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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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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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뒤편의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우리 앞쪽의 땅은 검푸르게 밤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서 도시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때, 우리는 휴다인 고개를 넘어 평야 지대를 달려가고 있었다. 차가운 저녁 공기 속에 앞에서 반짝이는 불빛은 자연 말을 다그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윽고 도시가 나타났다. 우리들의 고향인 헬턴트 영지보다는 훨씬 큰 도시로 도시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거대한 강이 특색이었다. 휴다인 강이 크게 휘어지는 부분이다. 강 주위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고 저녁이 되어 돌아가는 소와 목동들의 모습이 보였다. 샌슨은 이 도시 이름이 레너스 시라고 말 해 줬다. 미드 그레이드 가장 서쪽의 도시로 휴다인 고개의 관문 도시로서 발전한 도시라고 한다.

황혼의 붉은 기운도 완전히 사라진 검은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레너스 시에 들어섰다.

휴다인 강을 넘어 레너스로 들어가게 되는 다리를 건너자 도시의 불빛은 더욱 따스하게 우리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도시 중앙의 길을 따라가던 우 리는 곧 펍과 여관이 밀집한 거리로 접어들었다. 관문 도시라서 그런지 여관이 꽤 많았다.

나는 주위를 휙 둘러보며 말했다.

“선택의 기준은?”

“보통은 물어보는 것이 좋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옆을 지나가는 중년 남자를 불렀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우리는 여행자인데, 이 도시가 자랑할 만한 여관이 있다면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중년 남자는 손을 들어 간판 하나를 가리켰다. 12인의 여관.

“저기에 들러보면 대륙 어디에 가서도 이 도시에 대한 좋은 추억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게다.”

“아, 고맙습니다.”

난 고개를 꾸벅 하고는 칼에게 말했다.

“12인의 여관? 혹시 열두 명이 아니면 손님으로 받지 않겠다는 곳 아닐까요?”

“설마. 아마 12인의 다리에서 따온 이름일 테지.”

우리는 그 여관으로 향했다. 대로에서 조금 들어간 위치에 있는 여관으로 꽤 넓은 뒷마당이 살짝 보였다. 전면은 나무판이 대어져 있고 아기자기한 창들이 뚫려 있는 4층짜리 건물이었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여관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콰당!

뭐야? 놀란 나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넓은 여관 정문에서 웬 체구 좋은 남자 하나가 후다닥 달려 내려왔다. 그런데 곧 여관에서 물통이 하 나날아와 그 남자의 뒤통수를 맞추었다. 퍽! 남자는 앞으로 고꾸라져 정문 앞에 있는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내렸다. 상당한 솜씬데? 이윽고 앙칼진 고 함소리가 들렸다.

“죽었으면 그대로 누워 있고 살았어도 누워 있어! 죽여줄 테니!”

그러나 그 남자는 그 정도로 어수룩하지는 않았는지 냅다 일어나 달아났다. 우리는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샌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못 고른 것 같은데요?”

칼도 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곧 정문에서 또 다른 물통을 손에 든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물통을 휘두르며 계단을 달려내려오다 자칫 샌슨과 부딪힐 뻔했다. 샌슨은 놀라서 물러났고 그 여자는 샌슨을 흘끔 보더니 곧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나와 나이가 비슷할 것처 럼 보이는 금발머리 아가씨였다.

“식사와 침대가 필요해요?”

“다른 것도 제공할 수 있습니까?”

내 대답에 그 여자는 물통을 들어올려 보이더니 말했다.

“이걸로 한 대 먹여줄 수는 있지. 그런데 조금 전 누가 뛰쳐나오는 것 못 봤니? 아니, 관둬. 벌써 멀리 달아났겠지. 말 셋과 사람 셋이에요? 들어와 요. 말은 여기 세워둬요. 휴! 임마, 튀어나와! 말들을 데리고 가 마구간에 묶어! 말 중에 편자를 갈거나 할 놈은 있어요? 없는 모양이군. 걸음걸이가 다 괜찮은데. 휴! 이 자식아, 빨리 튀어나오지 않으면 네녀석 머리를 다 밀어버릴 테야! 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거예요! 붉은 카펫이라도 앞에 깔아드려야 들어올 거예요? 휴! 이 자식, 동작이 그래서 뭐에 써먹겠어! 어서 말들을 데리고 가! 말은 휴를, 사람은 날 따라와요.”

말도 다 뺏겼으니 이젠 꼼짝없이 들어가야 되나? 샌슨과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듣다가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칼도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따라왔다. 그 여자는 안의 홀로 들어서더니 당장 우리에게 질문했다.

“술, 식사, 목욕, 침대, 화장실?”

이건 정말 수수께끼로군. 나는 간신히 다섯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제일 급하냐고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난 대답했다.

“앞의 두 개.”

우리는 그 여자의 안내로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안은 어두워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어둠에 눈이 익고 나자 꽤 넓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 장에는 램프가 매달려 있었고 램프 불빛 아래에서는 무관심한 시선들이 한 번씩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꽤 시끄러웠다. 우리는 그 여자에게 떠밀리듯이 한 테이블에 앉았고 그 여자는 곧 다른 사람 몇 명에게 고함을 지르고는 사라졌다. 잠시 후 그 여자 는 거대한 맥주잔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흑맥주였는데 맥주 거품이 램프 불빛 아래 주황색으로 반짝였다. 그 여자는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싶게 맥주잔을 탁탁 내려놓았는데 놀랍게도 한방울도 튀지 않았다.

“뭘 드시겠어요? 당신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다 나오니까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샌슨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닭요리 됩니까?”

“뭐든 된다고 했잖아요? 닭 하나, 그리고?”

“돼지고기 파이와 시드 케이크.”

칼의 주문이었다. 샌슨도 그때쯤에야 용기를 내어 더 주문하기 시작했다.

“어, 나도 돼지고기 파이, 그리고 미트볼, 팬케이크 추가. 그런데 다 기억해요?”

“저 꼬마가 말해야 ‘다’ 기억할 거예요. 꼬마는 주문이 뭐니?”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꼬마, 꼬마 그러니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군. 뭐든 다 된다고 했지? 난 입술을 조금 삐죽거린 다음 말했다.

“드래곤 파이.”

그녀의 눈꼬리가 당장 올라갔다. 난 싱긋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가고일 날개찜, 난 날개를 특히 좋아해요. 오크 등심구이와 스터지 수프. 후식으로는 워터 엘리멘탈 주스와 블랙 푸딩. 푸딩 먹어본 지 오래 됐어.”

그녀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이봐, 꼬마야. 조금 전 그 사내가 왜 그렇게 달아난 줄 알아?”

“왜 달아났죠?”

“내 젖이 먹고 싶다고 그랬거든.”

샌슨은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렸고 칼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매우 선량해 보이는 눈으로 그 아가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나와요?”

“죽을래!”

그 아가씨는 탁자를 쾅 내리쳤고 그러자 주위의 손님들이 우리 쪽을 돌아봤다. 꽤 키가 작은 손님 하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 유스네는 5분도 못 참는군. 또 싸움인가?”

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키가 어찌나 작은지 샌슨의 여덟 살짜리 막내동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꽤 나이들어 보였다. 호오…………, 하 플링인가? 난 다시 고개를 돌려 씩씩거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당신 이름이 유스네인가요?”

“그래, 꼬마야! 그리고 여기선 유스네를 화나게 한 사람은 13번째 사람이 되지!”

“13번째 사람?”

“이 여관은 12인의 여관이야. 13번째는 필요없지!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나게 된다고!”

“당신 같은 꼬마가 주인이었나?”

유스네의 볼이 실룩거렸다. 이 아가씨와 오래 사귄 것은 아니지만 저 표정은 아무래도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인 것 같은데. 그녀의 손에는 술잔을 받 쳐들고 온 소반이 있었다. 그리고 유스네는 그 소반을 확 들어올렸다.

휙!

하품 나오겠군. 우르크의 글레이브도 그것보단 빨랐어. 난 내 머리로 날아오는 소반을 받아내며 살짝 당겼다. 당연히 유스네는 소반을 내게 빼앗겼 고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당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멈추고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꽤 조용해졌다.

난 그 나무 소반을 손가락 위에서 빙빙 돌리며 말했다.

“이봐. 유스네. 나는 행인에게 추천할 만한 여관을 물었거든? 이렇게 불친절한 여관이 추천된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가 뭘까?”

칼은 빙긋 웃으며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 흑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샌슨은 배고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욘석아! 네가 빨리 주문을 해야 나도 배를 채울 거 아냐?”

“아, 글쎄 주문을 했더니 이 아가씨가 이걸로 날 치려고 하네?”

“말이 되는 주문을 해야지!”

그때 무기(?)를 빼앗기고 당황하고 있던 유스네가 말했다.

“이 자식! 모험가냐? 재주가 있어서 내게 무례하게 군단 말이지?”

“무례를 따지자면 그쪽이 먼저였던 것 같아.”

유스네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외쳤다.

“오빠!”

아이고, 가지가지 하네. 차라리 아빠를 부르지. 내 예상대로라면 4큐빗짜리 근육덩어리가 나타나 험상궂은 얼굴을 내게 내밀 것 같다.

예상은 반만 정확했다.

부엌 쪽에서 정말로 4큐빗짜리 근육덩어리가 나타났다. 샌슨과 좋은 상대를 이루는군. 하지만 얼굴이 무성한 수염으로 가려 있어 험상궂은지 어떤 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단한 털보였다. 그 남자가 걸어오니 그렇지 않아도 낮은 천장이 더 작아보였다. 천장에 걸린 램프가 아슬아슬하게 그 남자의 머 리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그 남자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왜 불렀어?”

어라? 목소리는 꽤 젊네? 수염 때문에 나이 들어 보였지만 별로 나이가 많지는 않은가 보다. 겨우 샌슨 정도? 하긴 이 아가씨의 오빠라니 그렇게 나 이가 많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스네는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우리 오빠 앞에서 다시 주문해 봐.”

못할 것도 없지. 난 팔짱을 끼고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드래곤 파이, 가고일 날개찜, 오크 등심구이, 스터지 수프, 후식으로는 워터 엘리멘탈 주스와 블랙 푸딩.”

자, 이제 뭐가 날아올까? 처음에는 물통이 날아다녔고 조금 전에는 소반이 날아왔으니 다음 것이 몹시 기대된다. 그런데 나는 그 남자의 눈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만 재료가 다 떨어졌군요. 다른 것은 안 될까요?”

오………… 이건 품위 있는 대답이로군. 나 스스로 내 농담을 수습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인데? 품위에는 품위로 답해야겠지.

“그렇다면 돼지고기 파이 3인분과 닭요리, 시드 케이크에 미트볼과 팬케이크. 맥주를 마시고 있을 테니 천천히 준비해도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그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덕분에 꽤 꼴이 우스워져버린 유스네는 놀라서 자기 오빠를 따라갔다.

“오빠! 저런 헛소리나 지껄이는 꼬마를…………….”

“네가 고함 지르는 것 다 들었어. 꼬마라니. 너랑 비슷해 보이는데.”

“무, 무슨!”

유스네와 그 오빠는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며 그대로 부엌으로 사라졌다. 난 피식 웃으며 의자 등에 몸을 기대었다. 별 웃기는 오누이 다 보겠네. 아 니, 오빠는 괜찮은데 그 동생이 참 웃기는군.

“이 여관이 뭐가 장점이라 추천된 걸까요?”

칼은 빙긋 웃었다.

“난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래요? 이유가 뭔데요?”

“자네 앞의 잔을 들어보게.”

난 고개를 갸웃했다가 그 커다란 잔을 들어올려 입가로 가져왔다. 한 모금, 어라? 두 모금, 엥? 세 모금. 에라, 꿀꺽꿀꺽꿀꺽.

“카! 우와, 아하하하하, 아우!”

배가 고파서 대단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샌슨은 내 발작하는 모습을 보더니 역시 그 흑맥주를 마셔보았다. 샌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이거 정말 좋은데!”

샌슨과 나는 단숨에 그 커다란 2파인트짜리 술잔을 비웠다. 술에 대해선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훌륭한 맛인걸. 난 샌슨의 의향을 물어보고는 부엌 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유스네, 여기 두 잔 더 갖다줘!”

부엌에서 나타난 유스네는 돌진하는 멧돼지처럼 달려왔다. 대단한 기세야.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용맹 무쌍한 레이디 유스네. 이 멋진 흑맥주 두 잔만 더 부탁해요.”

물론 내 말은 칭찬이 아니며 유스네는 눈썹을 몹시 곤두세웠다. “어쭈, 농담을 걸어?”

슬슬 신경질이 나는군. 도대체 이 아가씨는 뭐가 불만이라 이렇게 목을 곤두세운 뱀처럼 구는 거지? 왜 이리 쉭쉭거려? 식당의 다른 손님들은 2차전 을 기대하겠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봐. 유스네. 뭐 하나 물어보겠는데, 성심성의껏 대답해 줘. 최근 애인한테 걷어차였어?”

식당에서 웃음소리가 폭발처럼 터져나왔다. 유스네는 내 멱살을 쥐어올렸다. 맙소사………….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유스네를 바라보 았다. 우리 마을에선 완전히 내놓은 계집애, 그러니까 제미니라도 이렇게 거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예절이 빵점이군.

난 잠시 후에야 목에서 걸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이거 놓지 않으면 너 몹시 후회한다.”

“후회하게 해봐!”

어렵지 않지. 난 유스네의 허리를 붙잡아 위로 휙 들어올렸다. 제미니와 많이 연습한데다가 OPG가 있으니 거의 맥주잔만큼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 는다. 나는 아기 다루듯이 유스네를 살짝 던졌다가 받아내었다(천장에 부딪히지 않게 하려니 힘들었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엄마야!”

유스네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내게 안겨들었다.

“내가 네 엄마냐? 좀 놓은 다음 내 말을 들어봐.”

유스네는 당장 떨어졌지만 그 허리는 여전히 내게 잡힌 채 공중에 떠 있었다. 유스네의 발이 내 가슴을 몇 번 찼지만 나야 말의 뒷다리에 채여도 까 딱없는걸. 나는 무시하면서 유스네에게 경고했다.

“얌전히 굴겠다면 나도 얌전히 내려줄게. 하지만 그렇지 않겠다면 난 좀 거칠게 내려놓겠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난 오크를 60큐빗 정도 던 져버린 경험도 있거든.”

“거, 거짓말!”

난 샌슨에게 고개를 돌렸고 샌슨은 말해 주었다.

“아가씨. 그 말은 사실이야. 저 녀석은 오늘 낮 12인의 다리에서 오크 네 마리가 숫자가 모자라서 못 건너가는 것을 보고는 모두 집어던져서 휴다인 계곡을 건너게 해줬거든. 하지만 후치, 이제 좀 내려놔라. 그게 무슨 짓이냐.”

난 순순히 유스네를 내려주었다. 유스네는 앙칼진 눈빛으로 날 바라봤지만 내 힘을 알고서는 함부로 덤비진 않았다. 난 샌슨과 나의 빈 잔을 건네주 며 말했다.

“얌전히 가서 맥주를 가져온다면 나도 감사히 여기며 얌전히 마시겠어. 그런 정도로 화해하지. 어때?”

유스네는 그 잔을 받아들고는 냉큼 달려가 버렸다. 난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원, 참 성격 거친 계집애네. 멱살을 잡다니.”

“흠, 나도 좀 놀랐다. 온갖 손님이 득실거리는 여관에서 일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 아닐까?”

“아니, 원래 성격일 거야.”

그때 옆자리에 있던 그 하플링이 말을 걸어왔다.

“여보시오. 아까 그 말 사실이오? 그러니까 오크를 집어던져서 휴다인 계곡을 건너게 해주었다는 말.”

“예. 사실이에요. 그 오크들 덕분에 우리가 숫자를 맞춰서 다리를 건널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도로 돌려보내 주었지요.”

그 하플링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야! 그거 정말 믿기 어려운데? 거인이 아니라면 휴다인 계곡을 넘어갈 정도로 던져버릴 수는 없을 텐데. 아, 내 이름은 듀칸 버터핑거요.”

“난 후치 네드발입니다. 버터핑거요? 독특한 성이네요. 버터를 만드는 집안이세요?”

“성은 아니고 내 별명이지요.”

“그러세요?”

그때 유스네가 돌아왔다. 그 커다란 맥주잔을 여전히 탕탕 내려놓았는데 내 얼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마워.”

유스네는 내 얼굴을 쏘아보고는 그대로 뒤로 돌아 가버렸다. 참 성격 고약한 계집애네.

“이 집 맥주 맛은 모르지만 서비스는 정말 엉망이군. 저런 계집애를 데리고 어떻게 장사를 하는 거지?”

듀칸이라는 그 하플링이 껄껄거리며 끼어들었다.

“유스네는 사실 착한 애지요. 겉모습관 달라요. 자기를 다 큰 처녀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처음 보는 남자에 의해 그렇게 던져지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요?”

“저 계집애가 먼저 내 성격을 건드린 거예요.”

듀칸은 껄껄거리며 다시 몸을 돌려 식사를 계속했다. 난 이번에는 느긋한 마음으로 흑맥주를 즐기기로 했다. 내 주량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유스네 를 또 부르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샌슨은 가차없이 그 2파인트 잔을 또 비워냈다. 확실히 오거다.

샌슨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난 절대로 저 계집애 부르지 않을 테니 샌슨이 주문해.”

흑맥주 맛뿐만 아니라 식사도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우리에서 칼은 제외된다.) 걸신들린 듯이 요리를 먹어치웠고 듀칸이라는 그 하플링은 우리 핏줄에 혹시 드워프의 혈통이 흐르지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식사 후 우리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침대 네 개짜리 커다란 방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세 명이라 침대 하나가 남았다. 그래서 샌슨과 나는 그 침대 위에 배낭을 던져놓고는 배낭에게 푹 쉬 라고 말해 준 다음 홀로 내려왔다. 그 멋진 흑맥주 맛이 아직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칼은 그냥 방에 누워 있겠다고 말해서 우리 둘만 내려왔다. 홀은 넓고 식당처럼 낮은 천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건물의 1층 전체가 낮다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목조 건물로 다층 건물을 만들 때는 성에서처럼 높게 만들 수 없다. 기둥 부러지니까. 어쨌든 낮은 천장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밝은 색의 벽도제에 어울려 아늑하게 느껴졌다.

샌슨과 나는 좀 늦게 내려온지라 벽난로 가의 상석에는 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별로 춥지 않았으므로 상관없다. 우리는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흑 맥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조용한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듀칸이라는 하플링과 또 하나의 하플링 이외에는 전부 인간이었다. 나는 하플링에 집중했다. 우리 마을은 아무르타트가 설치는 앞마당 같은 곳이라 하플링들이 안심하고 살 곳이 못 된다. 인간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마을에 살아갈까. 그래서 나는 하플링을 보지 못했다.

“야, 투기장에서 오늘 그거 봤어? 제길. 난 녀석이 조금 더 버틸 줄 알았단 말이야.”

“넌 도대체 그런 황당한 베팅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도 그런 녀석에겐 걸지 않아.”

“그러니까 이겼을 땐 배당이 높잖아?”

무슨 이야기일까? 그런데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나는 감탄했다.

듀칸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인간용이라 그에게는 높았고 그래서 듀칸은 어디서 물통을 가져와 의자 위에 엎어놓고 그 위에 앉아 있다. 그러면서 테 이블 위로 발을 올린 채 저렇게 균형을 잡고 자기 머리통만 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맥주잔을 기울이다가 그대로 뒤로 쓰러질 것 같아서 보고 있는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

유스네는 홀 한귀퉁이의 테이블에서 양초를 세워두고는 주판을 튕기며 뭔가를 적고 있었다. 장부 정리인가? 유스네는 내 눈길을 알아차렸는지 고개 를 들었다가 발끈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거 참, 별 상관은 없는 애지만 이런 관계는 기분 나쁘군. 그러다가 유스네는 다른 사람의 주문을 듣고는 맥주잔을 받아들고 식당으로 달려가 버렸다.

“이 맥주맛 때문에 떠나기가 정말 싫어지는데.”

샌슨의 말이었다. 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하루 푹 쉴 수 없어?”

“안 돼. 여정을 지켜야지. 우린 한가로운 여행자가 아니잖아.”

“음. 고향에선 우릴 기다리겠지. 이 일이 모두 잘 끝나면 나 다시 한번 대륙을 돌아보고 싶어졌어.”

“여행의 맛을 느끼는가 보구나.”

“응. 이렇게 떠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12인의 다리라는 멋진 것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그런 것 말고도 내가 모르는 굉장한 것들이 많겠지? 지 금까지는 그런 것을 못 느꼈는데 갑자기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들을 못 본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데.”

“모든 것을 다 해보기엔 우리 수명이 짧아. 내 생각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어. 자신이 겪는 일을 최대로 즐기면 돼.” “감사합니다! 맞아. 내가 겪는 일만 즐기지. 샌슨과 말이 나에게 탄다든가…………….”

“그만!”

“도대체 어떻게 아침과 점심에 걸쳐 두 번이나 실수했지?”

“몰라! 젠장, 내가 왜 그랬지? 한 번만 더 이루릴을 만나면 난 돌아버릴 거야. 뭐, 이제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섣부른 판단이야.”

“응?”

“홀 입구를 봐. 놀라운데, 아무런 약속도 없이 하루에 세 번을 만나는 사람에게라면…………, 뭐라더라?”

샌슨은 급히 허리를 틀다가 허리를 삐끗하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홀 안의 다른 손님들도 홀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루릴이 서 있었다.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램프의 불빛을 반사하여 검붉은 폭포수가 되어 어깨에 내려앉고 있었다. 이루릴은 주위를 살짝 둘러보다가 우리 쪽을 쳐다 보았다. 이루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루릴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배낭을 테이블 옆에 내려놓고 앉으면서 말했다.

“놀랍군요. 아무런 약속도 없이 하루에 세 번을 만나는 사람에게라면 목숨을 맡겨야 된다고 했는데.”

맞다! 그런 말이었다. 약속이 없어도 그렇게 만나지는 사람이라면 대륙 양끝에 갈라놓더라도 만날 수 있으므로 절대로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러므로 만일 원수가 된다면 어차피 도망칠 수 없으므로 목숨을 맡겨두어야 되는 셈이고, 친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타나 도와줄 것이므로 역시 목 숨을 맡겨두어도 상관없는 셈이다.

이루릴은 나처럼 그 말을 떠올린 것이다. 나는 웃으며 물어보았다.

“누구 말이었죠?”

“후치는 항상 내게 인간의 말을 묻는군요. 루트에리노 대왕이 중부 대로를 지나면서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를 세 번 만났을 때 한 말이죠.”

“우리도 중부 대로에서 세 번 만난 셈이군요. 거참. 그런데 말도 없으신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요?”

“말은 인간의 길을 달리고 저는 숲을 달렸으니까요.”

흠, 지하에서 드워프와 경주하지 말고 숲 속에서 엘프와 경주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렇지만 진짜 빠르네? 샌슨은 꽤 조심하면서 말했다.

“저, 반갑습니다. 이루릴. 이 여관에 묵으실 건가요?”

“예. 간판이 마음에 들더군요. 낮에 여러분과 겪었던 일이 생각나서 들어와 보았는데 뜻밖에도 여러분을 뵙게 되는군요.”

그때 유스네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 아가씨는 이분들과 동행이신가요?”

“아니, 그냥 아는 분이에요. 저도 여기에 묵을 생각입니다. 방 준비될까요?”

“물론이죠. 지금 올라가시겠어요?”

“아뇨. 이분들과 좀 이야기를 나누고 올라가겠어요. 맥주나 좀 가져다주겠어요?”

유스네는 알았다고 고개를 꾸벅이고는 물러갔다. 그녀는 이채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는데, 마치 네가 뭐하는 녀석이길래 그렇게 힘이 센데다가 엘 프까지 아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손님들도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머리의 미인 엘프가 우리를 아는 척하니까 꽤 흥미롭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을 충분히 즐기며 이루릴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디까지 가는데요? 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호기심에서 묻는 겁니다.”

“델하파의 항구로 갑니다.”

거기가 어디지? 난 샌슨을 돌아보았고 샌슨은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아! 그럼 수도를 지나치시겠군요?”

“인간들의 수도를 지나치겠지요.”

“아, 예. 그럼 이게 세 번째 부탁인데, 동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자! 이제 세 번째다. 이루릴은 또 말이 없다고 말할 텐데 과연 샌슨은 이번엔 뭐라고 대답할까?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이루릴은 말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저 오늘 오후 동안 숲 속을 걸으면서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여러분께는 뭔가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동행하는 것도 좋았 을 거라고 후회했어요.”

이루릴은 갑자기 흠칫하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후회라고 했나요?”

“그런데요?”

“후회………… 벌써 많은 것을 배우는군요.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인데.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배웠어요. 마치 인간처럼 말했군요.” 난 이해가 안 되어서 잠자코 있었다. 이루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다시 제의해 주신다니 정말 고마워요. 샌슨. 여러분과 수도까지 동행하겠습니다. 말을 한 마리 구하도록 해야겠군요.” 샌슨의 얼굴 표정은………… 말도 하기 싫다. 바람둥이! 고향에 돌아가기만 해봐라. 내 입은 진실을 단속하는 데 있어서는 대단히 취약하단 말이야!

이루릴은 맥주 한 잔을 마시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샌슨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제했다. 난 보기에 불쾌

할 듯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샌슨에게 말했다.

“반한 거야, 아니면 반한 것처럼 구는 거야?”

“무슨 소리야?”

“오, 제3의 가능성. 반한 것도 아니고 반한 것처럼 구는 것도 아닌데 내 눈에만 반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지? 거 참 괴상하군.”

“후, 후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다 마셨으면 일어나자. 일찍 쉬고 내일도 일찍 나서야지. 식료품도 좀 사고 램프 기름에 뭐, 보급품이 많잖아. 내일 오전은 바쁘겠어.”

“괜찮아. 그건 나와 칼이 다 할게. 샌슨은 우리들 중 말에 대해 제일 잘 아니까 이루릴이 말 고르는 것이나 도와주지.”

“그럴까? 네가 다 할래?”

샌슨은 좋아하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나의 유도 심문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헤, 제미니라도 이런 유도 심문에는 안 넘어가겠다. 정말 힘뿐 만 아니라 머리도 오거야.

2층에 올라와 우리 방에 돌아오니 칼은 침대 위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다. 오래간만에 침대도, 촛불도 있으니 책 읽기에는 딱 좋겠지만 보나마나 따분한 학술 서적이겠지. 칼은 그런 책만 본다. 여행중인데 소설이나 읽는 게 어울리지 않나?

“무슨 책이에요?”

칼은 책을 덮으며 말했다.

“마법사의 열전 같은 거야. 제목은 너무 기니까 생략하고…………, 12인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타이번 하이시커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름이 안 나 오는군. 하긴 이 책은 인명록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일을 했다면 꽤 유명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요? 참, 이루릴을 만났어요.”

칼은 놀란 눈이 되었다.

“이 여관에 들렀어?”

“예.”

“놀랍군. 아무 약속 없이 하루에 세 번 만나는 사람에겐 목숨도 맡긴다고 했는데.”

“루트에리노 대왕. 맞지요? 이루릴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샌슨이 장장 세 번에 걸친 치열한 부탁 끝에 동행 허가도 받아내었지요.”

“동행하겠다던가, 퍼시발 군?”

칼은 샌슨에게 물었고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허허 웃었다.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동행이라면…………. 아니, 관두지. 우리 여행의 관리자는 퍼시발 군이니까 퍼시발 군이 정한 대로 따르지.”

칼이 별 이의 없이 동의하자 샌슨도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샌슨과 나는 오래간만에 침대에서 누워 뒹구는 기쁨을 만끽했다. 배개를 집어던지고 시트를 뒤집어쓴 채 펄쩍펄쩍 뛰었다. 칼의 점잖은 제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는 밤새도록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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