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8화

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8화

8

성문이 눈앞에 보이자 난 숨이 턱에 닿을 지경이었다. 술기운은 가슴에서부터 입천장을 쾅쾅 때리고 있었고 다리는 얼얼한 게 내 다리 같지 않았다. 취한 채 무감각하게 달려오느라 몰랐는데 나는 다리 곳곳에 상처를 입고 젖어 있기까지 했다. 이상하게 길이 자꾸 구불텅거려 나는 어쩔 수 없이 덤 불숲이나 도랑에 들락날락해야 했던 것이다.

성문 앞에서는 경비병들이 횃불을 든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성 안의 홀로 우리를 안내했고 이번엔 이상하게 성이 흔 들거렸다. 지진인가?

어쨌든 간신히 홀로 들어가자 급히 만든 듯한 자리가 보였다. 깨끗한 홀 바닥에는 짚이 가득 널려 있었고 그 위에는 시트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곳곳에 부상을 입은 병사들 20여 명이 드러누워 있었다.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홀에 급히 자리를 만든 모양이다. 각자 제멋대로의 상처 로 끙끙거리고 있는 그 모습은 끔찍했다. 성의 하녀들이 총동원되어 그들을 돌보고 있었고 하멜 집사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칼도 부상병들 을 돌보고 있다가 우리 모습을 보자 다가와서 말했다.

“타이번 오셨습니까?”

“어떤가?”

“뭐, 걱정하시지는 않아도 됩니다. 이들은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정도의 상처니까요.”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는 제일 끝으로 달려가서 부상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우리 아버 지는 없었다. 내가 거의 반대쪽 끝에 왔을 때, 웬 거대한 덩치 하나가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샌슨!”

샌슨은 무릎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러다가 그는 내 복장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후치? 그 갑옷이랑 바스타드 소드는 어떻게 된 거야? 얼씨구, 장갑도 멋진 걸꼈네? 성의 복장은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말도 나오지 않았는데 샌슨은 팔자좋은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 혹시 우리 아버지 어떻게 됐는지 알아?”

“미안하구나. 난 너희 아버지와 다른 부대여서. 그러니까 우리는 끝없는 계곡에서 절벽 위에 있었고, 에, 그러니까 휴리첼 백작님의 작전에 따라서………….”

“그 멍청 무쌍한 작전은 잘 알아! 먼저 온 사람이 다 말해 줬어.”

“그래? 그럼 나와 너희 아버지는 떨어져 있었다는 것도 알겠구나.”

“그래서? 못 봤어?”

“응. 미안.”

“……미안해. 고함 질러서. 샌슨은 괜찮아?”

“난 괜찮아.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을 뿐이야. 그런데 넌 요즘 취해 있는 경우를 자주 보는구나. 아이고 술 냄새. 부탁 하나 하겠는데 나도 너 마시던 술 좀 가져다주겠니?”

나는 허허 웃어버렸다. 지금 마을까지 도로 내려갔다 오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는 하녀들에게 주방의 위치를 물어본 다음 간신 히 주방을 찾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냉수 한 모금 마시고는 식탁 위에 있던 술병을 찾았다. 주방에는 아무도 없어서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그걸 들고 돌아왔다.

홀 안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샌슨은 아까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샌슨? 여기, 술.”

샌슨은 고개를 들더니 고맙다는 듯이 웃으며 술병을 통째로 입으로 가져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샌슨은 조금씩 떨고 있었다. 술병이 몇 번이나 이 빨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샌슨은 많이 마시지도 못하고 술병을 도로 내려놓았다.

“목마르던 참인데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샌슨. 확실히 아무 데도 안 다친거 맞아?”

“……마음을 다쳤다. 너무 끔찍했어. 해리도, 자렌도 모두 죽었어. 내가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샌슨은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뭐, 항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던 일이지만………… 아무르타트의 브레스에 맞아 녹아내리는 동료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한데.”

“샌슨.”

샌슨은 그저 혼잣말하듯이 계속 말했다.

“귀환길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부상으로 죽어가던 동료들의 신음소리에 미치는 줄 알았어. 치료는커녕 굶어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부상당한 인간 들은 몬스터들의 좋은 목표였지. 계속되는 공격은 악몽 같았다. …몇 명은 내 손으로 죽였어.”

나는 취한 기분에도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살려면 그들을 버려야 했어.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차피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우리 를 따라오던 몬스터들에게 죽임을 당할 테니까. 그들도 납득했지. 고통은 없었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내 손으로 동료들의 목을 치게 될 줄은 몰랐 지.”

“샌슨…….”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왔어야 했는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

샌슨은 다시 술병을 들이켰다. 술의 반은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영주님도 구출하지 못했어. 영주님의 경비대로서 면목이 없구나. 나 살자고 이렇게 성까지 달아나버리다니.”

“그건 걱정 마. 영주님은 안전해.”

샌슨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르타트가 몸값을 받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영주님은 안전할 거라고.”

“그러냐? 어떻게 그걸………….”

“샌슨 앞에 온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다 말해 줬어.”

샌슨의 얼굴에서 비로소 수심 한 자락이 걷혔다.

“그거 다행이구나! 그런데… 그 몸값은 엄청나겠지?”

“짐작해 보겠어? 10만 셀.”

샌슨의 머리로는 그 금액이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 머리로도 그 정도의 금액은 어림짐작도 안 된다. 그는 입을 쩍 벌리더니 한숨 을 쉬었다. “맙소사.”

피곤한 밤이다. 술 마시고 마을에서 성까지 뛰었더니 몸이 물에 젖은 솜같이 무겁다. 난 홀의 한쪽 구석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모두 환자, 또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난 환자도 아니고 환자를 돌보는 사람도 아니다. 난 칼처럼 많은 책을 읽어 약학 에 능숙한 사람도 아니고, 타이번처럼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치료에 나서는 것은 아예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다. 또한 하멜 집사처럼 모르는 것이 없 어서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는 아니지만 도움은 줄 수 있는 수완 좋은 사람도 아니다.

난, 아버지를 잃고, 어두운 성 안의, 홀 구석에 앉아, 외로움에 치를 떠는, 술취한 17세 소년이다.

난 두 다리를 끌어모으고 팔로 껴안은 다음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씩…… 쌕………….

호흡소리, 내 호흡소리. 난 살아 있어. 아버지는 죽었어.

아니야! 빌어먹을, 누구냐! 우리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한 게 누구냐고!

둔탁한 맥박소리. 난 살아 있군, 그리고……………

칼의 말을 떠올리자, 맥박이라, 그러니까, 칼이 말하길, 사람의 고막에는 핏줄이 없다고 한다. 사람의 고막에 핏줄이 지난다면 사람은 심장 박동 소 리에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핏줄이 없다. 놀랍지 않은가?

아버지……………

아버지는 무슨 꽃을 좋아하셨더라? 재수 좋다면 어쩌면 아버지의 무덤은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때 난 무슨 꽃을 가져갈까?

집어치워! 제기랄, 집어치우라고! 뭐하는 거야? 확실해? 아버지가 죽은 게 확실하냐고! 확실해진다면, 그땐 상관없어. 미친 놈처럼 하늘을 보고 짖어 대든지 땅을 뒹굴며 낑낑거리든지, 어쨌든 무슨 개새끼 흉내를 내어도 좋아.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말소리. 사람의 말소리가 다가온다.

“저건 뭐야? 뭐가 저러고 있어?”

“후치야. 마법사를 업고 와서 지쳤나 봐.”

“아니, 아무리 지쳤대도 그렇지. 눈앞에 이렇게 다친 사람이 많은데 저렇게 처박혀 있어? 철이 없군.”

“내버려 둬. 걔 아버지도 정벌군에 참전했어.”

“응?”

“괴로울 거야. 이미 패했다는 것은 아는데,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거든. 아무리 덩치가 커도 겨우 17살이야.”

“쳇.”

말소리. 사람의 말소리가 멀어진다. 무슨 말들을 했더라? 필요없어. 소용없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야.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필요없어. 그 렇다면, 내가 말을 할까?

강물은 낮은 곳으로, 새는 높은 곳으로,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길쌈을 하지. 전사는 앞을 보고, 마법사는 위를 보지. 태어난 이상, 우린 매일 죽어가고 있다.

내 흥얼거림에 맞춰, 나는 잠이 들었다.

“아버지!” 쾅!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난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벽에 머리를 박고 졸도했다고 한다. 아침에 보니 확실 히 홀 한쪽 벽에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물론 내 머리에도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예? 확실한 거죠?”

그토록 노력했던 힘 조절도 까먹고 나는 펄쩍 뛰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아이고 머리야. 어제 부딪힌 데 또 부딪히니까 정말 아프네. 내게 이야기를 해주던 병사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고 칼은 당황한 듯이 웃었다.

병사는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 네드발 씨는 영주님과 휴리첼 백작과 함께 고블린의 부대에 잡혀갔어. 난 죽은 척하고 있어서 잡혀가지 않았지. 그때 고블린 한 놈이 확인 사 살하러 내게 오기에 죽을 힘을 다해 그놈을 베고 달아났지.”

난 너무 기뻐서 머리가 아픈 것도 잊어먹을 지경이 되었다. 나는 그 병사에게 손 대는 일마다 횡재하라는 둥, 절세미인 마누라를 얻으라는 둥, 자손 이 번창하여 8대가 번영하라는 둥 온갖 축복을 다 해주었다. 병사는 히죽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야,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뛰냐?”

“당신도 웬수 같은 여자에게 아양떨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면 그렇게 돼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 다음 난 너무 기뻐서 그대로 괴성을 지르며 홀을 빠져나왔다.

샌슨이 도착한 바로 그 다음날 도착한 패잔병들 중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쁠 데가! 아버지는 역시 요령이 있으시다. 나는 팔짝팔 짝 뛰고 공중제비를 넘고 데굴데굴 구르고, 어쨌든 지나가는 사람마다 저놈은 백 퍼센트 순종 미친 놈이라는 판정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연병장 가운데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웃고 있을 때 샌슨이 다가왔다. 샌슨은 먼지와 흙, 피로 엉망이 되어버린 갑옷 대신 말끔한 옷을 입고 있 었다. 나는 샌슨에게 말하려 했지만 샌슨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들었다. 오면서 보니까 네가 하도 발광을 하기에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었어. 잘됐구나, 후치.”

“응! 역시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죽을 줄도 모르지!”

“……그거 칭찬이냐?”

“그런데 어디 가는 길이지? 좀 쉬지 않고, 게다가 완전 정복 차림이네?”

“전사 통지를 해야지. 내 임무니까.”

난 순간 즐거워했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전사자들의 집안은 잠시 후 울음바다가 되어 있을 테지.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날 보며 샌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미안해할 건 없어. 네가 기뻐하는 것은 전사자들의 가족들이 슬퍼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도………… 너무 내 생각만 한 거 같네.”

“하긴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은 좀 보기 그렇겠지? 미안하다면 들어가서 타이번이나 좀 도와라. 넌 그분의 조수라며?”

“응.”

타이번은 홀 안에서 병사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칼의 말마따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대개 부상은 작았고 그것보다 는 탈진한 상태였다. 여기까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느라 지독하게 지쳐 있는 것이다.

타이번은 이미 몇몇 위급 환자들을 처리하고는 주로 의자에 앉아서 하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나는 타이번의 지시에 따라 가벼운 부상병들 을 자택으로 옮겨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샌슨은 마을로 가는 길에서 나와 만나게 되었고 그는 내 힘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부상병들로 가득 찬 수레를 가뿐하게 끌면서 샌슨을 따라잡 았던 것이다.

“우와! OPG라고? 정말 엄청난데?”

“그래봐야 샌슨 정도지 뭐. 오거의 힘이니까.”

“뭐야! 요 녀석, 입은 그대로군.”

수레에 탄 부상병들도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모두 기쁜 표정이었다. 마을로 들어와서 한 명 한 명을 집 앞에 내려놓을 때마다 그들을 반기며 눈물을 터뜨리는 가족을 보니까 나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내가 끄는 수레는 기쁨을 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내 수레를 보자 수레에 탄 사람들에게 환성을 보냈다. 여! 살아왔군. 걱정해 주신 덕분에, 크레 이, 돌아왔군요! 오, 다이앤! 난 키스하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히죽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정말 신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간혹 샌슨이 전사자들의 집에 멈춰 서 전사 통지를 할 때는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들은 굳어버린 얼굴로 샌슨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악 수했지만 여자들은 샌슨을 붙잡고 통곡했으며 그럴 때마다 샌슨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나나 수레에 탄 병사들의 얼굴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괜찮아!”

“타라니까 그러네!”

마을 끝까지 돌면서 부상병들을 다 내려주고 나서 나는 샌슨에게 수레를 타라고 강요했다. 샌슨은 거절했지만 어차피 성까지 끌고 갈 수레에 한 명 쯤 태운다고 큰일나는 거 아니니까 타라는 내 강요에 못이겨 히죽 웃으며 수레에 탔다.

“자! 달립니다!”

“우앗!”

난 수레가 뒤집어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샌슨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수, 수레 부서지겠다! 임마, 나 여기서 죽고 싶진 않아!”

“그렇지? 너무 느려서 지루해 죽고 싶지? 어디!”

“그아아아아!”

난 샌슨을 좀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샌슨은 어지간히 무서웠나 보다. 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수레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으니까. 난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 웃고 난 나는 수레를 세워두고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갔다. 더 나를 부상병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홀 안에 앉아 있던 타이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칼도 없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하멜 집사에게 다가갔다.

“저, 집사님? 타이번은 어디 갔지요?”

“음, 후치 왔구나? 잘됐다. 따라오렴.”

“예?”

“널 기다리던 참이다. 어서 와.”

부상병들을 실어나르고 온 나를 불러들인 하멜 집사는 놀랍게도 1층 끄트머리에 있는 영주 집무실로 날 데려갔다. 난생 처음 와보는 곳이다. 통로의 오른쪽에는 벽에 걸린 창검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고 왼쪽으로 빛이 안 닿는 곳에는 영주님의 조상님으로 짐작되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아마 햇 빛이 닿으면 초상화가 변색된다거나 하는 이유가 있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걸어갔다.

거대한 나무 문짝을 익숙하게 연 하멜 집사는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실내를 둘러보았고 곧 한숨을 쉬었다. 휑뎅그렁했다. 사방은 그저 밋밋한 석벽이었고 가구라곤 책상과 테이블, 의자 몇 개와 책장이 다였다. 벽 난로 위에 걸려 있는 검과 방패가 유일한 장식물처럼 보였다. 우리 영주님이 가난한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게 영주님의 집무실인가?

거대한 창문 옆으로 놓인 테이블에는 타이번과 샌슨, 그리고 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지만 칼이 곧 나를 불러 앉혔다.

“네드발 군. 이리와 앉게나. 집사님?”

하멜 집사도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주위를 둘러싼 다섯 명 중에서 나와 샌슨은 영문을 몰라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였고 하멜 집사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타이번과 칼은 별 표정이 없었다.

하멜 집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영주 대리로서 말하겠습니다만…………, 칼 도련님? 정말 대리를 맡지 않으시겠습니까?”

샌슨은 기절초풍할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무슨 배짱으로 영주의 숲 속에서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살았겠는가. 그가 칼 헬턴트, 바로 헬턴트 영주의 동생이니까 그렇지. 이건 마을 사람들 중 몇 명과 나만 아는 사실이다.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그럴 자격 없습니다. 형님을 도와드리지도 못했고 그저 숲 속에서 게으름 부리며 살아왔을 뿐. 그리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형이 사라진 지 금 형의 자리를 노리고 달려든다는 식은 싫습니다.”

하멜 집사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샌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눈길을 거두었다. 하 멜 집사는 말했다.

“그럼, 경비 대장 샌슨 퍼시발.”

“예!”

“현재 헬턴트 영지의 상황과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의 패배에 대한 보고를 하고, 국왕 전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므로 누군가 수도 바이서스 임 펠로 가야 한다. 이해하겠지?”

“예!”

“칼 헬턴트 도련님께서 수도로 가실 것이다. 여기에 대한 호위가 필요한데, 알겠지만 지금 성의 병사들은 태반이 부상당해 있고, 가을이 깊어지는 것과 경비대 병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볼 때 몬스터들의 극심한 공격이 예상되므로 호위 병력을 많이 차출할 수 없다. 그래서 칼 도련님은 단신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 이 계절에 혼자 수도까지 여행하신다니. 그래서 너와 또 한 사람이 도련님을 수행해야겠다.”

또 한 사람이라.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후치 네드발 군.”

“알겠어요.”

내 대답에 하멜 집사는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했다.

“나는 정규군이 아니니까 병력 차출은 아니고, 어차피 내 나이로는 자경대에도 못 들어가니까 쓸 만하겠지요. 뭐 좋지요. 그리고 제 아버지 일도 걸 려 있어요. 아마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먼저 졸랐을 거예요. 집사님.”

하멜 집사는 쓰게 웃었다.

“넌 건방진 편이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난 타이번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가 같이 간다면 무서울 게 없겠는데. 타이번은 내 마음을 꿰뚫어보았다는 듯이 말했다.

“웬만하면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말이야. 아무래도 이곳이 염려스러워. 후치? 조심하고 또 조심해. 너야 지금까지 가고일과도 싸워봤고 오거와도 싸 워봤지만 그건 전부 환상이었으니까 현실과는 전혀 다른 거야. 그걸 까먹으면 죽는다. 알겠지?”

“알았어요.”

“제미니는 걱정 말아라. 내가 다른 놈에게 눈길 보내지 않도록…”

“그만!”

칼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특별히 준비할 것 있나? 없는가? 그럼 빨리 출발하도록 하지요. 각자 준비하고 내일 새벽에 내 집으로 와요. 난 내 정체를 알리고 싶지는 않은데, 도와줄 수 있겠지?”

샌슨은 뭔 소린지도 모르면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말했다.

“수도에서 전하를 알현한다든가 자금을 마련해 본다든가 하는 일은 내가 다 맡게 될 거야. 두 사람은 서로 토의해서 여행 준비를 맡아주면 좋겠군. 세 사람이 빠르게 수도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주게나, 퍼시발 군. 마을 사람들이 안심하도록 수도로 간다는 소문을 내는 것은 좋지만 내 이름 은 말하지 말아주게.”

“예! 염려 마십시오!”

하멜 집사는 몸을 일으키더니 책상으로 다가와 열쇠로 서랍을 열고는 상자 하나와 돈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그는 돈주머니를 샌슨에게 주며 준비물 을 구입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상자는 칼에게 내밀었다.

“도장과 임명장입니다. 그리고 기타 헬턴트 영지의 소유 증서와 임산물, 농작물 등의 수취권 증서도 있습니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 되시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샌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내가 앉아 있자 날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서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저, 저.”

“그냥 지금까지처럼 칼이라고 부르게.”

“예, 칼, 말을 타실 순 있으시겠지요?”

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얼굴은 편치 못했다. 말이라고? 나는 타이번에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잠깐! 타이번, 당신은 마법사잖아요? 우리를 수도까지 휙 날려줄 수 없어요? 그래, 공간 이동. 전에 발러를 불러냈을 때 텔레포…. 어쩌고 했잖아

요?”

타이번은 웃으며 말했다.

“요 녀석아! 네가 발러냐?”

“예?”

“설명하긴 어려운데, 난 장님이라서 정확하게 워프시킬 수가 없어. 하지만 발러는 악마 중에서도 대단한 악마이기 때문에 내가 근사치 좌표밖에 설 정하지 못한다 해도 나와 협력하에 올 수 있어. 사실 난 통로를 설정하고 문을 여는 것은 발러지. 그것은 발러가 가지는 게이트 능력과도 상관이 있고…….”

“더 말해도 못 알아들어요. 그만하세요.”

그때 샌슨은 내가 뭐라고 더 말할 틈도 없이 날 끌고 집무실 바깥으로 나왔다. 남은 세 사람은 뭔가 대단한 토론을 나누고 있겠지만 그건 나로선 알 수 없다. 샌슨은 다급하게 나에게 물었다.

“야, 야. 후치. 넌 별로 놀라지 않던데, 칼이 도대체 누구야?”

“칼이 칼이지. 누구긴 누구겠어?”

“그러지 말고 후치야, 좀 말해 줘.”

“아까 말했잖아? ‘형이 사라진 지금…………. 모르겠어?”

샌슨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영주님 동생이야?”

“정확하게는 이복동생. 그래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거지.”

“아아!”

칼은 우리 영주님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어머니는 성의 하녀였고, 그래서 칼은 일찌감치 자신의 배경에 관심을 버렸다. 그는 어렸을 때 마을을 떠나 꽤 떠돌다가 장성하여 돌아왔다. 자상한 우리 영주님은 그를 친동생처럼 맞이하려 했지만 칼은 사양하고 대신 숲 속에서 조용히 살게 해달라고 부탁 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궁금증 속에 칼은 그렇게 신비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엔 내 차례인데. 말을 타고 갈 거야?”

“당연하지. 그럼 그 먼 길을 걸어가려고? 갔다오면 대여섯 달은 지나겠다.”

“그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 안 된단 말이야.”

“무슨 말이야?”

“나 말 탈 줄 몰라.”

샌슨은 벙긋 웃었다.

“괜찮아. 처음부터 잘 타는 사람 있냐? 천천히 익숙해질 거야.”

“흠…….”

“조언 하나 할게. 말은 자기 주인을 알아보게 만드는 게 중요해.”

내 눈에서 빛이 번뜩였지만 샌슨은 보지 못했다.

마구간의 말지기 오넬은 내가 수도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야 된다는 사실을 듣자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아, 내가 더 놀랄 지경이야. 그 는 머리를 휘두르더니 마구간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샌슨은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와 칼이 탈 말을 준비해야 되는데, 말지기 오넬은 훈련이 끝나고 아직 배정이 되지 않은 말 이 몇 마리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보여준다고 해서 내가 고를 줄 아나?

난 말지기 오넬에게 말했다.

“이봐요. 내가 당신에게 순수 파라핀 양초하고 혼합 양초를 보여주고 골라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오넬은 껄껄 웃더니 내 체격을 살펴보고는 직접 한 마리를 골라왔다. 밤색으로 잘 생긴 놈이었다. 샌슨이 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형마 ‘슈팅스타’에 비해 볼 땐 작아 보였지만 난 저런 끔찍스럽게 큰 말은 싫은걸. 난 말을 가만히 노려보았고 그놈도 날 가만히 노려보았다.

말의 눈은 이상하다. 눈꺼풀이 동그란 그 모습은 뭐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심술궂고 사나워 보이기도 한다. 난 이번엔 약간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낀 채 째려보았다. 말은 투레질을 했다. 푸르릉.

샌슨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후치. 넌 오늘 저놈과 어울려라. 준비는 내가 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자신의 말을 몰아 그대로 가버렸다.

오넬은 싱긋 웃더니 안장과 마구 등속을 가져와 내 앞에 놓았다. 난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았고 오넬은 시범을 보였다. 재갈 물리고, 정수리끈 당기 고, 턱끈 매는 방법, 제킨 얹고 안장 올리는 법, 뱃대끈 매고 가슴끈 묶는 법으로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보였다. 오넬은 천천히 동작을 보여준 다음 다 시 다 풀어 내려놓더니 내게 직접 해보라고 했다.

좋아. 해보지.

나는 재갈을 들고 말의 입에 넣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오넬이 할 때는 순순히 입을 열던 말이 내가 다가가자 머리를 흔들며 물러난 것이 다. 난 의심스러운 눈으로 오넬을 바라보았지만 오넬은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난 손가락을 꺾었다. 주인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고 했지?

“좋아, 어쨌든 난 널 좀 타야겠다. 네가 반항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 관계가 유쾌할 것이다. 알았냐?”

오넬은 내 근사한 모습에 배를 잡고 웃었다. 난 콧방귀를 뀐 다음, 말의 목을 휘어감았다.

“으랏차!”

난 말의 목을 겨드랑이에 단단히 낀 채 다른 손으로 강제로 재갈을 물려넣었고 오넬은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반항하려 했지만 내가 끼고 있는 장갑이 뭐냐? OPG 아니냐? 나는 계속해서 재갈을 쑤셔넣어 적당한 위치에 오게 한 다음 재갈 끈을 묶었다.

그리고 나는 물러나서 안장을 들어올려 보였다.

“자, 이젠 이거다. 또 반항하면 무릎을 꿇려놓고 맨다. 알겠지?”

말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어이구, 돌겠네.

한참을 씨름한 끝에, 말은 나를 좀 알아모시는 듯했다.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의 고초는 말도 못한다. 난 말의 뒷다리에 여러 번 걷어차였고, 말도 나 에게 여러 번 걷어차였다. 오넬은 머리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렇게 어울리는 말과 기수는 처음 보겠군.”

어쨌든 놈은 이제 순순히 내가 매는 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재갈을 물리고 머리끈을 정리하고 턱끈을 맨다. 제킨을 얹은 다음 안장을 올린다. 그리 고 뱃대끈과 가슴끈을 적당히 조인다. 이 적당히라는 부분이 어려웠는데, 난 어느 정도로 조이면 되느냐는 질문에 무조건 적당히 조이라고 대답하는 오넬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누가 나에게 양초를 골 때의 불 세기를 물어오면, 나 역시 적당히 하라고밖에 대답 못하겠다.

“이제 타면 돼요?”

마구 얹는 법 배우다가 벌써 오후가 되었다. 하지만 내일 아침 출발이니 시간이 없다. 오넬은 내게 안장에 올라앉는 법을 지도했다. 놈은 이제 상당 히 순해져서 오르는 법을 배우는 것은 간단했다.

오넬은 재갈에 기다란 밧줄을 매더니 나에게 달려보라고 했다.

“아니, 밧줄을 매어놓고 어떻게 달리라는 겁니까?”

“둥글게 달려.”

나와 말은 오넬을 중심으로 둥글게 걷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나는 말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타고 있는 셈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넬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안 떨어지는 법부터 배워.”

그리고 갑자기 오넬은 무슨 지시어를 내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말은 좀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당장 흔들림이 좀 심해졌다. 나는 더럭 겁 이 나서 고삐를 놔버리고 말의 목을 껴안았다. 오넬은 혀를 찼다.

“다리에 힘을 주고, 상체는 가볍게 흔들리도록 내버려둬.”

다리에 힘을 줘? 상체는 흔들리도록 내버려두라고? 난 허리 위로는 축 늘어뜨리고 발은 등자를 꽉꽉 밟기 시작했다. 한결 편해졌지만 내 허수아비 같은 몰골은 오넬을 퍽 우습게 만든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두어 번 떨어진 다음에 간신히 요령을 터득했다. 다리 아래의 충격이 허리에서는 사라져 야 된다. 등자를 밟고 있는 발과 무릎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리듬을 타듯이, 부드럽게.

그러자 오넬은 고삐 쓰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단순했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고삐를 살짝 당기며 다리로 살짝 신호를 주면 된다. 그리고 멈추고 싶으면 체중을 뒤로 실으며 고삐를 위로 당기고, 달리고 싶으면 체중을 앞으로 실으며 등자로 배를 차고.

오넬은 속성으로 가르치기로 결심했는지 내가 한 시간쯤 그렇게 달리고 나자 곧 쉴 틈도 안 주고 밧줄을 풀고 그냥 달리게 만들었다. 밧줄이 풀리자 이놈은 심술이 되살아났는지(하긴 내가 그 위에 있으니 난 완전히 말 마음대로다.), 마구 반항하기 시작했다. 난 놈의 반항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놈 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아이고! 갑자기 말이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걷어차는 것은 출발이다! 멈추는 건 뭐더라? 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을 멈추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말이 갑자기 멈추자 내 몸은 그대로 앞으로 휙 날았다. “으악!”

오후 늦게 내가 어쩌고 있나 구경하러 온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하고 싸웠냐?”

난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오넬은 내가 타던 말을 보여주었다. 말은 온몸에 거품 같은 땀을 내뿜으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저놈 이름을 제미니로 짓겠어요.”

말과 나는 서로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았고, 오넬과 샌슨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