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9화
9
하루 일을 마치고 집 앞 의자에 앉아 쉬던 마을 어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네 꼬마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고 소녀와 처녀들은 손을 모아쥐 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도 몸이 결려서 말에 타고 있어도 온몸이 아팠다. 하긴 그 사정은 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샌슨과 나는 말을 몰아 마을 대로로 내려왔던 것이다.
“우와!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후치 경께서 말을 탔네?”
난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서글픈 미소를 지어주었다. 온몸이 뻣뻣해서 팔도 못 들어주겠다. 그때 마을 광장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채 꼬마들과 어울려 깡총깡총 뛰면서 놀고 있는 제미니가 보였다. 정말 못 말리겠다. 제미니는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싶어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와아!”
마을 사람들은 모두 환성을 질렀다. 아마 옛날 이야기에서처럼 내가 제미니를 안아올린 다음 그대로 그녀를 안장에 앉히고 석양을 향해 달려갈 것이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 없다. 그러고 싶어도 못한다. 몸이 아파 죽겠는데!
제미니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곧 나에게 걸어왔다. 나와 제미니 사이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얼씨구, 정말 행동 통일이 잘되는 사람들이다. 제미니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더니 말의 뺨을 쓰다듬었다.
“예쁘네…………. 이름이 뭐야?”
“제미니.”
제미니(사람이다.)는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마을사람들은 킥킥거렸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고! 제미니는 발그레한 얼굴을 어떻게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머리를 만졌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에 꽃이 꽂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이구, 철부지.
제미니는 그 꽃을 뽑더니 말의 귀에 꽂아주었다. 놀랍게도 제미니(말이다.)는 얌전히 꽂아주는 대로 있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 그때 난 무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여자란 원할 때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전까지 마을 꼬마들과 깡총거리며 뛰어놀던 제미니가 무슨 성 녀나 된 것처럼 가냘프면서도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다.
“내 이름을 가진 말아. 이 꽃을 너에게 주니 주인을 잘 모셔다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똑똑하게 말했다. 그러곤 제미니는 뒤로 돌아서 달려가 버렸다. 마을사람들은 다시 환호성을 올렸고 난 혼 절하고만 싶었다.
난 그 즉시 산트렐라의 노래로 체포되어 갈 뻔했다. 샌슨이 아니었다면 난 그날 밤이 새도록 술에 절어버렸을 것이다. 샌슨은 준비할 게 많다면서 우 리에게 몰려드는 마을 사람들을 점잖게 물리쳤다.
샌슨은 잡화점에 들렀고 아까 사두었던 물건을 달라고 했다. 말에 다는 가방과 밧줄, 램프, 그릇 몇 벌, 부싯돌과 발화장치, 바느질 도구, 칼과 쇠꼬 챙이와 삼발이 등 요리에 쓰이는 도구 몇 개, 주전자, 물통 커다란 것 세 개………… 끝도 없다. 어쨌든 그 거창한 짐을 내 말과 샌슨의 말, 그리고 같이 데 려온 칼의 말에 나누어 메우고 샌슨은 자기 집으로 갔다.
대장간의 조이스는 별말도 없이 램프와 냄비, 칼붙이와 손도끼 등을 내주었고 고약과 약초도 내주었다. 그리고 샌슨의 어머니는 건포와 베이컨, 밀 가루, 옥수수가루, 소금, 후추………….. 내가 또 왜 이러지? 어쨌든 그런 것들을 내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차례로 나누어 실었다.
샌슨의 어머니는 저녁을 먹고 자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집안도 정리해 두어야 되고 문도 못질하고 할 일이 많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우리 집에서 푹 자고 싶다. 그래서 난 제미니를 몰아 우리 집으로 향했다.
며칠 성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오래간만에 가는 집이니까 아마 냉랭하고 황량할 것이다. 어차피 오늘만 자고 내일 아침 다시 출발이니 치우기도 귀찮 다. 그냥 저녁이나 대충 챙겨먹고 자야지. 그런데 우리 집에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우리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일까? 아냐. 아버지는 아무르타트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 나는 말을 근처 나무에 묶어두고는 검을 뽑아들고 우리 집으로 다가갔다. 혹시 아버 지가 탈출하셨나? 믿을 순 없지만 만일 그랬다면 아버지는 그래도 병사니까 먼저 성으로 왔을 텐데. 도둑? 에이, 설마. 우리 집에는 뭐 훔쳐갈 것도 없거니와 사실 우리 마을에는 도둑 같은 것이 없다. 도둑이라도 우리 마을처럼 살벌한 곳에서는 영업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근처를 지나가던 떠돌이가 빈집인 줄 알고 들어왔나? 그럴 수는 있겠다. 우리 집은 외진 곳이고 내가 며칠을 비워두었으니까 빈집 냄새가 날 것이다.
‘넌 죽었다. 어디 두고 보자.’
난 살금살금 집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가로 다가섰다. 문을 박차고 들어갈 준비를 하는데 느닷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으어! 엇? 제미니? 푸아!”
아이고, 내 신세야! 제미니는 문을 열고는 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그 멍청한 계집애는 컴컴한 바깥에 서 있는 나를 못 보고 그대로 들고 있던 냄비를 비운 다음에야 날 알아보았다.
“악! 후치? 거기서 뭐해!”
“그건 내가 해야 어울릴 말이야.”
“그럼 해.”
“악! 제미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째 바보가 된 것 같다. 제미니는 까르르 웃더니 곧 집안에 걸려 있던 수건을 찾아와 내게 내밀었다. 나는 낑낑거리며 가죽 갑옷을 벗고는 먼저 몸 을 닦고 나서 갑옷을 닦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갑옷! 그런데 저 계집애는 남의 집에서 뭐하는 거야?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식사 준비. 내일 수도로 간다며? 그래서 뭐 맛있는 거나 만들어주고 싶어서.”
“……날 잘 씻겼으니 이제 잘게 썰면 되냐?”
“어머, 후치는. 가서 몸이나 제대로 씻고 와!”
난 투덜거리면서 일어났다.
“고맙긴 하네.”
“나 아니면 누가 챙겨주겠니?”
난 빙긋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물벼락을 맞고 그대로 옷을 벗은 다음 밖으로 나오니 몸이 와들거렸다. 허엇! 시원하네. 난 짐짓 팔을 휘두른 다음 물통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우에취! 음, 춥군.
나는 대충 씻은 다음 숲 속에 매어둔 또 하나의 제미니를 끌고 돌아왔다. 어라, 우리 집에는 말을 매어둘 만한 장소가 없는걸?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말의 등에서 짐을 내린 다음 긴 밧줄을 가져와 말의 고삐에 묶고는 놈을 작업장에 넣었다. 밧줄이 기니까 배가 고프면 나와서 풀을 뜯고, 목 마 르면 물 마실 수 있겠지.
난 밖에 묶여 있는 제미니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예의를 아는지라 참 잘 먹었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마을을 떠날 때 환송식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비록 그 사람의 요리 솜씨가 좀 고약하다 할지라도 그 성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지 않은가.
제미니는 내게 물을 떠오게 하고는 달그락거리면서 설거지까지 했다. 음, 괘씸하도록 예뻐 보이네. 난 뱃속에 신경을 덜 쓰기 위해 숫돌을 꺼내서 검 을 갈기 시작했다. 대장장이 조이스가 워낙 잘 갈아둔 것이라 별로 신경써서 갈 필요는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이렇게 해줘야 녹이 슬지 않고 날의 수 명이 길어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때 제미니는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 후치 계속 그 칼 들고 다니면 귀찮겠지?”
“응?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행다니면서 그렇게 할 순 없잖아. 어디 보자. 가죽끈이나 혁대 안 쓰는 것 있니?”
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작업장에 있던 가죽끈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제미니는 바느질 도구를 꺼내더니 내 칼집에 묶을 가죽끈을 만들기 시 작했다.
몸살나겠군. 정말 예쁘네.
촛불 빛 아래에서 내가 사용할 소드 벨트를 정성껏 만들고 있는 저 애가 정말 제미니 맞나? 제미니는 바느질에만 정신을 파느라 얼굴의 근육이 모두 이완되어 그윽하고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꺼내고 말았다.
“내 운명도………… 참 괴상하구나. 여름만 해도 내가 설마 수도에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을이 되니까………….”
제미니는 바느질하면서 내 말에 대답했다.
“가을이 되니까?”
“그렇구나. 가을이 되면서 캇셀프라임이 나타나고, 마법사의 조수가 되고, 아버지는 아무르타트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난 수도로 달려가게 되는군. 모든 가을은 마력을 지녔다고 하지만…………….”
“무슨 말이야? 가을이 마력을 지녔다니.”
“가을은 그래. 봄여름 동안 지상의 것들은 자신의 생명력으로 불타오르지. 하지만 가을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 생명력들은 스러지기 시작하고 이윽 고 겨울. 그건 죽음이야. 그래서 가을은 신비로워. 죽음 직전의 생명들. 다가오는 죽음.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생명력이 사그라들고 죽음이 찾아오기 직전, 모든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는 짧은 시기가 있으니 그게 가을 어느 중간쯤에 있는 마력의 시간이야.”
“아여의 이아(마력의 시간)?”
제미니는 이빨로 실을 끊느라 발음이 이상했다. 그냥 실을 끊고 나서 말하면 될 걸 저렇게 말하니 정말 귀엽군. 난 빙긋 웃으며 칼이 좋아하는 마력 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력의 시간이라는 것은 모든 장소에 각각 다르게 일어나. 분명 가을 어느 시기인 것은 확실해. 그런데 우연히 그 마력의 시간에 접어든 장소에 사 람이 들어가면 그에게는 온갖 희귀한 일이 일어나지. 그 짧은 가을 동안, 낙엽이 대지를 덮기 시작하고 마침내 첫눈이 오게 될 때까지, 그 사람은 평 생에 기억될 단 한 번의 가을을 가지게 되지. 때론 모를 수도 있어. 그저 그 가을에 일어났던 일만 기억하다가 몇 년 후에나, 혹은 늙어버렸을 때 겨우 알아차리게 되지. 하지만 자신이 마력의 시간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낙엽이 대지를 덮을 때부터 첫눈이 오기까지 놀라운 일을 이룩할 수 있지.”
“어머나……………”
“루트에리노 대왕께서 영광의 7주 전쟁을 시작한 것도 낙엽이 흩날리기 시작한 때였지. 그리고 그분께서 드래곤 로드를 물리칠 때의 이야기는 알겠 지? 장대한 싸움 끝에 드래곤 로드는 마침내 쓰러졌어. 그때 하늘에서 흰 눈이 날리기 시작했지. 루트에리노 대왕은 끝내 검을 들지 못하고, 드래곤 로드는 달아났지. 그 이후로 다시는 루트에리노 대왕은 검을 들지 못했어.”
“그럼, 바로 그때가……?”
“루트에리노 대왕의 마법의 가을이었지. 다가온 겨울 직전, 생애 최대의 일을 이룩하셨지만 그건 끝내 미완성이야.”
칼은 왜 이 이야기를 좋아할까. 아마 이 미완성의 끝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난 이런 이야기 좋아하지 않아. 단순하고 완성된 결말을 좋아한다. 하지만 제미니는 꽤 취향에 맞는 이야기인가 보다. 제미니는 볼을 감싸면서 공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제미니는 정신이 든 듯이 말했다. “다 됐어. 걸쳐봐.”
난 제미니가 만들어준 소드 벨트를 보았다. 허리에 차는 정교한 것은 만들 수 없어서 그것은 그저 칼집에 연결하여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바스타드를 어깨에 메자 제미니는 안쓰러운 듯이 말했다.
“허리에 차면 좋을 텐데…………….”
“아냐, 두 손도 자유롭고 걸을 때도 편하네, 뭐.”
그것을 걸고 바스타드를 뽑으니 간신히 뽑혔다. 뭐, 롱소드도 아니고 칼 길이가 2큐빗은 되는 바스타드니까. 난 잠시 고민하다가 왼손을 뒤로 돌려 검집을 아래로 당기며 뽑아보았다. 잘 빠져나왔다. 방패가 없어서 다행이군. 난 제미니에게 부담 없이 뽑아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말했다. “짠! 괜찮지? 내 팔에 딱 맞네. 고마워.”
제미니는 배시시 웃었다. 난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고는 말했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야지.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제미니는 침대 한켠에 치워둔 숄로 어깨를 감쌌다. 난 램프 하나를 챙겨들고 나왔다.
“말 태워줄까?”
제미니가 제미니에 탄다. 흠, 재미있군. 제미니는 조금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찬성했다.
난 말을 데려와서 세우고는 제미니를 흘긋 바라보았다. 제미니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나도 그랬지. 난 제미니의 허리를 붙잡아 위로 들어올려 태웠 다. 평소에도 간단히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정말 가볍군. 제미니가 옆으로 앉은 자세가 되자 나는 제미니에게 램프를 들려주고 고삐를 붙잡은 채 말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가을밤은 바람소리 속에서 희한하게 사각거리는 소리들이 이채롭다. 겨울이라면 이파리들이 떨어져나갈 듯이 앵앵거릴 것이다. 하지만 가을밤엔 그 렇지 않다. 귀뚜라미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숲 속을 걸어갔다. 말 위에 탄 제미니가 높이 들고 있는 램프의 불빛은 희뿌옇게 우리들만을 비 추고 있었다. 주위의 숲은 그 빛을 그대로 빨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쾌활하다. 이젠 내일이면 떠나는군. 뭐, 곧 돌아올 예정이지만, 잠시라도 떠난다고 생각하니 주위의 모습들이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난 한 손은 바지에 꽂고 다른 손으로 고삐를 쥔 채 휘파람을 불면서 걸어갔다. 말은 유순했다. 이놈은 제미니와 자기 이름이 같다는 것을 알고 있나? 왜 이 렇게 얌전하지? 말 위의 제미니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내 휘파람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간혹 손에 든 램프를 다른 손으로 가 렸다가 그 그림자에 자기가 놀라서 다시 손을 치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제미니는 숨막힌 소리를 내었고 나는 낄낄거렸다.
조이스는 견습 기사와 레이디라고 했던가? 지금 장면은 확실히 그렇게 보이겠다. 별로 할말은 없어.
어라? 이상하다. 길이 짧아졌나? 벌써 저 앞쪽에 제미니의 집이 보인 것이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세우고는 뒤로 돌아 팔을 내밀었다. 제미니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몸을 던졌다. 공중에서 제미니의 허리를 붙잡는 순간, 난 어떤 계획을 떠올렸다.
난 제미니를 붙잡은 채 내려놓지 않고 말했다.
“참, 제미니?”
“응?”
“내가 조언 하나 할까?”
“뭔데?”
“달아날 수 없는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
제미니는 무슨 말인지 몰랐겠지만 난 내 계획을 진행시켰다. 제미니는 내가 들고 있으니 어디로 달아날까. 제미니의 눈망울이 커졌다……………
잠시 후 나는 제미니를 내려놓고는 그녀가 떨어뜨린 램프를 붙잡아 들어올리면서 벼락같이 말에 올라타고는 달려갔다. 제미니는 그제야 고함을 질렀다.
“야아! 이이! 후치, 나쁜 놈아아아! 으아앙!”
왜 달아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냐고, 그래. 그건 그렇고 나도 참 큰 일이다. 아무래도 제미니가 예뻐 보이는 걸로 봐서 평생 제미니의 나이트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군. 그게 내 서글픈 운명인가 봐.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 희뿌연 여명 속에서 나는 우리 집 문에 못질을 했다.
뭔가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문에 못질하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태어나 17년 동안 살던 집이라는 점이 문제다.
우리 국왕님께는 개망나니 같은 형이 하나 있다고 한다. 원래는 그 형님이 국왕이 되어야 하지만 워낙 성격이 엉망이고 행실이 개판이라 귀족원에서 그분의 목을 치고 그 동생을 태자로 앉혔다. 그런데 난 이 폐태자의 이야기 중에서 지금 내 상황에 썩 어울리는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그 폐태자가 어느 날 자기 방에 못질을 해버렸다. 궁내부원들이 보고 놀라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내 미래가 밖에 있으니 밖으로 가겠다. 그러나 내 소중한 과거는 여기에 있으니 죽기 전에는 돌아오겠다. 과거 없이는 미래도 없으니, 그때까지는 이 방은 불침이다.”
그러고는 궁궐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날로 귀족원에 의해 폐위되었다.
역시, 어떠한 방랑자에게도 돌아올 곳은 있는 법이다. 뛰쳐나온 집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설령 고아라 해도 그의 소중한 기억이 있는 장소는 있을 것이다. 그곳을 평생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으로 방랑을 계속할 힘을 얻는다. 거꾸로 말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못질하는 것은 험난한 미래에 몸을 던 지는 것이다.
아아! 난 너무 말을 잘해. 이상스레 흥분되는 마음에 손가락을 두 번이나 찧었다.
나는 손가락을 절절 흔들면서 작업장도 폐쇄하고는 말에 마구를 걸치고는 칼의 집으로 향했다. 아침 안개가 가득 피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길을 잃을 일은 없다.
칼은 나와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오, 일찍 오시는군, 네드발 군.”
난 싱긋 웃고는 그에게서 망치와 못을 받아들고는 한 방에 하나씩 꽂아넣었다. 칼은 머리를 흔들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네, 그 힘에 꽤 익숙해졌군 그래. 자연스러운데?”
“매일 그런 망측스러운 훈련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등에 그건?”
칼의 등엔 롱 보가 걸려 있었다. 칼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여행은 여행이니, 무장을 해야 하지 않겠나. 활은 좀 쓸 줄 알거든.”
“그런데 샌슨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그때 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서 샌슨의 모습이 안개 사이로 나타났다. 그는 황급히 두 마리의 말을 세우고는 뛰어내렸다.
“허엇, 헉.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냐, 아냐. 지금 막 나온 길이야.”
난 샌슨의 얼굴을 보았고 곧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샌슨의 눈은 빨갛게 되어 있었다. 아마 틀림없이 오늘 아침 집을 나오면서 통곡을 했던 모양이 다. 아니, 아니지. 흠. 설마 그 샌슨의 아버지 조이스가 그런 꼴을 보일 리는 없고……………. 오오라!
난 샌슨에게 다가갔다. 샌슨은 내가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나는 느닷없이 샌슨의 가슴에 코를 박았고 샌슨 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아….. 향기로워라.”
샌슨은 내가 던진 미끼뿐만이 아니라 아예 바늘까지 꼴까닥 삼켰다.
“으헥! 설마, 후치, 어떻게, 그 냄새가 나?”
“역시! 푸헤헤헤헤!”
샌슨은 보나 마나 여기로 오는 도중에 그 처녀를 몰래 만났을 것이다. 그러고는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겠지. 나는 남녀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 다.
“오자마자 다시 떠나시다니요!”
“미안하오. 하지만 난 군인이라………… 흑흑, 사실 나도 가기 싫소! 우아아앙!”
“아아, 야속한 운명이어라! 우리, 사랑으로 이 형벌을 이겨내요!”
샌슨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난 싱긋 웃으며 말에 올랐다. 칼도 자신의 말이 어느 것인지 물어보고는 짐을 얹고 익숙한 동작으로 말을 탔다.
잘 타네. 부럽다.
샌슨만이 축 쳐져서 우울한 표정이었다. 칼은 샌슨이 하도 처량맞아 보이자 위로하고 싶은 기분이 든 모양이다.
“퍼시발 군. 걱정 말아요. 이건 아무르타트와 싸우러 가는 그런 일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자네가 이 일을 훌륭히 수행해 낸다면 그건 영주님께 대한 커다란 충성이라네.”
“무,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선도하겠습니다.”
“길은 아나?”
“어젯밤 늦도록 지리서를 읽어두었습니다. 모든 여정과 날짜 소모, 그에 따른 필요한 보급지와 속도도 다 계산했습니다.”
“그럼 퍼시발 군만 믿고 따라가지.”
샌슨은 경례까지 붙이고는 우리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안개가 심한 데다 어차피 숲이라 달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 바깥까지 나오는 동안 천천히 걸어갔다.
마을 바깥으로 나오자 비로소 샌슨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트롯 정도의 속도로 우리는 수도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해가 떠오르며 우리의 앞길을 황금빛으로 바꿔놓았다. 대단히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단숨에 캔터 정도로 속도를 높였다. 난 어제의 고통이 되살아나 허리가 아파왔지만 샌슨과 칼은 여유 있게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나 혼자 뒤처질 수는 없었다.
눈에 와 부딪히는 햇살, 눈꺼풀에 부딪히는 바람. 뜨겁고 차갑군.
세 마리의 말은 태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