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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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내 일과는 재미있게 바뀌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무장을 갖추고는 산트렐라의 노래로 달려간다. 타이번은 테이블에 앉아서 우유를 마 시다가 내가 들어오면 인사를 보낸다. 정말 기가 막히다. 난 한번은 지나가던 꼬마에게 부탁해 그 애를 내 앞에 집어넣어 보았지만 타이번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내 발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맞힌다.
그러곤 타이번을 데리고 성으로 간다. 성에 남아 있던 경비 대원들은 어젯밤의 보고를 하고 뭐 기타 등등 말을 나누지만 난 그것과는 상관없으므로 대부분 연병장에서 기다린다.
이때 난 검을 뽑아들고 몸을 비틀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아침 훈련을 마치고 식사까지 끝낸 경비 대원들이 연병장 가장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나를 바라보며 박수를 보내거나 조롱을 보내거나 한다. 때론 조언도 보낸다.
“손아귀에 힘을 빼! 제미니 손목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이게 조언이냐! 앙! 전도유망한 청년 하나 매장시킬 일 있냐!
때론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가 막히다! 세 번씩 몸을 돌리며 아홉 번을 치는 터너의 동작을 흉내내다가 난 몇 번이고 고꾸라졌다. 터너는 트롤과의 싸움 때 부상을 입었기에 정벌군에 출전하지 않았다. 타이번이 그걸 고쳐주긴 했지만 아직 원활하게 다리를 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럼 에도 귀신 같은 동작으로 그런 묘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히죽거렸다.
“터너 저 녀석, 다리 다치더니 영 무디군.”
“임마! 너도 쇠스랑에 다리 찍혀봐!”
병사들은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날 지도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어렵다.
“욘석아, 집에 들어가거든 팔굽혀펴기를 하든지 장작 패기를 하든지 해서 팔힘 좀 길러라. 이 녀석, 매일 양초만 고다보니까 몸이 완전히 양초잖아?” 장작 패기라…… 그거야 별로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불을 쓸 일이 많아서 다른 집처럼 매일 장작을 쪼개지 않고 장작을 사서 쓴다. 그래서 나는 팔 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은 팔이 저려서 빵을 집어먹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그렇게 성에서의 업무가 끝나면 타이번은 순찰을 나간다. 간혹 마을 주변에서 타이번은 나에게 지형을 자세히 물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멈춘다.
“그렇다면 여기가 접근 루트로 적절하겠군.”
몬스터들이 쳐들어오면 이곳이라는 뜻이다. 그러곤 날 시켜서 나무나 땅, 바위에 이상한 모양을 그리게 하고는 스펠을 캐스트한다. 그게 뭐냐고 물 어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제대로 그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타이번은 항상 날 실험 대상으로 쓰니까. 그래서 난 보이지도 않는 거미줄에 걸려 허공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고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되어 콰당 쓰러지기도 하고 불꽃에 머리를 그슬리게 되기도 했다.
“타이번! 살려줘요!”
드래곤 다섯 마리가 날 앞에 두고 튀겨먹을지 삶아먹을지 날로 먹을지 의젓하게 의논하는 환상 속에서 내가 지른 고함소리다. 그건 정말 등골이 쭈뼛 서는 경험이었는데 타이번은 야속하게도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칵! 저 장님을 그냥 절벽으로 인도해 버릴까?
한 번 그렇게 손을 봐둔 장소는 내가 꼭 기억해 두어야 했다. 그걸 지도로 작성해서 성의 경비병들에게 알려줘야 되기도 했거니와, 타이번은 매일 그 장소에 들러서 마법을 갱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연력은 한곳에 비정상적으로 마력이 집중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 ‘이라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 리를 하면서 말이다.
결국 그 마법의 부비 트랩은 뭔가를 낚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부비 트랩을 설치한 장소로 다가가다가 그야말로 머리털이 곤두 서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타이번과 내가 겁에 질려서 오거가 아닐까, 혹은 가고일일지도 몰라, 저 소리로 미루어보아 어쩌면 라미아일지도…… 등등의 의견을 교환하며 조심 스럽게 다가가자 제미니가 죽어라고 도망다니는 꼴이 보였다. 그런데 그 계집애는 10큐빗 반경의 원을 그리면서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뛰고 있었다. 제미니는 구조되고 나자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우리 둘을 분해 죽겠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제미니, 도대체 이곳에는 왜 온 거야?”
“그냥 두 사람 뭐하는가 구경하려고…….”
‘호기심은 발견의 첩경이지만 몸을 망치는 첩경이기도 하다.’는 괴상한 말을 씨부렁거린 타이번은 우리의 순찰 행렬에 제미니를 동반시켰다.
오후가 되면 우리는 산트렐라의 노래로 돌아온다. 타이번은 한 번도 똑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모험담으로 벌써 마을 꼬마들과 주당들 의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후에는 꼬마들에 둘러싸여 있고 저녁에는 주당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난 조수 업무가 끝났으므로 오후에는 양초 를 마을에 돌리는 등 평소의 일을 하거나 검술 연습을 하거나 한다. 말이 좋아 검술 연습씩이나 되지만 그건 우리 아버지의 창술 연습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날도 그렇게 순찰을 마치고 오후의 임무로 돌아가려던 참이다.
천둥소리? 설마. 난 겁에 질려서 그 고함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마을 동편의 야산 쪽이었다. 순간 그 장소에 설치해 둔 마법이 기억났다. 근 처를 지나가면 불꽃이 날아들게 되어 있는 곳이다. 타이번은 날카롭게 말했다.
“제미니는 여기 있나?”
“……예.” 제미니의 화난 대답.
“그럼 제미니는 아니군. 드디어 뭐가 걸린 모양인데?”
“정말 귀신 같군요. 그쪽으로 들어올 거라는 걸 어떻게?”
“말했잖아. 나라면 들어올 위치라고 생각되는 곳에 설치했어. 자, 가보자. 제미니? 우리 둘이 먼저 가볼 테니까 성으로 가서 경비대를 파견시켜 줘. 우리들을 지원하도록 말이야. 하지만 저것이 양동 작전일지 모르니까 마을 자경대는 지원하지 말고 마을을 잘 지키게 하라고 말하도록.”
“너무 길어요!”
“경비대는 야산으로 오고, 마을 자경대는 꼼짝말고 마을에 있으라고 전해.”
“알았어요!”
곧 제미니는 치마가 뒤집어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타이번이 날 말렸다.
“뭘 생각하는 거야? 장님 마법사와 애송이 전사가 전설이라도 만들어보겠다는 거야? 천천히 주의하면서 가자. 경비대들이 따라오도록.”
“하지만 놈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그건 어려울걸?”
뭔 소린가 싶어 되물어보려는데 곧 저 멀리 야산 쪽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니, 섬광이다. 어쨌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강력한 빛이 번쩍거렸다. 난 눈을 감았지만 타이번은 보이지 않으므로 느긋하게 말했다.
“뭔 놈들인지 모르지만 뒤로 돌아 줄행랑을 치고 싶을걸? 내 특기는 마법의 연결이야.”
“그게 무슨…… 허억!”
맙소사! 하늘을 본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구름이 야산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설마 벼락이 치지는 않겠지? 콰광! 흠. 벼락이 치는군.
“저긴 아마 쑥대밭이 될 거야. 웬만한 놈들이라면 기절해 버릴걸.”
그런데 타이번도 이번엔 틀렸다. 거친 포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웬만한 놈들이 아니군. 빨리 가자, 후치!”
“옙! 이거 잡아요!”
난 바스타드를 내밀었고, 타이번이 그것을 쥐자마자 그대로 타이번을 인도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린다고 하기는 하지만 장님인 타이번이 얼마 나 빨리 뛰겠는가. 우리는 구보 정도의 속도로 달려갔다.
마을을 벗어나자 포효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 동안 놈들도 달려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놈들은 아마 마을을 기습할 계획이었지만 타이번의 부비 트 랩에 걸려 기습하는 데 실패하자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난 멀리서 달려오는 그것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다리가 안 움직인다!
“종류가 뭐야?”
“황소 대가리에 몸은 사람 몸인데 7큐빗도 넘겠는데요.”
“아이구 맙소사, 미노타우로스잖아? 몇이야?”
“열……둘! 열둘이요!”
“우라질! 이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마을이야! 미노타우로스가 한 놈도 아니고 열둘이나 나타나다니!”
미노타우로스들은 우리들을 발견하자 거대한 배틀 액스를 들고 포효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창피한 말이지만 그야말로 사타구니가 뜨뜻해질 것 같 다. 땅이 울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저 배틀 액스는 넓이가 내 가슴만 하고 길이도 거의 내 키만큼은 되겠다. 사람이 쓴다면 그레이트 액스겠지 만 미노타우로스가 들고 있으니 배틀 액스다. 얼씨구? 저런 걸 한 손으로 휘두르고 달려오다니. 놈들은 타이번의 마법에 걸려 군데군데 상처를 입고 어떤 놈은 벼락에 맞았는지 검게 그슬려 있었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와 방향!”
난 재빨리 타이번의 오른손을 잡아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350큐빗, 아니, 330큐빗, 아니아니 300큐빗…….”
제기랄! 달려오고 있으니 거리가 계속 바뀐다. 타이번은 씩씩거렸다.
“제기, 눈이 안 보이니 매직 미사일 같은 초급 주문도 못 쓰잖아.”
타이번의 몸에 있는 문신들이 번쩍 빛을 내었다. 미노타우로스들은 놀랐지만 더욱 발광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놈들도 아마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우릴 후려칠 모양이다. 정말 타이번을 내버려두고 뒤로 돌아 달려가고 싶은데. 보이지도 않는 타이번이 정말 부러웠다. 타이번은 스펠을 읊조리다가 두 팔을 앞으로 쫙 뻗었다.
“에라, 내 눈이 안 보이면 다른 눈으로 하지 뭐!”
그때였다.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던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도저히 시간 내에 달려오지 못할 것 같자 그 배틀 액스를 집어던졌다. 놀랍게도 그 묵직 한 배틀 액스는 곧바로 타이번에게 날아왔다.
“죽어보자!”
나는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바스타드 소드를 뽑으면서 칼집은 던져버리고 칼은 바로 아래로 내리쳤다. 쾅! 아이고, 내 손목! 간신히 배 틀 액스의 궤도는 바꿔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정말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속도로 날아오던 그 엄청난 것을 치고 나니까 팔이 통째로 떨어 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타이번은 눈 한 번 꿈쩍하지 않고(뭐가 보이냐!) 캐스팅을 마쳤다.
“적을 분쇄해! 발러!”
뭐냐, 이건! 검은색으로 번쩍거리는 10큐빗짜리 덩치가 앞에 나타났다.
나는 주저앉아서 지독한 유황 냄새를 풍기는 검은빛 연기에 휩싸인 10큐빗의 인간형 괴물을 바라보았다. 머리엔 미노타우로스가 형님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장대한 1큐빗짜리 뿔이 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놈이 쓰고 있는 투구의 뿔이었다. 온몸은 그야말로 칠흑의 갑옷이다. 너무나 검어서 윤곽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도대체 옷인지 살갗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발러라는 그놈은 왼손에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들고 있고 오른손엔 거대한 스커지를 들고 있었다. 스커지는 아홉 마디의 캣오나인테일인데 곳곳에 날카로운 금속 스파이크가 달려 있다. 저걸 한 번 후려치면 가죽이 깨끗이 날 아가겠는데.
그 발러라는 놈이 등을 돌리고 있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찰나, 놈은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얼굴이 없었다! 투구 아래에 보이는 것은 검은 칠 흑뿐이다. 내가 간혹 악몽 속에서 보는 그 무한대의 칠흑이었다.
“적은?”
발러는 타이번에게 질문하는 듯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난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질겁했다. 타이번은 악을 썼다. “야이, 머저리야! 저 미노타우로스 아니면 뭐겠어?”
“형식은?”
“멸절!”
발러는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 뭐? 날아? 놈은 날아가고 있었다. 등에서 갑자기 칠흑의 날개가 펼쳐지고 그대로 날아오른 것이 다. 그 날개는 작게 잡아도 12큐빗. 그놈은 우아하게 약 4큐빗 정도 위로 날아올라 그대로 미노타우로스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쐐애액 하는 공기 가 르는 소리.
“쿠우우웃!”
미노타우로스는 포효하면서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하지만 발러는 가벼운 동작으로 땅에 내려앉자마자 스커지를 휘두르더니 미노타우로스의 배틀 액스를 쥔 팔을 잡아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스커지를 당겼다.
크직! 콰지직!
미노타우로스의 팔은 깨끗이 절단되었다. 놈은 오른손의 스커지를 다시 휘두르면서 왼팔은 반대쪽으로 휘둘렀다. 왼손의 클레이모어는 단숨에 미노 타우로스의 허리를 날려버렸고 오른손의 스커지는 또 다른 미노타우로스의 목에 감겼다. 발러는 스커지에 감긴 미노타우로스를 통째로 휘두르기 시 작했다.
“쿠우엑!”
발러는 고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스커지에 매달린 미노타우로스를 악동들이 개구리 휘두르듯이 휘둘렀고 곧 주위에 있는 미노타우로스 들이 퍽퍽 튕겨나갔다. 발러는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오른손의 미노타우로스를 모닝스타처럼 휘둘러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리고 발로 쓰러진 미노 타우로스를 밟고 왼손의 클레이모어로 지팡이질을 하듯이 쿡쿡 찔렀다. 장관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무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시원스럽게 싸우는데?
“저게 뭐야……?”
내 목소리가 아니다. 어느 새 달려온 경비병들이 우리 뒤에까지 와 있었다. 경비병들은 하도 기괴한 장면을 보자 함부로 달려들진 않았다. 그래서 난 빠르게 설명했다.
“저 시커먼 놈은 타이번이 불러낸 놈이에요! 우리 편이죠!”
경비병들 중에 터너가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 편이란 말이지? 정말 우리 편으로 삼고 싶진 않은 놈인데. 저건 발러잖아?”
“어? 터너, 저걸 알아요?”
경비병들도 터너를 바라보았다. 터너는 타이번을 보면서 말했다.
“마법사님. 제가 보기엔 발러인데요? 채찍만 봐도 알겠는데, 맞습니까?”
“맞아.”
“그런데 어떻게 아비스의 발러가 우리를 돕고 있습니까?”
“내가 불러냈다고 후치가 그랬잖아?”
터너는 입을 쩍 벌렸다. 경비병들과 나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터너는 그런 우리들은 본체만체하고는 타이번에게만 말했다.
“아니, 저건 정령도 아니고 악마잖습니까?”
“허어? 제법이군. 엘프들의 정령 소환도 아는가.”
“상식 수준으로…… 그런데 어떻게 저걸? 저건 소환하고 어쩌고 할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인간처럼 그냥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맞아. 잠깐 아비스의 미궁에서 내가 여기로 옮겨온 거야. 소환은 아니지. 공간 이동이야.”
“그런데 옮겨왔다고 저놈이 왜 싸워주는 겁니까?”
“약속 때문이니까.”
“무, 무슨 약속인데?”
“간단한 거야. 내가 원하는 놈을 박살낸다는 약속. 바꿔 말하면 난 놈에게 피를 제공하는 거지. 지금 신나게 미노타우로스들의 피를 받아내고 있을 텐데.”
어느새 발러는 미노타우로스들을 깨끗이 물리쳤다. 달아나는 놈들도 있었지만 발러는 타이번의 말대로 끝까지 따라가 ‘멸절시켰다. 사람이라면 수 십 명이 달려들어도 하나를 상대할까 말까한 그 미노타우로스를 저렇게 간단하게 처리하는군.
마지막 미노타우로스가 처절한 비명(그 비명의 반은 피였다.)을 쏟아내자 발러는 그대로 돌아섰다. 마치 자기가 한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투였다. 발 러는 후드득 날개를 펼치더니 이쪽으로 날아왔다. 하늘이 캄캄해지는 것 같은데.
병사들은 기겁해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물러나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나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발러는 타이번 앞에 내려서더니 병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허공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놈들도?”
그 의미를 알아들은 나는 파랗게 질려버렸지만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타이번은 당황해서 말했다.
“뭐? 이놈아. 아냐!”
“그럼 돌려보내 다오.”
“뭐야? 급한 일이라도?”
“내 미궁에 들어온 모험자들이 있다. 그놈들을 부수고 있었는데 네놈이 날 부른 것이다.”
“그래? 흠…… 갑자기 텔레포트 워프 스펠이 생각나지 않는데.”
갑자기 발러는 미노타우로스의 피로 젖어 있는 그 스커지를 위로 확 쳐들었다. 난 숨막히는 비명을 질렀다. 발러는 그대로 타이번을 내려칠 자세로 서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타이번은 계속 히죽거릴 뿐이었다.
발러는 팔을 들어올린 채 그렇게 서 있었고 병사들은 죽을 각오로 달려들 태세였다. 그러나 발러는 잠시 후 스커지를 다시 내렸다.
“생각해 내라.”
“네 목소릴 듣자니 돌아가면 그 모험자들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릴 생각인가 보군?”
발러는 잠시 말없이 타이번을 내려다보더니 침울하게 말했다.
“잘 들어라, 타이번. 넌 옛날의 타이번이 아니다. 마법사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어떻게 아직껏 살아남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발러의 말소리는 마치 형체를 지닌 것이 피부를 스치는 것처럼 나와 병사들을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타이번은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옛날의 너에게 약속했을 때는 어쩔 수 없어서였다. 피 대 폭력. 그렇게 나쁜 계약도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의 넌 내 손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죽 일 수 있다.”
“그런데?”
“날 돌려보내 다오. 내가 아직껏 너에게 약속을 지키고 있으니, 너도 날 명예롭게 대해 다오.”
타이번은 싱글거리며 스펠을 외더니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꺼져, 재수없는 악마 녀석. 그 모험자들 지금쯤 도망갔겠지.”
발러는 나타났을 때처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사라졌다. 역시 지독한 유황 냄새가 풍겼다.
발러가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들이 있는 들판에 정상적으로 태양이 내리쬐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러가 있는 동안에는 해가 비치고 있어도 마치 한 밤 같았다. 어쨌든 난 놈이 사라지고 나서야 안심하고 기절할 자세를 취했지만 타이번은 날 불렀다.
“가자, 조수. 미노타우로스들의 시체를 정리해야지. 그리고 놈들이 터뜨린 마법도 다시 걸어둬야 하고.”
“타이번…… 나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이지도 못하겠어요.”
“이런 불성실한 조수를 봤나. 확 갈아치워 버릴까?”
“뭐예요? 누구 때문에 당신이 살았는데!”
“응? 무슨 이야기야?”
“아까 당신이 캐스팅할 때 미노타우로스가 도끼를 던졌다고요! 그걸 내가 막아내지 않았으면 당신은 벌써 골로 갔어!”
타이번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이봐, 이 근처에 정말 배틀 액스가 있나?”
“하나 있는데요.”
터너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튕겨낸 배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그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굉장한 무겐데?”
타이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거, 후치가 내 생명의 은인이군? 좋아! 원하는 걸 말해 봐. 그럼 들어주지.”
“정말요?”
“하지만 황당한 소원을 말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우선 일을 하자고. 시체 더미에 모여드는 건 파리만이 아니지.”
우리는 발러가 저질러둔 참극의 현장으로 다가가서 미노타우로스들의 시체를 모아 태워버리고 그 무기들을 수거해 왔다. 미노타우로스의 배틀 액스 는 인간이 쓰기엔 너무 거대했다. 아마 몇 개는 전리품 삼아 놔둘 테고 나머지는 용광로에 집어넣어 재생하여 쓰겠지. 미노타우로스의 시체 더미는 엄 청나서 불은 꽤 오랫동안 타올랐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 와서 구경한 다음에야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나는 동네 소녀들의 영웅이 된 자신을 발견했다.
도대체 말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난 스펠을 외우느라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던 타이번을 목숨을 걸고 지켜낸 전사가 되어버렸다. 뭐, 틀 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죽었다 깨도 빗발처럼 날아드는 열 개의 배틀 액스를 쳐낼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내가 팔이 열 개냐?).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제미니는 갑자기 비상 상태에 들어갔다. 소녀들이 시도때도 없이 내게 접근하자 제미니는 완전히 울상이 되어 날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나에겐 주 위의 소녀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뭐가 좋을까? 음, 마법 양초 제조기를 만들어달라고 할까?”
“후치…… 그것, 너무 조야하잖아?”
제미니의 말이 맞다. 어, 이거 정말 문제네. 타이번은 내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소원을 말하면 좋을까? 제미니가 의견을 제시했다. “그냥 간단하게 돈을 달라고 하면 어때?”
“돈? 싫어. 폼이 안 나. 세상에 공주를 구출한 용사가 돈을 달라는 것 봤어?”
“그건 이야기잖아.”
“그래도 싫어. 어디 보자. 내 검에 마법을 걸어달라고 할까?”
“그것도 옛날 이야기네. 마법검으로 뭐할 건데?”
“응? 그, 글쎄?”
그러고 보니 내가 마법검을 가졌다고 해서 그걸로 뭐 뚜렷하게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야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고 아마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계속 영주님과 그 자손들에게 초나 상납하게 되겠지. 그리고 정말 재수가 없다면 제미니와 결혼하여 자식에게 초 만드는 거나 가르치겠지. 어쨌든 그 어느 부분에 마법검이 들어갈 곳은 없다.
“에이! 모르겠다. 힘이 세지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제미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힘이 세면 편하잖아. 무거운 것 드는 것에서부터 기름 부대 나를 때도 편하고, 뭐 절대로 나쁠 건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팔굽혀펴기 하기 귀찮았는 데.”
“그래도…… 너무 동물적이야.”
“그러냐? 그럼 어때. 넌 동물 아냐?”
“무슨 의미야!”
더 이상 생각해 내기 귀찮은 참에 정말 그럴듯한 생각을 떠올려서 기뻤다. 난 그 길로 제미니와 함께 산트렐라의 노래에 죽치고 있는 타이번을 찾아 갔다. 타이번은 내 소원을 듣더니 먼저 한참 웃었다.
“이유가 뭔데?”
“짐 나를 때도 편하고, 일할 때도 편하고.”
타이번은 내 이유를 듣더니 또 한참 웃었다. 뭐가 우스운 거야? 타이번은 눈물을 좍좍 흘리며 웃더니 나에게 자기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타이번의 방에서 가방을 가져다주자 타이번은 직접 그걸 열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타이번은 손끝의 감각으로 찾으면서도 꽤 수월하게 자기가 찾는 물건을 찾아내었다.
“그거 너 가져.”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올린 물건은 희한하게 생긴 장갑이었다. 이게 뭐야? 무슨 약이라도 주는 줄 알았더니 웬 장갑이야? 그것은 검정색 가죽 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손등 윗부분과 손바닥 쪽으로는 작은 은빛 쇠고리들이 연결되어 표면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쇠고리인 데다가 손등과 손 바닥 이외의 부분은 자유로워서 기사들의 건틀릿처럼 손을 움직이는 데 불편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주위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 고 있는 가운데 나는 그 장갑을 양손에 찼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지만 평소와 다른 이질감 이외엔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난 타이번에게 물어보았 다.
“이게 뭔데요?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타이번은 키득거리더니 제미니에게 펍 한귀퉁이에 있는 장작을 가져오게 했다. 제미니가 하나 가져다주자 타이번은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양쪽으로 당겨봐.”
뭔 말이야? 꺾는 것도 아니고 당겨보라니. 난 얼떨떨한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고 양쪽으로 당겼다. 장작은 두 개로 나눠졌다.
“히이익?”
해너 아주머니의 감탄사였다. 난 내가 한 일이 믿어지지 않아서 양손에 든 장작개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뭐, 뭐야, 이거?”
“흠, 이번엔 양손에 힘을 줘봐.”
타이번은 그렇게 말했다. 난 얼떨결에 손에 힘을 주었다. 파직! 장작은 단숨에 갈라지며 이쑤시개처럼 되었다. 난 그 장작개비들을 쥐어짜버린 것이 다.
“후에엑?”
이건 제미니의 감탄사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와 그 쪼개진 장작개비들을 바라보았다. 주당들 중에 하나가 당황한 표정으 로 자기가 들고 있던 청동 술잔을 내밀었다.
“이봐, 후치. 이것 한번 양쪽으로 당겨봐.”
“안 돼!”
해너 아주머니의 제지는 늦었다. 난 어느새 그 술잔을 깨끗이 반으로 나누어놓았다. 마치 무슨 사과 쪼개듯이 청동제 술잔을 쪼개버린 것이다. 그 모 양을 보던 주당들은 모두 질겁한 표정이 되더니 술잔을 잡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어림없지. 술잔이 무슨 천쪼가리도 아닌데 양쪽으로 갈라질 일은 절 대로 없다. 집어던지거나 망치로 후려쳐 우그러뜨리는 거라면 몰라도 그걸 정확하게 반으로 쪼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구.
그런데 난 그렇게 한 것이다!
“뭐, 이런 괴물딱지 같은 장갑이……?”
“명심해. 그건 물리적인 힘만 좋아지게 만드는 거야. 건강이나 정력 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거야. 그러니 아가씨들 기쁘게 해줄 일은 없지.”
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제미니에게 꼬집혀버렸다. 제미니는 타이번에게 악을 썼다.
“타이번!”
“알았어, 알았어. 어쨌든 후치 네가 말한 대로 짐 나르는 데는 썩 좋을 거야. 네 팔은 이제부터 살아 있는 곰에게서 심장을 뽑아낼 정도의 힘을 낼 테 니, 잘해봐. 빵을 가루로 만들어버려 배를 곯게 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고 먹을 땐 그거 벗어.”
“아, 예…… 그런데 이거 꽤 귀한 것 아녜요?”
“아무리 귀해도 내 목숨만큼 귀하진 않아. 부담 없이 가져버려.”
“그럼 부담 없이 가져버릴 거예요? 돌려달라고 하기 없기?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됐지? 나 원 참. 소원을 들어준 일이 많지는 않지만 이런 단순 무식한 소원 들어주기는 또 처음이네.”
“제가 해드릴게요!”
“맡겨줘!”
“내가 해줄까?”
“이리 줘! 그 정도쯤이야!”
난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면서 내 무지막지한 힘으로 마을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나뭇짐을 들어 날라다주는 일에서부터 공사장에서 기둥 세우는 일, 우물가에서 두레박 끌어올리는 일까지.
그런데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나뭇짐을 들어올리면 나뭇짐이 부스러져버렸고 기둥을 땅에 꽂으면 기둥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 속에 박아 놓았다. 우물에서 두레박을 끌어올릴 때는 두레박이 튕겨지듯이 솟아올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벼락을 끼얹었다.
“후치! 제발 부탁이니 그 장갑 좀 벗고 다닐 수 없겠냐?”
이건 너무 가혹한 부탁이다. 이런 기분 좋은 일을 그만두라니. 하지만 나는 우는 아기를 달래려고 하늘에 살짝 집어던졌다가 100큐빗 정도로 솟아오 른 아기를 간신히 받아내고는 노랗게 질린 그 어머니에게 살해당할 뻔한 다음 그걸 벗을 수밖에 없었다.
“푸하하하!”
바로 그날 저녁 산트렐라의 노래에선 타이번이 껄껄 웃었다. 내가 풀죽은 얼굴로 그날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한 상황 보고를 했던 것이다. 그 옆 에 모여 있던 주당들도 배를 잡으며 웃었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겠다. 으헷, 으헤헤헤!”
타이번은 아예 데굴데굴 구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난 불퉁거리면서 말했다.
“이거 어떻게 힘 조절하는 방법은 없어요?”
“이 녀석아. 자기 힘을 다루는 방법은 자기가 터득해야지. 누구나 스스로 훈련하면서 힘을 얻게 되고, 바로 그 훈련 과정이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힘 에 대한 조절 장치가 되는 거야. 그런데 넌 아무런 훈련 없이 힘을 얻었으니 그 고생을 하는 수밖에.”
흠. 상당히 옳은 말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요. 하지만 좀 문제라고요. 이걸 조절하려면 계속 이 힘을 써야 되는데 힘을 쓸 때마다 사고가 일어난다고요.”
“이 녀석아, 그거야 네가 돌대가리니까 사고가 일어날 일에만 손을 대니까 그렇지. 할 수 없군. 이 마을이 박살나면 안 되니까 내일부터 내가 좀 도와 주마.”
다음날,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산트렐라의 노래에 찾아갔다.
타이번은 분명 도와준다고 했으니 아마 날 지도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마법사의 제자라…… 어감이 참 좋군. 그는 장님인 데다가 마법사이긴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악마 발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이니 아마도 장님 검법의 달인일지도 모른다. 장님 검법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옛이야 기에 보면 흔히 그렇잖아? 그래서 난 무장을 완전히 갖춘 채 산트렐라의 노래에 찾아갔다.
마을 대로를 걸어가는 동안 나를 보자마자 슬금슬금 달아나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쉬어야 했다. 쳇. 어쨌든 산트렐라의 노래에 들어가자 타이번은 항상 그랬듯이 우유 한잔을 마시고 있었다.
“타이번! 가죠!”
“알았다. 원 참, 오늘은 왜 이렇게 신난 거야?”
그리고 타이번과 나는 매일 그래왔듯이 먼저 성으로 갔다. 난 신난 표정이었지만 타이번은 하품을 하면서 느릿하게 걸었다. 성에 도착하자 항상 그렇 듯이 경비병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를 쑤시면서 나오고 있었다. 타이번은 말했다.
“도와주기로 했었지? 터너. 이봐, 터너 있는가?”
터너가 달려왔다. 타이번은 발소리만 듣더니 터너가 말하기도 전에 말했다.
“부탁인데 연병장 좀 정리해 주겠나?”
“예? 무슨 일로…….
타이번은 터너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고 터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저 녀석 대가리로는 그렇게밖에 안 돼. 자네도 어제 저 녀석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들어봤겠지?”
“원 참. 성격도 괴팍하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타이번은 그대로 팔짱을 낀 채 기다렸다. 난 멀뚱히 터너를 바라봤고 터너는 그런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할 수 없지. 이봐! 연병장에 있는 경비 대원, 전부 4열 횡대로 연병장 왼편에 모여 앉아.”
“왜?”
“마법사님께서 끝내주는 거 구경시켜 주신댄다.”
병사들은 기대 섞인 표정으로 물러나 정렬해 앉았다. 터너는 말했다.
“준비됐는데요.”
“그래? 후치. 연병장 한가운데 가서 서도록.”
난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연병장 가운데 섰다. 와! 외로워라. 상당히 주위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위치였다. 타이번은 보이지도 않는 주제
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두 손을 모으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뭐하는 거지?
“우와! 저것 봐!”
병사들은 감탄한 표정이었다. 타이번이 스펠을 외자 곧 내 앞의 땅에서 뭔가가 땅을 빠르게 긁고 지나가는 것처럼 흙이 파바박 튀고 돌멩이가 날렸 다. 난 놀라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윽고 땅에는 도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도형은 거대한 원형이고 그 안에는 복잡한 도형이 그려졌다. 도형이 완성되자 곧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유황 냄새가 났다. 응? 이건 발러를 불러낼 때의 그 냄새인데. 설마 또 발러를 불러내는 건 가? 난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사라지자 그 안에는 뭔가가 서 있었다.
샌슨이다! 아, 아니, 오거다!
무지막지하게 벌어진 어깨, 잘 빠진 허리, 내 허리통만 한 허벅지. 정말 온몸에 ‘파괴’라고 써 붙인 것같이 생겼다. 장대한 체구는 작게 잡아도 6큐 빗. 그런데 어깨 넓이는 거의 3큐빗은 되어보였다. 추악하게 생긴 머리통은 어마어마하게 컸지만 그 어깨 위에 있으니 작아 보였다. 손에는 칼인지 도 끼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희한하게 생긴 검을 들고 있다. 코페시처럼 보이는데. 보통 검과 손잡이는 따로 만들지만 저 코페시는 검과 손잡이가 완전히 하나의 쇠붙이다. 날붙이라기보다는 그저 힘과 무게에 의한 파괴력을 살리는 무기. 정말 딱 어울리는 무기인걸?
난 참으로 짧은 순간에 이토록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타이번은 터너에게 물었다.
“나온 거 같은데, 맞아?”
“마, 마, 맞는데요, 정말 저걸 불러낸 겁니까?”
“됐군. 후치? 잘해봐.”
뭐, 뭐, 뭐라고? 저게 무슨 말이냐? 오거에게 뭘 잘해보란 말이지?
“참, 한 가지 말 안 해 준 게 있는데 말이야, 그 장갑 OPG야.”
“OPG?”
“오거 파워 건틀릿.”
“히엑!”
맙소사!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칼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네드발 군. 몬스터와 인간은 자기 정체성 구현에서조차 차이가 나요. 인간, 자네를 볼까? 어느날 자네가 대로를 걷는데 자네와 똑같이 생겼고 똑같 은 말투를 구사하는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을 봤다고 생각해 봐. 그러곤 자넬 보고는 놀라서 너 누구냐는 식으로 물어온다면, 기분이 어떨까? 미쳐버 릴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탄력적이기 때문에 놀람이 사라지면 먼저 이게 어떻게 해서 일어난 일인지 생각하게 될 거야. 자네에게 자네도 모 르는 쌍둥이가 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몬스터는 정신이 인간만큼 탄력적이지 못해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위협당하면 상대를 맹목 적으로 죽이려 들어. 그래서 몬스터의 능력을 가진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야. ‘샐러맨더의 심장’을 가진 자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 속에서도 안심이지만 샐러맨더를 만나면 위험하지. 그리고 ‘오거 파워 건틀릿’을 가진 자는 골렘과 힘을 겨룰 수도 있지만 오거를 만 났다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된다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제기랄! 그 오거는 놀란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노려보았다. 순간 그놈의 관자놀이가 꿈 틀거렸다.
“크르르르….그 건틀릿!”
돌려드릴게요, 미안해요, 난 이거 OPG인 줄 몰랐어요, 저 장님 마법사가 준 거예요, 저 마법사 좀 보세요,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것처럼 생 기지 않았나요? 그에 비해 볼 때 난 어때요, 이처럼 순진 무쌍한 얼굴을 보셨어요?
왜 말이 한마디도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거지? 오거는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코페시를 들어올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쿠와아악!”
“타이버어어언! 당신, 주우욱일 거야아아아!”
오거는 OPG를 가진 나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코페시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내가 사타구니를 적시지 않고 대신 바스타드를 뽑아낸 것은 내가 생각해 도 참 대견한 일이다. 코페시는 지독하게 느린 검이었기에 난 간신히 그걸 볼 수도, 막아낼 수도 있었다. 쾅! 이게 칼 부딪히는 소리냐? 온몸의 관절이 부러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타이번은 뭐가 좋은지 킥킥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터너는 그저 한숨을 쉬며 앉아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모두 가만히 구경만 해라. 그리고 옆으로 전달.”
터너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왼쪽의 병사에게 뭐라고 말했고 차례차례 전달되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놀란 표정이 되어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원래 마법사란 괴팍한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음. 죽으면 할 수 없고 살아나면 잘 가르친 셈이라는 거군?”
“후치가 죽을 정도면 나서라고?”
“음, 후치. 우리 편하도록 죽더라도 상처는 좀 입혀봐.”
어처구니가 없어진 내 입에선 참으로 지독한 저주의 말이 쏟아져나왔다.
“당신들 모두 첫날밤에 불능에나 걸려버려어어어!”
병사들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런 개 같은! 죽을 정도면 도와준다고? 그럼 지금이잖아?
오거는 내 몸을 가지고 몇 조각까지 낼 수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듯이 달려들었고 난 정신없이 팔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내었다. 냉정한 관찰자가 본다 면 상당히 멋진 장면이었겠지만 난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당하고 있는 당사자였다. 게다가 여전히 힘 조절은 되지 않아서 힘껏 오른쪽으로 팔 을 휘두르면 내 몸 전체가 오른쪽으로 뱅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괴상한 동작을 취했기에 오거의 코페시는 엉뚱한 곳을 가르거나 생각 지도 못한 곳에서 내 바스타드에 막혀버렸다. 하지만 그 코페시를 막아낼 때의 느낌이란…… OPG가 아니었다면 내 팔은 예전에 부러져버렸겠지만 나 와 오거의 현재 힘은 똑같다.
응? 그래. 힘은 똑같잖아?
“이 자식아! 너와 난 똑같은 힘이다! 그렇다면…… 죽어보자!”
“쿠앗!”
우하, 놀라라. 난 내가 저지른 일에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다. 난 오거의 허리에 멋진 검흔을 선사했던 것이다. 피가 뿜어져 나오자 오거는 주춤거리 며 물러났다. 내가 조금만 경험 있는 전사였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겠지만 난 얼이 빠진 채 그걸 보고만 있었다.
“후치, 이 자식아! 지금 달려들어야지!”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오거는 이미 자세를 바로잡고는 코페시를 가슴 앞에 세워들고 날 겨냥하고 있었다. 아이고, 아 까워라! 할 수 없이 나도 오거와 똑같이 바스타드를 앞에 세워들고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무지막지한 칼부림에 이어 싸움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와 오거는 신중하게 발을 움직이며 둥글게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움직이기 시 작했던 것이다. 물론 신중한 건 오거 쪽이었고 난 울상이 된 채로 그저 오거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하지만 내 표정만 빼놓으면 여전히 멋 진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은 감탄했다.
“어쭈! 제법이다, 멋진 발놀림인데?”
“발을 땅에 더 바싹 붙인 채 미끄러지듯이 움직여라!”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어! 당신들 모두 살인 공범이야!”
“개가 짖나? 닭이 우나?”
“타이번 부탁이니까 우린 도와주지 못해. 네가 죽을 정도면 도와줄게.”
“야야, 우리 후치가 만일 재수 없어서 죽으면 누가 제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인지나 정할까? 제비뽑기 어때?”
“앗! 난 싫어. 난 제비뽑기에 약하다고!”
저게 도대체 사람의 정신을 가진 놈들이냐? 내 헬카네스에게 맹세코 오거에게 죽지 않는다면 저 병사들 가만두지 않겠다. 아니, 지금 그렇게 해버릴 까?
“이봐요, 오거 씨. 저 병사들 먼저 손 좀 보고 당신과 싸우면 안 될까요?”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하늘을 가를 듯이 내려쳐진 코페시였다. 이잇! 그건 준비하고 있었어! 난 팔을 휘두르면 내 몸이 통째로 돈다는 것을 이용하기 로 결심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난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치며 오거의 코페시를 튕겨내며 그대로 상체를 한 바퀴 더 돌려 다시 아래에서 위로 올 려쳤다. 오거는 턱 바로 아래에 지나가는 내 바스타드에 질겁하며 물러났다. 검이 왜 짧아진 거야!
“우와! 멋지다, 후치!”
나는 헉헉거리며 물러났다. 사실 내가 해놓고도 의심스러운 동작이다. 내가 정말 그렇게 했나? 그 증거는 곧 나타났다. 허리가 부러질 듯이 아파온 것이다.
“우…… 이거 장난이 아니다.”
허리가 아릿해지니까 정말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걸. 하지만 오거도 턱이 쪼개질 뻔하자 씩씩거리면서도 달려들지는 않았다. 코페시가 워낙 느려 일 격에 날 맞추지 못하면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오거는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앗! 안 돼! 저놈은 나보다 팔이 훨씬 길단 말이야! 적 당한 거리를 주면 내가 더 불리하다. 그렇다면 내 거리로 맞추자!
“에에에랏!”
난 앞으로 달려들었다. 코페시보다 더 안쪽, 그러니까 오거의 팔거리 안에서라면 저놈은 날 어떻게 할 수 없다. 샌슨이 트롤을 상대할 때 그렇게 했 지? 난 바스타드를 마구 휘저으며 돌격해 갔다.
하지만 놈은 나보다는 훨씬 능숙했다. 오우, 젠장! 다리가 날아온 것이다. 난 복부에 성의 기둥만한 다리를 맞고는 뒤로 구겨지듯이 날아갔다. 땅에 뒹굴던 내 눈에 하늘로 솟아오른 오거의 그림자가 역광 속에 시커멓게 떠올랐다. 그놈은 그대로 코페시를 내리칠 모양이다. 하지만.
“죽어보자!”
놈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공중에선 몸을 못 움직인다. 난 허리를 튕기며 바스타드를 곧게 찔러올렸다.
“쿠우욱!”
코페시가 내 머리를 쪼개기 직전, 난 오거가 떨어져내리는 힘까지 이용하여 그놈의 복부를 관통시켜 버렸다. 오거는 입에서 피를 흘렸다. 해냈구나! 그러나 오거는 바스타드에 찔린 채 다시 코페시를 들었다. 아악! 내 검은 오거의 몸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뭐하는 거야? 지금 도와줘야지! 엇, 시간이 없다! 오거는 괴성을 지르며 코페시를 내리쳤다.
“제미니이!”
안녕, 절친했다기보다는 웬수일 경우가 더 많았던 친구들이여. 안녕, 사랑했다기보다는 끔찍스러웠던 내 17년 인생이여. 안녕, 내 솥과 양초 냄비들 아. 이젠 누가 너희들을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닦아주지? 초장이는 초장이답게 살아야 했어. 마법사의 제자가 웬말이냐. 에, 내가 죽어본 사람으로서 죽음에 대해 설명하겠는데, 죽음이란…… 낄낄거리는 병사들의 웃음 속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것?
난 바스타드로 하늘을 찌른 모습 그대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병장에 앉아 있었다. 병사들은 이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터너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헉, 우헥, 요 녀석아. 가짜다.”
가짜란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고 진짜가 아니면 그건 가짜인데…….
“일루전!”
난 땅바닥에 털썩 드러눕고 말았다. 타이번, 타이번! 이 망할 늙은이가 날 속였구나! 아이고 억울해, 억울해 미치겠다. 병사들은 본격적으로 날 놀리 기 시작했다.
“들었어? ‘제미니이!’ 정말 멋지더군.”
“맞아. 야야, 부럽다. 난 누구 이름 부르며 죽지? 어머니?”
“이봐, 후치. 그땐 그래선 안 되지. 나의 영혼의 열쇠를 가지신 고귀한 레이디 제미니여! 이렇게 말했어야지.”
난 눈을 번뜩이며 일어났다. 병사들의 낄낄거림이 차츰 멎어갔다. 이윽고 병사들은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후치?”
난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은 죽을 때 누구 이름 부를 거지?”
돌격 앞으로! 병사들은 연병장을 마구 질주하기 시작했고 난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도망쳐 다니면서 날 놀려댔다.
“제미니! 네 나이트가 우리를 죽이려 들어. 도와줘!”
“우아아아! 그만두지 못해!”
왜 OPG는 다리 스피드는 올려주지 않는 거야! 그날 아침, 난 매일같이 달리기로 단련된 병사들을 쫓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