다. 난 목을 쓰다듬으며 한참 캑캑거렸다. 그때 내 눈에 허옇게 질려버린 드래곤 라자의 얼굴이 보였다. 샌슨도 그것 을 본 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할슈타일 공. 안심하십시오.”
할슈타일 공께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저씨, 정말, 대, 대단하네요?”
드래곤 라자는 몹시 놀란 듯 다시 평어를 썼다. 원래 평민이었을 테니까. 샌슨은 기겁할 듯이 놀랐지만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드래곤 라자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떻게 보통 롱소드로 위어울프를?”
샌슨은 롱소드를 들어올려 보였다.
“제 것과 나머지 세 명의 검은 은으로 코팅되어 있지요. 빛이 예쁘지요?”
드래곤 라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도 우리 영주님을 가난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지 뭐. 바이서스 어디에서 병사들의 검에 은도 금을 해준단 말인가. 그러나 저건 미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오로지 실용성을 위해 은을 발라두었을 뿐이다. 물론 축복받은 은으로 통째로 만드는 것 이 대(對)라이칸스롭 전용 무기의 제조법이지만 그랬다가는 한 자루도 못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임시 방편 비슷하게 은도금을 한 것이지만 우리 경 비병들은 그 정도로도 잘 싸운다. 왜냐하면…….
“귀, 귀하들은 일개 병사인데……, 수, 수도의 기사들보다 더 용맹해 보이는군요.”
“글쎄요. 이곳의 병사들은 아무르타트라는 체에 걸러진 알짜배기들이거든요.”
“예?”
샌슨은 빙긋 웃으며 멋진 동작으로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꽂아넣었다.
“아무르타트 때문에 이 주위에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지요. 그래서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간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병사들 은, 최고로 단련된 병사들뿐이지요. 하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다음 번 싸움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걸 아니까 겁없이 싸울 수 있습니다.”
롱소드가 검집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달빛에 반사되는 검광이 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잠시 내 눈엔 대장장이의 아들이자 내 노래에 허둥 대는 순진한 샌슨이 루트에리노 대왕보다 더 위대한 영웅으로 보였다. 보름달 아래의 마력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샌슨은 루트에리노 대왕만큼의 영웅 일까?
내 의문을 알 리 없는 샌슨은 고개를 돌려 위어울프를 조사하고 있던 터너를 바라보았다. 터너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는 얼굴이야.”
“그래.”
“4년 전 위어울프 침입 때 실종되었던 카르도 씨야. 강 건너에 살았지.”
주위는 잠시 조용해졌다. 샌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빠르게 말했다.
“자, 다들 빨리 움직이자. 시체 수습하고, 보고는 내일 내가 하지. 늦었어. 내가 내려가서 한잔 살 테니 힘들 내자고.”
“와, 샌슨 대장 만세올시다.”
“이럴 때만 만세지?”
병사들은 어두운 심정을 씻어내려는 듯 농담을 주고받으며 민트를 정성스럽게 모아 자루에 담았다. 샌슨은 자신의 자루를 들어올리다가 나를 보면 서 히죽 웃었다.
“자, 후치? 노래 값은 치러야지.”
“에엑?”
샌슨은 방긋방긋 웃으며 내 어깨에 자루를 턱 올려놓았다. 나는 다리가 휘청한다는 시늉을 해보였고 모두들 왁자하게 웃었다. 그까짓 민트 한 자루 별로 무거울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내가 입 속으로 구시렁거리자 샌슨은 말했다.
“임마,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해. 뭘 구시렁거리냐?”
“부엌의 음식 냄새? 빨래터의 잿물 냄새? 저장고의 와인 냄새?”
샌슨은 처절하게 외쳤다.
“야이, 자식아아아아!”
취소다. 절대로 샌슨은 루트에리노 대왕 같은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샌슨과 친구로 남겠어. 루트에리노 대왕은 아무래도 놀려먹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숙취와 중노동, 흥분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꿈자리는 무시무시했다.
난 바닥에서 일어나 앉아 멍하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자리는 끔찍스러웠는데, 너무 끔찍해서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 았다. 다만 어디에 짓눌리다 만 듯한 머리 때문에 나는 눈의 초점도 제대로 못 맞추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일어났으면 치우고 씻어라.”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려와도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퍽 걸릴 정도였다. 당연히 아버지는 내 등을 걷어찼고, 나는 간신히 일어나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버지. 다리가 완전히 풀렸어요!”
“잘한다. 어서 못 일어나?”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니까요?”
“갈수록 태산이다. 했던 말 또 하고. 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그랬지.”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날 치매 환자로 몰아가셨다. 난 구시렁거리며 일어났다. 몸에 둘둘 말고 자던 모포를 집어 털고는 침대 위에 던져두었다. 침대 는 아버지 것이고 난 바닥에서 모포를 말고 잔다.
“나도 침대 좀 만들어줘요. 뼈마디가 쑤신다니까요?”
“그래? 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그런 증상이 있으셨지.”
이젠 날 신경통 환자로 몰아가신다. 난 포기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와 내가 사는 오두막 옆에는 아버지의 작업장이 바로 붙어 있다. 작업장이라고 해봐야 오두막의 지붕을 길게 늘인 다음 기둥을 세워둔 정도지 만. 나는 그 작업장의 물통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차피 윗옷은 벗고 자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그대로 머리만 물통에 박으면 세수다.
“푸아!”
찬물을 뒤집어쓰자 머릿속에 끈적하게 굳어 있던 알코올 때문에 누군가가 머리를 쾅쾅 때리듯이 아팠다. 몇 번 발을 헛디딘 뒤에야 간신히 중심을 잡 고 가슴과 팔도 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인자하게 말씀하셨다.
“잘 논다. 귀여워 미치겠구나. 걸음마를 다 하고.”
“양초 주문량은 어제 다 만들었지요? 그럼 오늘은 일 없지요?”
“없긴 왜 없냐, 이 자식아! 벌집 모으고 비계도 받아와야지!”
“어? 더 만드실 거예요?”
“성에서 급한 주문이 나왔다.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사용될 양초야.”
아무르타트 정벌군이라. 그럼 이번이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인가?
캇셀프라임이라는, 그 수도에서 온 화이트 드래곤도 도착했으니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비된 것이다. 어차피 인간들은 수백 명을 모아 간다 해도 아무르타트를 어떻게 할 수 없다. 회색 산맥의 공포이자 중부 대로의 슬픔 아무르타트. 이 강대한 드래곤에게 인간의 만용 을 부리려 들었다가는 뼛조각 하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깨끗이 태워지거나, 통째로 잡아먹힐 테니까.
드래곤에게는 드래곤으로 맞서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주님의 간곡한 부탁과 정성(칼과 나의 추측이지만 틀림없이 많은 뇌물이 오갔을 것이다. 불쌍한 우리 영주님. 돈도 별로 없으면서.)으로 마침내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황송스럽게도 수도의 캇셀프라임을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난 마당의 테이블에 아침 식사를 차리면서 말했다.
“아버지.”
“왜?”
“캇셀프라임은 아무르타트를 이기겠지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많이 보았던 싸움, 그러니까 너와 제미니가 싸우는 거라면 누가 이길지 짐작할 수 있지만.”
“나와 제미니가 싸우면 어떻게 되는데요?”
“전적을 말해 주랴? 넌 제미니 덕분에 다리가 두 번 부러지고 팔을 한 번, 그리고 콧등이 왕창 벗겨진 적도 있었고 물구덩이에 빠져서 감기에 걸린 것 은 셀 수도 없다.”
그래. 어렸을 때 난 제미니에게 그토록 심하게 당했었지. 난 제미니에 대한 해묵은 적개심이 맹렬히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제미니에게 네 고추를 보여주다가 제미니가 자신에게는 없는 그것이 가짜가 아니냐고 의심한 끝에 그것을 잡아당겨…….”
“아버지!”
“따라서 난 눈물을 좍좍 흘리며 제미니의 아버지에게 널 사위로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음. 고얀 놈. 왠지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것 같 다고 생각되지 않아?”
이로써 난 여자에게 순결을 빼앗긴 등신 같은 아들네미가 되었다. 더 이상 말을 했다간 무슨 가공할 과거사가 폭로될지 몰랐기에 나는 서둘러 아침 준비를 마쳤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는 턱수염에 묻은 술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양초는 오늘부터 네가 만들어라.”
“예?”
“난 좀 바빠질 것 같구나. 집사님께도 이미 말씀드렸다. 품질이 좀 떨어질진 모르겠지만 네가 만들 거라고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았다.”
“품질 어쩌고 하는 부분은 잊겠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이번에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자원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할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말이 나오려고 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은 극 히 평범했다.
“아버진 창도 못 쓰시잖아요?”
“그래서 오늘부터 연습할 생각이다. 정벌군의 훈련에도 참가하고.”
“가면 살아 돌아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네 걱정은 하지 않는다. 제미니가 널 보살펴줄 거야. 부디 제미니에게 사랑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냉정할 수가 없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아버진 가면 돌아가실 거예요. 개죽음이라고요!”
“군대에서 작전을 짤 땐 전체에서 사망자 비율이 30퍼센트 이하가 될 수 있을 때 작전을 추진한다고 들었다. 따라서 내가 죽을 확률도 30퍼센트란 다.”
갑자기 엄청나게 거리감 느껴지는 변명을 들어서 나는 정신이 없었다.
“그건 작전일 뿐이잖아요? 아무르타트에게 도전했던 군대는 무조건 백 퍼센트 죽었어요!”
“글쎄. 이번엔 캇셀프라임도 있으니 훨씬 나을 거야.”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아버지는 너무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뭔데요? 이유가 뭐예요? 왜 자원하신 거예요?”
“아무르타트가 쓰러지는 것을 볼 권리가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나도 그중에 들어가기 때문이지.”
“아버지가 그러시면 어머니가 기뻐할 것 같아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테이블 위의 술병을 들어올려서 빈 잔에 다시 채웠다. 술병을 기울이는 아버지의 손끝이 흔들렸다고 느낀 것은 단지 내 생각일 뿐이었을까. 난 숨을 푸푸 몰아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아버지는 내 물잔을 비우시더니 거기에 술을 채웠다.
“어제 보니 자면서 술주정까지 제법 하더구나.”
난 내 앞에 있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꼭 아버지의 죽음을 위해 바치는 술잔 같았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올리면서 말씀하셨다. “잡아라.”
난 술잔을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아버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난 죽으려 가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네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난 살아서 돌아오겠다.”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정말입니까?”
“여자에게 그토록 당하는 너 같은 반편이 아들을 두고 죽기엔 너무나……”
“믿을게요.”
“그럼, 내 생환을 위해 건배해 다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건배하고는 술잔을 말끔히 비웠다.
“아버지…….”
“왜 부르느냐?”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께서는 깊은 한숨을 쉬셨다. 난 아버지를 애타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도 내 아내의 목숨을 가져간 녀석에게 내 목숨까지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술주정뱅이 아들의 목숨이라면 한 번쯤 고려해 볼 만하지만.” 난 눈초리를 확 바꿨다. 아버지는 껄껄 웃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표정을 잘못 이해하신 것이다.
“그래요! 제가 갈게요!”
“멍청아. 군대 징집 하한선도 모르냐? 넌 열일곱 살이야.”
아버지는 아주 간단한 말씀으로 내 입이 다물어지게 만들었다.
“그거 상한선은 없어요?”
“있지만 내 나이는 아니다. 약오르지?”
마을 대로에도 이상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아무르타트 정벌군 소식 때문이었다. 흥분, 걱정, 희망, 불안 그 모든 것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통째로 절구에 넣고 갈아버린 다음 마을 대로에 뿌린 것 같았다. 속삭임, 웃음소리, 한숨소리, 고함소리. 평소 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그런 소리들이 어쩐지 오늘은 매우 이상하게 들려왔다.
난 성으로 걸어갔다.
성에서 버리는 동물의 지방은 유지 양초의 원료로 쓰인다. 그 외에 생선 기름으로 만드는 것도 있고, 난 구경도 못해 봤지만 고래 기름으로 만드는 양 초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지방으로 만드는 유지 양초는 좀 저급품이지만 평민들에게는 굉장히 값진 것이다. 따라서 평민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의미 로 우리 영주님은 영주의 성에서 나오는 비계나 동물 지방 등을 양초로 만들게 한 다음 필요로 하는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게 한다. 하지만 밤에 책을 읽거나 하는 시민은 그렇게 많지 않으므로 수요는 높지 않다. 그리고 벌집으로 만드는 보다 고급품인 파라핀 양초는 성에서 사들이며, 그것으로 우리는 먹고 산다. 즉 성에서는 음식 찌꺼기로 시민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파라핀 양초를 사들임으로써 우리 가족을 먹여살린다. 마음씨 좋은 우리 영 주님. 이야기에 나오는 못된 영주들은 초장이들에게 음식 찌꺼기를 팔아먹기도 한다던데.
숙취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땅만 보면서 걸었다. 그래서 자칫 마을 대로에 모여선 사람들과 부딪힐 뻔했다.
사람들은 마을 대로를 완전히 막고 모여서 있었다. 난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조장의 미티가 보였다.
“미티? 뭐야? 무슨 일이야?”
“후치냐? 저기 성을 봐.”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눈은 전부 언덕 위쪽, 영주의 성을 향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뽑아들고 성 쪽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로 거대한 하얀 목이 보였다.
“캇셀프라임?”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뭔가 넓고 큼직한 하얀 것이 올라오며 그 목을 가려버렸다. 나는 잠시 후 그것이 다시 내려갔을 때에야 그것이 캇셀프라임의 날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날개는 다시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이윽고, 캇셀프라임은 둥실 떠올랐다. 거짓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 커다란 덩치가 하늘을 날려면, 산꼭대기 같은 곳에서 산비탈로 마구 내 달려야 간신히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런데 캇셀프라임은 마치 참새나 된 것처럼 제자리에서 우아하게 날아 올랐다. 참새라고? 아니, 해오라기 같았다. 그 우아한 날개의 움직임. 느리면서도 가벼운 몸놀림. 가공할 힘이 있음에 틀림없을 텐데도 한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목과 꼬리.
캇셀프라임은 이윽고 완전히 날아올라 성 위의 하늘에 떠올랐다. 그것은 천천히 날개를 저어 우리가 서 있는 쪽을 향해 날아왔다.
너무 빨랐다.
날개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그렇게 빠르다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캇셀프라임의 거대한 날개라면 다른 조그만 새들이 수백 번은 날개 쳐야 될 거리를 한 번 날갯짓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캇셀프라임은 어느 새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캇셀프라임 만세!”
“만세!”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팔을 뻗어올리며 소리높여 환호를 보내었다. 나 또한 그 광경에 감동해서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르고 팔을 내둘렀던 모양 이다. 칼이 내 어깨를 잡았을 때 급히 팔을 내리다가 칼의 콧잔등을 찍어버릴 뻔했으니까.
“이크, 조심하게나. 네드발 군.”
“아, 칼?”
“흠. 과연 장관이구먼.”
“예. 어, 그런데 캇셀프라임은 어딜 가는 거지요?”
“글쎄올시다. 날아간 방향으로 보아 회색 산맥이군. 정찰이 아닐까 하는데.”
“정찰? 정찰이라면 우습네요. 저건 누구 눈에나 뜨일 테고 당연히 아무르타트에게도 보일 텐데.”
“지금은 그렇구먼.”
“예?”
“오, 네드발 군. 인비저빌리티라는 마법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비밀스러운 일이었던가?”
“아! 마법!”
난 머리를 딱 쳤다. 물론 그게 어떤 원리인지야 나로선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인비저빌리티는 물체를 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변명할 말은 있다고.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법사라고는 딱 세 번밖에 보지 못했다. 제6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때 한 명, 그리고 제 8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때 두 명을 봤다. 그리고 그들이 마법사라는 것만 알았지 그들이 마법을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나에겐 마법 이란 신비한 것,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마법에 대해 바로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잖아.
칼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하긴 마법사라는 것이 워낙이 희귀한 것이니, 우리의 네드발 군이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야 있겠는가.”
“그런데 누가 캇셀프라임에게 인비저빌리티를 써주지요?”
“응? 그야 캇셀프라임이 직접 쓰는 것 아닌가.”
“드래곤이 마법도 써요?”
칼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가장 적절한 대응, 즉 뻔뻔스러운 얼굴로 그것쯤 모른다고 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히기라도 하느냐는 듯한 표 정을 지었다. 그런데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이지.”
나와 칼은 동시에 말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인, 아니 청년, 아니 노인인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는데다가 머리엔 얼굴이 다 가려질 정도로 후드를 내려쓰고 있었다. 입고 있 는 옷은 검은 색의 능직 로브. 여행자들 중 말을 타지 않는 사람이라면 선택해 볼 만한 옷이다. 두껍고 펑퍼짐한 옷으로 밤에 잘 때 특히 좋다. 하지만 활동이 많을 경우엔 대단히 거추장스럽다. 이불을 둘러쓰고 달리는 셈이니까. 등에는 가방을 메고 오른손엔 지팡이를 세워들고 있었는데, 오른손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흘러내려서 팔에 가득한 문신이 잘 보였다. 어디서부터 시작인지, 몇 개의 선인지 짐작할 수도 없이 복잡한 선들이 도형을 이루고 있었다. 글자인가? 무늬인가? 어떻게 보면 글자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무늬인 것 같았다.
남자는 후드를 천천히 걷어올렸다. 마치 그 동작의 완성을 위해 몇 년은 좋이 연습을 한 것처럼 완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동작. 이윽고 드러난 목에서 볼에 이르기까지 문신이 보였다. 오른팔과 그 볼을 볼 때, 아무래도 상체 전체에, 어쩌면 온몸에 문신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타난 눈. 없다. 하얗다. 마지막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하얀 백발. 검은 옷에 검은 문신으로 검정색 일변도에 하얀 눈과 하얀 머리카락이 이색적이었다. 대단히 주눅 들게 만드는 위압적인 모습의 장님 노인이었다.
“저, 누구시죠?”
내겐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야 할 이유도, 그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 먼저 마음대로 말을 건 쪽은 저 문신 장님 쪽이니까. 문신 장님은 무표 정하게 말했다.
“타이번.”
“타이번이라. 드래곤에 대해 잘 아세요?”
“아니, 몰라.”
“……이것 보세요. 무턱대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조언을 건넬 만한 지혜와 연륜이 있어야 될 거 아녜요?”
나도 이 정도는 말할 줄 안다. 칼의 덕분이지만. 타이번이라는 그 문신 장님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빙긋 웃었다.
“질문이 잘못됐어.”
“O||?”
“난 드래곤보다는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마법사예요?”
“이런, 자네도? 반갑네. 장님 동지.”
척 보면 마법사인 것을 모르겠느냐는 고상한 비난인 것 같은데. 하지만 난 마법사가 온몸에 문신을 하고 검정색 로브를 입고 다녀야 된다는 말은 들 어본 적이 없는걸.
“칼. 내가 장님이 아니라고 좀 말해 주겠어요?”
“그러지. 이 청년은 장님이 아닙니다. 다만 눈을 뜨고 있어도 별볼일이 없다는 것 정도지요.”
“그럼 장님보다 더 고약하군.”
칼과 타이번의 즉석 합동 작전으로 난 단숨에 눈 뜬 장님이 되어버렸다. 칼은 내 콧방귀를 피식 웃어넘기고는 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근처에서는 못 뵙던 분이시군요. 전 칼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겠지. 목적을 묻는다면 여생을 마칠 자리를 찾고 있는 늙은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
“여생을?”
“그렇다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떠돌아다니는 것도 지겹고, 정착해서 내 무덤자리나 정해서 풀 베며 가꿀 생각이네. 그래서 부탁인데, 이 마을은 어떤 마을인가?”
“영주님은 헬턴트 자작이시고, 썩 괜찮으신 분입니다. 노인장께서 대륙을 주유하셨다면 영주님께서는 노인장을 초청하여 심원한 지혜, 혹은 머나먼 지방의 재미있는 풍습을 들으시겠지요. 하지만 시기가 안 좋군요.”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들어오자마자 술렁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더군. 그대로 떠나버릴까도 생각했다네. 하지만 이 나이가 되면 섣부른 판단은 피하게 되 지. 자네가 괜찮다면 주점에 좀 안내해 주겠나? 난 자네 둘에게 술을, 자네 둘은 내게 조언을 줄 수 있겠지.”
타이번은 위압적인 겉모습에 비해 온화한 사람인가 보다. 우선 이치를 알고 예절 있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게다가 자네 둘이라고 했으니 거기엔 나 도 포함되며, 난 백번 찬성이다. 칼은 날 바라보았지만 ‘혹시 바쁘지 않은가?’ 등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걸어갔다.
마을 광장에 있는 펍 ‘산트렐라의 노래’로 가는 동안 타이번은 날 놀라게 했다. 대로에는 강아지들과, 정열이라는 면에서는 강아지와 결코 차이점을 찾을 수 없는 개구쟁이들, 그리고 가축과 마차 때문에 생긴 흙구덩이와 진흙탕이 가득했지만 타이번은 마치 눈을 뜬 것처럼 여유 있게 걸어갔다. 롱 부츠를 신고 있어서 무턱대고 걸어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타이번은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을 피해가며 걸어갔다. 지팡 이 쓰는 손이 정말 민감한 모양이군.
롱 부츠? 그러고 보니 고급품이다. 난 내 나막신에 들어오는 모래들을 느끼며 타이번의 롱 부츠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우리는 ‘산트렐라의 노 래’에 도착했다.
펍 안에는 조금 전 캇셀프라임의 비행을 구경하던 축들이 한 잔 하러 들어와 있었다. 요란한 소리. 그들은 서로 캇셀프라임이 1분에 날개를 몇 번 치 는가에 대해 대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현재 여섯 번일 거라는 주장이 우세한 것 같았다. 그거야 그저 계산하기 편하게 10초에 한 번씩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테고, 캇셀프라임의 날갯짓은 자기 마음대로일 테지, 뭐.
칼은 친절하게 타이번을 의자에 앉혔다. 주점의 주인인 해너 아주머니는 날 멀거니 바라보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너, 숲 속에서 몰래 술 마시고 취한 채 계곡을 달리는 버릇이 있다더니 이젠 아주 당당하게 술집에 들어오는구나?”
어떻게 어제 처음 일어난 일이 내 버릇씩이나 되어 있는 것일까? 난 내 동료 두 사람을 턱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분들 따라온 거예요.”
“어련하겠냐. 두 분은 맥주고 넌 우유겠지?”
“맥주 세 잔!”
“아니, 한 잔은 와인이야. 뮤러카인 사보네 있는가?”
늙은 마법사 타이번의 말이었다. 주점 아주머니의 얼굴이 확 변했다. 그게 뭔데? 주점 아주머니는 놀란 눈으로 타이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있긴 있는데, 아, 저…….”
타이번은 빙그레 웃고는 팔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빼서 동전을 튕겼다.
주점 안에 스며들어 오는 오전의 낮은 햇살을 되튕기며 허공을 날아가는 것은 반짝반짝하는 금화였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감을 뻔했다. 그 번쩍 이는 빛에 캇셀프라임의 날갯짓 회수를 토론하던 축들도 놀라서 바라보았다. 해너 아주머니는 황송스러운 데다가 그것을 잡아낼 자신이 없자 아예 치 마로 받아내었다. 해너 아주머니의 떨리는 손이 치마폭에서 두툼한 금화를 집어내었다.
해너 아주머니는 당황해서 말했다.
“저, 선생님. 잘못 던지신 것 아닌가요?”
“음? 모자란가? 이런, 100셀짜리가 아닌가? 늙긴 늙었나 보군. 손이 무뎌졌어.”
타이번은 다시 품을 뒤지려 들었고 해너 아주머니는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니 맞습니다.”
“그래? 허허. 내 손은 그대로군. 다행이야. 자네들도 주문하게.”
칼은 그냥 맥주를 주문했지만 난 17세였다.
“무카라사네보!”
해너 아주머니는 내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뮤러카인 사보네야, 이 멍청한 녀석아.”
“맥주.”
해너 아주머니는 머리를 절절 흔들면서 바로 걸어갔다.
“아이고, 큰일이다. 7년 만에 한 병이 작살나는구나. 이제 겨우 두 병 남았어.”
이리하여 맥주 두 잔과 그…… 포기하자. 어쨌든 괴상망측한 와인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해너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사위 보면 주려고 했던 건데, 손 자 보면 주려고 했던 건데, 하면서 아쉬워했지만 그러면서도 창가로 다가가 감탄하는 눈으로 그 100셀짜리 금화를 햇빛에 비쳐보았다. 주점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재빨리 해너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그 금화를 함께 구경하며 감탄했다.
“주점의 분위기는 썩 좋군.”
“훌륭한 척도가 되지요.”
“음. 좋은 마을이야. 영주의 인망이 괜찮군.”
“됨됨이가 약하다는 게 정확할 겁니다.”
“나쁘지 않아. 그런데 캇셀프라임은?”
“아무르타트 때문입니다.”
“중부 대로 어딘가에 블랙 드래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
“여깁니다.”
“참, 거, 고약하군. 이런 아름다운 마을에 그런 고통이 있다니.”
“전후 관계가 바뀌었습니다. 아무르타트가 있어 우리 마을이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칼과 타이번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할 괴상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칼의 마지막 말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난 흥분하여 무례하게 끼어들며 말했다.
“어, 저, 그게 무슨 말이지요?”
칼은 잠시 내 존재를 잊었던 모양이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곧 친절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우리 마을은 강력하지만 조용한 마을이지. 네드발 군. 대륙 어디를 돌아보아도 우리 마을 같은 곳은 없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대도시에서 보이는 소 란스러움과 복잡한 인간 관계는 없지. 모두 아무르타트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그래서 사람들끼리는 참으로 살갑게 살아가는 마을이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칼과 자주 나누던 말 중에 하나다.
“그건 전에도 들었어요.”
“그렇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생활이 고통스러워서 강하게 단련되었지만 그만큼 다정하다네. 여기에서는 일개 병사도 오크 대여섯 마리는 너끈히 상 대할 수 있을 정도야. 자네 친구 샌슨 퍼시발, 난 그 청년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청년이라면 어쩌면 오거도 상대할 수 있을걸? 그런데도 여기서는 순박한 시골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지. 만일 수도 같은 대도시라면 퍼시발 군은 예전에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 휘말려 들어가 기사단 대장쯤 노리며 출세 지향형 인간이 되었겠지.”
그 말에는 찬성이다.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정말 샌슨은 기사단의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보검을 허리에 차고 어전에 서 있어도…… 안 어 울리겠다. 쳇. 샌슨은 역시 물레방앗간에 숨어서 그 처녀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어울리겠다.
“그래서?”
“별말은 아니야. 우리 마을은 모두가 강한 사람들이지만, 따스한 마을이고, 조용한 마을이지. 우리는 아무르타트와 일종의 균형을 이루는 셈이지. 하지만 이제 캇셀프라임이 왔다네.”
“캇셀프라임은……..”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를 물리치면, 우리 마을은 원래의 좋은 위치 때문에 크게 번영할 거라네. 우리 마을이 중부 대로에서는 꽤 발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잘 알 테지? 아직 개척되지 않은 대륙의 서부로 들어가려면 우리 마을은 그 관문이 되겠지. 어쨌든 뮤러카인 사보네까지 구경할 수 있는 마을이니까.”
“그게 그렇게 희귀한 술이에요?”
“뭐, 제법 희귀하지. 전하께서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술이니까.”
난 입을 쩍 벌렸다. 아니, 국왕께서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술을 주문하다니, 저 타이번은 도대체 뭐하던 작자야? 칼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쨌든 아무르타트가 없어지면, 우리 마을은 지금 현재의 모습대로 있을 수는 없다네. 번영하게 되겠지.”
“좋은 일이잖아요?”
“음. 하지만 우리 마을이 번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예?”
“우리 마을을 노리는 자가 많아지겠지. 사람들은 이권과 경쟁을 배우겠지. 사실 우리 영주님은 마음씨 좋은 분이지만, 우리 마을을 탐내는 무리들이 생기면 과연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지금이야 누가 아무르타트의 앞마당 같은 이 마을을 노리겠는가. 그러니 우리 영주님처럼 소심한 분도 자리를 지키시는 거지.”
간신히, 아주 간신히 이해했다. 그 이해를 위해 맥주 한 잔이 완전히 소모되었다. 칼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을이 이토록 좋은 위치와 비옥한 토지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는, 그래서 조용하고 사람끼리 서로 사랑 하며 살 수 있는 마을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아무르타트 덕분이라네.”
“웃기는 소리!”
난 탁자를 꽝 내리쳤다. 칼은 별로 놀라지 않았고 타이번만이 놀라서 보이지도 않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면 아무르타트, 그 개자식한테 감사라도 할까요? 우리 마을이 낙원처럼 아름다운 것이 모두 아무르타트 때문이라고? 아무르타트 때문에 더더 욱 생존 욕구가 부채질되어 모두가 근면 성실한 사람들이 되어서 고맙다고 할까요? 녀석 때문에 득시글거리는 몬스터들이 심심하면 마을에서 약한 사 람들을 죽여버리니까 점점 강한 사람만 남게 해줘서 고맙다고 할까요?”
나는 아무래도 열두 시간 안에 연속으로 술을 마셔선 안 되는 타입인가 보다. 어제 이후로 반나절이 지났지만 당장 취기가 짜릿하게 올랐다.
“그 자식 때문에 중부 대로의 관문인 우리 마을이 발전도 되지 않고 목가적인 마을인 채로 있다고 고마워하라고요? 혹시 타이번이 그렇게 말하면 이 해해요. 하지만! 하지만 칼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칼은 항상 봤잖아요? 한 달에 한두 명씩은 꼬박꼬박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봤고, 그 가족들이 우 는 것을 봤잖아요! 아니, 지금 당장 강 건너에 가보세요. 4년 만에 죽은 시체로 돌아온 카르도 씨 가족에게 그렇게 말해 봐요!”
주점의 다른 사람들, 즉 해너 아주머니와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칼만을 바라보았다. 칼 은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들었네. 그리고, 네드발 군.”
그리고 칼은 맥주를 삼키고는 말했다.
“자네 말이 다 옳아요.”
그때 타이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봐. 후치라고 했던가? 내가 보기에 이 옆의 칼은 너무 이른 나이에 인간에게 실망해 버렸어. 그러니 아직 인간을 사랑하는 나이인 자네가 보기엔 이해할 수도 없는 말도 하는 것이고.”
“집어치워요! 당신이 뭘 안다고, 오늘 처음 만났잖아?”
“그러나 이런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니까.”
그때 칼이 말했다.
“타이번. 그만 하십시오. 네드발 군. 내 잘못일세. 용서해 주게.”
칼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취해서 한 말이라네. 잊어요, 네드발 군.”
난 씩씩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드발 군?”
칼이 불렀지만 난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나가 버렸다. 제기랄, 펍을 빠져나오자 오전의 햇살이 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왔다. 미칠 것 같은 햇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