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대지를 향해 끝없이 다가오고 대지는 바다에서 끝없이 멀어지려 한다. 가장 깊은 해저의 신비는 차라리 대지를 향한 갈구이다. 그러나 인간들 중 한 인종이 있어 거꾸로 바다를 갈구하는 사람들 이 있다. 어부는 오늘도 그 몸을 바다에 던지고, 어부의 아내는 그 눈물을 바다에 던진다. 태초의 어부이자 최초로 바다에서 실종된 희구와 갈매기의 그림 오세니아. 그의 아내 시무니안이 흘리는 눈물이 억겁 의 세월 동안 바닷물을 짜게 만들었고 오늘도 바다 밑바닥, 그림 오세니아의 거대한 몸을 조용히 쓰다듬는 혈류는 파도로 대지의 시무니안에게 달려간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3권 5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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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가지고선………. 조심스럽게 후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칼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리고, 곧 호위 대장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나타난다. 칼은 묵묵히 손을 들어 우리 앞에 늘어선, 오, 젠장! 오크 무리를 가리킨다. “너무 많습니다.”
호위대장 스카일램 트리키는 불평 섞인 어조로 말했다.
“길을 우회하게 된다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토록 많은 오크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모두 섬멸하면 그만입니다.”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섬멸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 물론 국왕 전하께서 직접 사절단의 호위 대장으로 선택했다는 무문의 명가 트리키 가문의 11대손 스카일램 트리키의 기사적 소양과 그 실천 의식에 대해 뭐라고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섬멸한다는 말이야! 우리 인원 전부 다 해봐야 겨우 30명 정도인데. 그 러나 칼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하는 대신 점잖게 말했다.
“무익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스카일램 트리키의 엄숙한 얼굴에서 딱딱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칼 님과 여러분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 권한에 대한 침범은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트리키 공의 권한을 침범할 생각은……………”
“샌슨!”
네리아의 고함소리.
“으아아아!”
그리고 이어진 샌슨의 비명소리에 칼의 말은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서 있는 언덕 아래의 평야에서는 샌슨이 땅에 넘어져 있었다. 가을 벌판에 널려진 죽은 풀들이 흙먼지와 함께 솟구쳤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기 가 막힌 미녀가 날개를 펼쳐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공중에서 거꾸로 내리꽂히듯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샌슨을 찍어누르려 했고 샌슨은 쓰러진 채 롱소드를 험하 게 휘저었다. 부우우웅!
여자는 샌슨의 롱소드에서 뻗쳐나오는 기운에 밀린 듯이 날개를 쫘악 펼치며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녀는 샌슨의 롱소드를 피해 다시 위로 올라갔고, 그 사이에 샌슨은 몸을 굴려 일어났다. 똑바로 일어선 그는 무서운 눈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곧, 다시 눈이 풀려버리고 만다…………. 저 오거!
네리아가 다시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질렀다.
“샌스은! 이 바보야, 제발 정신차려엇!”
“어, 어엇!”
샌슨은 네리아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고, 그래서 간신히 그의 가슴으로 날아오는 여자의 손톱을 피할 수 있었다. 샌슨 스스로도 돌아버릴 지경일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이상한 자세로 섰다. 그러자 여자는 기합을 질렀다.
“합!”
“응?”
샌슨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저런, 저런! 샌슨의 입가가 다시 스르르 올라갔다. 여자는 가차없이 손톱으로 샌슨의 가슴을 할퀴었다.
“크으윽!”
“아아악!”
네리아의 비명소리와 함께 샌슨은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갈비뼈에 닿는 부상일 것이다. 샌슨은 뒤로 데굴데굴 굴러가서는 벌떡 일어났다. 가슴에 섬뜩하게 그어진 세 갈래 핏길에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샌슨은 그것보다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이 더 약오른 모양이다.
“제기랄, 그런 느끼한 눈짓 하지 말고 제대로 싸우잔 말이다!”
여자는 샌슨이 일어나는 것, 게다가 씩씩하게 고함까지 지르는 것을 보고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래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는 우리를 올려다보았 다.
“이건 안 되겠는걸. 역시 괴물 초장이가 앞으로 나오시지?”
그러자 곧 그녀의 뒤쪽에서는 백여 마리의 오크들이 함성을 질렀다. 오크들은 글레이브로 하늘을 찌르며 고함소리를 질렀다.
“와악! 췻취취취치! 그래, 덤벼라, 그 뾰족한 콧대를 내밀어봐!”
“괴물 초장이! 취익! 어디 갔냐? 어서 나와봐!”
“취취취! 쿠헬! 괴물 초장이도 남자다! 절대 못 이긴다!”
저 망할 놈들. 나도 남자니까 저 헬브라이드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난 지금 OPG가 없단 말이야. 난 그저 냉엄하고 쌀쌀맞아 보이는 표정을 보내주기 위해 애쓸 뿐이다.
호위 대원 중 척후병으로 앞서가던 두 명에게서 들판 가득히 오크의 군단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조심스럽게 달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녀석들을 우회하여 좀더 좋은 지형, 그러니까 언덕 위에서 오크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이만저만 많은 것이 아니다. 도열한 오크의 군단을 보 는 순간 나와 샌슨, 그리고 칼은 차라리 웃고 싶어졌다.
“이번엔 정말 많이 모아왔는데……..?”
“으응……. 그렇군. 허허허.”
그렇게 나와 샌슨이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미소를 짓는 가운데 호위 대장 스카일램 트리키는 드디어 자신이 나라의 은공에 대한 보답을 할 자리를 찾았느니 뭐니 하 면서 우리와 호위 대원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런데 저놈들은 분명히 언덕 위의 우리를 발견했는데도 화살거리 바깥에 멈추어선 채 달려들지 않았다. 우리가 의아 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오크 들 중 한 놈이 걸어나오더니 1대1로 붙자고 제의해 왔다.
“1대1로 붙자고?”
“그렇다! 취익! 우리는 너희들의 세 배가 넘는다! 하지만 싸우면 둘 다 다친다. 취익!”
“그래서?”
“1대1로 붙자! 취익! 그래서 우리가 지면 물러난다! 취익! 그러나 그쪽이 지면, 취취칫! 괴물 초장이와 두 명을 내놓아라!”
괴물 초장이와 두 명은 서로의 얼굴을 향해 한숨을 쉬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샌슨은 먼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고 나서 당당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스카일램은 호위 대장인 자신에게는 일행의 호위에 대한 최우선적인 의무가 있으니 자신이 나가겠다고 거의 떼를 쓰다시피했지만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활을 들어올렸을 뿐이다. 혹시나 1대1 어쩌고 하다가 한꺼번에 달려들지도 모르기 때 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는 스카일램 역시 호위 대원들에게 활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오크들은 여전히 화살거리 바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언덕을 다 내려간 샌슨은 롱소드를 뽑아들며 말했다.
“내가 하지. 누구냐?”
샌슨이 내려서자 오크들은 대단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괴, 괴물 초장이가, 취익! 아니라?”
샌슨은 얼빠진 얼굴이 되더니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왜, 괴물 초장이와 싸우고 싶어?”
그 말에 잠시 오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뭐야, 저놈들은? 내가 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어쨌든 잠시 후에 오크들 중 웬 녀석이 걸어나왔다.
샌슨은 자신의 상대로 나온 오크가 다른 오크들에 비해 오히려 덩치도 작고 가냘파 보여서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오크는 뒤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빨을 꽉 깨물고는 갑자기 대거를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찔러버렸다.
“뭐, 뭐야?”
샌슨뿐만 아니라 언덕 위에 있는 우리 모두가 크게 놀랐다. 그 오크는 자신의 가슴을 찌른 채 무슨 못 알아들을 말을 중얼거리며 쓰러졌다. 오크들은 놀라지도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루릴은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이 기운은……?”
그리고 갑자기 오크의 몸은 땅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진흙탕 위에 던져진 동전처럼 땅은 유동체가 되어 오크의 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 땅은 핏빛으로 물들어 갔고, 그 핏빛의 땅 가운데가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샌슨은 다부지게 롱소드를 겨누었다. 그런데 크게 입을 벌린 땅 속에서 한 마리 거대한 새의 비상처럼 솟 아오른 것은 푸른 날개와 붉은 날개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렇게 나타난 것이 저 아름답고 화려한 날개를 가진 지옥의 숙녀 헬브라이드였다.
오크들은 나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아마 틀림없이 내가 나갈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헬브라이드가 공포스러운(어흠, 흠!) 괴물 초장이를 물리쳐주면 그 즉 시 돌격해서 싹 쓸어버린다는 식의 작전을 세운 모양이다. 괴물 초장이라도 남자는 남자니까, 남자들을 몽롱하게 만들어버리는 헬브라이드 앞에서는 당연히 꼼짝 못 할 것이다, 뭐 이런 것이 오크들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거 정말 대단하다. 오크 수준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거의 천재적이다. 나는 저놈들이 내가 OPG를 잃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억울해할까를 생각하며 속으로만 웃어주었다.
내가 어떻게 오크들의 작전을 아냐고? 그렇지 않다면야 저게 1대1 대결 구경하는 꼴이냐? 모두 돌격 자세로 글레이브를 꼬나들면서 서로간에 기세를 올리기 위해 ‘췻! 힘내라! 취익! 집중해서! 취익! 괴물 초장이만 나오면!’ 등의 속 드러나는 함성을 지르고 있는데, 내가 칼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짐작하겠다.
“퍼억!”
잠시 딴 생각하는 사이에 샌슨은 다시 헬브라이드의 주먹을 맞았다. 샌슨은 말도 안 되는 고함소리를 마구 지르며 물러났다. 정말 골치 아픈 노릇이다. 샌슨은 어떻 게든 상대를 보지 않고 싸우려 했지만, 상대를 보지 않고 싸운다는 것이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이루릴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이루릴은 샌슨이 발이 미끄러질까 봐 주의하며 힘들게 내려간 언덕바지를 단 세 발자국(세 번 날았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에 뛰어 평지에 내려섰다. 헬브라이드는 흠칫 해서 물러났고 샌슨은 이루릴을 마치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루릴마저도 마치 해질 무렵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는 듯한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쉬세요. 샌슨. 이 대결은 공정하지 못해요.”
“이, 이루릴 양. 그럼…….”
샌슨은 자신이 한심해 죽겠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헬브라이드에게 끔찍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곧 샌슨의 얼굴은 해맑은 미소로 바뀌고 말았다.
이루릴이 그의 어깨를 흔든 다음에야 샌슨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러났다.
오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루릴은 여자고, 또한 엘프다. 오크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취에에엑! 어딜 달아나는 거냐! 끝까지 싸워라!”
“취익취익! 비겁하다! 비겁하다!”
이루릴은 무표정한 얼굴로 헬브라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1대1로 싸우자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남자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요. 그러니 내가 싸우겠습니다.”
굉장하군. 네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헬브라이드가 헐떡거리며 목에서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 엘프! 엘프!”
조금 전과는 상황이 거꾸로 되어 헬브라이드가 이루릴에게 위압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어라? 그거 신기하네? 헬브라이드는 지금까지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이를 갈고 헐떡거리며 손을 사납게 흔들어대기는 했는데 전혀 앞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루릴은 천천히 에스터크와 망고슈를 뽑아들고는 양 손에 쥔 검을 그냥 양쪽에 늘어뜨린 자세로 서서 헬브라이드를 바라보았다.
헬브라이드는 고양이 만난 쥐 모양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피리소리 같은 희한한 숨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오크들은 당황했다.
“취이잇칙! 암흑의 신부여!”
“췻! 이, 이런!”
오크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눈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난 언덕을 올라오는 샌슨을 끌어당기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 됐어요. 도망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요?”
스카일램과 토론중이던 칼은 다시 언덕 끄트머리로 다가왔다.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았고, 조금 후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 저 부조화와 불합리의 산물인 헬브라이드가 겁을 먹지 않을 수 없겠군.”
스카일램은 완전히 감동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릴은 차분히 헬브라이드를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결국 헬브라이드는 못 견디게 되어버렸다. “끼요욧!”
헬브라이드는 느닷없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헬브라이드는 공중에서 날개를 촤악 펼치더니 세차게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곧 그녀의 붉고 푸른 화려한 날개에서 깃털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이루릴은 옆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깃털은 거의 빗발처럼 쏟아졌고, 나라면 죽었다 깨도 못 피했을 정도로 세차게 몰아쳤다. 그러나 이루릴은 가볍게 뛰면서 캐스팅 했다. 곧 그녀의 몸 주위로 실프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실프의 바람은 헬브라이드의 깃털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하아아압!”
헬브라이드는 깃털 폭풍으로 시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이루릴에게 급격히 뛰어내렸다.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잡아채는 모습이다. 그 급속한 움직임과 실프의 바 람 때문에 잠시 허공에 소용돌이가 생겨났고 그 소용돌이는 헬브라이드의 깃털을 그러모아 거대한 장막을 형성했다. 이루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악!”
네리아와 내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깃털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두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맙소사!”
스카일램의 근엄한 비평이 들리는 가운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뻣뻣하게 서 있는 이루릴의 옆모습과 커다랗게 나가떨어져 있는 헬브라이드의 모습이었다. 땅에 뒹 굴고 있는 헬브라이드의 날개는 아름다운 깃털에 피가 엉겨 눈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장면이었다. 이루릴이 이겼어! 나와 네리아는 펄쩍펄쩍 뛰면서 덩실덩실 춤을 출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헬브라이드는 웃기 시작했다.
“하하핫하! 패배를 시인하는가?”
이루릴은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루릴의 반대편 어깨에 난 커다란 상처가 보였다. 그렇다면 헬브라이드의 날개에 엉긴 피는? 이루릴은 무릎을 꿇 으며 자신의 볼을 감쌌다.
“이루리일!”
네리아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칼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뛰어내리면 안 되오! 오크들이 달려들 거요!”
네리아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칼을 바라보며 도리질을 했지만 칼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엄한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악에 받힌 고함을 질러댔지만 그 목소리는 오크 들의 함성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이루릴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마치 앉아 있는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취이이! 보았느냐! 나와라, 괴물 초장이! 우헷헤헷!”
“괴물 초장이! 어서 나와라! 취취 취이잇!”
좋아, 나가주지. 나가준다고! 스카일램이 내 어깨만 놓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려가주겠어! 헬브라이드는 땅에서 일어나 웃으며 이루릴을 내려다보다가 곧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올려다보았다.
“졸개들은 그만 내보내라! 괴물 초장이가 누구냐? 머리를 내밀어라!”
칼은 분노에 덜덜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놈들은 아직까지 네드발 군에게 겁을 먹고 있어서 함부로 덤비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네드발 군을 내보낼 수야 없지. 트리키 공.”
스카일램은 무거운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헬브라이드와 싸울 수 없소. 도망가야 합니다. 아시겠소?”
스카일램은 목에 걸린 것을 간신히 끌어내리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당신도 남자요! 제발, 왜 이러시오?”
스카일램은 그 말에 다시 침을 삼켜대었다. 아래쪽에선 여전히 헬브라이드와 오크들이 우리에게 삿대질과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스카일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지금 달아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은 곧 우리 뒤를 추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명령받은 것은 사절단이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 게일스 공국에 도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손을 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게다가 저 아래에 계시는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 양은 어떻게 합니까?”
칼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스카일램은 다부지게 말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나가보아야…………. 당신도 남자입니다. 될 리가 없습니다.”
“해봐야 압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네리아가 말했다.
“그를 보내죠?”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우리 뒤쪽을 향했다. 칼은 놀란 표정이 되었고 스카일램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리아는 말했다.
“그는 남자긴 남자지만 좀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눈으로 싸우는 거라면 그가 가장 낫지 않을까요?”
칼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다가 손뼉을 쳤다.
“맞소! 그가 있군. 트리키 공.”
“안 됩니다!”
“아니, 네리아 양의 말이 옳습니다. 내가 보증하지요. 그 외엔 방법이 없소.”
스카일램은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칼은 기다리지 않았다. 칼은 즉각 몸을 돌려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호위 대원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의 직속 상관인 스카일램을 바라보았다. 스카일램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칼 헬턴트 님!”
“농담이 아니오. 난 당신보다는 그를 잘 알아요. 그리고 그도 이런 황야에서 오크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달아나지는 못할 거요. 부탁하겠소, 트리키 공.”
스카일램은 한참 동안 칼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래의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무서운 고민의 흔적이 지나쳤지만 군인답게 고민의 시간이 길진 않았다. 스 카일램은 호위 대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대원들은 즉각 마차로 달려갔다. 그 마차는 튼튼하게 만들어진 죄인 호송용의 마차였고, 호위 대원들은 열쇠를 꺼내어 마차 문을 열었다. 삐이이이걱.
“이리 나와!”
마차의 철문이 열리고 호위 대원이 고함을 지르고 나서 잠시 후, 햇살을 가리기 위해 눈썹 위로 손을 펼친 남자가 마차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침울한 표정으로 호위 대원들을 바라보았고 호위 대원들은 우리 쪽으로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는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운차이. 당신 이외엔 방법이 없구려.”
운차이는 무표정하게 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에까지 들리더군요. 알겠습니다.”
샌슨은 신뢰 어린 동작으로 자신의 롱소드를 운차이에게 내밀었다. 운차이는 롱소드를 들고 몇 번 휘저어보았다. 호송 중인 죄수에게 무기를 건네주는 모습을 보는 스카일램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근엄하게 체통을 지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매서운 눈으로 운차이의 동작 하나하나를 노려보았다. 운차이는 잠시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 가벼운 동작으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때까지 우리에게 야유를 보내던 헬브라이드는 남자가 하나 뛰어내려 오자 곧 경계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오크들에게 물었다.
“저 자가 괴물 초장이인가?”
“취, 취익? 아, 아니오?”
“뭐야? 이런. 또 졸개를 내보내는 건가!”
헬브라이드는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는 침을 삼키며 언덕바지에 몰려섰다.
언덕을 다 내려간 운차이는 헬브라이드를 흘깃 바라보았다. 헬브라이드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운차이에게 말했다.
“이봐! 너 말고 괴물 초장이에게 나오라고 그래. 죽고 싶은가?”
운차이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이루릴에게 걸어갔다. 이루릴은 그때까지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운차이는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간신히 언덕 위의 우리에게까지 들려왔다.
“마비됐군.”
마비라고?독이란 말인가?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그래. 헬브라이드의 깃털은 강력한 마비를 일으키지.”
운차이는 이루릴을 그대로 내버려두고는 헬브라이드에게 걸어갔다.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운차이는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는 커다랗게 외쳤다.
“이봐, 후치! 저 여자에게 그 미모에는 경배를 보내되 그 목숨에는 경배를 보낼 수 없다고 전해 줘어!”
스카일램은 놀란 얼굴이 되어 날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정도의 해괴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난 참으로 한심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아래쪽으로 고함질러 주 었다.
“라고 했다아!”
네리아는 딸꾹질을 시작하는 샌슨에게 공감의 시선을 보내며 함께 딸꾹질을 하는 동지애를 발휘했다. 딸꾹, 딸꾹.
헬브라이드의 얼굴은 필설로 형용할 수 있는 한계를 가볍게 벗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은 쫘악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언덕 위의 나를 바라보았다. 헬브라이드는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게 말한 건가?”
“후치! 그렇다고 전해 줘어!”
“라고 했다아!”
헬브라이드 뒤쪽의 오크들마저도 췻췻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그들은 모두 비죽한 송곳니를 번쩍거리며 침까지 조금 흘리고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헬브라이드는 크게 숨을 쉬어 자신을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자, 잠깐. 그러니까 내게 직접 말하지 않고 저 소년을 통해 말한다는 것인가? 그런 거야?”
“후치! 지금껏 어떻게 암흑의 신부가 저 지저분한 오크의 소환에 응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눈치가 엉망이라서 아무나 부르면 좋아라 뛰어나온다는 것을 깨달았 다고 전해 줘어!”
“라고 했다아!”
헬브라이드의 얼굴에 결코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긴 너무 황당무계한 일을 당했으니만큼 즉각 화를 내지 못한 것을 탓할 수는 없겠군. “이놈! 내게 장난치는 거냐!”
“장난은 정신 수준이 비슷한 사람에게 칠 수 있는 것이라고 전해 줘어!”
“라고 했다아!”
“으아아! 뭐야, 이건!”
헬브라이드는 발칵 화를 내더니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러자 운차이는 롱소드를 들어올려 헬브라이드를 겨냥했다. 헬브라이드는 롱소드에서 반사되는 은광에 주 춤하더니 곧 씩씩거리며 운차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둘은 그렇게 잠시 동안 대치했다.
갑자기 헬브라이드는 뒤로 튕기듯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운차이는 매몰차게 웃었다. 헬브라이드는 크게 당황했다. 헬브라이드는 다시 한번 운차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지만 운차이는 싸늘하게 마주볼 뿐 전혀 표정의 변화 가 없었다. 헬브라이드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숨막히는 어투로 말했다.
“너, 너!”
헬브라이드는 참으로 두렵다는 듯이 말했다.
“……여자냐?”
“푸하하하!”
기어코 네리아는 샌슨의 어깨를 두드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운차이는 싱겁게 웃으며 롱소드를 내리며 말했다.
“눈빛이 흐릿해서 의심쩍었는데, 확실히 눈이 엉망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 줘.”
“라고 했……”
“그만! 도대체 뭐야! 장난 칠 기분이 아냐! 너, 너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냐?”
내 말을 끊으며 헬브라이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운차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