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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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날이 밝은 것 같다. 눈썹에 부딪히는 햇살이 강렬하다.
“으음?”
난 모포를 걷고 일어섰다. 샌슨과 칼 모두가 모포 속에 들어가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도 불침번을 서지 않고 다 잠들어 있는 거지? 그런데 사그라드는 모닥불 가에는 이루릴이 보였다. 이루릴은 가느다랗게 연기를 피워올리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났나요?”
이루릴은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당황해서 말했다.
“어, 당신이 불침번을 서준 거예요, 이루릴?”
“예.”
“아니, 왜?”
“여러분들은 며칠 밤을 오크들에게 시달렸다고 하더군요.”
“어…………… 고마워요.”
“이제 난 당신의 친구인가요, 후치?”
난 무슨 말인가 싶어 머리를 긁다가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웃음이 나오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모닥불 가로 다가갔다. 이루릴의 앉은 키는 나보 다 별로 크지 않았다. 다리가 꽤나 긴 모양이지.
“예. 당신은 내 친구예요.”
“그럼 날 위해 행동할 수 있나요?”
어랏? 흠, 좋겠지. 난 주먹을 손바닥에 딱 부딪쳐 보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당신이 날 생각한다면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킬 리는 없고, 내가 꼭 해줘야 되는 일일 테니까 반드시 해줄게요. 원래 친구가 그런 거잖아요?”
조금 교활한 말인가? 이루릴은 날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럼 가서 세수하세요.”
“……예.”
난 우리가 야영하던 절벽 아래쪽에 있는 작은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했다. 꽤 고지대라 나무들은 적었고 고원의 평야 사이로 좁게 대지에 금이 가듯 뻗어 있는 얕은 물줄기라 계곡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가을도 꽤 깊어 시냇물은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야영지로 돌아오니 차례차례로 칼과 샌 슨도 일어났다. 칼과 샌슨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이루릴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두었던 배낭을 다시 둘러메었다.
샌슨이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가시게요?”
“예.”
“아니, 벌써………….. 아침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지 않고..
그리고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지만 동행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샌슨은 허둥지둥 일어나며 말했다. 이루릴은 별 감정 없는 무표정한 그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동행이요? 글쎄요. 전 말이 없습니다.”
“아, 그럼 같이 타면 되지요!”
이루릴은 샌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샌슨은 자기 말에 혼절하는 표정이었다. 난 고개를 돌리며 킬킬거렸다.
“그렇게까지 여러분을 곤란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샌슨은 말을 실수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 이루릴은 나와 칼에게 번갈아 고개를 조금씩 끄덕여 주고는 말했다.
“그럼,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이루릴의 고풍스런 인사말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칼뿐이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이루릴은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거기서 나무에 매어둔 우리들의 말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말들은 유순한 태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루릴은 그러고는 길이 아닌 나 무숲으로 사라졌다. 덤불과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루릴의 검은 머리카락은 사라졌다. 잠시 후, 멀리 보이는 구릉 앞에 이루릴의 모습이 보이더니 이루릴은 그 구릉을 넘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 길로 다니지 않는 거지?”
이루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내가 한 말이다. 칼이 대답했다.
“길은 인간의 것이야. 엘프는 길을 만들지 않아.”
“길을 안 만든다고요?”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지.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는 나무가 된다.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긴다. 엘프가 별을 바라보면 그는 별빛이 된다. 인간 이 별을 바라보면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엘프의 변화를 잘 나타내는 말이지.”
“변화?”
“엘프는 닮아버려, 엘프 가까이 있는 것을. 인간을 닮아버려, 인간 가까이 있는 것은.”
목적어와 주어가 아주 희한하게 배치되는 문장이군. 흠. 나는 오래간만에 푹 자서(불침번 교대 때 깨는 것은 정말 고역스러웠다.) 활기찬 기분을 느끼며 말 했다.
“그럼 엘프와 인간이 만나면?”
“그 어느 때보다 엘프는 심하게 인간화되지. 그러니 퍼시발 군. 자네의 말은 꽤 실례되는 말이었다네.”
샌슨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말했다.
“모, 몰랐어요. 거, 어, 후치와 내가 같이 타면 되는데………….”
밀가루를 반죽한 다음 팬케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 때에도 먹을 수 있도록 밀가루를 가득 반죽했다. 여기에 우유나 계란을 좀 집어넣으면 훨씬 맛이 부드러울 텐데. 뭐, 야외니까 호강은 바라지 말자.
칼은 소식(小食)을 하지만 나는 지칠 때까지 먹는 타입이고 샌슨은 먹어도 먹어도 지치지 않는 타입이다. 내가 굽고 있는 동안에도 샌슨은 날름날름 잘도 주워먹었다.
“나 먹을 건 남겨둬어!”
“멍청아. 왜 다 굽고 먹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흠. 그렇군. 난 한 손으론 팬케이크를 뒤집으며 다른 손으론 열심히 주워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곧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아무 리 구워도 점심 식사 때 먹을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샌슨과 나는 의아해했고 칼은 우리를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샌슨은 아까 실수한 것을 아직도 아쉬워했다.
“후치와 내가 함께 탄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됐어요, 응? 지나간 일을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야.”
난 밀가루를 더 반죽하면서 물어보았다.
“자, 어쩌지요? 그 오크들.”
“위치까지 알면서 모르는 척 지나치자니 양심이 찔리는데.”
“방법이 있어요? 아, 손 치워! 이건 점심 때 먹을 거야!”
샌슨은 기어코 한 장 더 입으로 가져가서 기쁜 표정이었지만 칼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법은 없구만. 우리에겐 임무도 있으니 우리 목숨을 함부로 굴리는 건 용납이 안 되고, 할 수 없지. 수도에 도착했을 때 누구 힘 있는 사람에게 보 고하도록 하지.”
“그럼 그 사람들은…….”
“괴롭겠지만, 오크들은 기술자들을 함부로 괴롭히지는 않을 거야. 기술자들은 여행을 많이 다니지는 않을 테니 오크들로서도 그런 사람들을 구하기 는 어렵거든. 어떻게 조금 더 견뎌보라고 할 수밖에. 퍼시발 군.”
“읍, 읍, 쩝쩝, 예!”
“지리서에 위치와 그들이 말한 표시를 잘 기입해 둬요. 수도에서 보고할 때 도움이 되도록.”
“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오래간만에 푹 자서 아주 개운했다. 하지만 푹 잔 데다가 팬케이크를 두 번이나 굽다보니 시간이 많이 늦
었다. 내가 샌슨 때문에 늦었다고 투덜거리자 샌슨은 오후쯤이면 휴다인 고개를 넘을 수 있을 것이며 저녁에는 마을에 들러서 쉴 수 있을 테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또 구시렁거렸다.
“후치와 내가 함께 탄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만해!”
우리는 지난밤 수목 한계선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저지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산 속의 길이지만 그래도 중부 대로의 연장 선상이기 때문에 길은 고르고 넓었다. 말을 달리게 하기에도 적당했지만 그래도 경사가 있으니까 우리는 말이 지치지 않도록 가볍게 달려갔다. 며칠 말을 타다보니 나도 말에 꽤 익숙해졌어.
한 시간쯤 달렸을까. 점점 급박한 계곡이 나타날 듯한 높이에 이르렀다.
쿠쿠쿠쿠쿠릉!
난 이상한 소리에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말했다.
“휴다인 강이야. 계곡의 급류라서 소리가 꽤 크지? 우리는 그걸 건널 거야.”
“급류? 말을 타고 급류를 건너야 되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다리가 있어.”
“잠깐! 내가 맞추지. 휴다인 고개에 휴다인 강이니 다리 이름은 휴다인 다리겠지?”
“틀렸다. 12인의 다리인데?”
“뭐? 12인? 그게 무슨 뜻이야?”
“몰라. 지리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는데.”
칼이 약간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떠돌다가 그 비슷한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는데. 휴다인 계곡에 아주 이상한 다리가 있다는 이야기였어.”
“무슨 다리인데요?”
“모르겠어. 그 땐 내 다리로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높은 곳까진 잘 오지 않았거든. 한참 돌아 가더라도 평지로, 안전한 곳으로 다녔지. 12인의 다리라. 왜 그런 이름일까.”
우리는 어리둥절해져서 그 12인의 다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가갈수록 급류의 물소리가 거대해졌다. 보통 목소리로는 옆 사람과 말을 나누 기 조금 힘들 정도였다.
잠시 후 길 양편에 늘어서 시야를 가리던 나무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저 멀리 앞편에는 거대한 절벽이 보였다. 우리는 절벽보다는 그 앞에 서 있는 것들을 보고 놀랐다.
히잇?
우리들은 당황하여 말을 멈춰세웠다. 샌슨은 손을 허리로 가져갔고 난 어깨로 가져갔다. 눈앞에는 오크 아홉, 드워프 하나와 엘프 하나가 서 있었다. 어떻게 오크가 낮에 돌아다니지? 어쨌든 지금 오크들은 드워프를 노려보고 있었고 드워프는 거대한 배틀 액스를 얼굴 앞에 세워들고 그 날을 만지 작거리며 오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쓰던 배틀 액스가 떠오르는데. 그 거대한 길이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만 도끼날의 크기는 거 의 맞먹겠다.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도끼를 쓴다 해도 혼자서 아홉이나 되는 적들에게 맞서 주눅들지 않고 있다니 저 드워프 정말 대단하군. 게다가 이 오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싸우던 놈들보다 훨씬 크고 사나워 보였다. 오크들은 드워프의 도발에 노한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었으며 한 명의 엘프는 그중 누구 에게도 시선을 보내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서 떨어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엘프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루릴?”
물소리 때문에 말발굽 소리를 듣지 못하던 그 무리는 우리가 거의 다가가서야 겨우 우리를 알아보았다. 나와 샌슨은 당장 말에서 뛰어내렸다. 샌슨 은 이루릴에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이루릴은 계곡의 바람에 흩날리는 그 검은 머릿결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헤어지자마자 만나는군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예?”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샌슨은 당황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이 상황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오크들은 전혀 덤벼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드워프도 전혀 겁먹은 태세가 아닌 당당한 자세로 오크들을 쏘아보고 있 었다. 마치 드워프 한 명이 무서워 오크들이 덤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루릴은 나를 보더니 말했다.
“후치? 당신은 누굴 돕겠어요?”
허어…………… 이거 어려운 문제군.
“일단은 찾아봐야겠군요. 도움이 필요한 게 누군지.”
그때 드워프는 배틀 액스를 내리며 말했다.
“됐군. 세 명이면 열네 명이군.”
그러자 오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크 중 하나가 외쳤다.
“취이익! 그럼 누가 빠지는가?”
드워프는 이죽거리면서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 중 둘을 죽이면 어떨까?”
“취이익! 너와 저 엘프를 죽여놓지!”
그때 이루릴이 나섰다.
“아무도 약속을 어기면 안 됩니다.”
그러자 오크와 드워프 모두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나와 샌슨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분명히 싸우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런 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걸. 칼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세레니얼 양.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여기, 초행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여기 12인의 다리에서는 어떠한 종족도 싸울 수 없답니다.”
“싸울 수 없다고요?”
샌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이 다리를 만든 이의 소원. 그는 그래서 열두 명이 아니면 다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요.”
“예?”
이루릴은 손가락을 들어 계곡을 가리켰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두 절벽 사이의 거리는 약 60큐빗. 그런데 그 중간의 허공에 작은 배가 떠 있었다. 아니, 배라고 할 것까진 없고 넓적한 사각형 뗏목처럼 생긴 것으 로 그 주위로 울타리처럼 난간이 쳐 있는 단순한 구조였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무런 밧줄이나 기타 장치 없이 그저 허공에 떠 있는 것이었다. 샌슨 과 난 절벽 쪽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공중에 떠 있었다. 그런데 그 뗏목 바닥에는 동그란 원 과 복잡한 도형들이 보였다. 저것은 마법원……… 마법이구나!
이루릴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어떤 종족이라도 열두 명이 구성되어야 다리를 건널 수 있지요. 날아서 건널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 여기선 서 로 싸울 수 없어요.”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허어…… 같은 종족 열두 명은 안 됩니까?”
“그건 상관없어요. 그래서 인간 상인들이나 오크들은 흔히 열두 명으로 짝을 짓더군요. 하지만 다른 종족은 열두 명이나 되는 많은 수가 함께 다니 는 일이 드물지요. 그래서 여기서 어떤 종족이든 기다린 다음, 이곳에서만은 싸우지 않으며 함께 건너게 되는 겁니다.”
우와.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흠. 대단한 곳이군.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뜻은 좋은데 좀 불편하군요. 열두 명이 안 되면 절대로 건널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예. 하지만 이곳은 워낙 왕래가 잦은 곳이라 잠시만 기다리면 열두 명을 채우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저도 그래서 여러분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고요.”
아하, 문제가 뭔지 알았다.
지금 오크와 드워프, 엘프까지 모두 열한 명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을 건너기 위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싸우지 않고 한 명이 더 나타나기를 기 다린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 명이다. 따라서 두 명은 남아서 다시 열 명이 더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골자로군.
그 동안에도 드워프는 계속 으르렁거리며 상대편의 오크와 험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더러운 놈들! 이곳이 12인의 다리라는 것을 고마워해라! 다른 장소라면 너희들은 예전에 죽었어!”
“취이이이익! 크앗! 이 지저분한 수염의 꼬마가 어디서!”
흠, 오크와 드워프가 서로 키를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저 오크들은 오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크니 드워프를 가리켜 꼬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 드워프는 눈앞에 오크들을 두고도 공격하지 못하니까 거의 돌아버릴 지경인 모양이다. 입에 거품을 물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그런데 저놈들은 어떻게 낮에 돌아다니는 거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이루릴이 말했다.
“저들은 우르크라고 하지요.”
“우르크?”
“오크의 일종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족의 이름이랄지· 체구가 꽤 크지요? 저들도 다른 오크처럼 햇빛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견딜 수는 있어요. 그 래서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했지요. 낮에는 보통 오크들이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건널 수 있답니다. 그런데 하필 우르크가 나타난 데 다가 드워프까지 나타났군요.”
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르크에게서 충분한 거리를 둔 곳까지 걸어간 다음 주저하면서 말했다.
“저, 여러분. 우리들이 뒤에 왔으니 우리들 중 두 명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드워프는 전혀 칼의 말을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하도 거칠게 배틀 액스를 휘둘러서 칼은 잠시 물러나야 되었다.
“무슨 소리! 이놈들! 너희들 중 두 놈이 빠져! 그놈들은 살 수 있다. 내가 이 다리를 건너고 나면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드워프의 말에 다시 나는 문제를 깨달았다.
다리를 건너고 나서 종족비가 어떻게 되느냐. 이루릴은 분명 여기서는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과연 끝까지 약속이 지켜질까? 그래서 저 드워프는 종족 비율을 맞추려는 속셈인 모양이다. 우르크들 중 두 마리가 빠지면 인간 셋, 엘프, 드워프 하나씩으로 다섯 이다. 그리고 우르크는 일곱. 싸움이 나도 해볼 만하다. 하지만 우리들 중 한 명이 같이 건너고 두 명이 빠지면 숫자는 3대 9로 압도적으로 위험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드워프와 엘프, 인간이 한 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그렇게 틀릴 것 같지는 않다.
샌슨도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칼을 잡아당겼다. 그는 칼에게 귓속말을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겐 들릴 정도 였다.
“다리를 건너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셋은 함께 건너야 됩니다.”
“그러나…………… 여기선 아무도 싸워선 안 된다며?”
“오크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보세요, 드워프 씨. 당신은 이분들이 타고 있는 말을 생각하지 않는군요?”
응? 말도 포함되나? 음. 그렇군. 당연하다. 어떤 종족이든이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인원은 모두 열일곱인가? 드워프는 신나게 외쳤다.
“그렇다면 너희들 다섯이 빠질 수 있군! 어느 놈이 빠질 거야?”
“취이익! 헛소리! 인간, 너희들이 뒤에 오지 않았나! 취익! 그 냄새 나는 말을 데리고 여기서 기다려! 아니지. 말 한 마리는 내어줘야겠어!”
얼씨구. 전부 제멋대로 이야기하는군. 이루릴은 말했다.
“절대로 이곳에선 싸울 수 없어요. 그러면 아무도 이 다리를 이용할 수 없어요. 약속은 지켜져야 해요. 먼저 그것이 보장되고 나서 누가 남을지 결정 되어야 해요.”
백번 옳으신 말이다. 하지만 저 옳은 말도 흥분한 드워프와 우르크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골치 아픈데. 우리들 중 누구 하나를 내어주면 그는 위험하다. 계곡 건너편에서 마음이 바뀐 우르크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여섯(말 도 포함)이 다 건너야겠다고 주장하자니 뒤에 나타난 주제에 너무 뻔뻔한 것 같다.
드워프는 마구 흥분해서 너희들 중 다섯은 깨끗이 잘라버리고 나머지를 묶은 채 다리를 건너겠다는 식으로 배짱 대단하게 퍼붓고 있었고 우르크 또 한 취익거리면서 우리에게 말을 한 마리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우르크들의 속셈은 뻔한 것 같다. 말 한 마리는 문제가 아니니 계곡만 건너고 나면 드워프와 엘프 두 명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인가 보다.
그렇게 퍼부어대면서도 섣불리 싸움을 시작하지는 못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어느 종족들이 이기더라도 계곡은 건너지 못하게 되니까. 어느 종족 하 나만으로는 열둘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모인 다섯 종족(말까지 포함하면) 중 최소 두 종족은 모두 필요하다. 흠………… 이 다리를 만든 사람은 바로 이런 상황을 생각했나 보군? 난 그 상황에서도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로 했다.
“이런 골치아픈 다리를 만든 게 누구지요?”
이루릴은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상하군요. 인간 마법사의 일을 엘프에게 묻다니.”
“우리가 인간들 중에서 가장 무식한 세 명이라고 생각하세요. 누구지요?”
이루릴은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루릴이 웃는 것은 처음 보는군. “타이번 하이시커라는 인간 마법사입니다.”
순간 우리 세 명의 표정은 대단히 이상해져 버렸다. 칼은 내게 물었다.
“이봐, 네드발 군. 타이번 성이 어떻게 되지?”
“어? 칼도 몰라요? 나도 모르는데?”
샌슨도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렸지만 잠시 후 그의 눈은 다시 이루릴에게 고정되고 있었다. 좀 그만 해라, 그만 해! 정강이를 걷어차줄까 보 다. 이루릴은 그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분을 아나요?”
“우리가 아는 분 중에 타이번이라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그런데 성을 모르는데.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다고 듣진 않았는데, 그분이 이 다리를 만드신 건 200년 전입니다만.”
200년? 이런, 아니군. 칼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러면 다른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가요.”
난 헛기침을 하며 아직도 욕설을 퍼붓고 있는 우르크와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나는 칼에게 말했다.
“저 드워프 말대로 하면 어때요? 우르크들을 공격한 다음 네 마리만 포로로 잡아서 다리를 건너는 거.”
이루릴의 눈길에 수심이 피어올랐다. 난 멋쩍어졌고 칼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이곳에서나마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저런 다리를 만드신 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싸움이 난다면 누가 다쳐도 다칠 텐 데.”
“그렇다면 저놈들 중 다섯이 빠지라고 권해 볼 수밖에. 저놈들 아홉과 함께 건너는 건 싫은데요.”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속을 믿고 지키면 간단한 일을……………”
이런, 누가 그걸 모르나. 난 이루릴에게 말했다.
“오크 놈들이 그 약속을 지켜줄지가 문젠데요, 이루릴?”
“왜 그들이 지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후치?”
“오크니까.”
“그런가요. 오크들은 인간이나 드워프, 엘프니까 믿을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지요.”
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가? 난 칼을 바라보았고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요. 서로를 믿어야 되는군요. 그것이 이 다리의 건설 목적인가 봅니다. 하지만 여기 이 장소에서나마 서로를 믿기엔 다른 장소에서의 반목이 너무 크군요. 타이번 하이시커는 너무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군요.”
그때였다.
내 눈에 우르크들 중 한 놈이 갑자기 앞장서서 드워프와 욕지거리를 나누던 우르크를 붙잡아들이는 것이 보였다. 그놈들은 서로 수군거리면서 우리 를 가리켰다. 아니, 우리 말을 가리킨 것인가?
순간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세 명과 이루릴, 그리고 저 드워프가 다 죽어도 우리들의 말만 있으면 우르크 아홉 마리는 우리 말과 함께 다리를 건널 수 있는 것이다. 멍청하 긴! 그 작전은 성공할 수 없어. 우리 숫자가 훨씬 적으니 우르크들이 이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려면 우르크는 하나도 죽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저놈들이 생각 외로 무모할 수도 있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해야 된다. 나는 허리를 굽혀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고는 우르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밀었 고 그러자 우르크들은 의아해하며 날 바라보았다.
“이봐. 혹시 우릴 다 죽이고 우리 말을 빼앗으면 열둘이 된다고 생각하나본데 그렇게는 안 될걸.”
난 싱긋 웃으며 그 돌을 엄지와 검지로 부스러뜨렸다. 돌은 간단하게 가루가 되어 터져나갔고 우르크들은 퍼렇게 질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놈들 중 하나가 외쳤다.
“취익! 저, 저거 그 초장이다! 괴물 초장이다! 취이이익!”
어라, 내가 이 근처 오크들 사이에 꽤 유명해졌나 보군? 그런데 우르크들이 일제히 무기를 앞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욕설을 뱉어내고 있던 드워프도 우르크들의 글레이브에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글레이브는 다른 오크들의 글레이브보다 훨씬 커서 거의 인간의 글레이브와 맞먹었다. 삽시간에 우르크들과 인간─엘프─드워프말 연합군(?)의 대치 상태가 벌어졌다.
“어? 야! 뭐하려는 거야?”
난 놀라서 외쳤다. 그러자 우르크들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잘 됐군. 취이익! 계곡을 건널 필요가 없어졌어! 취익, 너희들이 이미 계곡을, 취익, 건넜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취익취익!”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쫓고 있었던 거야?”
“우리는 우르크! 투사 우르크다! 취익! 너희들의 말살을 의뢰받았지! 취익! 그 허약한 오크들이 대단히 겁먹은 투로 말하기에, 취익! 설마 이런 꼬마 와 노인이 섞인, 취익, 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태를 눈치챈 샌슨의 입가에서 이빨이 번뜩였다.
우리를 쫓던 오크들이 이 우르크들에게 의뢰를 했나 보다. 그래서 놈들은 우리를 쫓기 위해 이 계곡을 건너려 했고. 하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 늦게 출발해서 오히려 뒤처진 것이다. 샌슨은 나직하게 말했다.
“좋게 될 것 같지는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